100명의 애인 김민홍 목사, 고난을 사랑으로 바꾼 감동 실화
100명의 애인: 고난을 녹여 사랑을 꽃피운 감동 이야기
[애인 100명을 둔 특별한 사연💌] 김민홍 목사ㅣ새롭게하소서
애인 100명을 둔 특별한 사연
새롭게하소서에 귀한 손님, 김민홍 목사님을 모시고 특별한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영훈 님과 수지 님, 그리고 정 님이 함께 해주셨는데요, 오늘 김민홍 목사님께서는 고난의 순간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실 예정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힘든 고난에 직면했을 때 절망감을 느끼기 쉽지만, 목사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고난은 또 다른 문을 여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난 속에서 100명의 "애인"을 만들고 계신다는 점인데요, 과연 '애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김민홍 목사님을 모시고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애인 100명,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주영훈 님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셨는데요, 목사님께서는 일반적인 연인이 아닌, 특별한 '애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섬기시는 환자분들을 '애인'이라고 부르시는 것인데요, 환우, 환자라는 단어 대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아 '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환자분들 역시 '애인'이라는 호칭을 훨씬 좋아하신다고 하는데요,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의 환자라는 단어 대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애인'이라는 단어가 환자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김민홍 목사님께서 100명의 애인을 만들게 된 특별한 사연은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 겪으셨던 tragic accident 이야기를 시작으로, 목사님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외가 친척 집으로 놀러 갔다가 막냇동생과 함께 물놀이를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동생과 함께 기찻길 옆 굴다리로 피신하려던 찰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우산을 가지러 먼저 뛰어가시는 사이, 동생이 형을 따라 기찻길로 들어섰고, 그 순간 기차가 달려와 동생을 덮친 것입니다.
끔찍한 사고 현장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기차가 급정거하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혼란 속에서, 동생의 신발과 핏자국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사고 당시 동생은 일곱 살, 목사님은 중학교 1학년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전북대학교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동생은 머리 뒤쪽을 크게 다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충격이었을 텐데요, 사랑하는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목사님은 깊은 슬픔과 죄책감에 휩싸이셨습니다.
동생의 죽음 이후, 죄책감과 슬픔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님의 슬픔을 지켜보며 죄책감은 더욱 커져갔다고 하는데요, '나 때문에 동생이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괴로워하며, 부모님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더욱 모범적인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부모님께 더 큰 슬픔을 안겨줄까 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범생 콤플렉스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덧붙이셨는데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고 애쓰고,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죄책감은 어린 시절의 삶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도 깊숙이 드리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방이 여러 개 있는 집이었지만, 찬 방을 스스로 택해 생활했다고 하는데요,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에도 죄책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당시의 죄책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셨지만, 동생의 죽음 이후 하나님을 원망하며 교회를 떠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동생은 죽었다" 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전북대학교 병원 응급실 앞 잔디밭에서 밤새도록 울부짖으며 기도했지만, 결국 동생을 살려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는다" 고 단정하며,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영화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당뇨병으로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가정은 더욱 힘든 시기를 겪게 됩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종교 영화를 상영하는 사업을 계획하시고, 교회에 광고지를 보내게 되는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광고지를 본 오래된 친구이자 목사님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목사님은 아버지의 병문안을 오셨고,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억지로 끌려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함과 의지할 곳을 찾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2학년, 다시 교회에 발을 들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중고등부 예배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여학생 일곱 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에 묘한 끌림을 느꼈다고 털어놓으셨는데요, "내가 이 공주들을 지켜야겠다" 는 엉뚱한 생각과 함께 교회에 다시 정을 붙이게 되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자매들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솔직한 이야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을까요? 뜻밖의 계기로 다시 시작된 신앙생활은, 점차 굳었던 마음을 녹이고 상처를 치유하는 놀라운 경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은 여전히 목사님을 짓눌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에게 상처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주변 사람들은 목사님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가정 사역도 열심히 하고, 목사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면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내적 치유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비로소 모범생 콤플렉스의 근원이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또한 죄책감과 연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총신대학교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동기생들조차 목사님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극심한 내성적인 성격은 전도사와 목사가 된 이후에도 이어졌는데요, 맡은 일은 열심히 수행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피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모범적인 목사의 모습이었지만, 내면은 기쁨과 평안 없이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적인 고통뿐 아니라, 육체적인 고통 또한 목사님을 괴롭혔습니다. 아버지의 당뇨병에 이어, 목사님 역시 대학교 2학년 때 당뇨병 진단을 받게 됩니다. 군 면제를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하는데요, 젊은 나이에 찾아온 당뇨병은 끊임없는 건강 문제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당뇨 합병증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2000년, 왼쪽 눈이 망막박리로 실명되었고, 2006년에는 오른쪽 눈마저 망막박리 진단을 받게 됩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까?" 기도조차 나오지 않았고, 마음은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누군가 위로하거나 기도해주려 하면, 오히려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주변 사람들에게 표출하며, 마음은 더욱 삐뚤어지고 부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6인실 병실 커튼을 굳게 닫고 세상과 단절된 채 절망 속에 갇혀 지내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께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병실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풀룻, 바이올린, 비올라 등 다양한 악기 연주자들과 함께 오셔서, 병실에서 찬송가 연주를 시작하셨습니다. 대학병원이라는 특성상, 소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름다운 찬송가 선율은 병실을 가득 채웠고, 환자와 보호자들의 마음을 평안으로 이끌었습니다. 목사님은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셨다고 합니다.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찬송가를 통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옆 병상 환자들 역시 찬송가 연주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오신 환자분은 10년 전 집사였지만 교회를 떠나셨는데, 찬송가를 듣고 다시 교회에 나가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눈 수술을 여러 번 받으셨던 환자분은 지금까지도 목사님과 교류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찬송가 연주는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놀라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설교나 위로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찬송가의 능력을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한 달 뒤 검사 결과 망막이 다시 찢어졌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또 다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 목사님은 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계속 주시는 걸까?" 자책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응급 상황으로 소아안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소아안과 병동은 눈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로 가득했습니다. 목사님은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계셨는데, 맞은편 침대에서 작은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소파에서 떨어지면서 연필에 눈을 찔려 실명하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찬송가는 바로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였습니다.
놀랍게도, 찬송가를 듣는 순간 목사님에게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은 여전히 안 보이는 상태였지만, 환상 속에서 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아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엄마는 보호자 침대에 앉아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엄마 뒤에는 예수님께서 엄마를 안고 계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엄마를 예수님께서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환상은 목사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과 위로를 안겨주었습니다.
환상에 압도된 목사님은 커튼을 젖히고 아이와 엄마에게 다가갔습니다.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하며, 찬송가를 부를 때 예수님께서 엄마 뒤에서 안고 계시는 환상을 보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엄마는 목사님의 말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고, 목사님은 아이와 엄마를 위해 진심으로 축복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이 회복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였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시는 기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고, 고난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술 후에도 시력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까지 망가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목사님은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목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설교와 심방을 이어가셨고,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건강 악화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고난은 목사님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6년 10월, 결국 신장이 완전히 망가져 투석을 시작하게 됩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투석을 받으면서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성숙해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투석으로 인해 웃음과 활력을 잃었지만,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떠나가고, 교회가 폭발 사고로 파손되는 연이은 고난 속에서도, 목사님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의 혼전임신이라는 예상치 못한 문제까지 발생합니다. 교회는 폭발 사고로 엉망진창이 된 상황, 아들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여자친구의 임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목사님은 당혹감과 막막함에 휩싸였지만, 놀랍게도 차분하게 상황을 수습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며느리 될 아이의 부모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가족애는 목사님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고민 끝에, 교인들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목사로서 본이 되지 못했다는 죄송함과 책임감 때문이었는데요, 교인들은 오히려 목사님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교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큰 감동을 받은 목사님은 다시 힘을 내어 목회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더욱 굳건해진 믿음과 사랑은 목사님과 교회를 하나로 묶는 끈끈한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예쁜 손주를 출산했고, 손주는 목사님의 삶에 새로운 활력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투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목사님에게 손주의 재롱은 큰 위로가 되었고, 잃었던 웃음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손주 덕분에 삶의 목적을 다시 발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손주가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게 되면서, 건강 회복에 대한 의지 또한 강해졌습니다. 예상치 못한 손주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자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놀랍게도, 며느리는 둘째와 셋째까지 연이어 출산하며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세 명의 손주는 목사님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손주들의 웃음소리는 목사님의 병을 낫게 하는 명약과 같았습니다. 손주들을 보며 웃고, 손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목사님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손주들의 탄생은 경제적인 어려움 또한 해결해주는 놀라운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까지 출산하면서 청약 점수가 높아져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었고, 셋 아이 양육에 필요한 다양한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생계유지를 이유로 군 면제를 받고, 기술을 배워 가정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고, 가정에 웃음꽃이 피어나면서 목사님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난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은혜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10년 투석 끝에, 신장 이식을 받기 위해 병원에 신청했지만, 7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폐에 물이 차서 눕지도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고, 결국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교회 목사님들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감겨 움츠러들었던 눈이 놀랍게 뜨이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기적적인 눈 치유를 경험하면서, 신장 이식 또한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병원에서 7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식 수술 날을 기다렸습니다. 놀랍게도, 아내가 신장 이식에 적합하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고, 2016년 7월, 아들의 결혼식 다음 날 신장 이식 수술을 받게 됩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목사님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신장 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오랜 투병 생활로 인해 체력은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몸무게는 48kg까지 줄었고, 걷는 것조차 힘겨웠습니다.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라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교회 사역도 중단해야 했습니다. 6개월 동안 집에서 요양하며 재활에 힘썼지만, 예전처럼 설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께 1년 안식년을 제안했고, 목사님은 전남 보성의 한 치유센터로 요양을 떠나게 됩니다.
2017년 3월, 보성의 치유센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암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새벽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새벽예배 후, 한 자매가 홀로 남아 흐느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방암 말기로 고통받는 43세의 미혼 자매는 절망과 외로움 속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기도 후에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매 곁을 맴돌던 목사님에게 놀라운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저 자매의 애인이 되어주고 싶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임을 확신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자매의 애인이 되고 싶습니다. 아니, 저 자매와 같은 애인 100명을 섬기고 싶습니다. 애인 100명을 주십시오!" 애인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특별한 단어였습니다. 환자들을 사랑으로 섬기겠다는 굳은 결심과 헌신이 담겨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고, 아내는 흔쾌히 허락해주었습니다. 다음 날, 자매에게 "애인 하자" 고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자매는 당황한 표정으로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새벽예배 때 경험했던 일을 이야기했고, 자매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목사님은 자신의 믿음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내와 자매를 데리고 보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겼고, 자매는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치유센터 환우들을 애인으로 섬기기로 결심하고, 가장 먼저 자신의 방을 카페처럼 꾸몄습니다. 차와 다기를 준비해놓고 환우들을 초대하여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환우들은 목사님의 방에 모여 서로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위로하며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새로운 환우가 오면 함께 환영해주고, 떠나는 환우를 위해 축복 기도를 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함께 운동하고, 장에 함께 가기도 하면서, 환우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5일장에 함께 갔던 날, 환우들은 각자 비닐봉투에 무언가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놀랍게도, 자신을 위한 물건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설사 환자를 위해 감을 사오고, 변비 환자를 위해 사과를 사오는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에 목사님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암을 이길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함께 치유하는 전인치유, 통합치유의 중요성을 깨닫고, 환우들을 애인처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애인 멘토링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웃고 울어주는 것, 정보를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픈 사람들은 외로움과 고립감에 취약합니다. 친구와 가족조차 떠나고, 자신의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합니다. 애인 멘토링은 이러한 환우들에게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고, 정신적 지지와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100명의 애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는 김민홍 목사님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