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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질투하는 하나님을 만난 어머니의 신앙 고백

깊고 진하다! 신학자인 이덕주 목사의 체험적 신앙 고백: 40년 한국교회사 연구, 마침내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하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단연코 신앙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도 당대에는 몰랐지만, 결국 후대에 훌륭한 믿음의 유산을 남겼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어머니의 단호한 신앙 고백 이후 인생이 변화되었다고 고백하는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40년 동안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며 타인의 신앙을 써내려 갔지만, 드디어 자신의 신앙 고백을 이야기해주실 분인데요, 감신대 은퇴 교수이신 이덕주 목사님입니다.

이덕주 목사님은 초대교회사 연구에 매진해 오셨지만, 오늘은 목사님 개인의 깊은 신앙 여정을 나누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믿음의 유산은 아버지로부터 어머니께, 그리고 목사님께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는데요, 과연 어떤 어머니셨을까요? 목사님의 아버님은 일제강점기에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시다가 37세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네 살 때였으니, 어머니는 홀로 4남매를 키우셔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 전쟁, 그리고 6, 70년대 가난의 시대라는 힘겨운 시기를 겪으면서 삼남매를 키우신 어머니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놀랍게도 목사님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기독교인이 아니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처음에는 절에도 다니시고, 굿도 하시는 등 복합적인 토속신앙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아버님이 결핵을 앓기 시작하고, 목사님 누님이 홍역을 앓으면서 가난과 막막함에 짓눌리셨다고 합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어머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신앙에 의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종소리"였습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평소 듣던 절의 종소리와는 다른, 맑고 은은한 종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땡, 땡 울리는 절의 종소리와 달리, 땡그랑, 땡, 땡그랑, 땡 울리는 종소리에 이끌려 한밤중에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열이 펄펄 끓는 누님을 업고, 아픈 남편을 집에 둔 채 종소리를 따라 눈길을 걸어간 곳은 바로 단양읍 교회의 부활절 새벽 기도회였습니다.

전도받은 적도, 성경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던 어머니는 종소리만을 따라 교회에 발을 들였습니다. 새벽 기도회에 모인 20여 명의 교인들은 생경했지만, 교회 문턱을 넘는 순간, 어머니는 "바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강렬한 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훗날 신학을 공부하며 목사님은 어머니가 경험한 감정이 바로 "성령님의 이끄심",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행 은총"임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결심하고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의 발걸음과 마음을 인도하신다는 놀라운 은혜를 어머니가 체험하신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특히 큰댁 식구들은 "예수 귀신 믿는다"며 어머니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나갔고, 35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변의 비난과 "거봐라, 예수 믿더니 벌을 받았다"는 손가락질 속에서도 묵묵히 신앙생활을 이어가셨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어머니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아버지 사망 당시 4형제였던 가정에, 둘째 아들이자 어머니의 희망이었던 큰아들 권주 형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형님은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신앙심도 깊은, 그야말로 어머니의 자랑이자 희망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진학을 꿈꾸던 형님은, 효자 아들이자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형님은 공무원으로 특채될 정도로 인정받는 인재였지만, 안타깝게도 첫 출근을 앞두고 극장 아르바이트 중 천장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어머니는 넋을 잃었고, 1년 동안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럴 수는 없다"는 절망감과 슬픔에 잠겨, 어머니는 깊은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배당에 나가 예배를 드려도 감사나 기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예배당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어머니는 절망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밥을 짓기 위해 부엌에 들어선 어머니는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는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내 아들 권주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더 의지하느냐, 아들을 더 의지했느냐?" 순간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지만, 실은 아들 권주를 더 의지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십계명 제1조,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뼛속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 전까지 어머니의 신앙은 남편의 건강 회복, 자식들의 성공, 가정의 부유함 등 세상적인 복을 구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어머니는 완전히 무너지고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랑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어머니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들 권주 형님이 꿈에 나타난 것입니다. 환한 얼굴로 나타난 형님은 어머니께 "여기(천국)도 엄청 바빠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극복하고, 아들을 하나님께 "재물"로 바친 후 비로소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아들을 잃은 슬픔이 어머니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삼남매를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철야 기도 후, 아침마다 삼남매를 모아 아침 기도회를 하신 후 어머니는 엄숙하게 선언했습니다. "잘 들어라. 어제 기도하면서 결심한 건데, 오늘부터 너희들은 내 자식이 아니다." 어린 목사님은 어머니의 선언을 "가족 해체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했지만, 어머니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기도 중에 너희 삼남매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다."

어머니는 삼남매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의미를 몰랐지만, 어머니의 달라진 태도를 보면서 목사님은 어머니의 선언이 진심임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어머니가 매를 들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의 바르지 못하거나 잘못을 하면 회초리로 엄하게 훈육하셨지만,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때릴 수 없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식을 때리겠느냐? 때리더라도 하나님이 때리실 것이다."

가난은 여전했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쌀이나 돈을 빌리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쌀이 떨어지면 예배당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이 쌀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새벽 예배 후 집에 돌아오면,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는 쌀 한 봉지가 문 앞에 놓여 있곤 했습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만나"를 경험하면서 삼남매는 "만나 체질"이 되었습니다. 부족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내일 또 "만나"가 내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어머니는 기도하셨습니다. 빨간 독촉장을 들고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 당신의 아들 덕주가 등록금을 못 내 잘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하고 돌아오면, 신기하게도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열렸습니다. 목사님은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살려고 발버둥치며 사라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사라지는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의 자녀" 선언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세 아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큰형님 이현주 목사님, 누님 이정희 장로님 (장공 김재준 목사님 기념사업회 이사), 그리고 막내 목사님까지, 삼남매 모두 어머니의 기도와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선언대로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일방적인 "계약"에 대해 목사님은 중학교 1학년 때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중학교 1학년 봄 소풍 날, 갑자기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열이 펄펄 끓어 소풍도 못 가고 집에 누워있자, 외출했던 어머니는 놀라 교회로 데려갔습니다. 이철상 목사님은 목사님을 충주에서 가장 큰 병원, 김외과로 데려갔습니다. 의사 박사님은 진찰 후 "골수염"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골수염은 뼈 속 신경 조직망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병으로, 완치가 어렵고 수술과 재수술을 반복해야 하며 심하면 다리를 절단하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병이었습니다.

서울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고쳐주시면 안 돼요?" 의사는 난색을 표하며 자신의 아들도 같은 병으로 5년째 투병 중이며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머니는 서울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의사에게 "쟤는 하나님께 바친 자식"이라고 선언하며 수술을 부탁했습니다. "죽을 병이면 서울, 미국 가도 죽고, 살 병이면 여기서 수술해도 산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술실로 향하는 길, 의사는 목사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내 아들도 못 고쳤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다. 하지만 안 될 수도 있다." 어머니에게 "포기"당하고, 의사에게 "실패"를 전제로 수술하겠다는 말을 듣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목사님은 수술 직전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다리만 자르지 않게 해주시면, 하나님 종 하겠습니다."

수술은 놀랍게도 성공적이었습니다. 실력 있는 의사는 5년 동안 아들을 치료하며 쌓은 노하우로, 가난한 과부의 막내아들을 단 한 번의 수술로 완치시킨 것입니다. 어머니의 "포기"가, 의사의 "실패" 선언이, 역설적으로 목사님을 하나님께 매달리게 했고, 서원 기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내 새끼 살려달라"며 애원하고, 의사가 희망적인 말을 했다면, 목사님은 하나님께 서원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포기"는 오히려 목사님에게 최고의 "행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원 기도를 했다고 곧바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수술 후 공부도 잘 되었고, 서울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욕심과 유혹에 흔들렸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의대에 진학하려 했지만, 예비고사 후 갑자기 폐결핵이 재발하면서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당시 폐결핵은 완치 증명서가 있어야 대학 입학이 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질병이었고, 목사님의 꿈은 좌절되는 듯했습니다.

재수를 포기하고 형님의 권유로 감신대에 입학했지만, 신학교 생활은 재미없었습니다. 신학생의 본분을 망각하고 방황하며 데모, 유치장 신세도 겪었습니다. 여름 성경학교가 싫어 기도원에 도피했지만, 그곳에서 운명적인 "회심" 체험을 하게 됩니다. 철야 기도회에서 3시간 동안 찬송만 부르는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참여했지만, 냉소적인 마음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습니다.

새벽 4시, 정리 시간, 다른 사람들은 은혜받아 기쁨에 넘쳐 있었지만, 목사님은 여전히 냉담했습니다. 그때, 깊은 내면에서 녹음기 틀듯이 "하나님, 다리만 자르지 않게 해주시면, 하나님 종 하겠습니다"라는 오래 전 서원 기도가 들려왔습니다. 잊고 지냈던, 잊으려 했던 서원 기도가 다시 떠오르는 순간, 목사님은 비로소 자신이 왜 신학교에 왔는지, 왜 목사의 길을 가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잊지 않으셨고, 약속을 지키도록 인도하셨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기쁨의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1974년 8월 16일 새벽 4시,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목사님도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기도원을 내려오자마자 3년 동안 먹던 약을 버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폐결핵이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왼쪽 넓적다리의 수술 흔적과 가슴 속 치유의 흔적, 두 가지 "흔적"을 지니고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어머니는 늘 삼남매를 하나님께 맡겼고,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위대한 것은 어머니 자체가 아니라, 어머니를 사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머니는 70세에 홀로 은퇴 예배를 드리고,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홀로 지내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팔레스타인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후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췌장암 말기,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어머니는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오래 전 35세에 했던 기도, "남은 사남매 키울 동안만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70세에 응답해주셨다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은 얼굴로 마지막 전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혼수상태에서 쌍스러운 말이 튀어나오는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마지막 새벽에는 패악한 말은 사라지고 성경 말씀만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목사님에게 신앙의 깊은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성경 말씀을 2, 30번 통독했지만 암송은 못했던 어머니였지만, 임종 직전 무의식 속에서 성경 말씀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목사님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를 깨달았습니다. 평소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밤이 되어 시력을 잃을 때 빛을 발하는 기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까지 신학자인 아들에게 체험적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셨습니다.

2018년 은퇴 후,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너 알아?"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학교 교수, 목회자, 저술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척"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너는 나를 아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 동안 멘붕 상태에 빠졌지만, 곧 "이제부터 알아가라"는 음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은퇴 후 비로소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현재 한국 초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집필하고 계십니다. 선교사들의 업적을 기록하려 했지만, 선교사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감동시킨 한국 초대교회 교인들의 순수한 믿음을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하는 듯했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한국 교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목사님은 은퇴 후 집필 활동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목사님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알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고, "어린아이처럼 불완전하게 알던 것을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하게 아시듯 완전하게 알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목사님의 깊은 신앙 간증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의 의미와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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