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 컴패션 대표의 죄와 구원, 아이들을 위한 헌신 이야기
죄 벗고 아이들의 아버지로: 컴패션 서정인 대표의 인생 고백
죄의 굴레를 벗어나 마주한 세상: 서정인 한국컴패션 대표의 삶과 헌신, 그리고 깊은 깨달음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주영입니다. 오늘도 귀한 시간을 내어 함께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마주하게 되는데요, 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짓누르는 것은 바로 ‘죄’의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지만, 여전히 죄의 속성은 우리 안에 남아있어 때로는 구원의 확신마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계신가요?
저는 분명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 이러한 확신을 주셨고, 그 확신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새롭게 하소서’ 에는 특별한 분이 출연해주셨는데요, 바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죄와 치열하게 싸워왔고, 마침내 구원의 확신을 얻어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된 분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죄와 싸우고, 고뇌하며, 갈등했던 시간을 통해 얻은 자유함은 그를 변화시켰고, 지금은 전 세계 아이들에게 ‘아버지’ 와 같은 존재로 헌신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국제 어린이 양육 기구인 ‘컴패션 인터내셔널’의 한국 법인, 한국컴패션의 서정인 대표님을 모시고, 그의 진솔한 이야기와 깊은 깨달음을 함께 나누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서정인 대표님,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새롭게 하소서’ 출연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대표님과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네, 주영 형제님, 윤미 자매님과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습니다. 컴패션 활동을 하면서 함께 필리핀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었죠. 당시 아이티 봉사활동 때,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주영 형제님과 윤미 자매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따뜻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도록 변치 않는 모습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대표님,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희야말로 대표님의 헌신적인 삶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님의 강연이나 인터뷰를 통해 감동을 받으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데요, 특히 대표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많은 분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대표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13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셨다니 놀라운데요,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지만, 13살 때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맞습니다. 그것도 쌍둥이 아기를 돌보는 쉽지 않은 일이었죠. 당시 배경을 설명드리자면, 한국에서 교사로 30년 넘게 재직하셨던 아버님께서는 매우 강직하고 정직한 분이셨습니다. 촌지 수수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고, 오히려 부정부패를 혐오하셨습니다. 강직한 성품의 아버님께서는 당시 교사 월급으로는 네 형제를 교육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미국 이민을 결심하셨습니다. 제가 13살 때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요, 이민 가서 살게 된 아파트에서 중국인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쌍둥이 아기를 잠시 안아주게 되었는데, 아기들이 너무나 순하게 잘 자는 모습을 보시고는 저에게 베이비시터를 제안하셨습니다. 저 역시 용돈을 벌고 싶었던 차에 흔쾌히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5~6시간씩 쌍둥이 아기를 돌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쌍둥이라 성격도 달라서, 한 아이를 웃기면 다른 아이가 울고, 또 다른 아이가 웃으면 다른 아이가 울곤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베이비시터 경험은 쉽지 않았지만, 이후 컴패션 사역을 하면서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을 돌보는 경험을 하셨다니 흥미로운데요,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오히려 어린 시절에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어릴 때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저를 훈련시키셨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군요. 대표님께서는 학창 시절, 특히 사춘기 시절에 죄의 문제로 깊이 고민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의 죄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갈등과 방황을 겪으셨는지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감사하게도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집안 전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에 목회자 친척들도 많았습니다. 교회는 저에게 익숙한 삶의 일부였고,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신앙은 진짜일까?’ 라는 질문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신앙과 삶의 괴리감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신앙적인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했고, 방황하며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양다리 걸치고, 어느 곳에도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 제 자신의 모습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말씀대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깊은 고민과 갈등을 반복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셨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보통 고등학생 시절에는 진로 문제나 학업 문제로 고민하기 마련인데, 대표님께서는 죄의 문제, 신앙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셨다니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고 생각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의 문제로 고민하셨으며, 어떤 갈등을 겪으셨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당시 저는 팝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용돈을 모아 팝 앨범을 사서 듣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수련회에 가서 헌신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앨범을 모두 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수련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팝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결국 며칠 못 가 다시 팝 앨범을 사서 듣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팝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팝 음악을 듣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부모님께서 들려주시던 복음성가 대신 팝 음악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는 죄처럼 느껴졌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은 이성에 눈을 뜨고, 세상적인 즐거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성이나 세상적인 즐거움보다는 죄의 문제, 신앙적인 갈등으로 더 큰 고민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죄’라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결판을 내고 싶었습니다. 신앙적인 삶을 풍요롭게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죄의 문제로 하나님과 결판을 내고 싶었다는 말씀이 인상적인데요, 당시 대표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집회와 수련회에 참여하며 말씀을 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제 자신의 부족함과 죄성이 더욱 크게 느껴졌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제 모습에 좌절했고,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든지, 아니면 그냥 편하게 세상 살게 해주세요. 죄책감을 계속 주시면서 놓지도 않으실 거면 차라리 저를 포기해주세요.’ 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죄의 문제로 씨름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회 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목사님 설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설교 시간에 딴 책을 읽거나 딴 생각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공허하게 느껴졌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말씀대로 살라’ 고 강조하셨지만, 저는 ‘해봤는데 안 된다’ 고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은 말씀대로 다 지키면서 사십니까? 저는 해보니까 안 되던데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만 하지 마시고, 진짜 해결책을 제시해주십시오.’ 라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답을 달라고, 구원의 확신을 주시든지 아니면 저를 포기하시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열심 있는 학생이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죄와 싸우고 방황했던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셨군요. 그렇다면, 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주변 친구들이나 대학생 형, 누나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 간증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더 괴로웠습니다. ‘왜 나는 저들처럼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죄만 짓는 걸까?’ 자괴감과 열등감에 휩싸였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이번에야말로 하나님과 완전히 결판을 내겠다’ 고 결심했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도 포기하고, 술, 담배, 도박 등 죄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질투, 욕망, 시기, 미움 등 죄의 속성은 여전히 저를 괴롭혔습니다. 교회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교회 직분도 맡았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못하는 제 모습에 실망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절망했습니다. 대학교 시절, 저는 하루에 7~8시간씩 성경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좋아해서 읽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해답을 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발 응답해주세요. 응답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이제 완전히 세상으로 가겠습니다.’ 극단적인 심정으로 말씀을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죄책감만 더 커져갔고, 결국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너무 큰 죄인이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셨구나. 주변 사람들은 다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데, 왜 나만 이렇게 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이 인상적인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절망을 극복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절망감에 휩싸여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뛰면서 괴로움을 달랬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성경을 펼쳐 말씀을 읽고, 절망하고, 운동장을 뛰는 악순환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 생일 전날 밤이었습니다. 친구에게 ‘내일이 생일인데, 나는 내년에도 이렇게 똑같이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 솔직히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옥에 갈까 봐 두렵다. 이렇게 사는 건 너무 싫다.’ 고 고백했습니다.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절망적인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습관처럼 로마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3장을 읽을 때도 이전과 똑같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늘 들어왔던 말씀이었고, 여전히 제게는 절망적인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래, 나는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고, 구원받을 수 없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로마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로마서 4장 3절 말씀을 읽는 순간, 제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말씀이 마치 살아있는 말씀처럼 제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믿음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 말씀이 진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깨달음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죄를 이미 해결하셨다. 이제 나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살 수 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구원이구나!’ 그 순간, 지금까지 저를 짓눌렀던 죄의 짐이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누가 뒤에서 확 가져가 버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마음이 평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죄인의 눈물이 은혜의 눈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집에서 말씀을 묵상하다가 뛰쳐나가 동네를 뛰어다니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날이 제 생일이었는데,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그 이후 제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해졌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저는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 삶의 모든 문제가 십자가 안에서 해결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간증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대표님의 간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뜨겁게 하나님을 만난 이후, 컴패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컴패션과의 만남은 정말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한 대학교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고, 다른 대학교에서도 최종 후보 2인에 올라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수 임용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내가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경험을 하게 하시고, 다양한 분야에서 훈련시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당신을 이민 보내시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게 하시고, 신학 대학원에 진학하게 하신 이유가 단지 백인 중산층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내의 질문에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나는 모르겠다. 기도해 보겠다.’ 고 대답하고 백지 상태로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시오. 제가 교수직을 내려놓고 헌신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 컴패션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저는 컴패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지원한 적도 없었습니다. 컴패션 관계자는 저에게 텍사스에 있는 ‘로스’ 라는 분이 저를 추천했다고 말했습니다. ‘컴패션이 뭐하는 곳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전 세계 가난한 어린이들을 현지 교회와 연계하여 양육하는 기관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가난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돌보고, 대학까지 교육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내는 기관이라는 설명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특히 저를 울컥하게 했던 것은 컴패션이 한국 전쟁 직후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시작된 기관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에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1952년에 설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컴패션은 1993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어린이들을 도왔지만, 한국 경제가 성장하고 복지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한국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컴패션이 한국을 떠난 지 20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한국이 이제는 다른 나라를 돕는 후원국이 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아이들을 양육하며,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함께 전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내는 컴패션의 사역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컴패션 면접을 보겠다’ 고 자청했고, 면접을 통해 컴패션 한국 대표로 임명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원래 컴패션 면접은 10명이 넘는 면접관들이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마케팅, 인사, 경영, 재정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낸다고 합니다. 마지막 면접은 영적인 영역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면접관들은 저에게 ‘왜 어린이 사역인가? 왜 가난한 아이들인가? 왜 컴패션인가?’ 질문했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제 아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저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난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고 싶습니다.’ 면접 후 총재님께서 아내에게 ‘왜 당신의 남편이 컴패션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질문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컴패션 대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컴패션 사역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내에게 ‘왜 나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 고 물었더니, 아내는 ‘당신이 묻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다.’ 고 대답했습니다. 결혼 전부터 아내는 아이를 낳는 대신 입양을 통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세 아들을 연이어 낳으면서 입양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컴패션 대표 제안을 받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컴패션 사역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컴패션 대표직을 수락하기까지 아내의 기도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을 통해 저를 컴패션 사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컴패션이 한국 전쟁 직후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시작된 기관이라는 사실은 많은 한국인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입니다. 컴패션이 한국에서 철수한 후 20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된 배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컴패션은 1993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10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양육했습니다. 41년 동안 한국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했습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 땅에 2,700개의 교회와 보육원을 세워 어린이들을 돌보았습니다. 당시 컴패션은 한국 교회의 이름으로 사역했기 때문에 컴패션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컴패션의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어린이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컴패션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컴패션이 한국에서 철수한 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경쟁주의 등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새로운 부흥과 갱신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컴패션은 한국 교회의 요청과 국제 컴패션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컴패션과 협력하여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계 선교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한국컴패션이 설립되었습니다. 컴패션 한국 사무실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의 놀라운 변화에 감탄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적입니다. 컴패션은 한국의 기적적인 성장 과정을 통해 전 세계에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컴패션의 도움으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컴패션은 전 세계 가난한 나라들에게 한국과 같은 기적을 꿈꿀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한국컴패션은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되도록 돕고, 한국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대표님께서는 컴패션 사역을 하시면서 수많은 개발도상국을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개발도상국 현장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으셨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처음 컴패션 사역을 시작하고 에콰도르와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저는 깊은 충격과 슬픔에 잠겼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가난을 낳고, 가난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슬픔, 안타까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습니다. ‘이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밤잠을 설쳤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품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당장 이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필리핀 쓰레기 마을 방문은 잊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처참했습니다. 컴패션 아이들이 쓰레기 마을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쓰레기 마을로 향했습니다. 쓰레기 더미를 헤치며 걸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형, 누나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어린 동생들, 기저귀도 제대로 차지 못한 아이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져 먹을 것을 찾는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저는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저는 깊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아이들의 눈빛은 저에게 ‘우리를 불쌍하게 쳐다보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의 동정심을 구걸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사과했습니다. ‘미안하다. 너희들을 함부로 찍어서 미안하다. 너희들은 존귀한 존재인데, 내가 너희들을 존귀하게 대하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컴패션 현지 교회와 협력하여 아이들을 컴패션 프로그램에 등록시키고,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컴패션의 12가지 핵심 가치 중 하나인 ‘존귀함’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컴패션은 모든 아이들을 존귀하게 대합니다. 컴패션 홍보 사진이나 영상에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의 모습 대신 밝고 건강한 아이들의 모습을 담는 이유도 바로 아이들의 존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한 아이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고, 불쌍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아이들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컴패션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존귀하게 대하고, 사랑과 존중으로 양육합니다. 컴패션 사역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귀함의 가치를 배우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면서 ‘존귀함’의 가치를 깨달으셨다는 말씀이 감동적인데요, 실제로 컴패션이 지원하는 아이들은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컴패션이 지원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밝고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키워나가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컴패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정기적인 교육과 의료 지원을 받고, 영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컴패션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물질적 지원뿐만 아니라, 사랑과 관심, 격려와 지지를 제공합니다. 아이들은 컴패션 선생님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자존감을 높이고, 긍정적인 자아 이미지를 형성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됩니다. 제가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밝게 웃고, 활발하게 뛰어놀고,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저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컴패션 사역은 단순히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나가는 거룩한 사역임을 확신합니다.
컴패션 사역을 하시면서 골수 이식을 두 번이나 하셨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골수 이식을 결심하게 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골수 이식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골수 이식은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컴패션 사역 초창기에 있었던 일이죠. 저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컴패션 사역을 통해 저를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컴패션 사역을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백혈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놓인 학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학생을 살리기 위해 골수 기증 운동을 시작했고, 학교 학생들과 함께 헌혈 및 골수 기증 희망 등록을 했습니다. 몇 년 후, 컴패션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 잊고 지내던 골수 기증 등록이 지방에 사는 백혈병 환자, 어린 여자아이와 일치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내와 저는 망설임 없이 골수 이식을 결정했습니다. 전 세계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사역을 하면서, 눈앞에 있는 생명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골수 이식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척추뼈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골수를 채취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일주일 동안 계속 주사를 맞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불행히도 의료 사고가 발생하여 수혈을 받아야 하는 위기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무사히 골수 이식을 마칠 수 있었고, 어린 소녀는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골수 이식 후 몸은 많이 힘들었지만, 생명을 살렸다는 기쁨과 감사함이 더 컸습니다. 골수 이식 후 1년 뒤, 또 다른 백혈병 환자와 골수가 일치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의료 사고 후유증과 건강 악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반대도 심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환자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두 번째 골수 이식을 결심했습니다. 두 번째 골수 이식은 첫 번째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의료진도 두 번의 골수 이식은 매우 드문 경우라며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간절함으로 두 번째 골수 이식을 감행했습니다. 두 번째 골수 이식 후, 놀랍게도 환자 아이는 건강을 회복했고, 가족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자 아이의 아버지는 다른 백혈병 환자를 위해 골수 기증을 했다는 감동적인 소식도 접했습니다. 두 번의 골수 이식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생명의 존귀함을 더욱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골수 이식은 저에게 큰 희생과 고통을 요구했지만, 그 희생을 통해 얻은 기쁨과 보람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두 번의 골수 이식, 정말 숭고한 헌신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한 대표님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에 존경을 표합니다. 컴패션 사역을 하시면서 때로는 시험에 들 때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컴패션 사역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리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컴패션 사역을 하면서 가장 큰 시험은 ‘엔다카추’ 라는 에티오피아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차인표, 신애라 씨와 함께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차인표 씨는 자신이 후원하는 대학생 ‘엔다카추’ 를 만나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습니다. 엔다카추는 빈민가 출신으로 컴패션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한 모범생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대학 캠퍼스에서 엔다카추를 만났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휠체어를 탄 앙상한 아이와 엄마가 엔다카추를 만나기 위해 캠퍼스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알고 보니 엔다카추는 1년 전 컴패션에 전 세계 후원자들에게 기도 편지를 보냈는데, 자신의 병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엔다카추는 희귀병인 ‘혈액병’ 과 ‘폐결핵’ 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물론 아프리카 전역, 유럽, 미국, 캐나다까지 안 가본 병원이 없을 정도로 병원을 전전했지만, 치료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캐나다 제약회사에서 임상 실험 중인 신약이었습니다. 엔다카추는 제약회사에 간절히 편지를 보내 신약 사용을 요청했고, 제약회사는 고심 끝에 신약 제공을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은 한 달 약값만 300만 원이 넘는 고가였고, 매일 30개의 주사를 맞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9.11 테러 직후라 항공 보안이 강화되어 주사기를 비행기에 싣는 것조차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컴패션은 엔다카추를 위해 매달 300만 원이 넘는 약값을 지원하고, 캐나다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직원을 보내 주사를 전달하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1년 후, 기적처럼 엔다카추는 병을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엔다카추에게 3,600만 원이 넘는 후원금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한 아이에게 거액의 후원금을 사용하는 대신, 그 돈으로 더 많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편함이 남아있었습니다. 차인표, 신애라 씨는 엔다카추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저는 마음이 불편하여 형식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날 저녁, 차인표, 신애라 씨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가롯 유다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컴패션 대표로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저는 한 아이의 생명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1년 후, 차인표 씨가 다시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엔다카추가 완치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엔다카추가 자신의 삶을 아프리카 빈민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엔다카추는 아프리카 전역을 다니며 빈민들을 돕는 NGO 단체를 설립했고, 수많은 의료 봉사자들과 함께 빈민들의 질병 치료와 보건 개선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엔다카추의 이야기는 저에게 큰 교훈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엔다카추의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네요. 한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대표님께서는 컴패션 사역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컴패션 사역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점은 무엇입니까?
컴패션 사역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운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그리고 그 생명이 온전히 피어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컴패션 사역은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고, 그들의 존귀함을 회복시키고,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컴패션 사역의 본질입니다. 컴패션 사역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컴패션 사역은 저를 변화시켰고, 제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컴패션 사역은 제 인생 최고의 축복입니다.
컴패션 사역은 정말 귀한 사역입니다. 하지만, 후원자들의 어려움 때문에 후원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후원자들이 늘어나면서 후원 중단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코로나19 팬데믹은 컴패션 사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원자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후원이 중단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한국은 이탈리아와 함께 후원 취소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입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은 후원을 시작하면 오랫동안 지속하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과 이탈리아는 상대적으로 후원 지속률이 낮은 편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후원을 지속해주시는 후원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후원이 중단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개발도상국 아이들이 더욱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봉쇄 조치로 인해 학교와 교회가 문을 닫고, 온라인 수업은 꿈도 꿀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빈민가 가정은 일자리를 잃고 생계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컴패션은 긴급 구호 자금을 투입하여 식량과 생필품을 지원하고 있지만,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고,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릴까 봐 걱정됩니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아이들은 희망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컴패션은 아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교육의 끈을 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후원자님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 그리고 따뜻한 손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헌신하시는 대표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컴패션 후원을 망설이는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나 혼자 후원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작은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악과 악이 존재하는 한, 세상에는 늘 가난이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작은 헌신이 한 아이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에티오피아에서 만났던 ‘엔다카추’ 의 이야기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엔다카추는 한때 죽음을 눈앞에 둔 절망적인 아이였지만, 컴패션 후원자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지금은 아프리카 빈민들을 돕는 NGO 단체의 대표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후원이 엔다카추와 같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간증을 하고 버스에 오르려는데, 휠체어를 탄 아이가 울면서 저를 붙잡았습니다. 컴패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장애 때문에 소외되었던 아이였습니다. 저는 아이를 안아주고 컴패션 프로그램에 등록시켜주었습니다. 몇 년 후, 아이는 세 번의 수술을 통해 건강을 회복했고, 밝게 웃으며 춤추는 영상을 보내왔습니다. 한 아이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후원은 한 아이의 인생을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일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돕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나가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손길을 통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컴패션 후원에 동참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귀한 간증 나눠주신 서정인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표님의 삶과 헌신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저 역시 오늘 대표님의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특히 ‘존귀함’ 의 가치, 그리고 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대표님의 깊은 깨달음은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저 역시 컴패션 후원에 동참하여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오늘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들도 서정인 대표님의 간증을 통해 큰 은혜와 도전을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컴패션 후원에 동참하셔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귀한 시간 함께해주신 서정인 대표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다음 주에도 더욱 귀한 간증과 은혜로운 말씀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