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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20살 인생의 전환점, 절망을 이긴 기적의 간증

불같은 연단을 통해 정금같은 믿음을 주신 제 간증 들어보실래요?ㅣ주은미 전도사ㅣ새롭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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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다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 주영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겪기도 하고,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사고를 이겨낸 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큰 은혜와 도전을 받지만, 막상 나에게 닥친 고난 앞에서는 깊은 괴로움에 빠지곤 합니다. 지금 혹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오늘 주은미 전도사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귀한 간증을 들려주실 분은 한국 교통 장애인 협회 교통사고 예방 상담 센터장이자 해명 교회 전도사이신 주은미 전도사님입니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이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무주에서 강의 마치시고 바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어제 무주에서 강의가 하루 종일 있어서...) (네, 네.) 어젯밤 늦게 서울에 도착해서 피곤하실 텐데, 괜찮으신가요? (아, 괜찮습니다.) 어제 날씨가 안 좋아서 통증이 심하셨다고 들었는데, 서울은 좀 괜찮으신가요? (어제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통증 때문에 약을 계속 먹었습니다. 서울은 날씨가 괜찮아서 통증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불편하신 몸으로 귀한 간증을 위해 나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주 전도사님께서는 평소 한국 교통 장애인 협회에서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힘쓰시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전도사님으로 사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해명 교회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고 계신가요? (교회에서는 제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아이들이 벌써 다 커서, 지금은 청년부가 되었어요.) (진짜, 세월이 빠르네요.) 주일학교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다니,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네, 감사합니다.)

두 다리가 불편하신데, 모델 활동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모델 활동을 하시게 되셨나요? (아... 저희가 장애인 모델 협회를 만들었어요. 장애인분들이 자신의 모습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 협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모델 협회 개회 기념으로 패션쇼를 열었는데, 그때 여러 장애 유형의 모델분들이 참여하셨습니다. 저는 절단 장애인 모델로 참여했는데, 당시 패션쇼 조건이 의족을 드러내는 짧은 스커트를 입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나이도 많고 몸매도 좋지 않다고 망설였지만, 다양한 연령대와 장애 유형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장애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네, 정말 멋지시네요.)

모델 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죠. 특히 양쪽 의족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워킹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델 활동은 정말 떨리고 긴장됐지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 롱 스커트만 입는데, 모델 쇼에서는 처음으로 의족을 드러냈습니다. 제 모습이 다른 장애인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랐고, 장애 인식 개선에도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네, 분명히 많은 분들에게 큰 울림을 주셨을 겁니다.)

여름에는 반바지나 반팔을 입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인데도, 아직 우리 사회는 장애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도사님께서 의족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네, 맞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 의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도 의족을 착용하고 길을 다니다 보면, 어린아이들은 무서워서 울고, 어르신들은 신기하게 쳐다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의족을 가리기 위해 통에 솜을 덧대어 다리 모양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의족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외모에도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음, 안타깝네요.)

저는 오히려 장애를 더 드러내고,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도록 말이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갔을 때,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놀이공원에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장애인이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가장 먼저, 가장 좋은 자리를 배려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장애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 사회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30년 만에 모델에 도전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셨나요? (아, 모델 활동은 정말 떨리고 긴장됐지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의족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어 모델 활동에 참여한 것이 후회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네, 정말 멋진 경험이셨네요.)

사전 인터뷰에서 "내 인생은 20살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살 때 어떤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아, 제가 고등학교 졸업 학력고사 시험을 보고 합격했습니다. 1991년 1월 24일이었는데, 합격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아빠께서 예쁜 구두를 선물해주셨어요.) 아빠께서는 "예쁜 구두 신고 좋은 곳 많이 다니라"고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그 구두를 신고 가족들과 여수, 순천, 광주 등 전라도 여행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사고로 양쪽 다리를 절단하고, 척수 손상까지 입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은 20살 교통사고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사고였네요.)

어떤 사고였는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1991년 1월 6일,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아빠께서 목회하시는 해명 교회에서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첫 주일 예배를 해명 교회에서 드리고 싶어서, 큰아버지께 기차표를 부탁드렸습니다. 당시 입시 원서 접수 기간이라 기차표 구하기가 어려워서, 큰아버지께서 야간열차표를 구해 주셨습니다. 새벽 5시 30분쯤 영등포역에 도착하는 기차였는데,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기차가 영등포역에 도착했을 때, 새벽이라 어둡고, 승객들도 많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기차 문이 열린 채로 출발하는 바람에, 기차 계단에 쌓인 눈에 구두가 미끄러졌습니다. 넘어지면서 다리와 짐이 기차와 승강장 사이에 빠졌는데, 기관사님께서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기차를 출발시킨 것입니다. 기차가 출발하면서 난간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고 사고가 났습니다. 아빠께서 대학 합격 선물로 사주신 구두 때문에 사고가 났다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충격적인 사고였네요.)

사고 후 어떻게 구조되었고, 병원 치료는 어떻게 받으셨나요? (만약 기차가 그대로 출발했더라면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다행히 신호수 아저씨께서 기차 밑에 뭔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시고 기차를 멈춰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차는 80m 정도를 더 나아간 상태였고, 저는 기차 바퀴에 깔린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사고 직후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였고, 특히 머리 부위와 오른손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신호수 아저씨께서는 제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생각하고 시신 수습을 하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담요를 덮으려는 순간, "저는 주은미이고, 집 주소는..." 이렇게 이름과 주소를 말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사고 후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가족들에게 연락이 닿았고, 저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기적적인 순간이었네요.)

사고 소식을 들으신 부모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특히 첫 주일 설교를 앞두고 따님의 사고 소식을 접하신 아버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사고 당일이 마침 주일이었고, 아빠께서는 주일 예배 설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경찰로부터 "따님이 기차 사고를 당했는데, 다리를 다쳤으니 병원에 와보셔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아빠, 엄마, 남동생이 함께 경찰서에 갔다가, 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 딸을 보셨을 때, 부모님 마음은 무너져 내리셨을 겁니다. 하지만 아빠께서는 첫 주일 설교를 위해 교회로 향하시고, 엄마는 7시간 동안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셨습니다. 아빠께서는 주일 낮 예배 설교를 마치시고 광고 시간에 교인들에게 "우리 딸 은미가 기차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수술 중이니, 함께 기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깜짝 놀라 울면서 기도했고, 온 교회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전도사님 상태는 어떠셨나요? (저는 사고 직후 의식을 잃었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도 의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머리뼈가 깨지는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고 현장에서부터 병원 이송, 수술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가족들에게 전해들은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머리와 다리에서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피를 보고, 머리 수술과 다리 수술을 먼저 진행했습니다. 두 다리는 기차 바퀴에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였고, 발목 관절까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부모님과 상의 후, 제 의식 회복을 기다리지 않고 양쪽 다리 절단 수술을 결정하셨습니다. 당시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아빠께서는 양쪽 다리 절단 동의서에 서명하시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 설교를 하셨습니다. (정말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아버님의 믿음이 느껴집니다.)

본인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수술이 진행되었는데,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상황이 어떠셨나요? (수술 후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부모님께서 긴장하고 계셨습니다. 양쪽 다리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았으니, 제가 깨어나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울부짖을까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눈을 뜨자마자 "엄마, 허리가 아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고 직후 저를 철도 지정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는 머리와 다리 CT 촬영만 하고 척추 검사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척추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하반신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뒤늦게 척추 손상이 발견되어 응급차로 경희의료원으로 옮겨져 척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경희의료원에서는 이미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마친 직후인데다, 머리 부상 후유증도 지켜봐야 해서 섣불리 척추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마취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의사들이 모여 긴급회의를 했고, 결국 아빠께서 세 장의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신 후에야 척추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척추를 열어보니 신경이 끊어지기 직전이었고, 요추 1, 2, 3번을 교정하는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후에도 한동안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척추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던 순간부터입니다. (정말 끔찍한 사고였네요. 수술 과정도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처음 두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처음에는 그냥 '다쳤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손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다리가 절단된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일반 병실로 옮기기 직전, 아빠께서 사고 당시 신었던 구두와 함께 "네가 큰 사고를 당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하시며 양쪽 다리를 절단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두 다리를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충격이 엄청나셨겠어요.)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처음에는 현실 같지 않았습니다.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니, 다리가 붙어 있는지, 잘린 건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다리가 없어졌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죠.) 중환자실 면회 시간은 짧았고, 아빠는 다리 절단 소식만 전하고 나가셨습니다. 혼자 남겨진 병실에서 멍하니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때는 슬픔, 절망감, 뭐라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멍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다음 면회 시간에 아빠가 오셨을 때, "아빠, 그럼 저 대학교 합격한 건 어떻게 돼요?"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감정적인 사람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인데, 엉뚱하게도 대학교 합격 여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아빠께서는 "의족 하면 나중에라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래, 대학은 갈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네요.)

20살 꽃다운 나이에 두 다리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입니다. 절망감에 비관하지는 않으셨나요? (두 다리를 잃은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사고 후유증로 시작된 극심한 통증이었습니다. 하반신 마비로 1년 가까이 감각이 없다가, 신경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부터 시작된 통증은 밤낮없이 계속되었고, 일주일 내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환상통까지 겹쳐, 잘려나간 다리가 욱신거리고 칼로 에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진통제도 소용없었고,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야 겨우 5분 정도 잠들 수 있었습니다. 잠 못 자는 고통과 통증에 시달리다 보니,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삶의 의욕을 잃어갔습니다. '5분만이라도 편안하게 잠들고 싶다'는 생각, '제발 이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온몸이 경직되고 근육 경련까지 일어났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울부짖고, 잘려나간 다리를 붙잡고 울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기도해줬지만, 그때는 그 어떤 위로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겠네요.)

하반신 마비로 인한 수치심이나 비참함은 없으셨나요? (처음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척수 장애로 인해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척수 장애인이 되면, 대소변 감각이 사라지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인공적으로 배출해야 합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기도 전에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주님, 씻으세요. 다리 벌리세요" 하시며 넬라톤이라는 줄로 요도에 관을 삽입해 소변을 빼냈습니다. 4시간마다 소변을 빼내고, 대변은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관장을 해야 했습니다. 남자 인턴 선생님이 넬라톤과 관장을 해주시는 것도 너무나 수치스러웠습니다. 관장 후 변이 시원하게 나오면 그나마 다행인데, 변이 나오지 않으면 장갑을 끼고 직접 빼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다리 통증, 수치심,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무력감... '이런 모습으로 평생 살아야 하나'라는 절망감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셨네요.)

욕창으로도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척수 장애인에게 욕창은 정말 무서운 합병증입니다. 열이 계속 나면 염증을 의심해야 하는데, 저는 욕창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습니다.) 엉덩이가 썩어 들어가고, 여기저기 욕창이 생겼다 아물었다를 반복했습니다. 큰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욕창이 심해져 열이 나면, 엉덩이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열을 식히고, 항생제 주사와 링거를 맞으면 금방 나았습니다. 하지만 3개월 이상 입원할 수 없어서, 퇴원 후 다시 욕창이 재발하곤 했습니다. 퇴원 후 동네 병원에서 똑같이 항생제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큰 병원에서 사용하던 강력한 항생제가 아니면 욕창이 낫지 않았던 것입니다. 욕창은 점점 심해져 엉덩이뼈가 드러날 정도로 썩어 들어갔습니다. 여름 7월, 응급실로 실려가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욕창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엉덩이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허벅지 뒤쪽 살을 떼어 이식하는 수술을 했습니다. 40일 동안 엎드려 잠자고, 엎드려 치료받았습니다. 퇴원 후에도 두세 달을 엎드려 지내야 했지만, 감각이 없는 부위라 상처가 잘 아물지 않고 계속 열이 났습니다. 항생제를 밥 먹듯이 달고 살았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네요.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없으셨나요? (그때는 '나를 왜 살려주셨을까'라는 원망이 컸습니다. 아빠에게 "아빠, 그때 왜 나를 살려놨어?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텐데..."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를 데려가달라'고 기도했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은미야, 살아있으니 고통스러운 거야" 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무슨 의미가 있나? 앞으로 평생 이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지?'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동생이 "언니, 같이 기도하자"고 했지만, 처음에는 기도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입술이 굳게 닫혀버린 것 같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랐고, 아빠는 목사님이신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걸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음, 이해가 됩니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니, 의외네요. 어떻게 다시 믿음을 회복하게 되셨나요? (사실, 저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인가? 이건 아빠의 신앙이지, 내 신앙은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육 전도사님께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셨고,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말씀이 너무 재미있고,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성경 퀴즈 대회에서 1등을 휩쓸 정도로 성경 지식은 많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고3 때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에 대한 갈망이 커져서, 원래 교육학을 전공하려던 꿈을 접고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신학대학에 합격하기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걸까? 신학까지 공부했는데,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걸까?'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답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성경에서 답을 찾으셨나요?)

성경 말씀을 통해 어떻게 위로를 받으셨나요?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와 미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당시 저에게 닥친 현실은 재앙과 고통 그 자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재앙이 아니라 평안,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제 삶은 재앙이고 고통인데, 무슨 평안과 소망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장로교단 기도 훈련을 받았지만, 그때처럼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차 안에서 통증이 시작될 때면, 아직도 다리를 붙잡고 울부짖습니다. 절단 장애, 척수 장애는 평생 통증을 동반합니다. 중증 장애인들을 만나보면, 모두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통증만 없어도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통증의 이유조차 알 수 없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이 위로가 되셨다니, 놀랍습니다. 어떤 점에서 위로를 받으셨나요? (하나님께서 "재앙이 아니라 평안,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래, 아직 내 인생이 끝난 게 아니구나. 앞으로 살아갈 날이 남았고, 미래에 소망이 있겠구나.'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나님이 진짜라면, 하나님께서 내 미래를 책임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셨으니, 분명히 뜻이 있으실 거야. 앞으로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하실까? 기대하며 살아보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극심한 통증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은 삶의 희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셨습니다. 죽음이 아닌,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갈 힘을 주셨습니다. 욥기 말씀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저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재산, 자녀, 건강, 모든 것을 잃었지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 21절 말씀을 묵상하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지어다." 욥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욥의 믿음을 통해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문득,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한 다리를 주셨고, 사고로 다시 가져가셨지. 다리를 주신 분도 하나님,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 몸, 내 인생,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는 말씀도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신 후에 정금같이 단련된 믿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인내하며 연단을 받자. 불구덩이 같은 고통 속에서, 정금같이 순수한 믿음을 얻게 되기를 소망하자.'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처럼,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는 약속은, 고통 속에서 헤매던 저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욥과 예레미야 말씀을 통해 큰 위로와 소망을 얻으셨네요.)

고난 속에서 피어난 소망, 새로운 삶을 향한 발걸음

그 후 학교에도 복학하시고, 사고 이후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신경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고 후 6개월쯤 되었을 때 장애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하반신 마비가 계속되는 상황이라 '걸을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처럼 제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허벅지 앞쪽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고, 다리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양쪽 손으로 봉을 잡고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놀라워하며, 이제 의족을 맞춰도 되겠다는 진단을 내려주셨습니다. 감각 신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운동 신경이 회복되면서 의족을 착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기도의 힘이 저를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고, 그 기도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의족을 맞추고 다시 걷게 되면서, 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으로 복학해서 다시 학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회복이네요. 기도의 힘은 정말 위대합니다.)

복학 후 학교 생활은 어떠셨나요?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된 것도 기적이었지만, 복학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집은 강남 삼성동, 학교는 사당동, 당시에는 장애인을 위한 교통편의시설이 전무했습니다.) 양쪽 목발에 5kg 나무 의족을 착용하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택시를 타는 것 외에는 학교에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택시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강남 삼성동에서 목발을 짚고 택시를 기다리면, 수십 대의 택시가 그냥 지나쳐갔습니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님께 이유를 여쭤보니, "아침부터 장애인을 태우면 재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낮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 어려웠기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원래 지방 학생만 기숙사 입실이 가능했지만, 학교 측에 간곡히 부탁하여 1층 기숙사에 입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습니다. 5층 예배당에서 드리는 채플에 참석하기 위해, 매일같이 목발을 짚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오르내렸습니다. 나무 의족은 무겁고 불편했고, 다리는 계속 까지고 피가 났지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고통과 싸우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두개골 골절 후유증 때문에 학업 능력이 떨어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공부하는 데도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신학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대학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대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신학 공부뿐 아니라, MT, OT 등 모든 학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잃어버렸던 젊음과 낭만을 되찾았습니다. (정말 열정적인 학교 생활을 하셨네요. 대단하십니다.)

하반신 마비 극복이 첫 번째 은혜였다면, 두 번째 은혜는 무엇이었을까요? (대학교, 대학원 시절, 저는 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해도, 여성은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목회 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대학교 4년, 대학원 3년, 7년 동안 힘겹게 공부했지만, 졸업 후 진로가 막막했습니다. 대학교 졸업식에서 총장상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장애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그래, 사회복지를 공부해보자!'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장애인으로서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을 사회복지 분야에서 봉사하며 극복하고, 다른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여 사회복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사회복지를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네요.)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신 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밀알복지재단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밀알복지재단은 장애인 복지 전문 재단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밀알복지재단에서 장애인 결혼 상담,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장애인 자립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장애인 결혼 상담 사업을 하면서, 장애인 커플들의 만남부터 결혼까지 전 과정을 지원하며,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장애인 부부들의 결혼식 주례도 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돕는 일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 강사로도 활동하며, 사회 곳곳에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장애인 자립 지원 사업을 통해 장애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정말 의미있는 활동들을 많이 하셨네요.)

대학원에서 남편분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네, 대학원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과는 신학대학원 동기였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대학원 시절에 더 가까워졌습니다.) 남편은 기도, 저는 공부, 서로 관심 분야가 달라서, 학창 시절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학원 시절, 우연한 기회에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습니다. 남편은 청소년 사역에 열정적인 분이었는데, 제가 장애를 딛고 살아가는 간증을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남편의 부탁으로 청소년 캠프에 가서 간증을 했는데, 학생들이 제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고, 뜨겁게 반응해주었습니다. 그 후로 남편과 함께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습니다. 남편은 겨울방학 때, 학생들에게 헬라어를 가르쳐주고 싶다며, 헬라어 특강 강사로 저를 추천했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생도 아닌 학생들에게 헬라어를 가르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의 간곡한 부탁으로 헬라어 특강을 시작했습니다. 헬라어 특강을 하면서 MT도 함께 가고,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헬라어가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했네요.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네요.)

남편분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솔직히 남편은 제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외모도, 성격도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비전을 듣는 순간,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구나.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어떤 길이든 기꺼이 따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분과 결혼하면, 인생이 고생길이 훤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 고생길에 제가 함께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고민도 많았지만, 결국 남편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운명적인 만남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 같아요.)

결혼 승낙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고 하던데요. (네, 결혼 승낙받는 과정이 정말 험난했습니다. 특히 시어머님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저희 시댁은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고, 남편은 막내아들이라 시어머님의 기대가 컸습니다. 게다가 시댁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고, 시어머님은 막내아들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장애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시어머님은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게다가 저는 키도 크고, 양쪽 집안 부모님 모두 강남에 산다는 사실은 마음에 들어 하셨지만,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에 완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저를 만나보지도 않으시고, 2년 내내 결혼을 반대하셨습니다. (2년 동안 반대하셨다니, 정말 힘든 시간이었겠네요.)

시어머님의 반대가 2년이나 계속되었다니, 정말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어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처음에는 시어머님의 반대가 너무 속상하고 억울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인가? 왜 나를 이렇게까지 반대하시는 걸까?'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어머님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요. 어느 날 남편이 저에게 "엄마 허락받고 결혼하기 힘들 것 같아. 우리 도망가서 살까?" 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도망가자는 말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도망쳐서 결혼하면,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는 건데, 그렇게 시작하는 결혼이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인 결혼 상담 봉사를 하면서, 부모님 반대로 결혼식에 하객 없이 쓸쓸하게 결혼하는 커플들을 많이 봤습니다. 저 또한 그런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모님 축복 속에서, 당당하게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결혼은 나중에 하자. 어머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말했습니다. "어머님보다 우리가 더 오래 살 테니, 언젠가는 어머님이 허락해주시겠지. 그때까지 연애만 열심히 하자"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현명하시네요. 부모님 허락 없이 시작하는 결혼은 행복하기 힘들죠.)

어머님의 반대가 2년이나 계속되었는데, 결국 결혼에 골인하신 걸 보면, 어머님 마음이 결국에는 풀리셨나 보네요. 어떻게 어머님 마음을 돌리셨나요? (결혼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만났습니다. 어머님이 반대하시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남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 곁을 맴돌며, 24시간 저를 챙겼습니다.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저희 집에서 밥 먹고 잠만 자기 집에 가서 잘 정도였습니다. 시어머님께서 그런 아들의 모습을 2년 동안 지켜보시면서, '아들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드시고, 결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어떤 여자인지 한번 보자" 하시며, 저를 집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시댁 식구들과 첫 만남, 1차, 2차 면접을 치렀습니다. 큰 형님 부부, 작은 형님 부부가 먼저 저를 만나 면접을 봤습니다. '장애인이라고 하는데, 혹시 지적 장애는 아닐까? 모자란 사람은 아닐까?' 저를 꼼꼼히 살피고, 이것저것 질문하며 '면접'을 보셨습니다. 다행히 1, 2차 면접을 무사히 통과하고, 드디어 시어머님과 만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시댁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시어머님께서는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허락해주시는 건가?' 기대하며 방에 들어서는 순간, 시어머님께서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엉엉 우셨습니다. 결혼 허락은 하셨지만, 아들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함, 며느리에 대한 걱정 등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셨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긴장과 설움이 북받쳐, 시어머님과 함께 엉엉 울었습니다. 울음바다가 된 첫 만남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정말 파란만장한 결혼 스토리네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결혼식 분위기는 어땠나요? 시어머님께서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셨을 것 같은데요. (네, 시어머님은 결혼식 때까지도 마음을 풀지 않으셨습니다.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은 하셨지만, 여전히 며느리가 마음에 차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결혼식 사진을 보면, 시부모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 표정이 굳어 있습니다. 반면 친정 엄마는 큰딸 결혼식 6개월 전부터 입이 돌아가는 구안와사 증상을 앓으셨습니다. 신부 엄마 얼굴이 삐뚤어진 채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사진에서 활짝 웃는 사람은 신랑 신부뿐이었습니다. 양가 부모님의 반대와 우려 속에서 결혼했지만, 친구, 동료들의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결혼식 사진은 평생 남는 건데, 시부모님 표정이 굳어 있었다니, 안타깝네요. 지금은 시어머님과 관계가 어떠신가요?)

결혼 후 시어머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되었나요? (결혼 초에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점점 좋아졌습니다. 특히 첫째 딸 하늘이가 태어나면서, 시어머님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시어머님은 손녀딸 하늘이를 끔찍이 예뻐하셨습니다. 손녀딸 덕분에 며느리에 대한 마음의 빗장을 푸시고, 며느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님, 시아버님 모두 저희 교회에 다니시고, 매주 주일마다 양가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결혼 초에는 상상도 못 했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어머님의 반대는 결혼이라는 힘든 과정을 통해, 오히려 저희 가정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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