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영 대표 인생을 바꾼 세 문장과 희망의 노하우 정리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세 문장: 김해영 대표의 인생
## [유쏘뷰티풀🥰] 내 인생을 바꾼 세 문장ㅣ새롭게하소서ㅣ김해영커넥트(주) 김해영 대표: 상세 내용 정리 및 노하우 소개
오늘 우리는 특별한 분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와,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노하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김해영 커넥트(주)의 김해영 대표님인데요, 그녀는 유튜브 채널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여 자신의 인생을 바꾼 세 문장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2만 자 내외의 분량으로, 김해영 대표님의 이야기를 텍스트 내용 상세 정리하고, 그 노하우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단, 텍스트 내용만 정리하며, 내용 추가는 절대 금지됩니다. 영문 텍스트는 없지만, 혹시라도 영어 표현이 있다면 한국어로 재작성하여 원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하겠습니다. 기법이나 방법론은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정량적으로 서술하며, 요약은 최대한 지양하겠습니다. 한글로 작성하며, 3~4 문장마다 줄바꿈을 하고, 불필요한 쉼표나 따옴표는 제거하고, 불릿은 사용하지 않고 서술형 문장과 문단으로 구성합니다. 문장 연결 어구를 풍부하게 사용하여 글을 매끄럽게 연결하고, 직접 설명 방식으로 독자에게 친절하게 다가가겠습니다. 핵심 내용과 중요 노하우는 극도로 자세히 서술하되,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내용은 짧게 정리합니다. "~습니다" 문체를 사용하여 친근하고 자세하며 친절한 느낌을 주고, 서술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중요 키워드나 내용은 볼드체(굵은 글씨)로 강조하되, 전체 텍스트의 15%를 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문장 연결 어구는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특히 "~인데요" 연결 어구를 적절히 활용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겠습니다. 중요 문장이나 단어는 볼드체로 강조하고, 긴 문장은 단락을 나누어 가독성을 높입니다. 문단의 첫 문장은 반드시 볼드체로 표시하여 핵심 내용을 강조하겠습니다. 글의 도입부에는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주제를 소개하고, "블로그 글" 이나 "설명" 같은 단어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마크다운 렌더링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사용에 주의하며,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겠습니다. 수치, 통계, 데이터, 레퍼런스, 논문, 저자, 연도 등의 인용은 풍부하게 활용하되, 제공된 텍스트에 없으므로 추가적인 정보는 생략하고 텍스트에 집중하겠습니다. 볼드체 괄호나 따옴표 오류에 다시 한번 주의하며, 작성 규칙을 철저히 지키겠습니다. 직설적이고 명확한 어조를 사용하여 강한 부사, 명령, 단정, 확신, 강조 등의 표현을 적극 활용하고, 대화체와 문어체를 7:1 비율로 혼용하여 친근함과 전문성을 동시에 유지하겠습니다. 수사적 질문을 빈번하게 사용하여 독자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고, 과장법, 강조, 집중 등의 표현(절대, 반드시, 엄청난)을 사용하여 내용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비유나 예시를 적절히 활용하여 복잡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일상적인 비유나 투자 예시 등을 활용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겠습니다. 전문 용어와 일상 언어를 조화롭게 사용하고, 전문 용어는 쉽게 풀이하여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겠습니다. 글의 내용은 문제 제기 - 해결책 제시 구조, 단계적 설명 방식, 반복 강조, 대조/비교, 구체적 예시, 통계/데이터 인용, 전문 레퍼런스 인용 등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체계적으로 구성하되, 텍스트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하겠습니다. 마크다운 형식을 준수하며, 소제목은 ## 헤더로 표시하고, 볼드체를 사용하여 내용을 강조하며, 헤더 레벨은 ## 로 통일합니다. 서술형 문장과 문단(3~5 문장)으로 글을 작성하고, "~인데요" 연결 어구를 적극 활용하며, 볼드체 강조는 15% 이내로 제한합니다. 유튜브 썸네일 삽입은 텍스트 정리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볼드체 인용구 오류에 유의하며, (ex: 기대효용*) 와 같은 형태는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체 내용을 한 번에 제공하며, 짧은 컨텍스트 분할은 하지 않고, 3~4줄 줄바꿈을 철저히 지키고, 불필요한 쉼표를 제거하며, 반복되는 내용은 통합/정돈하고, 요청된 문체를 엄격히 준수하여 체계적이고 정돈된 글을 완성하겠습니다. 마크다운 헤더는 ## 레벨만 사용하고, 내용 구분을 명확히 하며, 볼드체는 15%를 초과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순수 마크다운 형식으로 작성하며, 'markdown' 단어나 코드 블럭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제, 김해영 대표님의 감동적인 이야기와 삶의 지혜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 절망의 터널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내 인생을 바꾼 세 문장
김해영 대표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세 문장을 소개하며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고난과 역경 속에서 어떻게 희망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특히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가정 폭력, 장애로 인한 차별, 경제적 어려움 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동시에 그녀의 강인한 의지와 긍정적인 태도는 큰 감동과 용기를 선사합니다. 그녀가 제시하는 세 문장은 바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입니다. 이 세 문장은 각각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절망의 터널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김해영 대표의 입을 통해, 그녀의 인생을 바꾼 세 문장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김해영 대표는 키 134cm의 척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우 고통스러웠는데요, 가정 내에서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가정의 모든 불행은 너 때문이야" 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김해영 대표는 가족의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조차 느끼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가족으로부터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멸시와 학대를 받았으니, 어린 김해영 대표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요? 성인이 된 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서 겪는 차별과 편견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은행에서 송금하려 할 때, 은행 직원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하며 송금 거절하는가 하면, 택시나 버스를 타면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장애인은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 해외 송금할 일도 없는 사람" 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녀를 점점 더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자폐 증상과 비슷한 증상" 까지 겪었다고 하니,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해영 대표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사랑스럽고 축복" 이라고 고백하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어린 시절 친구와의 싸움에서 "너는 병신이잖아" 라는 말을 듣고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 손가락질하며 "너는 왜 키가 작아?", "너는 여기 오면 안 돼" 라고 놀림을 받았을 때, "나는 뭔가 잘못됐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5학년 때, 고모님을 통해 자신의 장애가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화가 난 아버지가 자신을 집어 던져 척추 장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물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의 장애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습니다. 김해영 대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를 "방관자" 라고 표현합니다. 어머니의 학대와 저주 속에서 아버지는 늘 방관하며 모든 것을 외면했습니다. 본인의 죄책감 때문에 딸을 외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장애 없이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된 후, 그녀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0대 시절 방직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은 그녀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장의 10대 친구들은 시간도 많고, 건강하고, 돈도 있었지만, 인생과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장애가 나를 힘들게 하지만, 오히려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애가 오히려 자신을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주할 때도 "엄마, 괜찮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대.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대" 라고 말하며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10대 시절, 하나님의 사랑을 강렬하게 경험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눈물과 고통, 아픔이 지속적으로 있는 곳이지만,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는 천국 소망은 그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그녀에게 천국은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곳", "사람 대접받는 곳" 이라는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천국 소망은 장애라는 정체성과 장애인이라는 낙인을 극복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김해영 대표는 어머니로부터 심한 폭언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놈의 기지배", "나가 죽어버려" 등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아픈 딸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더 심하게 학대했습니다. 왜 어머니는 딸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했을까요?
김해영 대표는 어머니의 불우했던 성장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무학에, 42년생으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혼인하고, 스무 살에 김해영 대표를 낳았습니다. 친정에 가고 싶어도 할아버지의 반대로 갈 수 없었고, 시아버지의 학대와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힘겨운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친정에 못 가는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며 근심 걱정을 달랬습니다. 어느 날 새벽, 친정에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할아버지에게 알리려 했지만, 오히려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고, 일상 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아버지는 세 남매를 셋째 큰아버지 집에 맡기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몇 달 후, 김해영 대표도 서울로 가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이미 재혼한 상태였습니다. 새엄마는 그녀를 "애가 둘이라더니, 얘는 누구야?" 라며 냉대했고, 새엄마 밑에서 온갖 구박과 폭행을 당했습니다. 1년도 채 안 되어 친척들과 함께 어머니가 찾아오면서 새엄마와 헤어지고, 다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가정은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고, 아버지는 무관심했으며, 가정 폭력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김해영 대표는 집안 살림과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어머니에게 맞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도망쳐 옥상, 계단, 텅 빈 집 등을 전전하며 노숙 생활을 했습니다. "왜 나는 저 따뜻한 식탁에 있지 못하고, 왜 여기서 이렇게 춥게 지내야 하는 걸까?" 라는 서러움에 눈물짓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폭력은 자신에게만 향했습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어머니는 아들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했고, 오히려 딸을 더욱 핍박했습니다. 아버지는 방관자였고, 동생들도 누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김해영 대표는 어머니의 폭력과 아버지의 방임 속에서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습니다. 아버지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어머니의 폭력과 폭언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네가 아버지 잡아먹었어!" 라며 칼을 들고 위협하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쳐, 낯선 동네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새로 이사 간 집의 안주인 도움으로 다락방에 숨어 지낼 수 있었고, 안주인 소개로 한의원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의원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10개월 동안 그 집에서 지내면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그녀는 한의원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신문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습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편물 기술 훈련원에 지원하여 편물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국민학교 졸업", "장애", "15세 소녀" 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기술 훈련원에 합격한 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훈련원에서 만난 독실한 기독교인 선생님은 그녀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교회에 다니도록 권유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가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선생님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여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녀에게 "헤어와,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 삼아 살아야 한다" 고 따뜻하게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선생님의 진심에 감동받아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인생을 바꾼 첫 번째 문장은 바로 직업 훈련원 선생님을 통해 듣게 된 따뜻한 격려의 말입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왔던 그녀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은 마음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적시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이 문장은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업 훈련원을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한 후, 김해영 대표는 교회에 더욱 헌신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교회로 달려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게 했습니다. 교회 사택에서 살면서 목사님, 사모님으로부터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사님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은 그녀에게 큰 감동과 깊은 신뢰를 심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은 그녀의 생일을 잊지 않고 생일 잔치를 성대하게 열어주셨습니다. 30대 후반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를 위해 생일 잔치를 열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님 부부의 사랑은 계산적이거나 조건적인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그녀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공장이 부도나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 사모님은 그녀를 위로하며 기도해주었습니다. 사모님은 "하나님 아버지, 이 자매가 손으로 만드는 물건이 세계 최고가 되게 해주시고, 이 기술로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써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해주었습니다. 당시 보세 옷을 만들던 그녀에게 "세계 최고", "다른 사람을 돕는 기술", "하나님의 일꾼" 이라는 사모님의 기도는 황당하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사모님의 기도는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모님은 그녀에게 성경 구절 "여호수아 1장 5절~9절" 말씀을 선물하며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는 그녀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훗날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사모님의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예언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기능 대회에 참가하여 국제 기능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3개나 획득하며 "세계 최고"의 기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기능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4살에 가출했던 집으로 18살에 돌아와 소녀 가장으로서 가족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6년 동안 동생들을 돌보며 헌신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정 환경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욱 헌신했습니다. 기능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후, 방송에 출연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아픔이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가족에 대한 아픔입니다.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는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후, 4년이 지나서 남동생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남동생은 교회 청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 간 집이 교회 앞이었는데, 교회 청년들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남동생은 그녀를 보자마자 "누나 왔네!" 라며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어머니 역시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그녀에게 폭언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가족과의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남아있었습니다.
20대 시절, 동생들이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습니다.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정작 자신은 교통비조차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너무 힘들고 지쳐서 교회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짐을 지우시나요? 저는 중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는데, 왜 동생들을 위해 이렇게 희생해야 하나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네 동생들을 그렇게 챙길 수 있는 너를 내가 택했다" 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깨닫고, 동생들을 향한 기대와 원망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프리카 선교를 준비하던 어느 추석날, 오랜만에 집에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방에 숨어 계셨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방에 남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음식을 하나 가지고 와서 옆에 놓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옆에 놓아주셨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 어머니는 또 다시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옆에 놓아주셨습니다. 그때 그녀는 문득 어머니의 모습에서 "친엄마" 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음식을 건네는 어머니의 행동 속에서 따뜻한 사랑과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4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친엄마" 로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그녀의 인생을 바꾼 두 번째 문장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속으로 외쳤던 다짐입니다. 자신의 장애와 불우한 환경 때문에 늘 부족하다고 느껴왔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문장은 그녀에게 진정한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긍정적이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화가 날 때마다 "저 놈 갖다 버려!" 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젊은 어머니는 시아버지의 말에 겁이 나서 딸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폭력은 사랑의 잘못된 표현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어머니의 폭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원망하며 살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김해영 대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고,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받아보기도 했을까요? 18살에 집으로 돌아온 후, 동생들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 오빠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사랑에도 큰 벽이 되었습니다. 남자 친구의 작은 아버지는 "저런 장애인을 왜 만나냐?" 며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사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나는 여성으로서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라는 자괴감에 휩싸였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그녀는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선교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낯선 땅으로 떠난 것입니다. 1989년 말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원인 모를 피로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중 성경을 통독하다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라는 시편 119편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적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아프리카 선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양재 기술 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 문화도 언어도 낯선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꺼이 떠났습니다. 5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듯한 낯선 땅 보츠와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신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6개월쯤 지나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 일을 나에게 맡기시기 위해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게 하셨구나!" 보츠와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는 늘 경쟁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보츠와나에서는 경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은 그녀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자신의 작은 키와 장애가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함으로 인정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보츠와나 학생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았습니다. 걷기 힘든 자신을 부축해주고, 짐을 들어주고, 칠판에 글을 써주는 학생들의 배려 속에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힘들고 배고파도, 나를 사랑해주고 예쁘다고 해주는 아이들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내가 있을 곳"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츠와나에서 14년 동안 기술 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양성했습니다. 기술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보츠와나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고, 국민 훈장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그녀의 인생을 바꾼 세 번째 문장은 바로 보츠와나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들려주신 음성입니다. 학교가 망하고 혼자 남겨졌을 때, 절망감에 휩싸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라며 그녀를 붙잡으셨습니다. 이 음성을 통해 그녀는 선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보츠와나에서 계속해서 선교 활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러 왔는데, 하나님의 일이 힘들다고 도망갈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으로 하겠다." 선교적 소명을 새롭게 다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사는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예쁘다" 라는 학생들의 말과 "너만 있으면 돼" 라는 격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고,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그녀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주었습니다. 보츠와나에서의 14년은 그녀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쁨과 보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보츠와나에서 기술 학교를 운영하면서 대학교를 졸업한 전문 인력을 기다렸습니다. 학교가 점점 성장하면서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남동생이 단기 선교로 보츠와나에 왔다가 자매 선교사와 결혼하여 함께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남동생 부부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학교를 남동생 부부에게 맡기고, 미국 유학을 떠나 교육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유학 생활 두 달 만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올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사고 당시 갓 돌 지난 조카는 죽고, 조카 조셉만 살아남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큰 슬픔과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미국에서 보츠와나까지 3일이나 걸려 돌아왔지만, 올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보츠와나 공동묘지에 올케와 조카를 함께 묻었습니다. 슬픔을 가눌 길 없었지만, 살아남은 조카 조셉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남동생과 함께 조카를 키우기로 결심하고, 다시 힘을 냈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던 남동생은 이제 든든한 동역자이자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조카 조셉은 보츠와나에서 태어나 한국어와 보츠와나 현지어를 함께 사용하며 밝게 자랐습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내년 2월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케냐 선교지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앞으로의 기도 제목은 케냐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하고, 지치지 않도록 체력과 지력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소원은 조카 진수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청년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제자들이 자신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79세로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2012년 국민 훈장을 수상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던 감격스러운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청와대 방문 이후 어머니의 자존감과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고, 어린 시절 딸에게 모질게 대했던 과거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통해 "언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는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김해영 대표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장애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눈에 띄는 신체적 장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간다" 며, 자신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 자" 라는 말처럼, 김해영 대표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과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앞으로도 김해영 대표의 삶과 사역을 응원하며,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작은 거인" 으로 쓰임 받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귀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김해영 대표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삶의 소중한 교훈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우리에게 전해준 세 문장,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는 우리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김해영 대표와 같은 "작은 거인" 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며,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