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중학교 자퇴, 하나님을 위한 신앙 결단과 성장 스토리
14세, 하나님을 위해 학교를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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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자퇴?!: 하나님을 지키기 위한 14살의 결단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주영훈입니다. 오늘도 귀한 시간을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옆에는 정범균 씨도 함께 자리했는데요, 두 분은 혹시 주변에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상황을 마주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 건가요? 저는 솔직히 속으로는 ‘정말 불쌍한 사람이구나, 안타깝다’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하지만 막상 대놓고 맞서 싸울 용기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오늘 새롭게 하소서에 모신 특별한 분은, 바로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외치지 못했던 죄책감에 괴로워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분은 결국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세상에 통쾌하게 보여주셨다고 하는데요, 과연 어떤 분일까요? 오늘의 주인공, 김성경 전도사님을 모시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전도사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김성경 전도사입니다.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사실 작가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새롭게 하소서 출연은 제 인생의 버킷리스트였습니다. 올해 1월 1일부터 새벽기도 때마다 간절히 기도했던 제목 중 첫 번째가 바로 “올해는 꼭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야기를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였습니다. 이렇게 꿈에 그리던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전도사님께서는 ‘원디사이플’ 사역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아갈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힘쓰고 계시고, 5분 설교와 교회 친구들을 모으는 다음 세대 메신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원래 학교 기도 모임을 위해 짧게 제작했던 5분 설교 영상이 주 사역이 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미디어라는 바다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짧고 흥미로우면서도 진리가 담긴 영상들을 제작하여 말씀과 함께 그들의 바닷속으로 던져주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군요. 특히 요즘 세대에 꼭 필요한 사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연세 드신 교회 지도자분들께서는 꼭 주목해야 할 부분인데요, 다음 세대는 긴 영상이나 설교를 잘 보지 않습니다. 틱톡이나 릴스처럼 짧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하고, 음악도 2절까지 듣는 것을 힘들어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 맞춰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입니다.
오늘은 전도사님께서 다음 세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까지, 어떤 하나님의 힘이 작용했는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전도사님의 이력을 살펴보니, 중학교 입학 직후 자퇴를 하셨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는데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 3구 살구쟁이마을, 한마디로 시골 촌놈 출신입니다. 마을회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화투로 수학을 배우며 자랐죠. 촌놈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바로 ‘내가 다닐 중학교는 도시에 있다’라는 꿈이었죠. 도시 중학교에 가면 학교 끝나고 떡볶이집도 있고, 편의점도 갈 수 있다는 로망이 있었어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중학교에 가면 정말 멋지게 학교생활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라고 기도했어요.
드디어 입학식 날, 설레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입학식 날 담임 선생님으로 오신 과학 선생님께서 첫 마디가 충격적이었습니다. “내 반에서 교회 다니는 놈들 다 일어나 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담대함이 솟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첫날부터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믿음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는구나!’ 라는 생각에, 반에서 교회 다니는 친구 5명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함께 일어나 믿음을 보여주자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만 일어나 있었고 나머지 4명은 앉아있었습니다.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가리키며 “저런 놈들이 머리에 든 게 없으니까 허무한 미신이나 의지하면서 공부하는 거다. 신이 흙에다가 공기를 집어넣어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허무맹랑한 미신이나 의지하는 꼴통이 내 반에 또 있다면 저 놈이랑 같이 나가도 좋다!” 라고 말씀하시며 창조론부터 진화론까지, 약 15분에서 20분 동안 하나님에 대한 조롱을 쏟아내셨습니다. 꿈에 그리던 중학교 입학식은 제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혼났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주님을 위해 단 한마디도 변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 앞에서 이렇게 무력한 것인가?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외치지만, 세상의 강력한 조롱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 신앙인의 현실인가? 내가 사랑한다고 했던 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니…’ 이러한 죄책감이 14살 어린 제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논바닥에 내팽개치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새겨진 날이 제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소명이 시작된 날이 되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에 주저앉아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교회 다니는 사람은 세상에 나가면 아무 말도 못 해요! 교회 안에서나 잘난 척하지, 세상에서 조금만 강하게 나오면 찍소리도 못 해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인가요? 하나님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너무 비참합니다.”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는 와중에, 문득 이런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비참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중고등학교 6년을 오직 하나님만 공부하며 살면 안 될까요? 세상 그 누가 하나님을 조롱해도, 제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도록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때 제 소명이 결정되었고, 자퇴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4살 어린 나이에, 논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소명을 외친 것입니다.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당연히 난리가 나셨죠. 입학식 날 신나서 자전거 타고 갔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자퇴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하지만 부모님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자퇴보다 그 다음에 제가 했던 말, “엄마, 아빠, 저 주의 종이 되고 싶어요” 였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셨지만, 오히려 더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너무 이른 결정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저는 부모님이 제가 힘들 길을 갈까 봐 걱정하시는 줄 알았는데, 반대 이유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 아들을 내가 알지만, 넌 너무 이기적이어서 안 된다. 너밖에 모르는 놈이 주의 종이 되면 큰일 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주의 종이 되고 싶었고, 부모님께 진지하게 설득했습니다. 5일 동안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부모님께서는 “안 되면 돌아오는 걸로 하고, 일단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라며 자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자퇴를 실행했습니다. 5일 후 금요일, 자퇴서를 들고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결전의 날이었죠.
자퇴서를 들고 교무실에 찾아갔는데, 선생님께서는 제 자퇴서를 보시자마자 깊은 한숨을 쉬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아, 네가 사랑한다는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자퇴시키는 하나님이니? 제발 적당히 믿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은 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선생님, 제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라고 당차게 외치고 교무실을 나왔습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휘파람을 불며 교무실을 나서는 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자퇴 후,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도 잠시,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제가 믿음을 선포한 날부터 무책임하게 사라지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느껴지지 않았고, 채워지는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학원 다닐 형편도 안 되었기에, 시골 서점에 가서 EBS 교재와 중고등학교 참고서를 잔뜩 사서 혼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조롱이었습니다.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잃은 저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습니다. “멀쩡한 놈이 왜 자퇴를 하냐? 부모가 교육을 잘못 시킨다” 라는 비난과 조롱은 저뿐만 아니라 부모님께까지 향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저는, 부모님과 함께 매일 새벽기도를 하며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텅 빈 강당에 홀로 무릎 꿇고 “하나님, 죄송해요. 저 학교 못 다닐 것 같아요. 저는 꼴통인가 봐요. 이 길은 제가 갈 길이 아닌 것 같아요. 그날 상처가 너무 커서 소명을 잘못 들었나 봐요. 제 상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나 봐요… 너무 무서워요…” 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눈물로 기도하는 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늘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네가 내 길을 지켜주었기에, 내가 너의 길을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연약한 너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 36절 말씀을 통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통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힘든 시간을 버텨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버티다 보니, 어느덧 15살 겨울이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지금의 경인여대의 최연소 신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입시에 지쳐 힘들어할 나이에 대학생이 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대학교 합격증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담임 선생님이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인데요, 선생님께 복수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전혀 복수심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선생님께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중학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야, 나 오늘 학교 간다! 대학교 캠퍼스 구경시켜줄게!” 라고 말했습니다. 중학생들의 소문은 정말 빠르죠. 금세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졌는지,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교문 앞에 누가 서 계셨는데, 자세히 보니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께서 저를 보시자마자 달려오셔서 제 손을 꽉 잡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아, 네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놈이었으면 선생님한테 말을 했어야지! 선생님이 널 더 잘 키워줬을 텐데!” 라고 말씀하시며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포옹에, 저는 그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복수심이나 우월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께 안기는 순간, 자퇴서를 냈던 날부터 제게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다시 느껴졌습니다. 마치 제 맞은편에 서서 빙긋 웃으시며 “거봐, 결국 내가 널 책임지잖아. 내가 널 헛되이 두지 않아”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따뜻한 음성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 저를 임신했을 때부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가난한 목회자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어머니께, 하나님께서는 세 번이나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진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어릴 적부터 제게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져주신대!” 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그날, 선생님의 품에 안겨 비로소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5년이나 월반하여 대학생이 되셨는데, 당시 대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분명 형, 누나들에게 예쁨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딜 가나 ‘어린이, 어린이’ 하면서 귀여워해 주셨죠. 하지만 첫 학기 중간고사 즈음, 기숙사 룸메이트 형이 진지하게 제 어깨를 잡고 “야, 너, 학교 생활 좀 똑바로 해!” 라고 말했습니다. “형, 왜 그러세요?” 라고 물으니, “너, 지금 학교에서 엄청 욕먹고 있어. 사람들이 널 엄청 싫어해. 개념 좀 챙겨. 조심해서 행동해” 라고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이 저를 욕한다는 사실보다, 그 말을 전해준 형이 평소에 저를 가장 챙겨주던 형이었기에 충격이 컸습니다. 15살 어린 마음에, 사회 경험도 부족했던 저는 큰 혼란을 느꼈습니다. 신학대학교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서로 아끼고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내가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건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건가?’ 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화장실에서 도시락 먹는 장면을 제가 실제로 연출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몰래 화장실에 숨어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저는,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화장실에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나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것 같아. 너무 힘들어. 학교 그만둘까? 4년 늦게, 19살에 친구들과 함께 대학에 다시 와도 괜찮지 않을까? 아직 4년이나 남았잖아… 너무 힘들어, 엄마…” 라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제 말을 듣자마자 “학교 그만둔다고? 때려치워!”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엄마, 위로는 못 해줄망정…” 이라고 서운해하는 제게, 어머니께서는 “성경아, 잘 생각해 봐. 네가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선택한 길은, 앞으로 졸업하고 만나게 될 영혼들은 지금 네 심장을 쑤시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힘들게 할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야. 신학대학교에서도 못 견딜 거면, 네 길은 주의 종의 길이 아닌 거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아, 엄마, 지금 당장 학교 그만둘게!” 라고 말하려던 저는, 어머니의 단호한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원래 이런 험난한 길이었지…’ 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이를 악물고 “아니야, 엄마, 안 때려쳐!” 라고 외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어머니의 현명하신 조언 덕분에 대학 생활을 잘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셨네요. 미국 유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타지에서의 유학 생활은 고생길의 연속이라고 하던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경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 유학 시절, 제 인생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는 유학을 마무리할 즈음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교회 친구 자매가, 청년이 되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 시절부터 열심히 교회를 섬겼던 친구였기에 걱정되는 마음에 닭갈비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닭갈비를 먹던 도중, 갑자기 친구가 펑펑 울면서 “저는 하나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매주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싶었지만, 교회 문턱을 넘기가 너무 무서웠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고뭉치들은 절대 사랑해주지 않아요. 교회는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죄지은 아이들은 절대 사랑해주지 않아요. 제가 교회를 떠나보니 알겠어요. 교회는 교회 벽 밖으로 나온 아이들을 절대 찾으러 나와주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교회가 너무 무서워요…” 친구는 교회 안에서 상처받았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고, 그 죄가 교회에 드러났을 때 따가운 시선과 비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상처 때문에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저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니야, 교회도 분명히 널 찾고 싶을 거야…” 라고 위로하며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미국 유학을 결심했던 이유는 교수라는 꿈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유학 생활은 재정적으로 너무 힘들었기에, ‘이 힘든 유학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꼭 교수가 되어야 한다’ 라는 생각으로 박사 학위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 지원서를 작성해야 하는 시점에, 한국에서 만났던 친구의 눈물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이건 아닌데… 뭔가 잘못됐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곧장 기숙사 기도실로 달려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 돼요! 저는 교수도 되어야 하고, 제가 힘들었던 것에 대한 보상도 받아야 해요! 저는 박사 학위도 딸 거고, 교수도 될 거예요! 힘들지 않게 하나님 일을 하고 싶어요! 제게 이런 마음 주시면 안 돼요! 한국 청소년 사역, 청년 사역 하는 사람들은 제가 늘 무시하고 놀렸어요. 제 길이 아니에요! 제발 이 마음 없애주세요! 만약 계속 이러시면, 저 하나님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진짜예요!” 하나님께 의미 없는 협박을 했습니다. ‘하나님, 계속 이러시면 저 진짜 하나님 일 안 해요!’ 라고 소리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게 분명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야, 내가 너보다 잘해. 내가 너보다 너를 훨씬 더 잘 알아. 그러니까 너는 가야 해.” 순간, 저는 제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해드리고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너보다 모든 것을 잘 알고, 너를 가장 잘 알아. 내가 너를 택했고, 너를 보내는 것이다. 너는 가서 그 아이들을 붙잡아줘야 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은 예레미야 5장 1절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거리, 번화가, 가장 세상 문화로 더러워진 광장에서 진리를 구하는 한 영혼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눈물은 교회 벽 안에도 있겠지만, 교회 벽 밖에도 있을 수 있겠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벽 안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 벽 밖으로 흘러나가야 하는 분이시구나. 교회 안을 지키는 사명이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교회 벽 밖을 지키는 사명도 있는 것이구나.’ 진리를 구하는 한 영혼을 찾아달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에 응답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원디사이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빌리는 대신 거리, 대교 위, 카페, 라이브 클럽 공연장 등 다양한 장소를 빌려 5년째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수라는 꿈을 포기하고, 한 영혼을 구원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이제 막 교수의 문턱에 다다랐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비전을 품고 시작한 거리 사역은 어떠셨나요? 한국 땅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았을 텐데, 처음에는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셨나요? 처음 사역을 시작한 곳은 제 고향인 청주였습니다. 사실 유학파 전도사로서, 일반적인 길을 택했다면 서울에 있는 대형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면서 ‘내가 가고 싶은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가장 필요로 하시는 도시에 가자’ 라고 결심했습니다. 서울에는 이미 훌륭한 사역자들이 많았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시는 도시는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문득 제 고향인 청주에 하나님 문화가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청주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무작정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교회 협조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사역 초창기에는 청주대교 위에서 버스킹 예배를 드렸습니다. 청주대교는 청주 본정통 옆에 있는 가장 큰 다리입니다. 통기타와 마이크, 버스킹 스피커, 성경책 하나 들고 청주대교로 향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신기한 듯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웃기도 했습니다. 잊지 못할 기억은, 청주대교에 유독 노숙자분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이 제 버스킹 예배에 큰 관심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노숙자분들이 다가와 마이크를 빼앗아 “왕년에 나도 교회 좀 다녔어!” 라고 외치며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고, 시조를 읊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자유롭게 예배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청주대교 버스킹 예배를 통해 몇몇 청년들을 만났고, 그 청년들이 현재 5년째 저와 함께 원디사이플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한 맞춤형 설교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설교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떠셨나요? 목회자들은 보통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예수님처럼 단 한 영혼을 위해 설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설교한다는 기획을 듣고 흔쾌히 좋다고 하셨지만, 막상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첫 번째 대상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설교를 꼽으라면, 단연 아버지 앞에서 했던 설교입니다. 한 달 내내 설교를 준비하면서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할 정도로 긴장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아버지께 은혜로운 설교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 선배 목사이신 아버지를 감동시킬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짓눌렸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준비해도 방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 영혼을 위한 설교는, 웅장하고 화려한 설교가 아니라, 그 영혼의 삶을 담아내는 설교여야 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버지의 삶의 발자취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버지를 압도하는 훌륭한 설교를 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삶, 아버지의 등을 담아내는 설교를 해야겠다’ 라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치는 아버지 다윗의 등을 묵상하며, 아버지의 등을 설교에 담아내기로 했습니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때, 다윗의 종중 한 명이 언약궤를 들고 다윗을 따라왔습니다. 언약궤는 당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자, 하나님 나라의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도망치는 다윗에게 언약궤가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여전히 다윗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버림받았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언약궤를 붙잡는다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있어야 할 언약궤가,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저는 다윗의 결단을 묵상하며, ‘아버지가 제게 보여주신 등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헌신의 등이셨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등은, 늘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이 교회에서 살았던 시절부터, 아버지의 등은 늘 작은 예배당 강대상 위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씨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명예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맡기신 오늘의 삶과 교회를 사랑하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등.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떤 등보다 아름다운 아버지의 등을 닮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설교를 들으시고 펑펑 우시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아버지와 단둘이 차에 남겨졌을 때는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청주까지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 어찌나 어색했던지… 아버지께 제발 좀 주무시라고 부탁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께서는 아들의 설교를 어떻게 들으셨나요? 미국 유학 시절 친구분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교회 벽이 높고, 교회는 교회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잘 돌아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마치 제 이야기 같았습니다. 저 또한 교회 안과 밖을 나누고, 교회 안에서만 머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형적인 교회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목회자, 전도사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는 데 집중했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화려함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주님을 만나고, 세상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데 힘써야 할 때입니다. 전도사님처럼, 다음 세대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 나누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역자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저희 방송 조명도 몇 개 빼고, 얼굴도 잘 안 나오지만… (웃음) 저희 아이들이 어릴 때 채소를 잘 안 먹었는데, 장인어른께서 억지로 채소를 먹이려고 하셨습니다. “이게 얼마나 몸에 좋은 건데! 몸에 좋은 거니까 먹어!” 라고 아무리 강요해도, 아이들은 채소를 먹지 않았습니다. 건강에 좋다는 말은 아이들에게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교회는 얼마나 은혜로운 곳인데!” 라고 강요하며 억지로 은혜를 주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채소를 잘게 썰어 주먹밥에 넣어주면 아이들은 맛있게 먹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맞는 양식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도사님께서 하고 계시는 미디어 사역, 5분 설교, 다양한 방식의 예배 시도는, 다음 세대를 위한 효과적인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를 향한 염려와 걱정이 많지만, 전도사님처럼 다음 세대의 눈높이에 맞춰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함께 울고 기도하는 사역자들이 있기에, 한국 교회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전도사님의 귀한 사역을 응원하며, 앞으로 더욱 훌륭한 사역자로 성장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