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유가족의 슬픔과 회복, 편견 극복 이야기 및 위로 방법
자살 유가족의 슬픔, 40년 침묵을 깨고 희망을 말하다
만약 자살 유가족을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주세요!
우리 사회에서 자살 유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변의 시선과 편견 때문에 자신의 아픔을 숨기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오늘 우리는 어머니에 이어 오빠까지 자살로 떠나보내고 수십 년간 마음속 깊이 슬픔을 묻어둔 채 살아오신 박경임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자살 유가족을 어떻게 이해하고 위로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박경임 선교사님은 슬픔은 발효 중이라는 책의 저자이시자, 현재 필리핀 선교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현재 필리핀 북부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박경임 선교사님은, 2007년 필리핀에 건너가 나사렛 대학교에서 사역하시다 2015년부터 도시 빈민 마을인 샤멀로그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2015년, 처음 샤멀로그에 발을 디뎠을 때, 마을은 온통 깜깜하고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는 황량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공동묘지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도박을 하고, 아이들은 공동묘지에서 뛰어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마을의 이러한 어두운 현실을 마주한 박 선교사님은, 곧장 이장님과 마을 임원들과 함께 마을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를 통해 쓰레기통을 마을 곳곳에 설치하고, 공동묘지에는 가로등을 세우는 등 마을 환경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 현재 샤멀로그는 과거의 어두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밝고 희망찬 마을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아름다운 변화를 이루어내기까지, 박 선교사님의 헌신과 노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을 텐데요, 과연 그 과정은 어떠했을까요?
선교사님께서는 2007년, 처음 필리핀 선교를 시작했을 때, 풍토병으로 심한 고열에 시달리셨다고 합니다. 당시, 고열과 함께 오른쪽 귀에 극심한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에서는 고열이 떨어지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열이 잦아들면서 통증은 사라졌지만, 대신 오른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청력을 잃었다는 사실은, 상담 사역을 꿈꾸던 박 선교사님께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절망도 잠시, 박 선교사님은 오히려 한쪽 귀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들을 수 있는 상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왼쪽 귀로만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오히려 말의 소리뿐 아니라 마음의 소리까지 더 깊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박경임 선교사님과의 이야기에서는, 선교 이야기뿐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어떻게 슬픔을 극복하고 회복을 얻으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눌 예정입니다. 먼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박 선교사님의 어머니는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실 정도로 신앙심이 깊으셨다고 합니다. 반면,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낫을 들고 이웃들을 위협하는 등,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셨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 기독교 부흥의 시기에, 어머니의 끊임없는 기도와 헌신으로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게 되셨고, 이후 새벽기도를 나가는 등 신앙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변화에 동네 사람들까지 감동하여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마을에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신앙심 깊고 헌신적이셨던 어머니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박경임 선교사님이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에, 집안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훗날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께서 극심한 고부 갈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친정 식구들과는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아, 힘든 시간을 의지할 곳 없이 홀로 감당해야 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박 선교사님과 단둘이 식사하시던 중 갑자기 쓰러지셨고, 안타깝게도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 선교사님은, 어머니가 중증 우울증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으며, 어린 딸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셨던 것 같다고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박 선교사님은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져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심도 깊고, 마을에 부흥까지 일으킬 정도로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결국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스스로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당시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어린 딸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심각한 중증 우울증 상태였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어머니의 고통스러웠을 심정을 짐작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동네 사람들은 어린 박 선교사님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심한 욕설과 비난을 쏟아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 선교사님은 성장 후, 어머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이해하게 되면서, 오히려 어머니를 향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쏟아졌던 동네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 박 선교사님은, 자살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이해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라고 지적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박 선교사님에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유품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사진조차 남기지 않으셨다고 하는데요, 어린 박 선교사님은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어머니를 물에 빠뜨렸다"는 말을 했을 때, 어린 박 선교사님은 왜 어머니를 물에 빠뜨렸을까? 라는 의문을 품고, 어머니가 얼마나 추울까 걱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어머니의 옷을 태우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얼굴과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너무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기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박 선교사님은, 이후 갑자기 철이 들어버린 아이가 되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과거에는 막내로서 온갖 권력을 누리며 자랐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2학년 때 새어머니가 오시기 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고 하는데요, 새어머니가 온 이후에는 집안 분위기가 더욱 차갑게 변했다고 합니다. 특히, 집안에서 엄마라는 단어는 금기어가 되어, 그 누구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할머니는 어머니를 몹시 미워하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린 박 선교사님은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가 집안 분위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마저 다른 지방으로 일하러 가시고, 새어머니와 함께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박 선교사님은 좁은 동네에서 어른들의 무심한 말들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자살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오히려 함부로 말하고 비난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특히, 어린 아이에게 쏟아지는 어른들의 무심한 말들은, 상상 이상으로 큰 상처가 되었을 텐데요, 당시 동네 사람들은 박 선교사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을까요? 박 선교사님은, "막내가 엄마 닮았네" 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고 합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어머니를 닮았을 수도 있지만, "사남매 중에서 엄마 닮은 아이는 너밖에 없다" 라는 말은, 어린 박 선교사님에게 "너도 엄마처럼 죽을 수도 있다" 라는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상처 주는 말들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당시 박 선교사님은 이곳은 더 이상 살 곳이 못 된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생전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고, 박 선교사님 또한 어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간다" 라는 설교를 듣고 큰 혼란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머니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과연 천국은 누가 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더 이상 교회를 안전한 곳으로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초등학교 2학년 때, 박 선교사님 가족은 동네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던 박 선교사님, 과연 그 힘든 시간 속에서, 위로가 되어준 사람은 없었을까요?
초등학교 졸업 후, 박 선교사님은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새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더 이상 가정에서 보호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새어머니가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박 선교사님은, 새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과,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하는데요, 중학교 입학 후, 박 선교사님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김자옥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김자옥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을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김 선생님과의 만남은, 박 선교사님에게 처음으로 좋은 어른과의 만남이었다고 합니다.
중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던 박 선교사님에게, 김자옥 선생님은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김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을 따로 불러, 교사 발령 후 3년간 모아온 결혼 자금 통장을 건네며, 이 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였던 박 선교사님은, 선생님의 결혼 자금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비록 통장을 받지는 않았지만, 김 선생님의 사랑은 박 선교사님에게 큰 힘이 되었고, 이후에도 김 선생님과의 인연은 3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김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이 선교사로 파송될 때, 첫 개인 후원자가 되어주셨고,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목욕탕에 데려가 등을 밀어주시며 격려해주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박 선교사님이 작년에 출간한 책 슬픔은 발효 중을 가장 많이 사주신 분도 김 선생님이라고 하는데요, 김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께 단순한 선생님 이상의 존재, 친정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김자옥 선생님과의 만남 외에도, 인생에서 좋은 만남들을 많이 경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김자옥 선생님과의 만남은 특별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15살 어린 나이에 만나, 50세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박 선교사님의 삶의 궤적을 함께 걸어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 선교사님은 학창 시절, 소위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똘끼 넘치는 학생이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는데요, 하지만, 김자옥 선생님은 그런 박 선교사님을 꾸준히 사랑으로 격려하고 지지해주셨습니다. 김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의 가정 환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셨던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작년 필리핀 방문 당시, 김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께 "경인아, 넌 15살 때부터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 네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김 선생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박 선교사님의 아픔을 알고 있었고,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셨던 것입니다. 김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에게 어린 시절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였으며, 진정한 위로와 지지가 되어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박 선교사님은 일기 쓰기를 통해 힘든 마음을 달랬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감정을 배출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기장이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셈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동시 대회에 참가해보라는 권유에, 처음으로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늘 마음속에 맴돌던 "바닷속에 빠진 엄마는 얼마나 추울까?" 라는 생각으로 동시를 지었지만, 선생님은 박 선교사님의 눈앞에서 동시를 찢어버리셨다고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도 말라는 주변의 억압 속에서, 박 선교사님은 일기장에 슬픔과 아픔을 쏟아내며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의지하며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특히, "주는 나의 슬픔을 아십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라는 시편 56편 8절 말씀을 묵상하며, 눈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눈물로 다 쓸 정도로, 슬픔과 눈물을 쏟아내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나갔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박 선교사님에게, 또 한 번의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친오빠의 죽음입니다. 박 선교사님의 오빠는 장손이자 외아들이었기에, 집안에서 어른과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집안의 모든 어려움을 짊어지고 있었을 오빠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더욱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과 갑작스럽게 이별하면서, 오빠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까지 겪게 되면서, 오빠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후, 오빠는 방에 틀어박혀 칩거 생활을 시작했고, 먹지도, 자지도, 밖에도 나가지 않은 채, 고립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큰언니는 오빠를 시골로 데려갔지만, 결국 오빠는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에 이어 오빠까지 자살로 잃은 박 선교사님 가족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특히, 오빠의 죽음은 박 선교사님에게 큰 죄책감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새어머니가 왔을 당시, 박 선교사님은 새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빠의 험담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이었지만, 그날 저녁, 새어머니가 칼을 들고 오빠를 위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후, 오빠에게 죄책감을 느껴, 오랫동안 오빠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빠가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박 선교사님은 밤잠을 설쳐가며 오빠를 위해 기도했고, 추석 때 시골에 내려가 오빠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오빠는 오히려 박 선교사님을 위로하며, "나는 너를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빠의 따뜻한 말에 감동한 박 선교사님은, 이제 오빠와 다시 잘 지낼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며칠 후, 오빠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박 선교사님은 오빠의 유서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빠와 화해했고, 잘 지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에, 굳이 유서 이야기를 꺼내 아버지 마음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유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오빠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면서, "내가 그때 유서를 봤다고 말했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까?" 라는 죄책감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유서를 먼저 작성해놓고, 며칠 후 실행에 옮긴 오빠의 선택은, 박 선교사님에게 큰 후회와 자책감을 남겼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오빠가 유서를 작성한 시점이 꽤 오래전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요, 유서가 장판 밑에서 곰팡이가 핀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빠는 박 선교사님과 유서를 발견하기 며칠 전에도 대화를 나누는 등,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기에, 박 선교사님은 오빠의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빠는 오랜 시간 동안 죽음을 생각하며 괴로워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그의 자살 충동을 더욱 부추기는 도화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살 유가족들은 사회적 편견과 냉대 속에서 고립되기 쉽습니다. 특히, 박 선교사님의 오빠는 남자였기에, 더욱 속마음을 털어놓기 어려웠을 것이고, 사회적 시선과 비난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까지 겹치면서, 오빠는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박 선교사님은 오빠의 죽음을 통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훨씬 더 깊은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살 유가족들은 일반인들보다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회적 구조 자체가 이들이 회복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조차도 자살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자살의 영, 저주의 영과 같은 말들은 자살 유가족들에게 큰 상처가 되는 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자살 유가족을 자살 생존자(Suicide Survivor) 라고 부르며, 재난 생존자처럼 심리적 돌봄과 위로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자살 유가족들은 위로와 돌봄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비난과 낙인, 편견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오빠의 죽음 이후, 박 선교사님은 여자인 자신보다 남자였던 오빠가 훨씬 더 깊은 절망감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적 편견과 냉대가 자살 유가족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에 이어 오빠까지 자살로 잃은 박 선교사님 가족은, 오빠의 장례 또한 조용히 치러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오빠의 죽음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고, 화장 후 조용히 장례를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자살 유가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은 죄책감입니다. 하지만, 죄책감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박 선교사님 또한, 어머니와 오빠의 죽음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홀로 짊어진 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과연, 박 선교사님은 어떻게 자살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밝히게 되었을까요? 그 계기가 궁금해집니다.
시민 상담 공부 중, 애도 상담 과목을 통해 박 선교사님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애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2018년, 애도 상담 수업 시간에, 짝꿍과 함께 자신의 상실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처음으로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짝꿍에게 어머니와 오빠를 잃었던 슬픔과 아픔, 당시 느꼈던 감정, 주변 사람들의 반응 등을 이야기하면서, 박 선교사님은 그동안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괜찮은 척 살아왔지만, 실제로는 슬픔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억눌렸던 슬픔이 터져 나오면서, 박 선교사님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교수님께 개인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미국인 교수님은 박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분노하셨습니다. 어린 박 선교사님이 겪었던 부당한 언어폭력과 냉대에 대해 분노하며, "세상이 너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거칠게 대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교수님의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에, 박 선교사님은 큰 위로를 받았고,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인지하고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자살로 가족을 잃은 것은 수치가 아니라, 함께 울어야 하는 아픔" 이라고 강조하며, "네가 엄마를 닮았다면, 너희 엄마는 참 아름다운 분이셨을 것이다." 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40년 가까이 "엄마 닮았다" 라는 말이 경계해야 할 말, 두려움을 주는 말로 여겨왔지만, 교수님의 따뜻한 위로를 통해, 박 선교사님은 어머니를 아름다운 분으로, 그리운 존재로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박사 과정 공부를 하면서, 자살 유가족 관련 논문을 쓰고, 선언문들을 발표하면서, 박 선교사님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살 유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애도의 치유 과정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자살 유가족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살 유가족으로서 세상에 나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첫걸음으로, 슬픔은 발효 중 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슬픔은 발효 중 은 박경임 선교사님이 자신의 자살 유가족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박 선교사님은 두 가지 목표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첫째, 자살 유가족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사회적 인식 개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자살 유가족으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편견과 차별, 고통과 슬픔을 세상에 알리고, 자살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둘째, 애도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자살 유가족들은 슬픔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사회적 냉대와 편견 속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애도가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억압하면 심리적 문제와 질병을 야기하지만, 표현하고 이야기하면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 유가족들은 슬픔을 억눌린 채 살아갑니다. 박 선교사님은 슬픔은 발효 중 을 통해, 자살 유가족뿐 아니라, 상실의 아픔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슬퍼하고 울면서, 슬픔을 통해 회복될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애도는 온몸으로 겪어내는 과정입니다. 슬픔을 억지로 참거나 외면하지 않고, 마음껏 슬퍼하고 울면서, 슬픔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서로 위로하며 슬픔을 나누는 것처럼, 우리 사회 전체가 슬픔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위로와 격려를 통해 애도를 돕는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필리핀 선교 사역 중에도, 박경임 선교사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위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 중 한 명으로 제디라는 학생을 소개해주셨습니다. 2014년, 나사렛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었던 제디는, 예배 후 박 선교사님의 눈에 밟혀 기숙사를 찾아가 복음을 전했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도 중 갑자기 귀신 들린 증상을 보이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축사 사역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야 했습니다. 축사 후, 제디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니, 8남매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의 부재와 주변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자라온 상처투성이의 아이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의지했던 오빠마저 자살로 세상을 떠나면서, 제디의 마음은 더욱 깊은 상처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제디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제디를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디는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친구는 가스라이팅을 통해 제디를 고립시키고, 심지어 야반도주까지 감행했습니다. 1년 후, 제디는 박 선교사님 생일에 용기를 내어 다시 찾아왔습니다. 남자친구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와 죄책감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박 선교사님은 제디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다시 제자로 받아주었습니다. 5년 후, 제디는 다시 박 선교사님을 찾아와,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헌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현재 제디는 신실한 남자친구와 함께, 샤멀로그 현지 사역자로 헌신하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제디를 통해, 상처 입은 영혼을 사랑으로 품고 기도하며 양육하면, 반드시 회복되고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박경임 선교사님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현재 88세이신 아버지는, 여전히 생존해 계십니다. 박 선교사님은 중학교 시절, 아버지와 3년간 함께 살았지만, 당시 술에 의존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아버지를 보며 실망감과 원망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아내마저 도망간 아버지의 절망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박 선교사님은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감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묵묵히 견뎌오신 아버지,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하신 적 없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아계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현재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고, 박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아버지가 살아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앞으로 아버지와 더욱 따뜻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박 선교사님은, 어떻게 어머니와 마음의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까요? 애도 상담 공부 중, 고인의 묘소를 찾아가 묻어둔 감정을 이야기하는 애도 방법을 배우고, 2018년, 언니와 함께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 어머니께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냈다고 합니다. "엄마, 초등학교 들어가면 가방 사준다고 했잖아. 우유도 사준다고 했잖아. 엄마, 나 아무도 챙겨주는 사람 없었어." 묻어두었던 감정을 쏟아내면서, 박 선교사님은 비로소 어머니와 작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풍토병으로 아팠을 때, 어린 딸이 "엄마는 언제 와?" 라고 묻는 질문에,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엄마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고통을 끝내고 싶었던 것"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오해가 이해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책 슬픔은 발효 중 을 집필하면서, 다섯 살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며, 더욱 깊이 애도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슬하에 아들 현태 군을 두고 계신 박경임 선교사님은, 어머니의 부재 경험을 통해, 자녀 양육에 더욱 헌신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을, 아들에게 듬뿍 쏟아주며, 결핍과 부재의 아픔을 반면교사 삼아, 정서적으로 풍요로운 양육 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아들 현태 군은 박 선교사님께 든든한 지지자이자 동역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크다고 합니다. 아들 현태 군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필리핀 현지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 학생으로, 왕따와 문화적 차이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필리핀 국립 과학고등학교 재학 당시, 외국인 학생이라는 이유로 졸업에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기도, 학교와 이민국의 도움으로, 무사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현재 고려대학교 국제학부에 재학 중이며, 훌륭하게 성장해주었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아들에게 늘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앞으로 아들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들의 등록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었다는 간증을 들려주며,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신다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경임 선교사님은 자살 유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특히, 어린 자녀에게 부모의 죽음을 설명할 때, 죽음을 모호하게 표현하기보다는, "다시는 볼 수 없다" 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어린 아이라도 장례식에 참석하여 공식적인 작별 시간을 갖는 것이 애도 과정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습니다. 자살 유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과 정죄가 아니라, 따뜻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살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공감이 여전히 부족합니다. 슬픔을 억압하고 외면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슬픔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애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마음껏 울어도 괜찮다" 고, "슬퍼해도 괜찮다" 고 말해주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박 선교사님은 슬픔을 말할 수 있는 공간,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곳이 많아지기를 소망하며, 억지로 웃거나 괜찮은 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며 애도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주변에 자살 유가족이 있다면, 박경임 선교사님의 책 슬픔은 발효 중 을 선물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 박경임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자살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위로와 돌봄**이 넘치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