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CRPS 극복 이야기: 김소민 자매의 고통과 회복 과정
7년 CRPS 고통, 믿음으로 다시 웃기까지
"저를 7년간 울게 한 고통,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CRPS)을 이겨내고 다시 웃기까지" 김소민 자매의 용감한 고백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께서는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놀라운 용기와 믿음으로 삶의 희망을 찾아낸 한 자매의 감동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받았던 김소민 자매님의 이야기인데요, 그녀는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마침내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김소민 자매님의 용기 있는 고백을 통해,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CRPS)이라는 희귀난치병의 고통과 치료 과정,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진행자 주영훈 님과 연 님, 그리고 이정수 님이 자신들의 통증 경험을 나누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영훈 님은 "오늘 새벽에 깜깜한 데에서 지나가다 새끼발가락을 부딪쳤는데, 정말 너무 아팠다"고 생생하게 묘사하며 웃음을 자아냈는데요, 연 님은 "치통 때문에 뒹굴었던 적이 있다"고 고백하며 공감을 얻었습니다. 이정수 님 또한 "사랑니를 뽑을 때 굉장히 아팠다"고 덧붙이며, 오늘 초대 손님인 김소민 자매님이 겪은 통증이 얼마나 심각할지 궁금증을 유발했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김소민 자매님이 환한 미소와 함께 등장합니다. 진행자들은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밝은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요, 김소민 자매님은 수줍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사랑의교회 청년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진행자들은 오프닝에서 소개했듯이, 김소민 자매님이 겪은 통증은 극심한 고통이라고 강조하며, 어떤 병이기에 그렇게 힘든 고통을 겪었는지 질문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앓고 있는 병명을 정확하게 밝혔습니다. 바로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즉 CRPS라고 불리는 희귀난치병"인데요, 그녀는 "워낙 통증이 심해서 저주받은 질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며 병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했습니다. 진행자들은 저주받은 질병이라는 표현에 충격을 받으며, 도대체 어느 정도 통증이기에 그렇게 불리는지 되물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자신이 통증으로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차분하지만 생생하게 그 고통을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통증이 너무 심할 때는 뼈가 으스러지면서 드릴로 뚫리는 것 같았고, 불에 타는 진물이 나는 속살에 알코올을 들이붓는 것 같은 통증이 지속되었다"고 기록해 두었던 표현을 소개하며, CRPS의 극심한 고통을 전달했습니다. 보통 우리가 통증을 비교할 때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김소민 자매님은 CRPS의 통증이 출산의 고통보다 훨씬 더 심하다고 단언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통증의 강도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통증 지수를 언급했습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통증 지수를 0점에서 10점으로 나눈다고 하는데요, 출산할 때 고통이 7점인데 비해, CRPS는 9점에서 10점의 통증이 계속된다고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극심한 고통인데요, 김소민 자매님은 통증을 잊기 위해 자해까지 시도했다고 고백하여 충격을 더했습니다. 씻는 행위조차 고통스러웠던 그녀는, 물이 피부에 닿는 순간 쇠구슬이 피부에 부딪히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고 합니다. 씻기 위해 면도날로 멀쩡한 피부를 긋고, 상처에 물이 닿을 때 느껴지는 따가움으로 통증을 잊으려 했던 그녀의 절박함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통증이 계속해서 몰려온다는 그녀의 말은, 듣는 이들을 숨 막히게 했습니다. 진행자는 통증이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되는 고통인지 재차 확인했는데요, 김소민 자매님은 24시간 지속되는 통증이라고 답변하며,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전했습니다. 문제는 통증을 잡기 위해 하루에 네 번 약을 먹었음에도 통증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 취침 전 매번 2~30알의 약을 먹었지만, 통증은 여전했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돌발적으로 통증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돌발적인 통증이 찾아올 때면, 김소민 자매님은 속효성 마약성 진통제를 추가로 먹고, 수건을 두껍게 해서 물거나 마우스피스를 물고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아내는 과정에서 치아에 균열이 갈 정도였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극심한 통증으로 숨조차 쉬어지지 않을 때는 119에 신고하여 응급실로 후송, 몰핀이나 케타민과 같은 마약성 진통제와 향정신성 의약품을 주사로 맞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데요, 김소민 자매님은 이러한 고통을 무려 7년 동안 겪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재 그녀는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며, 오늘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어린 시절부터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다고 합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타고난 성격 자체가 완벽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유치원 야외 활동이 취소되면 울며불며 떼를 썼다는 일화는, 그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소풍을 못 가서 운 것이 아니라, 계획이 취소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달래줘도 쉽게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었던 그녀의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뚜렷했던 완벽주의 성향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된 완벽주의는, 성장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8살 때, 여의도로 놀러 가기로 한 날 폭우가 쏟아졌지만, 김소민 자매님은 고집을 꺾지 않고 여의도로 향했습니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 위험을 무릅쓰고 여의도에 가야만 했던 이유는, 단지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폭우 속에서 여의도 육교 밑에서 우산도 소용없는 비를 맞으며 놀았던 기억은, 그녀의 고집과 완벽주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어머니는 야단을 치기보다 딸의 고집을 들어주는 쪽을 선택했고, 김소민 자매님은 그런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자랐습니다.
공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김소민 자매님은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생각하며, 남에게 뒤쳐지거나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시험 기간에는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정답을 비교하며 자신의 실력을 확인했고, 수학 문제를 풀 때는 희열을 느꼈다고 합니다. 수학만큼은 무조건 100점을 받아야 직성이 풀렸던 그녀는, 한 문제라도 틀리면 몹시 속상해했습니다. 자신의 풀이 과정이 맞는데 오답 처리된 문제를 선생님께 가져가 항의했던 일화는, 그녀의 완벽주의 성향과 수학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장래희망 또한 일찍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변리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고, 변리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타고난 성향과 뛰어난 학습 능력은, 그녀가 변리사라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독서실 문이 열기 전부터 기다리고, 쉬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껴 공부에 매진했던 그녀는, 새벽 2시 독서실 문이 닫을 때까지 공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좋아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완벽주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진행자들은 김소민 자매님의 놀라운 집중력과 끈기에 감탄하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김소민 자매님은 변리사 1차 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2차 시험에서 아쉽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수년간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은 시험이었기에, 짧은 기간 공부한 그녀에게는 결과가 아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리사라는 꿈을 잠시 접어두고, 직장 생활을 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생 시절 교직 이수를 했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 또한 학교 선생님이었기에, 안정적인 교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2018년 5월 5일, 김소민 자매님은 모든 일을 정리하고 퇴사 기념으로 친구와 속초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 날부터 바로 교사 임용 시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시험까지 6~7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녀는 다시 공부에 매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쉼 없이 달려온 탓일까요? 몸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잔병치레가 잦아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비동염과 편도선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약을 먹었지만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폐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0대에 폐렴이라니, 뜻밖의 병이었지만, 당장 시험이 코앞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약을 먹으며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약을 그만 먹어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기쁨도 잠시, 다음 날 바로 장염이 찾아왔습니다. 며칠 고생하는 수준이 아니라, 몇 주간 증상이 이어지는 심각한 장염이었는데요, 동네 병원 선생님은 일반적인 장염이 아닌 것 같다며 대학병원 검사를 권유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검사 결과, 다행히 다른 질병은 아니었지만, 심한 장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액을 맞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봄부터 몇 달간 투병 생활을 했더니, 그 해 여름에는 대상포진까지 찾아왔습니다. 대상포진은 피부에 수포가 올라오는 질병인데요, 수포가 터지면서 물이나 공기 중에 있는 바이러스와 세균이 침투, 염증이 심하게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대학병원 감염내과에 입원하여 항생제 집중 치료를 받고 퇴원해야 했습니다.
염증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환부도 괜찮아져서 이제 드디어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며칠 후부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여름이라 얇은 이불을 덮고 잤는데, 오른발 통증 부위가 이불에 닿기만 해도 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통증이 심했던 것입니다. 대상포진 또한 매우 아픈 질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날카로운 통증이었습니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시 대학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진료를 예약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감기처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혼자 마취통증의학과 진료를 보러 갔습니다.
진료 첫날, 의사 선생님은 김소민 자매님의 증상과 피부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충격적인 진단을 내렸습니다. "환자분,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같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당황한 김소민 자매님에게 의사 선생님은 "이 질병은 제가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 질병을 전문으로 담당하시는 교수님이 있으니 그분께 넘겨 드릴게요.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치료받으셔야 돼요." 라고 당부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의아했습니다. 왜 굳이 다른 교수님께 넘기는지, 왜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치료받으라고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질병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경차단술이라는 치료를 받고, 목발을 짚고 독서실로 향했던 김소민 자매님. 새벽까지 공부하다 집에 돌아오면 잠 잘 시간조차 부족했기에, 부모님과는 간단한 대화만 나누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부모님은 딸이 계속 아픈지 모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독서실에서 앉아 있는 동안에도 통증은 계속되었지만,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시험 준비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9월 초 처음 마취통증의학과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는 양말 신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10월에는 발을 땅에 디디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습니다. 걷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고 땅에 닿는 순간, 발이 불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지속적인 통증에 더해, 돌발통까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시험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독서실에서 저녁때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김소민 자매님은, 그제서야 부모님께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마약성 진통제를 먹으며 공부하고 있으며, 더 심해지면 몰핀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딸의 고백에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험이 코앞인데 아프다고 포기할 아이가 아니었기에, 그렇게 아파하면서 울면서 이야기하는 딸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부랴부랴 주위 의사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돌아온 답변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 질병을 누가 걸렸냐", "그 질병은 아예 걸리면 안 되는 병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치료도 없고 치료법도 없고 완치할 수 없는 병이다." 그날 밤, 김소민 자매님 가족은 순식간에 멘붕에 빠졌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대상포진으로 시작된 병이 어떻게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으로 진행된 것일까요? 의사 선생님들은 "재수 없는 케이스" 라고 표현했습니다.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신경을 타고 침투, 항생제 치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CRPS로 넘어간 경우라는 것입니다. 당시 김소민 자매님의 나이는 28살, 젊고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나이에 불치병 진단을 받은 현실은, 그녀에게 큰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김소민 자매님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일 수도 있지만, "이번 어려움도 잘 극복해 내서 고난을 극복한 멋진 사람이 되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씀해 주시는지, 더욱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자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어려움을 맞서 나갔습니다. 아무리 자신감이 있어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아프기 시작한 28살 생일, 김소민 자매님은 "이번 어려움도 잘 극복해 내자"는 다짐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 후 29살 생일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생일" 이라고 확신하며 글을 썼습니다. 20대 마지막 생일을 아쉬워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죽음을 각오했던 그녀는 생일 촛불을 불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하루에 먹는 약이 배가 넘었고, 먹고, 자고, 생각하는 일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긴장하면 소화가 안 되는 경험, 다들 있으실 텐데요, 김소민 자매님은 통증 때문에 몸이 항상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하기 일쑤였고, 잠 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밤에 잠을 자기 위해 수십 알의 약을 먹었지만, 통증은 잠을 계속 이겼습니다. 몇 초 잠들었다가 통증 때문에 깨어나 소리 지르기를 반복,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하루에 30분도 못 자는 날들이 몇 년간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 또한 심각했습니다. 대표적인 부작용인 변비는, 병원에서 관장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변비 뿐만 아니라, 피부 가려움증, 발진 등 다양한 부작용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약 부작용으로 피부 가려움증이 심해져, 온몸을 긁어 상처투성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피가 나고 멍이 들 때까지 긁어도 가려움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통증 부위 또한 피부가 굳고 발톱이 깨지는 등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아픈 통증 부위에 약을 발라야 했지만, 약이 닿는 순간조차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약을 발라야 했던 시간들은, 김소민 자매님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돌발통은 일상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습니다. 24시간 지속되는 통증에 더해, 하루에도 수차례 돌발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은, 그녀를 끝없이 괴롭혔습니다. 돌발통이 시작되면 짧게는 30분, 길게는 응급실에서 몰핀을 맞기 전까지 고통이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돌발통이 올 때면 추가로 약을 먹고 수건을 물고 버티다, 결국 119에 신고하여 응급실로 후송되기를 반복했습니다. 심할 때는 119를 누르지 못한 채 쓰러져 기절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 속에서 김소민 자매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불치병에 걸려 남은 삶을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24시간 끊이지 않는 통증, 돌발통, 약 부작용 등 견디기 힘든 고통은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늘 긴장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은, 김소민 자매님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환자보다 더 힘든 역할이 보호자라고 생각합니다. 환자는 병원에서 의료진으로부터 공감, 위로, 격려를 받지만, 보호자는 오히려 세상의 엄격한 잣대 속에서 무조건적인 헌신을 강요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모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밤마다 응급실에 실려가는 딸 때문에 부모님은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점차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갔습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 직업을 내려놓고, 24시간 딸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짐은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무게로 가족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못 먹는 딸을 위해 대부분 시간을 부엌에서 보냈습니다. 약 부작용으로 고춧가루 하나라도 들어간 음식을 못 먹는 딸을 위해, 매운 음식을 피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몇 시간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어 내와도, 딸은 한 입 넘기기조차 힘들어했습니다. 어머니는 한 입이라도 더 먹으라 애원했지만, 딸에게는 쌀 한 톨 한 톨이 모래알처럼 느껴졌습니다. 남동생 또한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뎌냈지만, "식사 시간만큼은 마음 편하게 먹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가족 식사 시간은 더 이상 화목한 시간이 아니라,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 속에서 이어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처음 CRPS 진단을 받았을 때 심정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딸의 병명을 검색해 볼수록 무서운 정보들만 가득했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은, 통증 때문에 신음하는 딸의 소리를 문밖에서 듣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빨리 통증이 사라지고 잠들기를 바랐지만, 결국 119 구급차 소리가 집 앞에 울리는 현실은,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습니다. 딸은 "울면 몸이 들썩여서 더 아프다"며 울 수조차 없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그런 딸을 보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샤워하면서 펑펑 울었고, 하늘의 먹구름을 보며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투영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뒷산과 우면산에 자주 올라가 기도하며, 기도문을 쓰며 간절함을 쏟아냈습니다. 딸이 음식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을 때, 잠을 잘 잤다고 말할 때, 약 용량을 줄일 때 작은 희망을 발견하며 기뻐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 힘을 냈습니다. 약을 끊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어머니는 힘든 시간을 이겨낸 딸이 자랑스럽고, 고맙고, 사랑스럽다고 고백하며,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기도해 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가족 중 누구 한 명만 아파도 온 가족이 힘들어지는 현실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투병 생활은 가족들을 지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는, 김소민 자매님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행자들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함께 눈물 흘리며, 가족 사랑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힘든 투병 생활 가운데 김소민 자매님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더욱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 그녀는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을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통증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밤에는 찬양을 계속 들으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20살 때 잠시 방황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없이는 더 이상 버틸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와중에도 주일 예배에 꼭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일주일 치료 일정과 컨디션을 조절해서 주일 예배에 나섰지만, 예배 시간 한 시간 동안 통증을 참지 못하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다 말고 119에 실려 응급실로 후송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고작 한 시간 통증조차 버틸 수 없게 하시는 걸까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매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나쁜 짓 하겠다는 거 아니잖아요. 진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시간 예배 시간 동안만이라도 버틸 수 있는 통증을 허락해 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통증을 치료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예배 자리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조금씩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찬양 시간에 마음껏 찬양하고 싶은 소망도 있었습니다. 통증 부위가 오른발이라 마음대로 일어나 찬양할 수 없었고, 체력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유롭게 찬양하고 싶은 마음에 예배 시간에 일어나 찬양을 시도했습니다. 20분 찬양 시간 동안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일어나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박수를 치면 몸에 진동이 느껴져 통증이 심해졌지만, 박수 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은 통증보다 더 컸습니다. 점차 회복되어 지금은 마음대로 일어나 박수 치며 찬양하고, 손을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김소민 자매님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특히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 같았던 김소민 자매님의 변화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를 보고 "네가 그렇게도 아픈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는 하나님이 누군지 궁금하다", "나도 그런 하나님을 믿어보고 싶다" 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부부는 "태중에 있는 아이가 태어나면 너처럼 하나님 열심히 믿는 사람으로 키워내고 싶다"며 아이 이름을 성경 인물로 짓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프기 전에는 오히려 전도하지 못했던 김소민 자매님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병이 저주받은 질병이라고 불리는 것에 힘들어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어떤 상황에서든지 일하고 계셨습니다.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감사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성경 읽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변화입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아픔을 버틸 수 있도록 매일 성경 말씀을 읽게 해 주세요." 기도 속에는 두 가지 소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30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시고,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 없이 매일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게 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당시 몸 상태로는 불가능한 기도였지만, 그녀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약보다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매일 30분에서 한 시간씩 성경을 읽었고, 결국 성경 일독을 완료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싶어하고 간구하면 들어주시는 분이시구나." 김소민 자매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김소민 자매님은, 부모님이 제안했던 가정 예배를 늘 피해왔습니다. 귀찮기도 하고, 가족끼리 예배드리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프면서 예배를 더욱 사모하게 되었고, 부모님의 권유로 매일 저녁 10분씩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시작하고, 찬송가 471장 "주여 소민이의 병든 몸을 고쳐주소서" 를 함께 불렀습니다. 하루 종일 통증과 싸우며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는 듯, 찬양을 부르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질병을 고쳐주신다는 약속 말씀을 붙잡고, 가족 모두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매일 찬양하고 성경 말씀을 나누며,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무리했습니다.
가정 예배는 낯설 수 있지만, 김소민 자매님 가족에게는 간절함으로 만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드리는 10분 예배를 통해, 가족 모두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모태신앙이었지만 가정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주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큰 축복이었습니다. K장녀 성격 탓에 힘든 것을 잘 이야기하지 못했던 김소민 자매님은, 가정 예배를 통해 가족들과 솔직한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덜어주는 경험을 했습니다. 힘들다고 고백하는 것은 가족들에게 짐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든든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가정 예배를 통해 부모님은 웃음을 되찾았고, 가족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어머니는 가정 예배 시간 동안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마음 아파했지만,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앉아 있을 힘조차 없을 때는 침대에 기대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자세나 모양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가족 예배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넘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은혜는 공감 능력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MBTI 성격 유형이 ESTJ인 김소민 자매님은, 원래 공감 능력이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겉으로는 공감하고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의지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믿었던 오만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면서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오만했던 자신에게 주위 사람들은 진심으로 다가와 기도해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뿐만 아니라, 부모님 교회 성도들까지 새벽 예배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눈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지인들은 집 앞까지 찾아와 선물을 전해주고, 생일에는 축하 영상을 보내주었습니다. 병원 의료진 또한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병원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를 정도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은 자신을 볼을 감싸 안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공감 능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MBTI 성격 유형도 ENFJ로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교회에서 청년부 리더로 섬김의 자리를 감당하고 있는 김소민 자매님은, 예전의 자신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크지만, 투병 중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케타민 주사 치료 중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케타민은 동물 마취제로도 사용되는 약물로, 대학병원에서도 사용을 꺼리는 약물입니다. 하지만 극심한 통증 때문에 기절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김소민 자매님에게, 교수님은 케타민 치료를 제안했습니다. 위험하지만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매주 케타민 주사를 맞았지만, 위험은 늘 따랐습니다. 전신 마취 수술 시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 것처럼, 케타민 주사 치료 시에도 직계 보호자가 반드시 동행해야 했습니다. 케타민은 통증 신경 뿐만 아니라 호흡 신경까지 마취시키는 부작용이 있었고, 주사를 맞는 세 시간 동안 산소 포화도가 계속해서 90% 밑으로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죽을 뻔했던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신경계 질환 특성상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김소민 자매님은, 비가 오면 통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날은 통증이 너무 심해 케타민 주사 맞기 전에 몰핀까지 맞았습니다. 케타민 주사를 맞기 시작한 지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평소와 다른 환각 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죽음을 직감했습니다. 곁에 있던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죽기 전에 어머니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찰나, 잠깐 입이 떼어졌습니다.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생각하는 순간,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난 하나님을 믿어서 행복해" 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고백과 함께, 마음 속에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평안하게 하나님 곁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이상 증상을 감지하고 의료진을 불렀고, 긴급 조치 덕분에 김소민 자매님은 다시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만약 몇 초만 늦었어도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증을 잊기 위해 케타민 주사 치료를 계속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케타민 주사를 맞다 세상을 떠나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CRPS는 정말 무서운 질병입니다. 극심한 통증은 물론, 전신으로 통증이 확산될 수도 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 또한 오른발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으로 확산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통증이 전신으로 확산되기 전에는 완벽하게 죽는 방법을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죽는 것 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통증이 전신으로 확산되자 스스로 죽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약을 먹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통증이었고, 눈꺼풀을 깜빡이는 순간에도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수조차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삶의 의지를 모두 놓아버렸습니다. CRPS 환자 중에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과 동갑인 CRPS 환우 또한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친구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신앙 좋은 청년이었지만, 고통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환우를 지키던 보호자들의 고통입니다. 특히 어머니는 딸을 잃은 슬픔에 삶을 포기하려는 시도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CRPS는 환자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파괴하는 잔인한 질병입니다. 행복 전도사로 유명했던 故 최윤희 님 또한 CRPS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 스스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육체적 고통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김소민 자매님은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밝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습니다. 현재 상태는 어느 정도 호전되었을까요? 2021년 4월부터 5월 초까지 세 차례 전신 마취 수술을 통해 척수 자극기를 몸에 삽입했습니다. 척추뼈를 부수고 척수막 위에 전극판을 올려두는 고난도 수술이었습니다. 배에 배터리를 삽입하고, 전극판과 배터리를 연결하는 전선을 몸에 넣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오른쪽 엉덩이 신경 유착을 풀어주는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수술 결과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술 후 가을부터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고, 휠체어를 타던 김소민 자매님은 2022년 4월 두 발로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척수 자극기 수술 후 재활 치료와 재활 운동을 병행하며 호전 속도를 높였습니다. 몇 년간 사용하지 못했던 오른발은 경직되고 경련이 일어나는 상태였습니다. 다시 걷는 연습부터 계단 오르내리기, 발 움직이기 훈련, 자극에 견디는 훈련 등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했습니다. 김소민 자매님은 아프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교수님이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하지 않으며 환자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점차 호전되어 신호등 초록불 시간 안에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습니다. 하루에 배가 넘게 먹던 약 용량도 줄여, 현재는 하루 평균 세 네 알의 약만 먹고도 일상 생활이 가능합니다. 일주일에 여러 번 응급실에 실려가던 과거와는 달리, 응급실 신세를 더 이상 지지 않습니다. 놀라운 회복입니다.
밝게 웃는 김소민 자매님의 모습에서 더 이상 고통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스튜디오에 참석한 그녀는, 어머니에게 영상 편지를 전했습니다. "엄마, 그동안 저 대신 울어주셔서 감사해요. 엄마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엄마는 저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엄마는 교사라는 직업을 정말 사랑했는데,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저 하나만을 살리겠다고 나오신 거잖아요. 엄마의 사랑 때문에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어요. 늘 기도해 주시는 엄마, 아빠 때문에 무서울 게 없었어요. 엄마, 진심으로 고맙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어머니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은, 듣는 이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진행자 또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김소민 자매님. 아프고 난 후 하나님께 "좋아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기에 좋아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좋아질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지금 내 모습이 안 보이나?" 며 반문하고 싶을 정도로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버틸 수 있었고, 이만큼 좋아져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는 기도에 빚진 자로서, 힘 없고 소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CRPS 환우들을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책을 쓰게 된 계기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담당 교수님의 권유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과 같은 환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습니다. 책을 쓰면서 아팠던 시간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실제 통증이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책을 쓰면서 하나님이 모든 순간 자신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다시 아프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고백은, 청년 시절 고통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떤 상황이 와도 담대하게 하나님만을 붙잡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행자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김소민 자매님의 고백에 화답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하나님은 슬픔과 아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춤추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통 없이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웃으면서 고백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많은 아픈 영혼들이 김소민 자매님의 간증을 통해 회복되고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응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오늘 김소민 자매님의 용기 있는 고백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 김소민 자매님의 앞날에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