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흥 선교사 불가리아 19년 헌신과 감동 실화, 마피아 선교 이야기
오직 사랑과 복음으로, 마피아 훈련장 불가리아를 섬기다: 박계흥 선교사의 19년 헌신
"못마땅한 교인을 향한 주님의 시선" - 박계흥 선교사님의 깊은 이야기 속으로
오늘, 우리는 박계흥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을 준비가 되셨나요?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하신 박 선교사님은 동유럽 불가리아, 그중에서도 험악하기로 소문난 시골 마을 말레 스키에서 묵묵히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마피아와 범죄가 들끓는 이 곳에서, 동양인 선교사로서 겪는 어려움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박 선교사님께서 사역하시는 불가리아 말레 스키는 어떤 곳일까요? 방송에서 소개된 말레 스키는 인구 6천 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마피아와 범죄 조직이 활개를 치는 위험한 곳입니다. 동양인은 박 선교사님 가족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환경 그 자체인데요. 이런 척박한 땅에서, 오직 복음과 사랑만을 가지고 헌신하는 박 선교사님의 용기가 놀랍기만 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과거 이 마을이 마피아들의 '훈련장'과 같은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도둑질 연습을 하거나, 범죄를 모의하는 장소로 악용되었다고 하니, 그 위험천만한 분위기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선교지 중 왜 하필 불가리아, 그것도 말레 스키였을까요? 박 선교사님은 1990년대, FM국제선교회를 통해 단기 선교를 떠났습니다. 당시 찬양 인도를 담당했던 그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던 중 마지막 방문지였던 불가리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운 기적과 이적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특히 장님의 눈이 뜨이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박 선교사님 마음속에 "내가 사랑하는 내 자녀들을 위해 이곳에 와야겠다"라는 강렬한 감동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이 감동은 아내분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었고, 두 사람은 호텔 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며 불가리아 선교를 결심하게 됩니다.
물론, 결심은 쉽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유럽, 그것도 동유럽으로 선교를 떠나는 것은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신학교 동아리 단장이었던 박 선교사님은 팀 전체가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1인당 200만원이 넘는 비용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부부만 가더라도 400만원이 넘는 거금이 필요했는데요. 놀랍게도, 선교를 떠나기 직전 새벽 기도회에서 담임 목사님을 통해 100만원을 지원받게 됩니다. 여전히 200만원이 부족했지만, 박 선교사님 부부는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공항으로 향합니다. 혹시 안 되면 물품이라도 부치겠다는 심정이었지만, 공항에서 간사님의 "기도하자"는 말에 다시 한번 용기를 얻습니다. 기도 중에 문득 떠오른 동기 전도사님과의 약속, 10억 이상의 재산을 정리하고 200만원을 섬김을 위해 쓰겠다는 그 약속이 현실이 되면서 기적적으로 부족한 선교 자금을 마련하게 됩니다. 은행 문이 닫기 직전, 아내분이 200만원을 받아 티켓팅을 마치고 극적으로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영화와 같았고, 박 선교사님 부부에게는 앞으로 닥칠 어떤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을 믿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언어 장벽 등 수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말씀 묵상 세미나 기간에 발생한 화재 사건입니다. 세미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아내분으로부터 집에 불이 났다는 카톡을 받게 됩니다. 당황한 마음을 감추고 세미나를 마무리하려 했지만, 성도들의 눈치를 챌 수 없었습니다.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전하자, 몇몇 성도들은 뛰쳐나가려 했습니다. 이때 박 선교사님은 "말씀 세미나가 더 중요하다"며 성도들을 붙잡았습니다. "집이 다 타버려도, 지금 이 순간에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힘들지만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가자"라고 설득했습니다. 놀랍게도, 집에 도착했을 때 화재는 이미 진압된 상태였고, 집은 물에 젖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딸은 오히려 "왜 이제 왔냐"며 아빠를 때리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박 선교사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이 우선되어야 함을 몸소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험악한 말레 스키에서 복음 사역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박 선교사님은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동네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혔던 한 자매의 변화를 소개했습니다. 차량 절도, 마약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이 자매는 교회에 나오면서 철야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가게 되었고, 교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던 20여 명의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금은 교회의 핵심 멤버가 되어 헌신하고 있으며, 과거 문제아였던 아이들이 이제는 교회 학교를 돕는 교사가 되었다고 하니 놀라운 변화입니다.
특히, 박 선교사님은 '마리'라는 자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주었습니다. 15살 때 교회에 처음 나왔던 마리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나오지 않아 걱정되어 찾아갔더니, 소피아에서 온 할아버지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성적으로 학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 선교사님은 마리를 그곳에서 구해내기로 결심하고, "어떻게든 널 돕겠다. 일은 그만두고 교회로 오라"며 마리를 설득했습니다. 이후, 교회의 한 성도가 마리를 양딸처럼 맞아주었고, 마리는 현재 동네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받는 화덕피자 가게의 직원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과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간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말레 스키 교회는 특이하게도 다양한 민족 구성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가리아인, 터키인, 집시 등 서로 다른 민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교류하는 공동체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회 안에서 민족을 초월한 연애와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보통 민족 간 결혼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지만, 말레 스키 교회에서는 사랑으로 모든 장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서로 다른 종족끼리 결혼하면 부모가 죽인다고 할 정도로 갈등이 심하다"면서, 청년들의 결혼을 위해 많은 기도와 지혜가 필요하다고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과 문화를 초월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은 큰 보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선교사님의 삶은 헌신과 희생의 연속이지만, 가족들의 어려움은 또 다른 측면의 고통입니다. 특히 자녀들은 부모의 선택에 의해 낯선 땅에서 자라야 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박 선교사님의 자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동양인이 거의 없는 불가리아에서, 아이들은 "중국 놈"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큰 아들은 러시아 기숙학교에 진학했는데, 그곳은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지만, 동시에 마약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마약 하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는 스트레스는 컸고, 아들은 손톱과 발톱을 뜯는 자해 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아들의 고통을 뒤늦게 알게 된 박 선교사님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아내분은 아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친구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품도록 격려했습니다. 아들은 점차 성장했고, 친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며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녀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연합하고 성장하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자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성장하고 있으며, 선교사님의 사역을 든든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사역하면서, '이 사역을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실까요? 박 선교사님은 솔직하게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교인들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늘 도움을 줘야 하는 상황, 자립을 강조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는 상황,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들 속에서 지쳐갈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새벽 기도 시간에 '아브로라' 자매로 인해 힘들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네에서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는 아브로라 자매, 교회의 문제를 밖으로 퍼뜨리는 장본인, 박 선교사님은 속으로 '저 자매가 교회에서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도 중에 주님은 "네가 제일 미워하고 힘들어하는 아브로라가 바로 나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음성을 통해, 박 선교사님은 자신이 영혼을 바라보는 관점과 주님의 시선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이후, 문제 교인들을 '아브로라'라고 부르며,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할 존재임을 되새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여전히 어려움은 있지만, 성도들을 향한 마음가짐이 변화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박 선교사님은 19년 만에 첫 안식년을 맞이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자녀들, 특히 청소년기에 접어든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역에 몰두하느라 아버지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막내딸의 학교 문제 등 자녀 양육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막내딸과의 대화 중에, 자신이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이 자녀들에게 큰 아픔으로 남았음을 깨닫고 안식년을 결심하게 됩니다. 안식년 동안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관계를 회복하고,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역지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지금은 가족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통해 재충전하고 있습니다.
사역자 간의 협력 또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박 선교사님은 두 분의 동역 목사님과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13살 때 전도하여 신학교까지 졸업시킨 젊은 목사님이고, 다른 한 분은 불가리아에서 우연히 만난 목사님입니다. 하지만, 함께 사역하는 과정에서 의견 충돌도 있었습니다. 특히, 십일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오랫동안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럽 신학을 공부한 동역 목사님은 십일조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자립을 강조하는 박 선교사님과는 의견이 달랐습니다. 15년 동안 십일조에 대한 비판적인 설교를 묵묵히 들어왔지만, 성도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세 목사는 일주일 동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놀랍게도, 기도 기간 중 동역 목사님은 느헤미야 말씀을 통해 십일조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회개했습니다. 15년 만에 갈등이 해결되고, 동역 목사님은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안식년 기간 동안, 두 분의 동역 목사님들이 사역지를 잘 지켜주고 계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박 선교사님은 앞으로의 사역과 삶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선교를 시작할 때,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서원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특히, 자녀들의 학비, 생활비, 노후 준비 등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마주하면서,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선교사님은 처음 서원했던 마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앞으로도 묵묵히 선교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박계흥 선교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선사합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땅에서, 묵묵히 복음을 전하며 헌신하는 선교사님들의 눈물과 땀방울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주보 한 장, 헌금 봉투 하나에도 선교사님들의 희생과 헌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박계흥 선교사님의 앞날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기를 응원하며, 우리 또한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