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선 피아니스트 간증: 좌절 극복과 기도의 힘, 믿음의 인생 이야기
[새롭게하소서] 백혜선 피아니스트: 좌절이 준 선물
좌절의 스페셜리스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혜선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놀라운 인생 이야기를 펼쳐볼 주인공은 바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혜선 선생님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망했다'라는 표현을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백혜선 선생님은 오히려 좌절의 순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고백하십니다. 정상에 섰을 때가 아닌 가장 어려웠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은, 고난 속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사할 것입니다. 32년 전, 지금의 조성진, 임윤찬과 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랐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백혜선 선생님은 최근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셨는데요, 성공한 피아니스트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제목에 궁금증이 생깁니다. 출판사에서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어려움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극복해 나가는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본래 책에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었지만, 일반 출판사의 특성상 종교적인 내용은 다소 축소되었다고 하는데요, 오늘 방송에서는 그녀의 신앙과 인생 이야기가 더욱 깊이 있게 펼쳐질 예정입니다. 특히 백혜선 선생님은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아픔 속에서,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쓰셨다고 합니다. 좌절과 고난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백혜선 선생님의 인생 속에서 좌절의 순간들을 어떻게 특별하게 바꾸셨을까요? 피아노 연주와 기도의 힘, 그녀의 인생 여정을 통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기도의 힘: 국제 콩쿨 1등과 잊혀진 약속
백혜선 선생님은 피아노를 치면서 기도의 힘을 강하게 느꼈다고 하시는데요, 그녀가 처음으로 기도의 능력을 경험했던 순간은 바로 국제 콩쿨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 1989년, 그녀에게는 생애 첫 국제 콩쿨이었고, 이 콩쿨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권위 있는 대회였지만, 특이하게도 1등이 4년 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1등 수상자에게는 뉴욕 데뷔 무대와 다양한 연주 기회, 그리고 상당한 상금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백혜선 선생님은 스스로를 "너무나도 모자란 피아노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수상에 대한 기대보다는 매일 기도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잡지에서 한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가 실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쓴 글에는 힘든 가정 형편과 장애를 가진 두 아이를 키우는 고충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던 백혜선 선생님은 그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콩쿨에 나가기 전,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콩쿨에서 상을 받게 된다면, 상금과 부상을 이 가정을 위해 쓰겠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콩쿨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는 그녀에게 기도의 힘을 깨닫는 강력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콩쿨 과정 또한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결선 연주 당시, 베토벤 협주곡을 연주하던 중 갑자기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황한 순간,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침착하게 다음 악절을 떠올리려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피아노 조율사가 빠르게 대처하여 줄을 교체했고, 그녀는 다시 무대로 돌아와 연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콩쿨에서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며, 더욱이 결선 무대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줄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다음 악절을 잊어버려 연주를 망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1등 수상 후, 백혜선 선생님은 잡지사를 통해 그 장애인 가정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정을 찾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상금은 당시 돈으로 2만 불 정도의 큰 금액이었고, 어머니는 그 돈을 모두 장애인 가정에 전달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후에도 어머니께서 지속적으로 그 가정을 도왔고, 장애를 가진 어린 소녀가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녀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피아노를 통해 재활 치료 효과를 얻었고, 훗날 피아노 선생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백혜선 선생님에게 기도의 힘을 확신시켜주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잊혀진 도우미의 축복
백혜선 선생님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딸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콩쿨 참가를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딸을 늘 격려하며, 전화 통화마다 "기도할게"라는 따뜻한 말과 함께 축복했습니다. 선생님이 잠시 귀국하여 집에 들를 때면, 어머니는 밤늦도록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병원과 집이 함께 있었던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는 안방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며 가족과 딸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어린 백혜선 선생님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열심히 기도해야 할까?"라는 궁금증을 품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백혜선 선생님은 어머니의 기도가 단순한 헌신을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음악가, 예술가의 삶은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깊은 고독과 아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목해 보이는 가정에도 말 못 할 사연들이 숨겨져 있고, 사회적 편견과 아픔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기도를 통해 가족의 화목과 안녕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특히 백혜선 선생님의 가정사는 남들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재혼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가족 관계에 대한 혼란과 정체성 혼란을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러한 가정의 어려움과 딸의 학업, 외국 유학 생활에 대한 걱정을 기도로 승화시키며, 묵묵히 가정을 지켜나갔습니다.
놀랍게도, 백혜선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 준 또 다른 숨겨진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병원에서 일하던 도우미 아주머니였습니다. 그녀는 밥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다락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백혜선 선생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 주었고, "주여, 우리 혜선이가 잘되게 해 주시고, 나중에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린 백혜선 선생님은 그런 아주머니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했지만, 아주머니는 늘 "기도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권면했습니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백혜선 선생님 어머니에게 40일 금식 기도를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고, 백혜선 선생님에게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훗날 백혜선 선생님은 도우미 아주머니의 기도가 자신에게 큰 축복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집안의 모든 식구들을 위해 기도했고, 백혜선 선생님의 앞날을 축복하며 격려했습니다. 이처럼 어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 두 기도하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가 있었기에, 백혜선 선생님은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하소서 방송에 출연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던 백혜선 선생님은, 잊고 지냈던 도우미 아주머니의 헌신적인 기도와 축복을 떠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도우미 아주머니의 축복, 이 두 기도의 원천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깊은 깨달음과 감사가 밀려왔습니다.
서울대 교수 사직과 미국행: 자신만만함과 좌절
보스턴 유학 시절,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고 국제 콩쿨에서도 입상하며 승승장구하던 백혜선 선생님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 임용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걷게 됩니다. 대한민국 최고 명문 대학의 교수가 된 그녀는 탄탄대로를 걸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에 발을 들인 첫날,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과 답답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고,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습니다. 1990년대 중반의 서울대학교는 여전히 권위적인 분위기가 강했고, 교수 사회는 더욱 폐쇄적이었습니다. 남학생들은 교수를 보면 줄을 서서 인사를 해야 했고, 획일적인 유교 문화와 경직된 분위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백혜선 선생님을 숨 막히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에 출석했지만, 교인들은 그녀를 '서울대 교수'라는 타이틀로만 바라보는 시선에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음악으로 봉사하고 싶었지만, '서울대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가 오히려 족쇄가 되는 듯했습니다. 학생들의 태도 또한 그녀를 실망시켰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음악 자체보다는 '서울대 음대 졸업'이라는 간판을 얻기 위해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고, 1, 2학년 때는 미팅과 놀기에 바빴습니다. 3, 4학년이 되어서야 취업과 유학을 고민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녀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연주자에게 가장 중요한 연습은 뒷전이고, 앵무새처럼 뻔한 질문만 반복하는 학생들과의 소통은 답답함의 연속이었습니다.
결혼 후 남편과의 가치관 차이 또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현실에 안주하려는 남편과의 괴리는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며 음악적 성장을 갈망했던 그녀는, 20대 후반에 서울대 교수가 된 것이 오히려 자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방학 때마다 해외 연주를 떠나고, 한 달에 한 번씩 국내외 무대에 서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결국, 남편과의 잦은 갈등 끝에 이혼을 결심하고, 서울대 교수직을 사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의아해했지만, 그녀는 미련 없이 서울대학교를 떠났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그녀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했고,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국내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성과 서울대 교수라는 타이틀에 도취되어, 객관적인 현실 판단 능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자신감 과잉 상태에서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 아이들을 키우며 재기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혼 절차를 밟으면서도,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고 오만했습니다. 하지만 곧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광야에서의 40일 기도: 주님과의 만남과 새로운 시작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이주한 백혜선 선생님은 맨해튼 한복판에 아파트를 구하며 화려한 싱글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고, 아이들을 최고급 사립 유치원에 보내는 등 겉으로는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 중 하나였고, 맨해튼 아파트 임대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과거 재테크로 꽤 많은 돈을 모아두었지만, 수입 없이 지출만 계속되는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은 수입 없이 재테크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경고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고급 아파트 세 채를 소유하며 재테크에 성공했다고 자만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습니다. 은행들이 줄도산하고, 부동산 시장은 붕괴 직전에 놓였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아파트 가격은 폭락했고, 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집을 산 사람들은 이자 폭탄을 감당하지 못하고 집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백혜선 선생님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세 채의 아파트에 대한 대출 이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고,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았습니다.
매달 수천만 원에 달하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은행은 곧 아파트를 압류했고, 그녀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화려했던 뉴욕 생활은 끝났고, 두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순간은 바로 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였습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후에야 비로소 주님께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40일 작정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기도가 끝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구 가톨릭대학교에서 석좌교수 제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한 학기에 일주일만 강의하면 되는 조건이었고, 외국에 거주하면서도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뜻밖의 제안에 그녀는 하나님의 응답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녀는 이 경험을 통해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주님이시다"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살았던 과거를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광야와 같았던 뉴욕 생활은 끝났고, 40일 기도는 그녀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대구 가톨릭대학교 석좌교수직을 수락하고, 다시 강단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그녀에게 겸손과 감사를 배우게 하고, 진정한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귀한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뉴욕 한인 교회 성가대 지휘: 음악과 예배의 재발견
뉴욕에서의 광야 생활은 백혜선 선생님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특히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뉴욕 한인 교회였습니다. 컬럼비아대학교 앞에 위치한 이 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미 동부 지역 한인 교회의 모(母) 교회와 같은 곳입니다. 보스턴 교회와 비슷한 분위기의 이 교회에서, 그녀는 처음 유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경화 선생님의 어머니가 교회에 방문했고, 백혜선 선생님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 사람 백혜선 아니야? 아니, 목사님, 왜 백혜선 씨를 여기 두고 뭐 하시는 거예요? 이 교회는 음악으로 축복받아야 해요!" 정경화 선생님 어머니의 강력한 추천으로, 2007년부터 백혜선 선생님은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성가대 지휘는 그녀에게 음악의 근본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피아노 연주에만 몰두했던 그녀는, 성가대 지휘를 통해 노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음악의 근본은 노래다, 모든 악기는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피아노는 다양한 성부를 연주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악기는 단선율 악기이고, 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0년 넘게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그녀는 합창의 아름다움과 은혜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성가대 연습과 예배를 통해, 그녀는 끊임없이 감동과 눈물을 경험했습니다.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갖게 되었습니다. 예배에서 성가대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음악이 예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설교 전에 찬양을 듣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고, 영혼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목사님께 한 달 전에 미리 설교 말씀을 받아, 설교 주제와 성경 본문과 관련된 찬양을 선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양 가사를 설교 말씀과 연결시켜 의미를 더욱 깊게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뉴욕에는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녀의 교회 성가대에도 놀라운 실력의 성악가들이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30~40명 정도의 작은 성가대였지만, 20대 청년부터 85세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한 젊은 성도들은 나이 많은 성도들의 열정과 신앙심에 감동받고, 나이 많은 성도들은 젊은 성도들의 재능과 열정에 힘을 얻는, 서로에게 은혜가 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백혜선 선생님은 "음악은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으로 통해야 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음악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기교보다는 마음과 영혼을 담아 연주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듯한 마음으로 음악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성가대 지휘를 통해 그녀는 진정한 음악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예배를 통해 깊은 영적 은혜를 체험하며, 이전보다 더욱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음악가로 거듭났습니다. 교인들은 그녀의 성가대 지휘에 큰 감동을 받았고, 목사님조차 성가대를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백혜선 선생님은 성가대 지휘를 통해 가장 큰 은혜를 받고 있다고 고백하며, 교회와 성도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습니다.
후배들에게: 꿈, 열정, 그리고 감사의 마음
백혜선 선생님은 홀로 타국에서 음악가로서, 피아니스트로서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녀는 제2의 백혜선을 꿈꾸며 음악가의 길을 걷는 후배들,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열정적으로 임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녀는 또한 부모들에게 당부합니다. "자녀가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부모의 선입견으로 막지 마시고, 아이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해 주세요."
인생의 황혼기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백혜선 선생님은 여전히 배움과 자기 계발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편안한 삶에 안주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녀는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늘 기도할 제목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찾고 기도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자기 계발과 배움을 멈추지 않고, 정신이 온전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질문하고 동행하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면 됩니다."
마무리: 아름다운 인생, 하나님의 조율
주영훈 목사님은 백혜선 선생님의 인생을 '조율'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젊은 시절,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명예와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인생이라는 악기는 여전히 조율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시간을 통해 그녀를 연단하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조율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인생은 더욱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피아노 연주보다 더욱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백혜선 선생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선사합니다. 그녀의 간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깨닫게 해 줍니다. 앞으로도 백혜선 선생님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백혜선 선생님은 인터뷰 말미에 영감의 원천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진솔한 고백을 했습니다. 과거 인터뷰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들으며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시카고의 노래 "You're the Inspiration"을 언급하며, 그녀는 "영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는 어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의 끊임없는 기도와 축복이 있었음을 고백하며,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녀는 앞으로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통해, 그리고 후배 양성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전하는 음악가, 교수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세상에 감동을 주는 음악,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백혜선 선생님의 앞날을 축복하며, 인터뷰는 마무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