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덕만 교수 삶과 신앙 이야기: 내려놓음의 은혜와 변화
[새롭게하소서] 배덕만 교수: 내려놓음의 은혜, 삶과 신앙 변화 이야기
“요트를 사지 말고 요트 가진 친구를 사귀어라!” - 배덕만 교수님의 삶과 신앙 이야기 상세 정리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의 배덕만 교수님을 모시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깊이 있는 신앙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배 교수님은 23년간 교회사를 강의하며 수많은 미래 목회자들을 양성해 오셨는데요, 정작 본인은 목회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삶이라는 바다를 항해해 온 분입니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것과 현장에서 체득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클까요? 배 교수님의 솔직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그 간극을 좁혀보고, 삶과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는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배 교수님은 미래 목회자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침을 전하는 교수이자, 동시에 목회 현장을 직접 경험한 개척교회 목사이기도 합니다. 강단에서의 가르침과 실제 목회 현장의 괴리는 얼마나 클까요? 배 교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정말 다르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규모 있는 교회들을 편하게 다녔던 과거와 달리, 개척 후 지하 공간에서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예배를 시작하며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화려하게만 보이던 기존 교회와 현실 속 고난받는 이들의 교회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죠. 그는 지하 벙커 같은 공간에서 지상의 교회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환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자각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배 교수님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그의 삶과 신앙에 깊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배 교수님의 신앙 여정은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경기도 고양군에서 자란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친척들의 발길마저 끊기는 상황 속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일학교 전도사님이 심방을 오셨고, 공장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반차까지 내고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어머니와 배 교수님, 그리고 전도사님 단 세 명이서 드린 예배였지만, 전도사님의 따뜻한 위로와 기도는 어머니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연약하다는 이유로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작은 집에 찾아와 따뜻하게 안아준 전도사님의 모습은 어린 배 교수님에게 예수님의 이미지로 각인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배 교수님을 교회로 이끌었고, 그 따뜻한 느낌을 간직하고 싶어 열심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회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준 전도사님의 헌신은 한 아이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배 교수님은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술을 자주 드시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쉴 새 없이 공장에서 일해야 했지만, 배 교수님이 성적표를 받아올 때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그는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그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공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공부에 집중한 결과, 성적은 꾸준히 향상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 목사님의 멋진 모습에 감명을 받은 배 교수님은 목회자의 꿈을 꾸게 됩니다. 어머니에게 목사가 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어머니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들의 꿈을 지지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인천에 새로 설립되는 고등학교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의 도움으로 배 교수님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3년간 학비 면제라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배 교수님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배 교수님은 또 한 번의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원래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돕고자 했지만, 담임 선생님의 설득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좌절될 위기에 처했을 때, 서인천고등학교라는 신설 학교의 장학생 모집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극적으로 마감일에 서인천고등학교에 지원한 배 교수님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이것이 서울대학교로 이어지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앙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 선생님들은 그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해주지 못했고, 대학 진학 후 접하게 된 비교종교학, 종교 다원주의는 그의 신앙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88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는 민주화 운동과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대학교 3학년 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며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오게 됩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진학한 것은 본인의 의지보다는 학교 측의 권유와 전도사님의 조언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저렴한 학비 덕분에 경제적 부담 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과외를 통해 생활비까지 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하나님은 서울대학교라는 예상치 못한 길을 통해 배 교수님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배 교수님은 신학대학원이 아닌 예일대학교와 드루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원래 그의 꿈은 시골교회 목회자였지만, 신학 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사람보다 공부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목회자의 길보다는 신학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신학 연구에 몰두하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던 그에게, 80년대 후반 대학 시절 사회 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자들의 한국 교회에 대한 깊은 고민을 접하면서, 교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대원에 진학하면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소명이라는 것은 눈에 밟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장애인, 미전도 종족처럼 그에게는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가 눈에 밟혔던 것입니다. 이후, 배 교수님은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한 글을 쓰고, 강연과 집회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학자의 길을 걷던 그가 다시 목회의 길로 돌아오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배 교수님이 다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한 목사님의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개혁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던 배 교수님에게, 전라도에서 온 한 목사님은 “교수님 말씀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만, 한국 교회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목회를 안 해봐서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는 것 같다”는 뼈아픈 지적을 했습니다. 40년 넘게 교회를 다녔다고 자부했던 배 교수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전의 한 신학대학교에서 강의하던 그는, 개척교회 목회자들을 양성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개척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치 군대도 안 갔다 온 육군사관학교 교관이 학생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과 같다는 자괴감에 휩싸였습니다. 학자적 양심에 따라 한국 교회를 비판하고 개혁을 외쳤지만, 정작 목회 경험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큰 짐으로 다가왔습니다. 목회를 잘해서 교회를 키우겠다는 욕심보다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고민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마침, 대전의 한 교회가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배 교수님은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교단법상 교수는 이중직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는 목회를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기득권과 안정을 내려놓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배 교수님이 처음 부임한 교회는 폐쇄 직전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월세 13만원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적으로 열악했고, 교인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배 교수님은 사례도 받지 않고 오직 설교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교회에 가보니, 남아있던 교인마저 모두 떠나고 텅 빈 예배당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하 예배당에 홀로 남겨진 배 교수님은 교회의 이름 “주사랑교회”가 너무나 예쁘다고 생각하며, 이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교회에 가족과 함께 들어가 예배를 드리면서, 배 교수님의 두 번째 목회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화려한 강단을 떠나 척박한 현실 속으로 뛰어든 그의 헌신은 어떤 결실을 맺게 될까요?
폐쇄 직전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배 교수님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한국 교회의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편안한 교회만 다녔던 그는 비로소 한국 교회에도 메이저 리그와 마이너 리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위 ‘땅 위의 교회’에 다닐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팔자’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 반지하 방에서 브루스타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 아이를 안고 2층에서 뛰어내리려던 사람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교회 문턱을 넘나들었습니다. 단 20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에 우울증 환자가 세 명이나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배 교수님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신학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절감했습니다. 그는 매주 강단에서 설교하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교인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공허한 말만 쏟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거리가 먼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진정한 목회의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배 교수님은 교인들의 절박한 삶의 현실 앞에서 기도의 방식마저 바꾸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기복 신앙을 조롱하며 하나님 나라와 거룩한 뜻만을 강조했지만,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은 다음 달 월세, 아이들 학원비, 당장 먹을 것과 같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신용불량자,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배 교수님은 새벽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장풍이라도 쏠 수 있게 해주시고, 병도 좀 고치게 해주시고, 기도하면 로또라도 당첨되게 해주세요”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했지만, 감기 하나 낫게 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현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 교수님은 교회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교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2년만 목회하고 학교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에게 교회는 더 이상 피하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8년간의 목회 여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나고 싶다는 유혹에 수없이 시달렸고, 심지어 교회를 그만두는 상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지켰던 이유는 교인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젊은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앙심이 깊었던 청년은 헌신적으로 교회를 도왔고, 배 교수님과 함께 새벽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청년의 헌신 덕분에 교회는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청년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청년이 떠나자 교회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배 교수님은 큰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열심히 목회했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현실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이때부터 배 교수님에게 영적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설교를 준비해도 떠나간 교인들의 모습만 떠오르고, 자신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원망까지 솟아오르면서 극심한 영적 침체를 겪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주일 설교를 준비하다가 하나님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성경책을 벽에 던지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무슨 죄가 있어서…” 절규하며 목회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갈등 때문에 밤새도록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결국, 주일 아침 배 교수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향했습니다. 설교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교인들 앞에서 말이라도 하고 그만둬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아파트 단지를 일곱 바퀴 돌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지만, 두 바퀴째에 너무 추워서 근처 스타벅스로 향했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억지로 성경책을 펼쳤지만,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성경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성경 구절은 여호수아 1장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후에…”로 시작하는 구절이 배 교수님의 눈에는 “모 집사가 나간 후에…”로 보였던 것입니다. 착각이었지만, 그 순간 배 교수님은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1장을 읽는 동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배 교수님에게 개인적인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덕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에 배 교수님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카페 안에 혼자 앉아 엉엉 우는 중년 남성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배 교수님에게는 그 순간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는 목회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교회로 돌아온 배 교수님은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다시 한 번 목회에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후, 8년 동안 주사랑교회를 굳건히 지켰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주사랑교회 목회 이후, 배 교수님은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본래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은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신학 기초 교육을 제공하는 야학으로, 신학대학교 교수들이 재능 기부 형태로 운영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이후, 목회자 훈련 과정 프로그램을 개설하면서 전임 교수가 필요하게 되었고, 배 교수님에게 합류 요청이 들어온 것입니다. 정규 대학교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비인가 신학교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배 교수님은 오랜 고민 끝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에게는 명예나 안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주사랑교회 교인들은 배 교수님의 결정을 지지하고,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에서 더 큰 일을 감당하기를 응원했습니다. 모두가 만류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교인들은 오히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정은 예상치 못한 축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으로 옮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정규 대학교 교수 자리를 포기해야 했고, 월급도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 뻔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명함’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배 교수님 역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왜 저를 꼭 이 곳까지 이끄셔야 합니까? 제가 지방 대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더 욕심 내지 않고 조용히 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배 교수님에게 더 강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덕만아, 너도 똑같네. 강단에서 매일 사람들에게 십자가지고 좁은 길을 가라고 설교하면서, 정작 너는 좋은 것 먹고 넓은 길을 가고 싶어 하는구나. 너도 똑같네” 하나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배 교수님은 더 큰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으로 향했습니다. 이기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성장의 밑거름이 됩니다.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으로 옮기는 배 교수님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당시 자녀들은 아직 어렸고, 앞으로 들어갈 돈도 많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걱정이 컸습니다. 하지만, 배 교수님의 아내는 오히려 남편의 결정을 지지하고 격려했습니다. “목사님, 믿음이 그렇게 없으셔가지고. 목사님이 이렇게 헌신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내의 믿음 어린 격려에 힘을 얻은 배 교수님은 마침내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전에서 살던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해야 했지만, 서울은 월세 구하기조차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장인 장모님께서 살던 집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자녀의 학비 문제도 기적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첫째 딸은 국가 장학금과 교회 장학금을 받아 학비 걱정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었고, 둘째 아들은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유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막내 딸 역시 다둥이 장학금으로 미술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세 자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학비 걱정 없이 대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배 교수님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나머지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진리를 확증했다고 강조합니다. “요트를 사려고 하지 말고, 요트 가진 친구를 사귀어라”는 배 교수님의 말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풍요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포기하는 대신,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귀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배 교수님은 서울로 이사 온 후 원형 탈모를 경험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으로 옮긴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며, 인생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결정 과정에서 갈등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명확해졌을 때는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백향목교회라는 좋은 공동체를 만나 행복한 목회를 했지만, 교회 내 갈등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마치 빙판길에서 운전하는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2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원형 탈모까지 겪었지만, 결국 교회는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두 번째 목회 실패 앞에서 배 교수님은 또 다시 좌절했습니다. 아내와 동료 교수들은 그에게 목회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교수 사역에 전념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심지어 교인들 마저 그에게 “목사님은 교수가 딱이지 목회는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배 교수님에게 사랑과 관심이 부족하고,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잘 다루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배 교수님 역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씨름하며 목회의 의미를 되새겼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다시 목회를 시작하면서 그는 백향목교회 목회가 자신의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두 대학교에서 받던 강사료를 내려놓고 오직 느헤미야 기독연구원과 백향목교회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이기심을 내려놓고 헌신하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성장시키시고 사례비를 올려주시는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배 교수님은 이후 다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고, 원형 탈모 증상도 사라졌습니다. 그의 삶은 내려놓음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오늘 배덕만 교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내려놓음의 진정한 의미와 순종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배 교수님의 삶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빚어가시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 배 교수님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경험을 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