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방송분 공개] MC 주영훈과 전원희 목사의 100분 토론() 기독교 안에 남아있는 무속신앙과 유교문화ㅣ새롭게하소서 ㅣ전원희 목사
기독교 신앙과 무속/유교 문화의 혼합: 한국 기독교의 현실
한국 기독교 내부에 깊숙이 뿌리내린 무속신앙과 유교 문화의 잔재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권사님들이 점집을 찾고, 크리스천들이 제사를 지내는 현실은 우리에게 씁쓸함을 안겨주는데요, 과연 이러한 모습이 성경적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일까요? 오랜 시간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유교 문화와 무속신앙은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 신앙과 혼합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기독교는 유교 문화 위에 세워졌고, 그 결과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닌 '드리는' 것으로 표현하는 등 유교적 잔재가 예배 문화 속에 스며들게 되었죠.
예배를 '드린다'거나 형제님, 자매님과 같은 호칭 역시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표현인데, 이러한 유교적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에 녹아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점, 제사, 조상 숭배와 같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요소들까지도 한국 기독교 내에서 용인되거나 합리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불안한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점집을 찾고, 부모님을 핑계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토속 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합된 신앙 형태는 한국 기독교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성경적 가르침에 기반한 순수한 신앙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불안한 미래와 점(占): 크리스천은 점을 봐야 할까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특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때때로 우리를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이끌기도 하는데요, 점(占)을 보는 행위 역시 이러한 불안 심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을 통해 미래를 알고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인간의 욕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요? 점쟁이를 찾아가 미래를 엿보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행동일까요?
저는 점을 보는 행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만약 점쟁이가 "1년 뒤 대학에 합격할 것이다" 혹은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라고 예언하고, 부적까지 써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예언을 뒤집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점쟁이보다 위에 계신 분임을 믿는다면, 점쟁이의 예언이 빗나갔을 때 "점쟁이가 틀렸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점쟁이의 예언이 '맞을 때까지' 점집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오만함과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점쟁이들이 '용하다'고 소문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아는 무속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점집을 찾는 사람들의 고민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합니다. 사업 문제, 돈 문제, 자녀 문제, 배우자 문제, 건강 문제 등 대여섯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점쟁이들은 찾아온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노후가 좋다"와 같이 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예언은 검증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쉽게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너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와 같은 뻔한 덕담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러한 점술 행태가 신앙생활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이 원하는 '응답'이 있을 때만 하나님을 '용하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오해합니다. 자녀가 명문 대학에 합격하거나, 사업이 번창하는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릴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쉽게 실망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죠.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라면 어떨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직장, 원하는 배우자가 반드시 우리에게 최선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우리의 좁은 시야와 이기심에 갇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넘어서는'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을 발견해야 합니다.
제사 문제: 여전히 남아있는 유교 문화의 그림자
제사 문제는 한국 기독교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민감한 주제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제사를 조상 숭배로 여겨 거부감을 느끼지만,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부모님이 제사를 강요하는 경우, 크리스천 자녀들은 신앙과 효도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과연 크리스천은 제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할까요? 제사는 정말로 조상 숭배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가족 간의 전통 문화일까요?
저는 제사 문화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제사는 명백히 성경적 가르침과 배치되는 우상 숭배 행위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애굽기 20:4-5) 라고 경고합니다. 제사는 죽은 조상을 신격화하고, 그들에게 절하고 음식을 바치는 행위로서, 성경이 금지하는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제사를 통해 조상을 기리고 가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제사를 '기억'과 '추모'의 문화로 둔갑시키려 하지만, 이는 본질을 흐리는 행위입니다. 제사상은 단순히 음식을 차려놓는 것이 아니라, 죽은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입니다. 절하는 행위 역시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죽은 조상에게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조상에 대한 기억과 추모는 살아있는 동안 충분히 할 수 있으며, 제사와 같은 우상 숭배 행위를 통해 효도를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부모님의 반대와 사회적 압력 때문에 제사를 거부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행전 5:29) 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사를 강요하는 부모님께는 정중하게 성경적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효도는 제사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제사 문제로 인해 가족 간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점쟁이와 하나님의 차이: 누가 미래를 주관하는가?
점쟁이는 미래를 '예측'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점쟁이는 제한된 정보와 경험에 의존하여 미래를 추측할 뿐이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점쟁이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점쟁이에게 미래를 묻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점쟁이의 예언은 '불안'을 조장하고 '두려움'을 심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에게 액운이 닥칠 것이다", "당신은 불행해질 것이다" 와 같은 부정적인 예언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점에 더욱 의존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과 '평안'을 줍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 하는 것이라" (예레미야 29:11)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미래를 계획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십니다.
점쟁이는 '운명론'에 기반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자유 의지'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점쟁이는 우리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으며, 우리의 선택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우리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점쟁이는 '일시적인 위로'를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점쟁이의 예언은 현실의 어려움을 잠시 잊게 해줄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며,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위로를 쫓는 대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실수해도 괜찮다: 하나님의 섭리와 요셉의 이야기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오히려 그 실수를 통해 우리를 성장시키고 연단시키십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미래를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는 오늘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6-7) 와 같이 현재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강조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기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도서는 이러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실수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구덩이에 빠지고 노예로 팔리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형들의 행동은 명백한 '실수'이자 '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가뭄으로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은 후에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다가 넘어지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향하고, 그 길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를 '디딤돌'로 바꾸셔서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사탄을 내쫓는 효과적인 방법: 초기 기독교와 한국 교회의 사례
사탄을 내쫓는 방법은 단순히 주문처럼 외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한국 초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탄을 쫓아내는 진정한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사탄을 이기는 더 강력한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와 같은 직접적인 축귀(逐鬼)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예배, 찬양, 말씀, 그리고 이웃 사랑과 같은 방법들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주문을 외우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사탄을 쫓아내는 더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사탄은 발붙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30-31) 는 말씀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탄을 쫓아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실제로 주후 1-2세기 지중해 지역의 역사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이방 종교를 믿던 사람들과 달리, 기독교인들만이 가난한 자들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먹이는 등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들의 삶 자체가 복음이었고, 사랑의 실천이 사탄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한국 초기 교회의 축귀 역사 역시 비슷한 맥락을 보여줍니다. 초창기 선교사들은 한국에 와서 무속신앙과 토속 문화가 혼합된 한국 사회의 영적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무당굿이 성행하고, 질병의 원인을 귀신 탓으로 돌리는 등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했죠. 하지만 선교사들은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손씻기 운동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고, 위생적인 생활 습관을 가르치는 등 당시 한국 사회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데 힘썼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뜨거운 신앙 열정은 선교사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특히 '사경회'는 한국 교회 부흥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한 달 동안 한 곳에 모여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사경회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의 사랑은 한국 교회 초기 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한국 초기 교회는 '장시간 기도'를 통해 축귀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축귀 현상을 보면서, 서양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역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오랫동안 기도하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섬기는 과정에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진정한 축귀는 단순히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말로 하는 축귀 vs. 사랑의 실천: 무엇이 사탄을 쫓아내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초기 한국 교회가 보여주었던 '사랑과 헌신'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많은 교회들이 축귀를 '현상'에 치우쳐 바라보고, 안수기도를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지만, 그것이 축귀의 '전부'는 아닙니다. 진정한 축귀는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변화'에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는 주문 대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사탄이 물러간다'는 고백을 하게 된 이유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것이 사탄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감사'를 빼앗고, '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감사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고, 사랑을 잃어버리면 이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탄은 바로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를 공격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인색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는 믿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기꺼이 나누고 베풀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감사'와 '은혜'를 잊지 않는 삶입니다. 감사와 은혜로 충만한 삶은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의지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드리면 자신의 의지로 사탄을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만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묵상하고 지키면 의지로 사탄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감사와 사랑: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힘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속에 '불평', '불만',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의 감사를 앗아가고, 사랑을 식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감사'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불행하게 느껴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불평과 원망, 그리고 절망만이 남게 됩니다.
반대로 '감사'는 사탄의 공격을 막는 강력한 방패가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며,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감사는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역시 사탄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미움과 분열로 몰아가려고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덮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공동체를 굳건하게 만들며,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사랑은 사탄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회복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매일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사탄은 우리를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은 우리의 영적인 면역력을 강화시키고,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강력한 갑옷과 같습니다.
공동체의 중요성: 함께 싸워나가는 영적 전쟁
우리는 혼자서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끊임없이 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하지만 '공동체'와 함께라면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며,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연약함을 붙들어주며,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축귀를 할 때, 한 사람을 위해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공동체의 사랑과 긍휼, 그리고 간절한 기도는 귀신을 쫓아내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공동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영성 훈련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사랑과 연합은 사탄의 공격을 막는 강력한 방어막이 됩니다.
'새롭게하소서'와 같은 프로그램은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입니다. 다양한 간증과 삶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간증은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또한 '새롭게하소서'는 참여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는 공동체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함께 영적 전쟁을 싸워나가야 합니다. 혼자서는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공동체와 함께라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우리의 영적인 '가족'이며, 함께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동역자'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쟁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권세는 이미 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사탄의 유혹과 공격에 직면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공동체의 사랑과 기도로, 능히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할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말씀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체와 함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