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마비 극복한 치과의사 이규환 교수 감동 신앙 고백
신앙과 투지로 일군 기적: 전신마비 치과의사 이규환 교수 감동 실화
[최.초.공.개] 세계 최초 전신마비 치과의사의 신앙고백: 분당서울대병원 이규환 교수, 새롭게하소서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오늘 정말 특별한 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주영훈 님의 소개로 시작된 오늘 방송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지만,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복하고, 세계 최초 전신마비 치과의사가 되신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이규환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삶의 벼랑 끝에서 다시 일어선 그의 감동적인 신앙 고백을 통해, 우리 삶에 깊은 울림과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규환 교수님은 수많은 방송 출연 요청을 고사하셨다고 하는데요, 오늘 귀한 시간을 내어주시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고 합니다.
이규환 교수님은 겸손하게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단지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송 출연을 요청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새롭게하소서 팀의 끈질긴 설득과 진정성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작가님의 "힘든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이야기만 그대로 해달라"는 요청에, 용기를 얻어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송 출연이 처음이라 다소 긴장하신 듯했지만, 이내 편안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셨습니다. 주영훈 님의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시죠?"라는 질문에, 이규환 교수님은 "어깨 밑으로는 감각이 없고,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지만, 어깨와 팔꿈치 일부는 움직일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매우 섬세하고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인데,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불가능은 없다, 지독하게 하면 길이 생긴다" 이규환 교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왔습니다. "대단한 게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의 손은 일반적인 손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과 상처가 가득합니다. 이는 수많은 실패와 노력을 통해 얻은 '영광의 상처'라고 표현했습니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는 그는, 세계 최초로 자신만을 위한 특수 치과 기구를 개발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잡을 수 없는 기구를, 팔과 어깨의 움직임만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맞춤 제작했습니다. 이동의 어려움과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술기 연마에 매진했습니다. "눈 감고도 어느 정도 깊이로 치료해야 하는지, 어떤 각도로 기구를 사용해야 하는지" 몸으로 체득할 정도로 맹렬하게 훈련했습니다. 수많은 반복 훈련 끝에, 그는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의 치과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를 회상하며, 이규환 교수님은 "188cm의 건장한 체격에 운동도 잘하고,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것이 완벽했던 삶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수영장에서 다이빙 사고로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얕은 물에 다이빙하다가,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목이 꺾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사고 직후 정신을 잃었고, 일주일 가까이 중환자실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한 채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머리는 맑았지만,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고 그는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떠올렸습니다. "꿈이라고 믿고 싶었고, 수면제를 계속 요구하며 잠들려고 애썼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기도는 절규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제발 살려달라, 예전처럼 돌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은 없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그는 "제발 죽여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자살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절망은 분노로 바뀌었고, 신을 원망하고 저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환자실에서의 한 달은,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정신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겪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간호사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이것이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간호사가 10분씩 책을 읽어주었지만, 그는 3교대로 근무하는 간호사들에게 30분씩, 하루 2시간 정도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정신은 멀쩡했기에 책을 통해 위안을 얻고 싶었다"고 합니다. 성경뿐 아니라, 소설, 만화책, 인터뷰 기사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긍정적인 내용의 인터뷰 기사들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TV 출연은 고사하지만, 강연이나 인터뷰는 거절하지 않는 이유도, 과거 인터뷰 기사를 통해 힘을 얻었던 경험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책과 기사를 통해 조금씩 희망을 발견했고, "어차피 죽을 수도 있는데, 후회 없이 살아보자"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복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학 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과 변함없는 학교의 모습은 그에게 큰 괴리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사고 전에는 활발했던 그는, 휠체어를 탄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나만 변했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시설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더욱 어려움이 컸습니다. 동기들과 교수님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쉽게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기들과 선후배, 교수님들의 도움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손과 발이 되어준 동료들 덕분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치과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예수님 말씀처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치과의사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 같다" 그는 치과의사가 되는 것이 '천명'이라고 생각했고, 불가능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학을 강행했습니다. 교수님들조차 "졸업해도 뭘 할 수 있겠냐"며 만류했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변의 반대와 불가능하다는 평가가, 그의 투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일부 교수님들은 "법조계에는 척수마비 장애인 선례가 있으니, 법대로 가라"며 현실적인 조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되는 길"이 아닌, "하고 싶은 길"을 택했습니다. 이론 수업은 가능했지만, 실습이 큰 문제였습니다. 특히 치과 실습은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한 손기술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손에 맞게 특수 제작된 치과 기구를 개발했습니다. 업체와 협력하여,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팔과 어깨의 움직임만으로 조작 가능한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홍보 효과도 있어, 업체에서도 흔쾌히 제작에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독하게 버티고 노력하면, 길이 생긴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기구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기구를 놓치거나 떨어뜨려 다치는 일도 많았습니다.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는 수없이 많은 연습을 반복했습니다. 수만 번의 반복 훈련을 통해, 눈을 감고도 기구의 위치와 깊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몇 배, 아니 10배 더 노력해야 했다"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비장애인보다 10배 더 노력해야, 겨우 인정받을 수 있다"는 그의 말에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과 생활은 아침 9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장시간 강의와 실습을 견뎌내는 것은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수반했습니다. "몸이 버티지 못하고, 골반과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귀가하던 중 기절했고, 병원에서 패혈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욕창을 방치하여, 엉덩이 살이 썩어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CT 촬영 결과, 엉덩이에 주먹 두 개 크기의 구멍이 생겼고, 뼈가 감염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당장 수술이 필요했지만, 수술 후 3개월 동안 엎드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습니다. "휴학은 곧 포기를 의미했기에, 절대 그럴 수 없었다"고 그는 당시 절박했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담당 교수에게 간절하게 매달려, 방학 한 달 동안만이라도 수술을 미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방학 동안 오전 수업이 없으니, 오후 실습만이라도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수는 "무식한 놈"이라며 혀를 찼지만, 그의 간절함에 결국 항생제와 진통제를 투여하며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그는 하루하루를 버텼고, 방학 후 바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절대 저처럼 무모하게 따라 하지 마세요" 그는 방송을 시청하는 장애인들에게, "맨몸으로 시작하지 말고, 반드시 선배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배우라"고 조언했습니다. 자신은 세계 최초였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장애인 의사, 법조인 등 다양한 분야에 선배들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 헬멧을 쓰고 헤딩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는 비유를 통해, 선배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규환 교수님의 어머니는 아들이 의대에 합격했을 때, 하늘을 나는 듯 기뻤을 것입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는,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잘 키운 아들이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모님께는 청천벽력과 같았을 것"이라고 주영훈 님은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은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덤덤하게 저를 격려해주셨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부모님께, 그리고 가족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그는 기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기도만이 유일한Hope and solace였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욕창이 심할 때는 욕창이 낫게 해달라고, 통증이 심할 때는 통증을 줄여달라고, 수술할 때는 수술이 잘 되게 해달라고" 순간순간 필요한 것들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원망하고 저주했던 하나님에게, 그는 어느 순간 기대를 걸게 되었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기도는 유일한Hope and 의지처였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학사 과정도 어려웠지만, 그는 대학원까지 진학했습니다. "장애인 치과의사로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대학원 진학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비장애인과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 10배 이상 노력해야 한다" 그는 강연에서 항상 이 말을 강조합니다. 비장애인이 1시간 노력한다면, 장애인은 10시간 이상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학회에 참석하며, 자기계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것 같다"고 그는 굳게 다짐했습니다. 일반 의사보다 10배 더 뛰어난 실력과 경험을 갖춰야, 비로소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그의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국내 최고 대학병원 중 하나인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 취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100군데 가까이 지원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고 그는 회상했습니다. "장애인 치과의사를 누가 쓰겠냐는 생각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그는 언젠가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고,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했습니다.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치과의사로서 20년이 넘는 경력을 쌓았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환자를 진료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환자들의 냉대와 편견에 상처받기도 했습니다. "병신이 진료하냐", "내가 병신에게 진료받으려고 왔냐"는 욕설과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침을 뱉고 가는 환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친절하고 꼼꼼하게 환자를 진료하며, 실력으로 편견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저는 느리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정확하고 꼼꼼하게 진료하겠습니다" 그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했고, 실제로 그의 진료는 매우 꼼꼼하고 세심하다고 합니다. 6개월 정도 지나자, 환자들은 그의 진료를 입소문으로 칭찬하기 시작했고, 일부러 그를 찾아오는 환자들도 늘어났습니다. 지금은 병원에서도 인정받는 교수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반 교수보다 10배 더 노력하며,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겸허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지금은 치과의사로서,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제든 신이 다른 길을 제시한다면, 기꺼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다시 살려주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그의 고백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고 싶다. 다시 살려주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열심히 살아가겠다" 그는 마지막으로 힘찬 포부를 밝혔습니다. 이규환 교수님의 이야기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불가능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입니다.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신앙의 깊이를 더하게 해줍니다. 주영훈 님은 "환자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의사",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의사"라고 이규환 교수님을 칭찬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의 어려움 속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자문하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규환 교수님의 삶은, 고난 속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만약 그가 사고 없이 평범하게 치과의사가 되었다면, 오늘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그는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명의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에게는 "기적을 이룬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규환 교수님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입니다. 특히, 중환자실에서 삶의 끈을 놓으려는 환자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규환 교수님을 통해, 앞으로도 더 많은 기적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을 나눠주신 이규환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새롭게하소서 팀은 앞으로도 이규환 교수님을 위해 기도하며 응원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