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엄마의 특별한 인연과 위탁가정 이야기, 사랑의 성장
## 천사 엄마의 세 번의 특별한 인연
영하 10도의 강추위, 이 한편으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ㅣ배은희 작가ㅣ새롭게하소서
20대, 지적 장애 시설에서의 첫 경험: 낯섦과 마주한 용기
저는 20대 초반, 미술학원 유치부 강사로 일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노란 학원 버스를 타고 늘 지나치던 지적 장애 시설 앞에서 묘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높은 철조망 너머로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원생들이 밖을 향해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처음에는 솔직히 두렵고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매일 그 앞을 지나면서, 점점 그들의 간절한 시선과 굳게 닫힌 철문이 마음속에 깊이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보았는데요, 놀랍게도 한 원생이 환한 웃음과 함께 손을 맞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무지개가 뜬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그 시설 안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1년간, 시설에 들어갈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고, 마침내 큰 가방 하나를 싸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지적 장애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는데요, 당시 열악했던 시설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으며, 작은 방에 15명의 원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배정받은 방은 며칠째 선생님이 없어 방치된 곳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며칠 묵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함께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한 아이는 자폐 증상으로 소리를 지르며 여성용품을 꺼내 들고 있었고, 방바닥에는 붉은 혈흔이 낭자했습니다. 20대 초반의 저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함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며칠 밤낮을 고민하며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점차 그들의 세상 속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는데요, 함께 밥을 먹고, 장난치고, 잠들면서, 서툴지만 진심으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침 알람 소리에 맞춰 아이들을 깨워 식당으로 향하고, 식판을 챙겨 밥을 먹이고, 흘린 음식물을 닦는 일상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저는 그 속에서 묘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특히, 말조심해야 하는 상황도 많았는데요, 봉사활동 중 원생에게 나이를 묻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50대 원생을 "언니"라고 부르는 등,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그들의 작은 변화와 성장에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비록 한 달에 2박 3일의 짧은 외출만이 허락되었지만, 저는 매번 외출 때마다 원생 한 명을 데리고 나가 바깥세상을 경험시켜 주려 노력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슈퍼마켓에 들러 간식을 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아이들은 즐거워했고, 저 또한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제가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심을 이해해주셨는데요, 제가 첫 휴가를 받아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는 당황하면서도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늘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실천하셨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란 저는 자연스럽게 나눔의 기쁨을 배웠습니다. 지적 장애 시설에서의 경험은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과 작은 성장은, 그 모든 어려움을 잊게 할 만큼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제가 그토록 행복했던 이유는, 바로 "성장"을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는데요, 저는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그곳에서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아버지 사업 실패와 무용 포기라는 잇따른 좌절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지적 장애 시설에 들어가기 전, 힘든 마음에 길을 걷다 문득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걷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후, 저는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고, 지적 장애 시설에서의 봉사는, 제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시작, 그리고 두 번째 인연: 보육원 아이들과의 특별한 만남
지적 장애 시설에서의 봉사 이후, 저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제주도로 이주했습니다. 제주에서 독서 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우연히 제주 보육원에서 독서 치료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 저는 또 다른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00여 명의 아이들이 생활하는 보육원은, 지적 장애 시설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지만, 아이들의 순수함과 밝은 에너지는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제가 맡았던 4명의 아이들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는데요, 다양한 학년으로 구성된 그 팀은, 저에게 더욱 세심한 관심과 사랑을 쏟도록 이끌었습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 사업으로 6개월간 진행된 독서 치료 수업은 짧았지만, 저는 아이들과 정을 나누며, 6개월 후에도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수업 준비와 진행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저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명절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오히려 명절 당일이 가장 외롭고 소외될 수 있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설날에 함께 떡국을 끓여 먹고 윷놀이를 하자고 제안했고, 아이들은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시설장님의 허락을 받아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명절을 보내면서, 보육원 아이들과 더욱 깊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명절뿐 아니라, 주말에도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들은 점차 밝고 긍정적으로 변화했습니다. 특히, 요리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함께 쿠키나 떡볶이 등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던 경험은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보육원 아이들과의 인연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요, 아이들은 성장해서도 종종 연락을 해왔고, 독서 치료 수업을 통해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며, 저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 꼭 작가님께 독서 치료를 받고 싶다는 아이들의 말은, 제게 큰 감동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보육원 봉사활동을 통해, 저는 또 한 번 "나눔의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명절이나 주말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대신,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오히려 더 큰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밝은 웃음은, 제 삶의 활력소가 되었고, 봉사활동을 통해 저 또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보육원 아이들과의 인연은, 제가 세 번째 인연, 즉 가정 위탁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인연, 운명처럼 다가온 천사: 가정 위탁 엄마가 되다
지적 장애 시설 봉사와 보육원 봉사, 두 번의 소중한 인연을 통해, 저는 막연하게 "입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입양은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는데요, 결혼 20년 만에 작은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비로소 입양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아파트였지만,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온 가족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 행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이 좋은 집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입양에 대한 꿈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입양은 여전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기에, 우선 "가정 위탁"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지역 신문에서 우연히 "사랑의 위탁 부모가 되어주세요"라는 문구를 발견했고, 그 문구는 마치 저를 부르는 듯했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당시 저는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편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가정 위탁에 대한 궁금증이 끊임없이 샘솟았는데요, 결국 저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정 위탁 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가정 위탁은 입양과는 달리, 친가정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친부모의 일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양육이 어려운 아이들을, 일정 기간 동안 가정에서 보호하는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입양과는 다르네? 친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처음에는 다소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정 위탁이라는 제도에 깊이 끌렸는데요, 알면 알수록, "지금 당장 위탁 부모가 될 수 없을지라도, 교육이라도 받아보자"는 생각에 이르렀고, 제주 가정위탁지원센터에 교육을 신청했습니다.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가정 위탁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자격 조건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안정, 건강, 위탁 부모와 아동의 나이 차 제한, 추천서, 정기 교육 이수 등 다양한 조건들을 충족해야 했고, 특히 "종교 강요 금지" 조항이 눈에 띄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저는, 종교 강요 금지 조항에 대해 잠시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강요하지 않아도, 아이가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를 접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오히려 "믿는 가정이 가정 위탁을 통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신앙을 전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가정 위탁 교육을 수료하고, 위탁 과정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정위탁지원센터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7살 남자아이를 긴급하게 위탁해야 한다는 연락이었는데요, 남편과 상의 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결정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거절했던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걱정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내가 거절한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밤새도록 마음이 무거웠고, 몸살처럼 온몸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면서, 저는 "앞으로 어떤 아이든, 조건 없이 품에 안아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얼마 후, 기적처럼 지금의 딸, 은지가 저희 가족에게 왔습니다. 위탁센터에서 11개월 된 여자 아기 은지에 대한 연락을 주셨는데요, 미혼모 시설에 거주하는 엄마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에, 솔직히 망설여졌습니다. "이번에도 감당할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과, "어떤 아이든 받아들이겠다"는 결심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결국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센터에 요청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하며 은지를 맞이할 준비를 했고, 일주일 후, 기적처럼 온 가족이 은지를 품에 안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수없이 자문했지만, "가족들이 함께라면, 그리고 주변의 응원과 지지가 있다면,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마침내 위탁센터에 연락해 은지를 만나러 가기로 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은지를 기다렸습니다. 곰돌이 인형을 미리 준비하고, 은지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저는 이미 은지의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천사와의 첫 만남, 그리고 8년간의 기적 같은 동행
드디어 은지를 만나는 날, 눈발이 흩날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슴은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미혼모 시설 "땡땡원"이라는 낡은 건물 앞에서, 저는 왠지 모를 긴장감과 함께 유리문을 밀고 면회실로 들어섰습니다. 여고생처럼 앳된 엄마가 통통한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은지였습니다. 첫 만남은 어색하고 조심스러웠지만, 은지의 맑고 순수한 눈망울을 보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벅찬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조심스럽게 은지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요, 헤어지기 직전, "왠지 한 번 안아봐도 될까요?"라고 조심스럽게 여쭈었고, 은지 엄마는 망설이는 듯했지만, 마침내 은지를 제 품에 안겨주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은지의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볼, 맑은 눈빛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지 엄마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왠지의 불안하고 슬픈 표정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은 무거웠지만, 왠지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2~3주 후, 드디어 은지가 저희 집으로 오게 되었고, 온 가족은 갓 태어난 아기를 맞이하듯, 왠지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쏟았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순둥이처럼 잘 놀던 은지는, 밤이 되자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배를 내밀고 온몸을 비틀며 6시간 넘게 울음을 멈추지 않았는데요, 젖병을 물려도, 기저귀를 갈아줘도, 달래도 소용없었습니다.
3일 밤낮으로 계속되는 울음 속에서, 저는 비로소 은지가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감과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미혼모 시설에서 나올 때, 은지 엄마가 손목에 채워준 실 팔찌를 보며, 왠지가 엄마의 따뜻한 품과 익숙한 냄새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왠지를 더욱 따뜻하게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왠지의 불안감을 해소해주려 노력했습니다. "은지야, 낳아주신 엄마도, 길러주신 엄마도 있으니, 넌 두 배로 행복한 아이야"라고 끊임없이 말해주었습니다.
당시 20살이던 큰딸과 중2병에 걸린 둘째 딸 또한, 왠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는데요, 특히 둘째 딸은, 왠지 때문에 엄마의 관심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왠지를 살뜰히 챙기며 동생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엄마, 은지 그냥 우리 딸로 키우면 안 돼요?" 둘째 딸의 진심 어린 말은,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시작된 육아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왠지의 웃음과 재롱은, 모든 고통을 잊게 할 만큼 큰 행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아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밤새 칭얼거리는 은지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젖병 소독, 기저귀 갈기, 이유식 만들기 등 끝없는 육아에 지쳐갔습니다. 예전처럼 자유롭게 외출하거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할 시간조차 없었고, 점점 초라해져 가는 제 모습에 우울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할 때조차,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차림으로 유아실에 앉아 예배를 드려야 했고, 밖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를 들으며, "내가 이러려고 왠지를 데려왔나?"라는 회의감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리던 중 문득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왠지를 돌보는 이 자체가 예배"라는 사실을요. 유아실에서 땀 흘리며 왠지를 안고 달래는 모습, 헝클어진 머리와 잠옷 차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평안과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그 후, 저는 더 이상 형식적인 예배에 얽매이지 않고, 왠지를 돌보는 모든 순간을 예배처럼 여기며 감사함으로 감당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가를 자장가처럼 불러주고, "지혜와 지식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왠지를 향한 사랑과 헌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왠지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기도하는 모습, 찬송가, 성경 이야기 등을 통해, 왠지는 자연스럽게 신앙을 받아들이고, "기도해 주세요"라며 옹알이하는 모습은, 제게 큰 감동과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왠지가 6살이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서 성교육을 받고 돌아온 왠지는, "엄마도 왠지 임신했을 때 배가 뚱뚱했었냐?"고 물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왠지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진실을 말해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왠지야, 엄마는 왠지를 배 아파 낳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 낳았어"라고 말하며, 왠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습니다.
"엄마 배가 뚱뚱해서 낳지는 않았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목이 메어왔습니다. 왠지를 키우면서 겪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그 모든 고통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산고 없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듯이, 고통 없이는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없는 걸까?" 왠지의 질문을 통해, 저는 비로소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와 깊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날 밤, 잠든 왠지를 보며, 앞으로 왠지가 궁금해할 때마다, 왠지의 눈높이에 맞춰, 왠지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따뜻하게 설명해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설명으로 왠지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 왠지는 비로소 자신의 출생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위탁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왠지는 친엄마를 만나기도 했는데요, 친엄마와의 만남을 통해, 왠지는 자신이 두 엄마, 두 아빠를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왠지에게 친엄마를 "땡땡땡 엄마", 저를 "배은희 엄마"라고 부르도록 했고, 왠지는 자연스럽게 두 엄마를 받아들이고 사랑했습니다.
친엄마와의 첫 만남은, 왠지가 7살 되던 해, 왠지가 저희 집에 온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가정위탁지원센터를 통해 친엄마가 왠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이미 왠지에게 깊이 정이 들었고, 왠지는 제 삶의 전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친엄마를 만나게 해줘야 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가정위탁 제도는 친가정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쉽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입양할 걸 그랬나?"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왠지에게 친엄마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왠지야, 낳아주신 엄마 만나러 갈 거야"라고 말하며, 왠지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왠지에게 친엄마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도록 격려하고, 예쁜 옷을 입혀 함께 친엄마를 만나러 갔습니다. 하지만 왠지는 친엄마를 "하얀 옷 입은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친엄마를, 왠지는 엄마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왠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래, 하얀 옷 입은 언니 만나고 왔구나"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유치원 졸업 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왠지는 다시 친엄마를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이번에는 먼저 친엄마에게 연락해 만남을 요청했고, 친엄마가 생활하는 시설 마당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습니다. 유치원 졸업 앨범과 왠지가 직접 만든 카드를 친엄마에게 전달하며, 왠지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친엄마는 왠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친엄마의 눈물 속에서, 저는 왠지를 향한 깊은 모성애를 느낄 수 있었고, 친엄마 또한 왠지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왠지 예쁘게 키워줘서 고맙다"는 친엄마의 말에, "저희가 같이 키우는 거예요"라고 답하며, 왠지를 함께 키워나가자는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왠지와 친엄마는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헤어지기 위해 돌아서는 순간, 왠지가 갑자기 창문을 열고 "엄마 아프지 마"라고 외치는 모습은, 제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갓 8살 된 꼬마아이의 입에서 나온 "엄마 아프지 마"라는 말은, 핏줄의 강렬한 이끌림과, 왠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위탁 엄마로서 제 역할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왠지와 친엄마 사이의 혈연을 이어주는 존재, 혈연과 혈연을 잇는 소중한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요. 그 후, 저는 왠지에게 "두 엄마, 두 아빠"를 가진 아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왠지가 두 배로 행복한 아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저는 왠지를 "지켜진 아이", "건져진 아이"라고 부릅니다. 친부모님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왠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위험한 상황에 놓였었지만, 가정 위탁 제도를 통해 안전하게 보호받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왠지를 볼 때마다, 저는 성경 속 모세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모세처럼, 왠지 또한 역경을 딛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가정 위탁 제도는, 마치 "갈대상자"와 같습니다. 학대와 방임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현대판 "갈대상자"인 것입니다. 저는 왠지를 통해, 가정 위탁 제도의 소중함과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정 위탁에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왠지와 언젠가 헤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가정 위탁은, 입양과는 달리, 일정 기간 동안 아이를 보호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왠지가 언젠가 친가정으로 돌아가거나, 시설로 옮겨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큰딸을 라오스로, 둘째 딸을 사회학과로 독립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녀는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왠지와의 이별 또한, 언젠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5살이든, 20살이든, 왠지가 떠나갈 때가 되면, 웃으며 축복해주자"고 다짐하며, 왠지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 위탁 제도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2003년 한국에 도입된 가정 위탁 제도는, 혈연 중심 사회 분위기와, 위탁 부모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위탁 부모들조차, "가정 위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꺼려하고, 오히려 편견과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 받고 아이를 키운다", "정 떨어지면 버릴 거다"는 등의 비난과 오해는, 위탁 부모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를 키우면서,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과 오해가 얼마나 큰 폭력이 될 수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가정 위탁 제도에 대한 무지는, 아이들과 위탁 가정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가정 위탁 제도는, 여전히 개선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위탁 아동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하고, 의료, 교육 등 지원 부족, 사회적 인식 부족 등 다양한 문제점들이 존재합니다. 위탁 아동은 주민등록등본에 "동거인"으로 표기되고, 의료보험, 통장 개설, 휴대폰 개통 등 일상생활에서도 불편함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정 위탁 제도는, 학대와 방임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입니다. 가정 위탁 제도는, 단순한 보호를 넘어, 아이들에게 사랑과 안정, 행복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왠지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두 딸 또한 왠지를 통해 성장하고 변화했습니다. 큰딸은 라오스에서 국제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고, 둘째 딸은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사회적 약자를 돕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두 딸 모두, 왠지를 통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과 헌신적인 마음을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처럼, 왠지는 저희 가족에게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날, 둘째 딸이 쓴 편지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엄마는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 "엄마처럼 좋은 딸이 되고 싶다"는 딸의 진심 어린 고백은, 지난 세월의 어려움을 잊게 할 만큼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세 자녀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며, 왠지에게 "엄마는 왠지 엄마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왠지의 엄마로 살아갈 것이고, 왠지와 함께 성장하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힘든 육아였지만, 기쁨이 천 배 더 컸기에, 왠지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정 위탁 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가정 위탁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도, 가정 위탁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긍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지는 폭력과 같습니다. 가정 위탁 제도에 대한 무지는, 아이들과 위탁 가정을 더욱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정 위탁 교육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고, 가정 위탁 제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 위탁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과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가정 위탁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 위탁에 대한 작은 관심과 참여가, 학대와 방임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큰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1577-1406으로 전화하시면, 가까운 가정위탁지원센터에 연결되어, 가정 위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정 위탁에 대한 문의와 관심은, 곧 사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