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 탈출, 천국을 찾다: 김보빈 집사의 파란만장 탈북 스토리
처음 듣는 탈북 스토리: "북한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 김보빈 집사, 새롭게 하소서
오늘, 여러분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특별한 탈북 스토리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새롭게 하소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신 김보빈 집사님의 간증은, 북한 주민들의 현실과 그들이 겪는 고난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흔히 접하는 북한 뉴스는 오물 풍선이나 김정은 관련 소식이 주를 이루지만, 김보빈 집사님의 이야기는 뉴스 뒤에 가려진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삶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아니 영화조차 담아낼 수 없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영화 "통일 로라"의 주인공이자 새결교회 집사님으로, 오늘 귀한 발걸음을 해주셨습니다. 주영훈 님, 수지 님, 정복 님 세 분의 진행자와 함께 김보빈 집사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진행자분들도 북한 소식을 뉴스로만 접하며 북한 주민들의 실제 삶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언급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지구상 유일하게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북한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더욱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는데요, 김보빈 집사님 역시 탈북 후 북한의 현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셨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못 사는 나라들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만, 북한은 군에서 군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통제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며 북한의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현재 김보빈 집사님은 "통일 드라이브"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통일 드라이브"는 단순히 세상적인 협동조합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정착하며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공동체라고 소개했는데요, 받기만 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스스로 기자(일어서는 사람)가 되어 다른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돕는 버팀목이 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공동체의 이름에 "통일"과 "고향집"의 의미를 담아, 통일을 염원하며 고향에 돌아가는 마음으로 양평에 자리 잡았다고 하는데요, 양평을 거꾸로 하면 평양이 되는 점을 언급하며 재치 있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새결교회 주경배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으며, 신앙과 삶이 하나 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합니다. 삶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고, 일하는 사람도 예배를 통해 신앙을 함께 성장시켜 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탈북하신 지 12년, 2012년 6월 1일에 사랑하는 딸과 함께 대한민국에 오셨다고 합니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에서 생활하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요, 탈북민들의 간증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진행자의 언급처럼, 김보빈 집사님의 삶 역시 파란만장했습니다. 본격적으로 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요, 당시 북한 주민들이 겪었던 굶주림과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80년대에는 비교적 괜찮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90년대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상했습니다. 6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나 가난한 가정 환경 속에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요, 새 옷 한번 제대로 입어보지 못하고, 늘 물려 입는 옷과 신발 속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특히, 셋째 언니보다 키가 작아 늘 셋째 언니 옷을 물려 입어야 했던 설움, 넷째 딸을 "웃음딸"이라고 부르지만 자신은 "썩은 딸"처럼 느껴졌던 어린 시절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오늘날의 김보빈 집사님을 단단하게 만들어준 훈련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습니다.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 옥수수 배낭을 메고 집집마다 생선을 팔았던 경험은 정말 놀랍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겪어야 했던 고생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김보빈 집사님은 부끄러움 없이 생계를 위해 궂은 일을 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언니들은 겪어보지 못했던 고난을 홀로 감당해야 했고, 20살 넘어 결혼한 언니들은 밥 한 끼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시집갈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가정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선과 옥수수를 물물교환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한국의 6, 70년대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어르신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고생이 오늘의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회상하는 모습에서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20살이 넘어 성인이 되어서는 양치기 소녀, 양방목공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양방목공"이라는 직업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봐 부연 설명했는데요, 여기서 "양"은 짐승 양(羊)이 아닌, 볕 양(陽)을 의미하며, 산에서 양지바른 곳에서 방목하는 일을 뜻한다고 합니다. 양방목공 일을 하다가 친구 승모의 도움으로 장사를 시작, 샛별에서 청진까지 양파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언니들이 시집갔지만, 알코올 중독 남편들을 만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남은 아버지와 동생들을 걱정하며 자신이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지만,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가기로 결심한 이야기는 감동을 자아냅니다. 결혼을 한 달 앞둔 2월 19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했다고 하는데요, 결혼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희생정신이 느껴집니다.
중국으로 넘어가 돈을 벌려 했지만, 오히려 더 큰 고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결혼을 앞두고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결혼 자체를 하지 않고 중국으로 간 것이라고 정정했는데요, 승모가 한 달만 돈을 벌어오면 가족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설득하여 중국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해서 15일 동안 꼼짝 못하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민을 신고하면 5,000 위안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브로커들이 탈북민들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탈북민들을 이용하는 브로커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5일 후, 버스를 타고 길림성 매하구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다시 길림성 려원이라는 곳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인신매매라는 충격적인 단어가 등장했는데요, 김보빈 집사님은 일하러 간다고 생각했지만, 브로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것입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갈 때 브로커에게 3천 위안, 중국 브로커에게 12,000 위안이라는 거액이 오갔다는 사실은 인신매매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여줍니다. 자신의 몸값이 얼마인지조차 모른 채 팔려갔다는 사실은 더욱 안타깝습니다.
농촌으로 팔려간 김보빈 집사님을 동네 사람들이 원숭이 보듯 구경했다고 합니다. 북한 사람을 처음 보는 시골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겠지만, 김보빈 집사님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신매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애를 낳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끌려가고, 동네 의사가 집으로 찾아와 하체를 검사하는 수치스러운 일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왔지만, 인신매매로 팔려와 씨받이 취급을 받는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바지를 벗겨 하체를 검사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중국어를 전혀 몰랐던 김보빈 집사님이 처음으로 기억했던 중국어가 "메이어(없다)"라는 단어였다고 하는데요, 자신의 인권과 존엄성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느꼈던 절망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김보빈 집사님은 3일 동안 굶고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전통 편이라는 약을 한 줌 먹고, 샤워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죽음을 기다렸지만, 깨어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다시 쥐약을 먹었지만, 또 다시 병원에서 깨어났습니다. 세 번째로 세제를 마시는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지만, 결국 또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죽음 앞에서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악착같이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며 분가를 감행했다고 합니다.
분가 후에도 경찰의 단속은 계속되었고, 닭장, 개장, 심지어 물독까지 숨어 다니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분가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는데요, 중국 농촌에서는 아들이 결혼하면 부모와 함께 살지만, 셋째 며느리였던 김보빈 집사님은 시부모와 분리되어 따로 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끊임없는 단속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임신을 하게 됩니다. 2004년 4월 26일, 출산을 10일 앞두고 11명의 경찰이 들이닥쳐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협박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특히 신분이 없는 탈북 여성의 출산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강제 낙태의 위험에 직면했던 상황은 정말 끔찍합니다. 함께 살던 탈북 여성들 중에는 임신 3, 4개월 만에 강제 낙태 수술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체격이 커서 임신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 경찰에 발각되어 병원으로 끌려가 강제 낙태 수술을 받게 됩니다. 배에 주사 바늘을 찔러 아이의 머리를 맞춰 죽이는 끔찍한 방법으로 진행된 낙태 수술 과정은 차마 글로 옮기기조차 힘듭니다. 살아있는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고통, 죽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절망감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죽은 아이가 딸이었다는 사실, 탯줄도 끊지 않은 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모습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나라 없는 설움이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북한 속담처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탈북민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때부터 김보빈 집사님은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죽은 딸아이를 통해 북한 사회에 대한 깊은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해본 부모님, 늘 당과 수령만을 외치던 북한 사회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고, 다시 찾아온 새 생명은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하며 어머니의 고향인 중국 서귀포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임산부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탈북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냉대는 어디든 존재했습니다. 결국 2004년 7월, 둘째 딸 설령이를 낳았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시댁 식구들에게 구박을 받았고, 아들을 낳아 바꾸라는 강요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과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지어주지 않고, 북한식 이름으로 "설령"이라고 지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김보빈 집사님의 힘겨웠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딸 설령이가 60일 되었을 무렵, 유모차가 필요하냐는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이 교회였습니다. 교회와의 첫 만남은 유모차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전화하신 분은 같은 탈북민 자매였고, 그 자매가 다니는 교회 집사님이 유모차를 준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예배당이 뭔지도 몰랐고,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김보빈 집사님에게 교회는 낯선 공간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구제소인 줄 알았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에는 토속신앙이나 미신 같은 것을 믿었냐는 질문에, 특별히 믿는 것은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다른 집에서 불을 피워놓고 향을 피우는 모습은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18살 때 꿈에 나타난 산신령 같은 할아버지 이야기가 흥미로운데요, 할아버지가 경성이라는 곳의 절에 가서 책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 못 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미스터리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제야 다리에 힘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더욱 신기합니다. 그 후 할아버지는 매일 밤 꿈에 나타나 다음 날 일어날 일들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무속적인 경험을 했던 김보빈 집사님은 중국에 와서도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점을 치며 살았다고 합니다. 중국어를 못했기 때문에 조선족 언니의 도움을 받아 점을 쳤고, 꽤 잘 맞췄다고 합니다. 점을 쳐주고 돈을 받았지만,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힘들었다고 합니다. 점술 행위로 인한 고통을 겪던 중, 유모차를 받으러 교회에 가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간 날, 십자가를 보는 순간 눈이 이상해지고, 예배당에 들어가자 현금함이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유모차를 받으러 왔지만, 왠지 모르게 20원을 헌금해야 할 것 같았다고 합니다. 당시 20원은 돼지고기 한 근 가격과 맞먹는 큰 돈이었지만, 유모차를 공짜로 받는 것이 싫어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감사 헌금 봉투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삐뚤빼뚤 써서 헌금하는 모습은 순수하고 귀엽습니다. 하지만 예배가 시작되자 전도사님이 계속 김보빈 집사님을 쳐다보며 설교하는 것 같아 불쾌했고, 기도 시간에는 "주여, 죄인을 용서하소서"라는 말에 반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교회 용어와 분위기가 낯설고 불편했던 것입니다. 예배 시간 내내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힘들어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 문밖을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고, 다시 교회에 들어가면 아파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영적인 방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2부 예배, 3부 예배까지 계속되는 예배에 지쳐 유모차만 받고 가려고 했지만, 교회에서 신생아 용품을 가득 챙겨주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합니다. 20원 헌금하고 받은 신생아 용품이 너무 많아 "타산"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오늘만 가고 땡"이라고 생각했지만, 토요일 저녁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유모차를 준 자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자 오히려 초조해졌고, 결국 다음 날 새벽 6시에 교회로 향했습니다. 강렬하게 이끌리는 마음, 설명하기 어려운 이끌림이 김보빈 집사님을 교회로 향하게 했습니다.
다시 교회에 간 날에도 여전히 예배는 힘들었지만, 4주째 되던 날, 자신도 모르게 영접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3주 동안은 뒷자리에 앉아 불편해했지만, 4주째 되는 날에는 맨 앞자리에 나가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머릿속으로는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술로는 죄를 고백하는 모순적인 상황. 하지만 찬송가를 부를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접기도 후, 갑자기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고, 쏟아낸 것은 음식물이 아닌 가래와 같은 이물질이었다고 합니다. 두 시간 동안 울고 토했는데,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고 편안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영적인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후부터 예배가 지루하지 않고 찬송가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으려고 펼쳤지만, 족보와 어려운 이름들 때문에 포기했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보다는 찬송가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 자매들은 토요일마다 한식을 만들어주고 중보기도를 해주었는데, 중보기도가 뭔지도 몰랐던 김보빈 집사님은 경찰 단속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에는 경찰에 잡힐까 봐 돈을 모았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돈 모으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삶의 방식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녁 8시 중보기도 시간에는 미친 신경 환자들만 있는 줄 알았다는 표현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기도 소리를 듣고 무서움을 느꼈지만, 권사님의 설명을 듣고 방언 기도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특별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도사님의 권유로 사도신경, 감사 100번,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지만, 감사 100번은 너무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이 진짜 세다면 나에게도 증거를 보여달라"고 협박하며 40일 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40일 만에 방언이 터지고, 방언의 의미까지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토요일 예배 때 눈물, 콧물 흘리며 방언이 터져 나왔고, 자신의 방언이 어떤 의미인지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신비로운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된 김보빈 집사님은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말씀은 잘 들리지 않았고, 사랑이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냐는 질문에, 영접기도 후 할아버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더 좋았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점술 행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전도사님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설명해주었고, 김보빈 집사님은 하나님이 할아버지보다 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열심히 교회 봉사활동을 하고 성탄절 워십 공연 연습도 했지만, 성탄절 날 갑자기 경찰에 잡혀가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됩니다. 성탄절에 경찰에 잡혀간 이유는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밭 경계를 두고 시댁 식구들과 싸웠는데, 싸움에 진 사람이 앙심을 품고 교회에 다니는 며느리를 신고한 것입니다. 성탄절 연습 중 경찰차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교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김보빈 집사님은 김치 甕 속에 숨었지만 결국 발각되어 경찰서로 연행됩니다. 억울하게 잡혀간 상황, 탈북민 여성의 불안정한 삶을 보여줍니다.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풀려났지만, 시댁 식구들과 함께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이사 간 곳에서 딸 설령이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10일 동안 병원에서도 포기한 딸을 안고 교회 십자가 밑에서 밤새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던 간절한 기도는 감동적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중, 딸 설령이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이 갑자기 "엄마"라고 외치는 순간, 김보빈 집사님은 놀라움과 감격에 휩싸였습니다.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한 것입니다. 딸의 이름을 "설령"이 아닌 "은혜"라고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딸에게 "은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딸 "은혜"는 건강을 되찾았고, 김보빈 집사님은 딸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탈북하여 현재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름처럼, 딸 "은혜"는 김보빈 집사님에게 큰 기쁨과 감사가 되었습니다. 딸 "은혜"는 현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가난과 고난 속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딸은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된 것입니다. 김보빈 집사님은 다섯 자매를 키우면서 겪었던 수많은 상처들을 이야기하며, 한국에 오면 모든 고생이 끝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탈북민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치유 집회에서 "용서"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지만, 종이에 이름을 적어 포도주에 담갔다가 십자가에 못 박는 용서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그런 피상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두 시간 동안 몸부림치며 기도했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의 영역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종이에 용서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십자가에 못 박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했고, 그 순간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용서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용서를 선포한 후,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고, 광야와 같은 한국 생활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향의 부모 형제, 북한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깨닫고, 지금은 사명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며 간증을 마무리했습니다.
김보빈 집사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짧은 시간 안에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굴곡졌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김보빈 집사님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합니다. 수많은 고난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면회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하나님이 24시간 함께 계셔서 그곳이 천국이었다"는 고백이라고 진행자는 언급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경험했다는 김보빈 집사님의 간증은 큰 울림을 줍니다. 북한의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며, 북한에도 하루빨리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진행자 정복 님은 "북한에는 주님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지금도 북한 주민들과 함께하고 계신다"며, 우리가 북한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으며, 북한 주민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쉽게 얻은 복음과 신앙, 자유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목숨 걸고 신앙을 지켜온 북한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 더욱 감사하고 깨어있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대통령이 미국에서 당선된다고 해서 북한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는 진행자의 언급에 공감하며, 문화 콘텐츠를 통해 북한 변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눈물과 고통 속에서 신앙을 지켜온 북한 성도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 통일된 조국에서 김보빈 집사님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을 해주신 김보빈 집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