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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덕만 교수 인터뷰: 삶의 무게와 신앙, 목회와 하나님의 은혜

요약

삶의 무게, 무너진 신학, 다시 은혜

⛵ 요트를 사지 말고 요트 가진 친구를 사귀어라! - 배덕만 교수, 삶의 지혜와 깊이 있는 신앙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특별한 분을 모시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볼 예정입니다. 바로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의 배덕만 교수님인데요, 23년간 교회사를 강의하며 한국 교회 이야기를 주로 해 오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삶으로 실천하는 분이라고 합니다. 목사이자 교수로서, 강단과 현장의 괴리를 몸소 경험하며 얻은 생생한 통찰을 오늘 함께 나눠주실 배덕만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께서는 미래의 목회자들을 강단에서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직접 개척 교회 목회도 하셨는데요, 가르치는 내용과 실제 목회 현장 사이의 간극을 실감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정말 말씀하신 대로 현장과 교회의 간극은 매우 컸습니다. 저는 개척 전에 주로 규모 있는 교회에 다녔었는데, 개척 후 지하 공간에서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기존에 제가 경험하고 교육받았던 교회, 그리고 문제 삼았던 부분들과 실제 지하 벙커 같은 공간에서 만난 성도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곳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환상이나 관념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가르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신앙의 틀, 가르침의 허점이 실제 삶의 교회와 부딪히며 여지없이 부서져 나갔던 것이죠.

그렇군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혼란 속에서 신앙을 이어오셨는지 궁금한데요.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저희 가족은 경기도 고양군에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가난 때문에 친척들의 발길도 끊길 정도였죠. 어느 날, 주일학교 전도사님이 심방을 오셨는데, 공장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께서 심방 예배를 위해 반차까지 내고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릴 적 교회를 다녔지만 오랫동안 못 다니셨는데, 그날 전도사님, 어머니,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도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어머니께서 울기 시작하셨어요. 가난하고 연약하다고 아무도 돌보지 않던 저희 집에 찾아와 따뜻하게 위로하고 기도해 주시는 모습에 어머니께서 감동하신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이었던 저는 그날의 따뜻함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예배 후 어머니께서 장롱 밑에서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 그 여자 전도사님의 따뜻함, 그 모든 것이 어린 제게 예수님의 이미지로 각인되었습니다. 그 따뜻한 느낌을 계속 간직하고 싶어 열심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죠.

교수님께서는 학창 시절 공부도 매우 잘하셨던 것 같습니다. 서울대, 예일대 신학대학원, 듀크대까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어머니의 고생이 컸습니다. 술도 자주 드셨지만, 일요일도 없이 공장에서 특근까지 하시며 힘겹게 생활하셨죠. 제가 성적표를 받아오면 어머니께서 성적이 좋을 때만 웃으셨습니다. 어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어머니의 웃음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죠. 형편상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교회 목사님의 멋진 모습에 막연한 동경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 목사님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씁쓸한 표정으로 꿈은 크게 꾸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상고에 가려던 제게 인천에 새로 생긴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장학생 모집 공고가 뜬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설득하여 마감 직전에 서인천고등학교에 지원하게 되었고, 극적으로 합격하여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지만, 학교 방침은 졸업생들을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는 저에게 서울대 종교학과를 권유했고, 결국 저는 종교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께서 종교학과 공부가 신학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신 것도 영향을 미쳤죠. 운 좋게 서울대에 합격하면서 학비 걱정 없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에게 서울대 진학은 신의 한 수와 같았습니다.

서울대까지 진학하셨는데, 목회자의 길 대신 신학자의 길을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원래 시골 교회 목사가 꿈이셨다고 들었는데요.

네, 원래는 시골 교회 목사가 꿈이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말부터 신앙적인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생겨났고, 성경 공부 시간에 질문을 해도 선생님들께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88학번으로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고, 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종교학과에서 다양한 종교를 접하며 기존의 신앙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교회는 좋았지만, 질문들이 끊이지 않았고, 강단에서 예수님만이 구원이라고 설교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교 3학년 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다시 신학교에 진학했지만, 저는 사람보다 공부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했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고,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혼자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신학교 친구들은 목회에 대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 넘쳤지만, 저는 점점 그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변 친구들과 스스로의 성향을 돌아보며 신학자가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도서관에서 책 읽을 때라는 것을 깨닫고, 목회 대신 학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목사님이 되셨는데요. 신학자의 길을 걷다가 목회자가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연예부 기자를 꿈꾸셨다는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네, 사실 목회자가 되지 않았다면 연예부 기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일에 무관심했던 저는 연예인들의 삶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대학 시절, 사회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지,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한국 사회와 교회 현실이 눈에 들어왔고, 한국 교회 개혁에 대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청어람ARMC에서 한국 교회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문을 발표했을 때, 한 목사님께서 제 강의를 듣고 "배 교수가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한국 교회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목회를 안 해봐서 함부로 말하는 것 같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학자로서 한국 교회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목회 경험이 없다는 것이 큰 약점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개척을 준비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정작 저는 개척 경험 없이 제자들에게만 어려운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군대도 안 간 육군사관학교 교관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죠.

한국 교회를 제대로 비판하고,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목회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회를 통해 교회를 성장시키거나 성공하겠다는 욕심은 없었지만, 한국 교회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학자적 양심에 따라 발언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단법상 전임강사 이상은 이중직이 금지되어 목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담임 목사님께 털어놓았더니, 뜻밖에도 대전의 폐쇄 직전 교회에 부임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교인은 13명이었고, 사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설교만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주사랑교회에 부임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가보니 교인은 이미 다 떠나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텅 빈 지하 예배당에 홀로 남았지만, 교회가 문 닫는 것이 안타까워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한 목회가 8년간 이어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목회를 시작하시고 어떠셨냐는 질문에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네요.

저는 평생 편안한 교회만 다녔습니다. 부목사 경험도 없이 교육 목사로 청년부, 중고등부 설교만 했었죠. 개척 교회에서 만난 성도들은 이전 교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때서야 한국 교회에도 '리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메이저리그, 트리플A, 마이너리그… 좋은 환경의 교회, 소위 '백조'처럼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것은 축복받은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리그'에 속하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을 개척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우울증으로 18년간 19번이나 교회를 옮긴 분, 반지하에서 부르스타로 밥을 짓는 분, 아이를 안고 2층에서 뛰어내리려던 분… 그분들의 고통과 절망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감기 하나 낫게 해주는 것조차 버거웠습니다. 제가 가진 신학적 지식과 설교는 그분들의 삶의 무게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고, 2년만 목회하고 학교로 돌아가려던 계획은 점점 미뤄졌습니다. 결국 8년간 개척 교회 목회를 이어가게 되었죠.

목회하면서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은 없으셨나요? 정말 사라지고 싶을 만큼 힘든 적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특히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진 것 같아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좋은 성도님들이 나타나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영특하고 신령한 청년이었는데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저를 도왔습니다. 그 친구와 새벽 예배를 6개월 넘게 드리면서 교회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고, 새로운 성도들도 늘어났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큰 의지를 했고, 정말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일로 갈등이 생겨 그 친구가 교회를 떠나자,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새로 왔던 성도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교회는 다시 10명도 안 되는 작은 규모로 줄어들었습니다. 3년 동안 애써 일궈놓은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0.5단계 우울증 같은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려고 성경을 읽으면 떠나간 사람들 얼굴만 떠오르고, '내가 그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후회와 자책만 되풀이했습니다. 결국, 떠나간 친구에 대한 원망, 그 친구를 따라 떠난 사람들에 대한 실망, 하나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주일 설교 준비를 하다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하나님께 욕설을 퍼붓고,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힘든 목회를 해야 하냐"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내에게 월요일에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7시, 설교 준비도 못한 채 교회로 향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아파트 단지를 7바퀴 돌며 여리고 작전처럼 기도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추위에 떨며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시키고 성경을 펼쳤지만, 성경 말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욕설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우연히 펼쳐진 성경 구절이 여호수아 1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마치 하나님께서 제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 집사가 나간 후에… (모세가 죽은 후에)… 두려워하지 마라. 놀라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말씀이 메가폰처럼 귓가에 울리는 듯했습니다.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카페에 혼자 앉아 엉엉 울면서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다시는 그만둔다는 말 하지 않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교회로 돌아가 성도들에게 말씀을 나누고 다시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8년간 그 자리를 지켰고, 지금은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의 교수로 섬기고 있습니다.

힘든 목회 여정 끝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셨는데요, 교수 제안을 받으셨을 때 어떤 마음이셨나요?

사실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교수가 되는 것이 오랜 꿈이었지만, 막상 제안을 받았을 때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도 교수 제안이 있었고, 더 좋은 조건의 학교로 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좁은 길, 어려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왜 나를 꼭 이렇게 힘든 길로 인도하시는지, 그냥 지방 대학에 만족하며 살면 안 되는 건가"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던 중, "너도 똑같구나. 강단에서 좁은 길 가라고 설교할 때는 쉽게 말하더니, 네 문제가 되니 좋은 것만 쫓아가려고 하는구나" 라는 마음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큰 부끄러움을 느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결정해 주시면 순종하겠습니다." 기도했고, 며칠 후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교수직을 수락했습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교수님께서 힘든 결정을 하셨을 때, 사모님과 자녀분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걱정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대학, 유학 생활까지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경험의 연속이었지만,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다시 불안과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교회 성도이자 제자였던 목사님께서 "목사님처럼 헌신적인 분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시겠냐"며 격려해 주셨지만, 그때도 아멘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서울로 올라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왔지만, 당장 살 집도 없었습니다. 대전에서 월세 살던 형편에 서울 월세는 감당하기 어려웠죠. 하지만 장인, 장모님께서 살던 집을 흔쾌히 내어주셨습니다. 큰 아들은 국가 장학금을 받았고, 둘째는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 걱정 없이 유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미대 진학을 꿈꿨는데, 경기예고를 거쳐 미대에 진학하면서 다둥이 장학금을 받아 학비 전액 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 자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돈을 버는 이유는 결국 써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쫓는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돈 없이도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요트를 사려고 애쓰는 대신, 요트 가진 친구를 사귀면 요트를 누릴 수 있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채워주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신다"는 말씀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선불제와 같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원형 탈모까지 겪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목회하시면서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살다 보니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갈등은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명확해지면 순종해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삶인 것 같습니다. 백향목 공동체를 통해 좋은 동역자들을 만나 행복한 목회를 했지만, 2년 후 갈등이 생겨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문제는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제가 목회하면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 또한 교만이었죠. 제가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빙판길 위의 자동차처럼, 아무리 핸들을 돌려도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했습니다. 결국, 머리카락이 빠지는 원형 탈모까지 겪으면서 다시 한번 좌절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님은 교수가 딱이지, 목회는 안 맞는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영적으로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와 성경 공부만 열심히 하면 교회가 성장할 줄 알았지만, 사람들의 미묘한 관계와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께 매달렸고,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를 졌으니, 나를 따르려면 너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것이 목회다." 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다시 힘을 내어 목회를 시작했고, 남아있는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다시 세워나갔습니다. 백향목 교회 목회는 어쩌면 저에게 '알바'와 같은 경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대로 된 목회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던 것이죠.

백향목 교회 목회를 통해 더 이상 파트타임 잡이 아닌, 제가 져야 할 십자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두 대학 강사 자리를 내려놓고, 느헤미야 기독연구원과 백향목 교회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강사료를 포기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손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교회 사례비가 오르고,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려놓음을 통해 더 큰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내려놓음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하시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말씀과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저 역시 교수님처럼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해주신 연예인분들과 시청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 목회자, 신학자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역시 교수님께서 앞으로 다음 세대 목회자들을 위해 몸소 겪은 신앙 경험을 바탕으로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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