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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이야기: 사랑으로 완성된 가족, 오창화 집사의 감동 스토리

요약

사랑에는 마이너스가 없다: 입양으로 완성된 가족

"사랑에는 마이너스가 없습니다" - 오창화 집사의 삶과 입양 이야기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조금 특별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요즘 아버지들은 다정하고 친구 같은 모습이 많지만, 예전에는 엄하고 보수적인 분들이 많으셨죠. 오늘 모실 오창화 집사님은 바로 그런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와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고기잡이 배까지 타게 되셨다는 이야기는 정말 놀라운데요. 결혼 후 입양을 원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며 축복된 삶을 누리고 계신다는 오창화 집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줄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이겨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오늘 진언무역 대표이자 전 이기입양가족연대 대표이신 오창화 집사님을 모시고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오창화 집사님,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오프닝에서 소개해 드렸듯이,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출까지 감행하셨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네, 저희 아버지는 조실부모하시고 자수성가하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르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굉장히 두려움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밑에 동생분들이 세 분이나 계셨고, 동생들도 키워야 했고, 당신의 삶도 이겨내야 하다 보니 삶이 너무 힘드셨던 거죠. 어려움 속에서 두려움이 많으셨기에, 사랑으로 표현해야 할 감정들을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셨던 것 같습니다. 옛날 분들이 다 그러셨듯이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 하나는 정말 강하셨습니다. 그 책임감이 강할수록 가정에 대한 기대, 특히 장손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저 또한 장손이다 보니 첫째 아들에 대한 기대가 남들보다 유난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훈계도 강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아버지의 모습에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스물일곱 살,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풀리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보다 보면 잠시 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에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잠깐 타려고 했던 배가 60일짜리 배였죠. 어떻게 보면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갔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배를 타면서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경험을 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귀한 채널이 되었습니다.

60일, 두 달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원래 45일짜리 배였는데, 배의 크기가 작아서 7명 정도밖에 탈 수 없는 배였습니다. 작은 배는 워창이라고 해서 창고가 작습니다. 창고가 작으면 싣고 갈 수 있는 음식과 물의 양이 제한적입니다. 45일까지 버틸 수 있는 음식만 싣고 나갔는데,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다 한복판에서 다른 배에 물건을 공급받아서 겨우 만선을 채우지 못하고 열흘을 더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배에서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만났습니다. 배는 정말 열악했습니다. 쥐가 정말 많았는데, 뱃사람들은 쥐가 있어야 배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쥐가 갉아먹는 소리가 나야 배가 침몰하지 않는다는 미신 같은 거죠. 쥐들이 얼마나 담대한지, 겨울바다인데도 제 옆에서 잠을 자는 겁니다. 좁은 공간에서 옆 사람 어깨에 기대 자는데, 쥐가 귀를 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옆 사람 머리카락인 줄 알았는데, 쥐였습니다. 쥐가 사람들 사이에서 자고 있는 모습은 정말 흔했습니다. 손으로 쫓아낼 힘조차 없을 정도로 피곤했던 거죠.

한번은 파도가 배 안까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저희가 자는 곳은 식당 밑의 좁은 공간이었는데, 허리를 굽히고 다녀야 할 정도로 좁았습니다. 일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있었는데, 파도가 들이닥치면서 식당에 있던 음식물 쓰레기와 오물들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감전될까 봐 너무 무서웠습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꼼짝 못 하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제 자리가 맨 안쪽이라 나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전원을 내려주셔서 다행히 나올 수 있었는데, 나오자마자 엉엉 울었습니다. 잠깐이라도 편히 잘 수 있었던 공간마저 하나님이 가져가셨다는 생각에 섭섭했습니다.

폭풍이 지나가고 나니, 겨울바다인데도 유리처럼 잔잔했습니다. 그날따라 보름달까지 떴습니다. 보름달이 뜨면 집어등 효과가 없어서 물고기를 잡기 어렵습니다. 잔잔한 바다, 뱃머리에 앉아 보름달을 보면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양을 불렀습니다. 파도가 없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제 삶에서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파도만 없어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생사를 걸고 싸워야 했던 바다가 아름답고 감사한 공간으로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제 책상에는 그때 탔던 배와 비슷한 사진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의 감사함을 떠올립니다. 파도만 없어도 감사했던 그 순간, 그리고 찬양했던 기억, 틈틈이 옆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했던 시간들이 제 인생에서 정말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결혼 후 첫째 아들을 낳고, 둘째 아들도 연년생으로 낳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모유 수유가 끝나자마자 바로 생겼죠. 셋째까지 당연히 쉽게 생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셋째가 3년 동안 생기지 않는 겁니다. 3년 동안 아내와 함께 병원을 다니며 시험관 시술까지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의료보험 혜택도 없어서 정말 큰돈을 써야 했습니다. 큰돈을 들였지만 소식이 없자, 입양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셋째를 입양하려고 교육을 받던 중에 정말 셋째가 자연 임신되었습니다. 셋째를 낳고, 넷째도 연년생으로 바로 임신되었습니다.

넷째 아이를 가졌을 때, 예정일 일주일 앞두고 아내가 갑자기 의식 불명 상태가 되었습니다. 급하게 병원에 갔지만, 태반 조기 박리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탯줄과 엄마 몸에 붙어있는 부분이 떨어지면서 아이가 뇌사 상태가 되었다는 겁니다. 아이를 꺼냈지만 뇌사 상태였고, 의료진들은 최선을 다해 아이의 심장 박동 수와 모든 것을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내는 오후에 의식을 되찾자마자 "우리 아기는 어때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하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장애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아이이니 잘 키워보겠다, 그러니 아이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밤 12시쯤 일어난 일이었고, 아내가 깨어날 때까지 계속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수많은 기적들을 떠올리며, 하나님께 기적을 허락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아기의 상태는 계속 나빠졌고, 결국 24시간 만에 천국으로 갔습니다.

아내와 함께 중환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자녀를 먼저 보내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건지 너무 슬펐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아기를 보고 돌아오면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 24시간 만에 아이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이 몸에 붙어있던 수많은 의료 기기들을 떼어내고, 아내와 함께 아이를 안고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아기가 하나님 계획대로 그 시간을 살아냈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넷째 아이, '온유'는 하루의 삶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사인을 주셨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던 중, 제 안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빛 가운데 평안함, 그리고 온유가 있었습니다. "창화야, 여기가 네가 올 곳이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천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까지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별로 없었습니다. 삶이 바쁘기도 했고, 막연하게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넷째 아이의 죽음을 통해 천국은 제 아들이 있는 곳, 제가 가야 할 곳, 너무나 아름답고 평안한 곳,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빠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넷째 아이 온유는 천국으로 먼저 갔고, 저는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아이를 잃고, 셋째 때 준비했던 입양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아내의 몸 상태 때문에 자연 임신이 어렵다고 했고, 나이도 마흔이 넘었으니 입양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입양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외적으로는 넷째까지 낳았으니, 이제 입양을 통해 가정을 더 풍성하게 채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예상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아버지의 반대는 완강했습니다. 아마 많은 입양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의 안 좋은 속담들 때문에 아버지의 반대는 정말 심했습니다. 4개월 동안이나 반대하셨죠. 매주 저녁 가족 예배 후 아버지께 입양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버지는 완강하셨습니다. 가족 예배 시간에는 방에 들어가 계시다가, 예배가 끝나면 나오셔서 아이들 과자를 사주시곤 했지만, 입양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 허락을 받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가족 문제는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아버지께 반항도 많이 했지만, 목사님 말씀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믿음은 어디서 났니?"라는 질문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특히 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것이 성경적 질서에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허락을 받기 위해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주 화를 내셨습니다. "이 새끼가, 개가, 족보를, 성을..." 입에 담기 힘든 말씀을 하시면서 반대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거의 포기 상태셨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입양을 한다면 한 명보다는 여러 명을 입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입양되면 외로울 수 있으니,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쌍둥이 입양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 허락을 받는다면 바로 입양을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입양기관에 쌍둥이 입양 의사를 밝혔습니다. 기관에서는 쌍둥이 입양은 매우 어렵다고 했습니다. 10만 명당 1명 꼴로 쌍둥이가 태어나는데, 쌍둥이 입양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포기하려던 찰나, 기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쌍둥이 친권 포기 아동이 생겼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겠냐는 연락에, 저는 또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반대도 여전한데, 쌍둥이를 입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내가 과연 쌍둥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입양이 현실로 다가오니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친생자와 입양아를 차별하면 어쩌나, 콩쥐팥쥐 계모처럼 아이들을 핍박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역시 현명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으면 되지 않겠냐"며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아내와 저에게 동일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연못에 꽃 두 송이가 피어있는 환상이었습니다. 부부는 환상에 감사하며 응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아내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사랑을 하나도 못 받는 0의 상태에서 당신이 주는 사랑은 플러스밖에 없다. 마이너스는 없다"고 격려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을 차별할 사람이 아니다. 입양해도 된다"는 아내의 응원에 힘을 얻었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시설에서 자라는 것보다 입양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쌍둥이 입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쌍둥이들을 처음 만났던 날, 입양기관에서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동안 고민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친생자라고 해서 처음부터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로 낳은 자녀들도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아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존재, 그게 자녀였습니다.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맙다, 우리 가정에 와줘서 정말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너희들을 우리 가정에 보내주시기로 계획하셨고, 우리가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국에 가면 그 비밀을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이 배로 낳은 아이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쌍둥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쌍둥이들을 데려온 토요일 저녁, 부모님 댁에 갔는데, 아버지는 저희를 보자마자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다음 날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계셨습니다. 쌍둥이 중 한 명만 슬쩍 보시더니, "쌍둥이인 줄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며칠 후, 아버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셨습니다. 쌍둥이들을 쌍둥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얼굴이 활짝 피셨습니다. 그 전에는 쌍둥이인 줄 모르셨던 겁니다. 놀랍게도 일주일 후, 쌍둥이 중 한 아이가 눈이 잘 안 맞는 증상을 보였습니다. 아토피도 심하고 피부도 안 좋았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아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의사 선생님을 찾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좋은 병원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쌍둥이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신 겁니다. 열흘쯤 지나 어머니께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새벽에 쌍둥이 보고 싶어서 잠을 못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 다음 주, 아버지는 쌍둥이들을 만나시고는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쌍둥이들을 너무 예뻐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쌍둥이를 안고 있는 사진도 정말 많습니다. 주변 친구분들, 늦게 결혼해서 자녀 없는 가정을 볼 때마다 "왜 입양 안 하냐"며 입양을 적극적으로 권하셨습니다. "입양은 최고의 선택"이라며 입양 전도사가 되셨습니다. "가슴으로 낳으나 배로 낳으나 차이가 없다. 모든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완강하게 반대하시던 아버지가 완전히 변하신 모습에 정말 놀랐습니다. 변했다기보다는 아버지 안에 있는 하나님 마음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저는 전국입양가족연대 대표로 섬기고 있습니다. 2018년 입양특례법이 잘못되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단체입니다. 현재 입양특례법은 입양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법입니다. 2011년에 제정된 입양특례법은 공공성 강화를 목표로 했지만, 실상은 입양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공공성 강화 자체는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강화 방식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입양을 원하는 가정을 늘리고, 더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나라 보육시설 아이들의 80% 이상이 친권이 있는 아동입니다. 부모가 이혼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시설에 맡겨진 아이들 대부분은 18세가 될 때까지 부모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친권은 있지만, 가정에서 자랄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입양해야 할 가정도 부족하고, 위탁 가정도 부족한 상황에서 입양특례법은 입양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입양특례법의 문제점 중 하나는 입양 심사 기준이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목사님들이 입양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입양특례법은 목사님들의 재산 기준이 주관적 판단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입양 신청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공공성 강화의 핵심 결정은 판사님들이 하시는데, 우리나라는 입양 전문 판사가 부족합니다. 순환 보직 판사님들은 입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부족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입양률은 1%에 불과합니다. 1% 입양률은 미국, 아프리카 등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30만 명이 태어나면 3천 명 정도는 가정과 분리되는데, 분리된 아이들이 시설이 아닌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일대일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2010년 이전 자료를 보면, 시설 퇴소 여성들은 성매매를 경험하거나 범죄에 노출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자살률도 일반 아동보다 수십 배 높습니다. 시설 아동들은 외로움 속에서 자랍니다. 시설 선생님들이 아무리 사랑으로 돌봐도, 일대일 사랑은 가정에서만 가능합니다. 가정 양육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입양특례법을 입양 친화적으로, 입양 촉진법으로 개정해야 합니다. 위탁 대상 아동이 입양 대상 아동보다 훨씬 많은데, 위탁 가정이 부족한 현실을 개선해야 합니다. 베이비박스 아동 문제도 심각합니다.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이들은 친권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혼모들은 아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베이비박스에 맡깁니다. 미혼모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존중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사회와 교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베이비박스 아동들은 지자체장이 후견인이 되어 시설로 보내집니다. 친권 없는 아이들을 입양 대상이 아니라 위탁 대상으로 분류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입양 가족들이 위탁 가정이 되어 친권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입양선교회를 통해 100여 가정이 위탁 가정을 신청했습니다. 입양을 준비하는 가정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도 쌍둥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위탁 가정을 신청했습니다. 곧 새로운 아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오창화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모습에 상처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어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거리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소중합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어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입양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과거 아버지들은 전쟁과 가난 속에서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고 듣고 느꼈습니다. 우리 세대부터는 달라져야 합니다. 입양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입양은 핏줄이 아닌 사랑으로 맺어지는 또 다른 가족 형태입니다. 입양특례법 개정이 더딘 이유는 입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인이 사건처럼 입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입양특례법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입양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부터 입양에 대한 사고방식을 넓히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오창화 대표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도전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입양을 위해 더욱 힘써주시고, 많은 분들에게 희망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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