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좌절 극복과 하나님 신앙 이야기
## 좌절의 스페셜리스트 백혜선, 하나님과 함께 쓴 인생 역전 드라마
좌절을 딛고 일어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혜선 교수님의 삶: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과 음악을 통한 헌신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주영훈입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했다'라는 표현을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좌절의 순간에서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분입니다. 바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랐지만, 가장 어려웠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는 백혜선 교수님입니다. 오늘 방송이 고난 가운데 계신 분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백혜선 교수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백혜선 교수님은 32년 전, 지금의 조성진, 임윤찬 씨와 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셨습니다. 당시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셨고, 국제 콩쿠르 참가자가 드물었던 시대에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최근에는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셨는데요. 좌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교수님의 책 제목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오히려 성공적인 삶 이면에 숨겨진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들을 극복해온 과정을 책에 담았다고 합니다.
사실 출판사에서는 백혜선 교수님의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덜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새롭게하소서에서는 교수님의 신앙 간증을 마음껏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은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아픔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 은혜로 오늘날의 자신이 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좌절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찾지 못했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깨달음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제부터 백혜선 교수님의 인생을 좌절의 순간마다 스페셜하게 바꾸신 하나님의 이야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교수님은 피아노를 치면서 기도의 힘을 많이 느끼셨다고 하는데요. 어떤 순간에 기도의 힘을 경험하셨는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국제 콩쿠르 1등, 기도의 힘을 경험하다
백혜선 교수님은 1989년, 첫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며 기도의 힘을 처음으로 경험하셨다고 합니다. 이 콩쿠르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권위 있는 콩쿠르였는데, 당시 4년 동안 1등이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1등에게는 뉴욕 데뷔 기회와 풍성한 연주 기회, 상금까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신감이 부족했기에, 그저 매일 기도하며 콩쿠르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한 잡지에서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의 눈물 어린 글은, 20대 초반의 백혜선 교수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교수님은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고, 콩쿠르에서 상을 받게 된다면 상금을 이 가정에 기부하겠다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놀랍게도, 백혜선 교수님은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도 평범한 1등이 아니었습니다. 결선 연주 도중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당황한 순간, 교수님은 줄이 끊어진 피아노를 잠시 멈췄다가 다시 연주를 이어갔고, 오히려 이러한 해프닝이 심사위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1등이라는 기적적인 결과를 얻게 됩니다.
교수님은 1등 상금을 장애인 가정에 전달하기 위해 잡지사에 연락했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 가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며 적극적으로 도우셨고, 상금 전액은 장애인 가정에 전달되었습니다. 특히,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어린 딸은 이 후원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피아노 선생님이 되었다는 감동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백혜선 교수님은 기도의 놀라운 힘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의 어머니, 그리고 이름 없는 기도 후원자
어머니의 기도는 백혜선 교수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콩쿠르에 참가할 때마다 어머니는 늘 "기도할게" 라는 짧은 말로 딸을 격려했지만, 실제로 집에서는 밤낮으로 기도에 매달리셨습니다. 교수님은 어린 시절, 밤새도록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궁금증을 느꼈다고 합니다.
음악가의 삶은 화려해 보이지만, 정신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는 가정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숨겨진 아픔이 있습니다. 백혜선 교수님 역시 어린 시절, 가족사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겪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아버지의 재혼 사실을 몰랐고, 가족 관계에 대한 혼란을 겪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적인 어려움 속에서 어머니는 기도에 더욱 의지하셨고, 가족의 화목과 안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혜선 교수님을 위해 기도해 준 또 다른 숨은 공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병원에서 일하던 도우미 아주머니였습니다. 이 분은 밥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지냈고, 백혜선 교수님을 보기만 하면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크게 쓰실 것이다" 라며 늘 격려해주셨고,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백혜선 교수님의 어머니에게 40일 금식 기도를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백혜선 교수님은 "우리 집안 기도의 원천은 바로 이 아주머니였다" 고 회상하며, 어머니와 도우미 아주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기도의 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미국 유학 생활, 죄인 일기를 쓰다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난 백혜선 교수님은 외롭고 힘든 유학 생활 속에서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일기에는 "하나님 죄송해요"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회개 기도가 가득했습니다. "오늘도 연습을 게을리했어요", "숙제를 미뤘어요" 와 같은 소소한 잘못부터, "연애를 하면 꼭 결혼해야 하나요?" 와 같은 진지한 고민까지, 솔직한 마음을 일기장에 털어놓았습니다.
특히, 이성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연애를 하면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 고 배웠기에, 이성 친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큰 죄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순수했던 청년 백혜선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갈등했고, 일기장에 솔직한 심정을 담아냈습니다. "이것이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려주세요" 라는 기도처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유학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일기 쓰기는 도우미 아주머니로부터 받은 기도의 영향이었습니다.
서울대 교수 사직, 다시 시작된 광야 생활
보스턴에서 성공적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승승장구하던 백혜선 교수님은 20대 후반,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됩니다.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최고 명문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서울대학교에 발을 딛는 순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라는 직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숨 막히는 듯한 갑갑함과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권위적인 분위기가 강했고, 교수 사회는 더욱 보수적이었습니다. 유교적인 문화와 경직된 분위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백혜선 교수님을 억눌렀습니다. 또한, 교수라는 직책이 자유로운 음악 활동에 제약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교회에 가도 사람들은 "서울대 교수" 라는 타이틀에만 집중했고, 진정한 섬김은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학생들의 태도 또한 교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당시 음대생들은 음악 자체보다는 "서울대 졸업장" 에 더 관심이 많았고, 1, 2학년 때는 미팅에만 열중했습니다. 3, 4학년이 되어서야 취업이나 유학을 고민하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 없이 이름만 쫓는 학생들에게 실망했고, 진정한 교육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결혼 후 남편과의 가치관 차이 또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배움을 갈망했던 교수님은 외국 유학을 꿈꿨지만, 안정적인 삶을 추구했던 남편과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부는 한 곳을 바라봐야 한다" 는 생각에 이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주변에서는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것에 만류했지만, 교수님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교수님의 행동은 다소 경솔하고 자만했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국내 최고라는 자부심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재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직 사직과 이혼이라는 두 가지 큰 결정을 기도 없이 독단적으로 내렸던 것입니다.
뉴욕 생활, 파산과 40일 기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뉴욕으로 떠난 백혜선 교수님은 맨해튼에 고급 아파트를 얻어 생활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재테크에도 관심을 가졌고, 아파트 세 채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최고의 사립 유치원에 보내는 등, 화려한 뉴욕 생활을 즐겼습니다. 마치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008년, 미국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은행들이 무너지고, 부동산 시장이 폭락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전 세계 경제를 강타했고, 백혜선 교수님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파트 가격은 폭락했고, 이자율은 폭등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에 허덕이게 되었고, 세 채의 아파트는 은행에 압류당했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빚더미에 앉게 된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혜선 교수님은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후에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어머니에게도 차마 힘든 상황을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막막함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이때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40일 작정 기도에 매달리게 됩니다.
놀랍게도, 40일 기도가 끝난 직후, 대구 가톨릭대학교에서 석좌교수 제안이 왔습니다. 한 학기에 일주일만 강의하면 되는 조건이었고, 해외에 거주하면서도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 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광야와 같았던 뉴욕 생활은 기도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진정한 신앙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뉴욕 한인교회, 음악을 통한 헌신
백혜선 교수님을 다시 일으켜 세운 곳은 뉴욕의 한인교회였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 앞에 위치한 이 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포 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학생과 다양한 연령대의 교인들이 함께하는 따뜻한 공동체였습니다. 교수님은 교회 유년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며 교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 정경화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백혜선 교수님을 알아보시고 교회 관계자들에게 "백혜선 씨를 음악 사역에 참여시켜야 한다" 고 강력하게 추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교수님은 2007년부터 교회 성가대 지휘자를 맡게 됩니다. 성가대 지휘를 통해 음악의 본질은 "노래, 즉 사람의 목소리"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합창의 아름다움과 성부의 조화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모든 악기는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이라는 음악적 통찰을 얻게 됩니다.
10년 넘게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수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예배의 중요성과 찬양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설교 전에 찬양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고 영혼을 치유하는 음악의 힘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께 설교 말씀을 미리 받아 찬양 선곡에 반영했고, 가사를 설교 주제에 맞춰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뉴욕이라는 음악적 중심지의 뛰어난 성악가들이 교회 성가대에 합류하면서 성가대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성가대원들은 음악과 신앙 안에서 서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백혜선 교수님은 "음악은 기교가 아닌 마음과 영으로 하는 것"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음악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음악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성가대 지휘를 통해 교인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후배 음악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오랜 시간 피아니스트로서, 교육자로서 살아온 백혜선 교수님은 후배 음악가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전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몰두하라" 고 강조하며, 부모님들 또한 자녀들이 좋아하는 것을 지지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배움과 자기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배우고, 정신이 있는 날까지 자기 개발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며,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지 않는다" 라는 겸손한 자세와 함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조언했습니다. 어려움과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백혜선 교수님의 삶은 많은 음악가들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화려한 성공과 깊은 좌절을 모두 경험했지만, 결국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고, 교회 공동체와 함께 은혜를 나누는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백혜선 교수님의 앞으로의 음악 여정을 응원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귀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