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집안 아들에서 목사가 된 이야기 강남중앙교회 장찬영 간증
무당 집안 아들에서 강남 교회 목사까지: 영혼의 값, 차별 없는 사랑으로
✨ 누구나 동일한 영혼의 값어치를 지닌다😌ㅣ새롭게하소서ㅣ강남중앙교회 장찬영 목사ㅣ📖목사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
안녕하세요, 새롭게하소서의 주요 운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예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정수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교인들이 있는데요, 오늘 만나볼 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교인들을 통해 본인도 성장하게 되시고, 또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신 분이라고 합니다. 네, 오늘 주인공은 샤머니즘이 가득한 집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늘 죽자고 하시는 어머니를 전도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더욱이 영적 공격이 심한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겪었던 사투 끝에 교인들과 교회를 굳건히 지켜내셨다고 하는데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힘든 사투를 벌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자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보듬어 주셨다고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 영혼을 보살피는 뜻을 펼치셨고, 지금도 열심히 영혼들을 보살피시는 분이 바로 강남중앙교회 장찬영 목사님이십니다. 오늘, 장 목사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쇼, 오월입니다. [음악]
🎤 안녕하세요, 목사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많은 성도들을 통해 성장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오늘 그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나눠볼까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무속적인 분위기가 강한 가정에서 자라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족 중에 무속인이 계셨나요?
👨💼 아, 네. 저희 집안은 좀 특별했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사업을 크게 하셨는데, 사업이 워낙 잘 되다 보니까 집안에 늘 불안감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소위 '점'을 자주 보셨고, 굿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특히 기억나는 건, 집에 무속인을 정기적으로 불러서 굿을 했던 건데요, 마치 회사에 고문 변호사처럼 무속인을 '고문'으로 둔 셈이죠.
🎤 😮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네요. 굿을 자주 하면 회사가 잘 되던가요?
👨💼 글쎄요, 굿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돈이 정말 많았습니다. 사찰에도 거액을 시주하고, 저희 집안에서 뭘 짓는다고 하면 거액을 쾌척하곤 했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19년생, 어머님은 23년생으로 아주 옛날 분들이셨어요. 경상도에서 쭉 사셨던 분들이라 그런지, 무속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강하셨습니다. 사업은 크게 성공했지만, 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함이 가득하셨던 것 같아요.
🎤 🤔 열성적인 샤머니즘 집안에서 자라셨는데, 아버님이 하시는 사업은 어떻게 되셨나요?
👨💼 저희 아버지가 나중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 중 하나가 사업을 '망한 것'이라고요. 정권이 바뀌면서 회사가 국가에 귀속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친척들은 감옥에 가고, 아버님은 일본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된 겁니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도망가시자, 어머니는 홀로 남겨지셨습니다. 당시 삼양동은 지금과 달리 정말 낙후된 동네였거든요. 어머니는 짐을 싣고 삼양동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어린 시절, 넓은 집에서 식모들과 함께 북적이며 살았었는데, 하루아침에 좁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 거죠.
🎤 🥺 정말 충격적인 변화였겠네요.
👨💼 네, 어머니는 감당하기 힘드셨을 거예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에게 "공기 좋은 데 가서 살자" 하시면서, 남은 짐을 챙겨 위압감 넘치는 산동네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어머니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신 겁니다.
🎤 😮 샤머니즘에 심취했던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셨을까요?
👨💼 어머니는 원래 헌금도 많이 하시고, 불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실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셨습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셨고, 불면증으로 고생도 많이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사업 실패 후, 극심한 우울증과 고통에 시달리셨습니다.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으시고, 늘 "죽자"라는 말만 되풀이하셨죠.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어린 저에게도 오랫동안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 사업이 망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찾으셨으니까요.
🎤 🙏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셨군요. 샤머니즘이 강한 집안에 복음이 어떻게 씨앗처럼 심겨지게 되었을까요?
👨💼 당시에는 교회라는 단어조차 제대로 몰랐습니다. 교과서에서나 겨우 봤을 뿐, 교회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죠. 늘 무당 할머니와 함께 살고, 부모님은 무속에 깊이 빠져 계셨으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친구에게서 손으로 쓴 카드 편지를 받았어요. 바다 건너 여자아이였는데, 편지에 "나랑 같이 교회에 다니면 좋겠다"라고 써 있었어요.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어린 마음에 교회에 가면 정말 행복할까 궁금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부모님이 매일 싸우시는 모습을 보면서 늘 불안했거든요. 돈은 많았지만, 행복하진 않았던 거죠. 그래서 친구에게 "교회 가면 정말 행복해?"라고 물었더니, "응, 행복해!"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렇게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 문턱을 넘게 되었습니다.
🎤 ⛪️ 교회에 처음 가보니 어떠셨나요?
👨💼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 좋아서 어쩔 줄 몰랐어요. 어린 시절이었지만, 교회에 가자마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교회 선생님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친구들도 많았고요. 무엇보다 교회에서 제 인생을 뒤바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다닌 지 1년쯤 되었을 때, 6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성금녀 선생님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성 선생님은 지금 팔순이 넘으셔서 LA에 살고 계세요. 선생님께서 성경을 정말 재미있게 가르쳐주셨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 "하나님을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여쭤봤어요. 집에는 무당 할머니, 별보살, 의사양반, 고모, 외삼촌 등등 호칭이 많았거든요. 저는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습니다.
🎤 🤔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 궁금했군요.
👨💼 네, 선생님께서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면 된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집에 계셨던 아버지, 일본에 가셨다 오셨다 하셨던 아버지, 진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선생님께 "아버지는 집에 있는데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그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가 아니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였지만, 오히려 그 말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만약 저분이 진짜 아버지라면, 나에게 술을 마시라고 하지는 않겠지. 진짜 아버지라면, 일본으로 도망가지 않았을 거야. 진짜 아버지라면, 엄마를 때리거나 매일 부부 싸움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으셨네요.
👨💼 그러면서 선생님께서 "그래, 그 아버지는 네가 세상에 있는 동안 잠시 너를 돌봐준 아버지일 뿐이고,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6학년 어린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아이들의 영혼은 결코 얕거나 가볍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였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은 저에게 거듭남, 즉 '본 어게인(born again)'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아버지 탓, 엄마 탓 하지 말고, 하나님이 진짜 내 아버지라면,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세상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미움, 원망 대신, 진짜 아버지, 참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자 감사였습니다. 집에 돌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제가 교회에서 진짜 아버지를 만났어요!"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 😅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셨습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얼굴이 굳어지시면서 "어디서 그런 이상한 소리를 배웠냐? 교회에서 그러라고 시키더냐!"라며 저를 심하게 때리셨습니다. "너 당장 교회 다니지 마!"라고 호통치셨죠. 많이 맞았지만, 슬프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시, 저분은 내 진짜 아버지가 아니구나'라는 생각만 더 강해졌어요. 아버지의 분노에 찬 모습 속에서, 진짜 아버지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이 오랫동안 제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 🙏 교회에서 친아버지를 만나셨군요. 정말 드라마틱한 '본 어게인' 경험인데요, 그 이후에도 '본 어게인'을 또 경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네, 중학교 1학년 때 여름 수련회, 3박 4일 기도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울산 기도원이었는데, 거기서 2교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눈물겹도록 감사한 분입니다.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시면서, 울먹이시는 거예요. 찬양 가사가 "나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다 주셨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 주느냐"였는데, 그 찬양을 교회에서 1시간 동안 계속 부르시는 거예요. 4절까지 부르고, 다시 1절부터 울면서 부르시고.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피식피식 웃기도 했지만, 점점 찬양의 깊이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찬양 가사가 제 가슴에 '확' 와닿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다 주셨는데, 나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어린 나이였지만,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제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또 다른 '본 어게인'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 🤔 중학교 1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 집사님 말씀처럼, 당시 저희 집은 샤머니즘 영향이 강했고, 귀신을 숭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친척들 중에는 제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너는 흙덩이, 먼지와 같은 존재이지만, 네 안에 생명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저에게 임했던 것이죠.
🎤 😲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 당연히 황당해하셨죠.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저희 집은 불교를 숭배하고, 절에 시주를 많이 하는 집안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교회에서 선물로 받아온 성경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우셨습니다. 제가 집에서 성경을 읽고 있으면, 뺏어서 감춰두시거나 태우려고 하셨어요. "너 때문에 집에 귀신이 붙으면 어떡하냐"며 걱정하셨죠. 저는 몰래 새벽기도를 다니고... 어머니의 반대가 정말 심했습니다.
🎤 😥 신학대학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대는 더 심하셨겠네요.
👨💼 네,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먼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 "나도 교회에 가고 싶다"라고 말한 거예요. 정말 놀라운 변화였죠. 제가 3년 동안 기도했던 응답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처음 교회에 데려간 날, 어머니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시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으셨습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라고 여쭤봤더니, "하나님이 나를 오래 기다리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세상적으로 성공했지만 영적으로는 갈급했던 어머니께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신 거죠. 그 후 어머니는 1년 뒤 부활절에 세례를 받으셨고, 저와 형에게 "내 생일은 부활절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87세로 하늘나라에 가시기 전까지, 매년 부활절을 당신의 생일처럼 기념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 어머니의 변화는 정말 감동적이네요. 신학대학교 진학에 대한 어머니의 반대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 어머니는 제가 신학대학교에 진학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셨을 거예요. 제가 공부를 곧잘 따라가니까, 의사나 변호사가 될 줄 아셨던 거죠. 저도 신학대학교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교감 선생님께서 신학교 진학을 권유하셨습니다. "장찬영 학생은 목사가 되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기도하면서 목사의 길을 생각하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셨습니다. 신학교에 가면 뭘 하냐고 물으셨고, 제가 "목사가 되는 곳"이라고 말씀드리자, 더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평생 귀신을 섬겨왔던 당신의 아들이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셨던 겁니다. "내 배에서 나온 자식이 주님의 종이 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제가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셨는데, 목사가 된다는 건 상상조차 못하셨던 거예요. 결국, 교회 목사님과 선생님들이 어머니를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장찬영 학생을 훌륭하게 키워드리겠습니다"라고 안심시켜 드렸죠. 그 덕분에 제가 신학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대학교에 진학한 후, 어머니께서도 점차 마음을 여시고 저를 응원해주셨습니다.
🎤 🙏 어머니의 헌신적인 기도와 응원 덕분에 목사님이 되실 수 있었군요. 어머니는 목사님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멘토셨던 것 같습니다.
**👨💼 맞습니다. 어머니는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멘토셨습니다. 늦게 예수님을 믿으셨지만, 신학대학교가 무엇인지, 목회자가 무엇인지 아신 순간부터, 짐을 싸서 교회로 향하셨습니다. 평생 불교 신자로 사셨던 어머니께서, 밤마다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시기 시작한 겁니다. 교회 문이 항상 열려 있었거든요. 교회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새벽기도까지 빠짐없이 나오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효도를 제대로 못 한 죄송함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목사의 길로 인도해주셨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제가 한국에서, 미국에서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켜주셨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기도하시면서, 새벽 시장에서 곰 인형을 팔아 헌금을 하셨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할 법도 한데, 1000원짜리 곰 인형을 팔아 헌금을 시작하신 거예요. 나이 드신 분이 새벽부터 인형을 파는 모습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제가 어릴 적 노란색을 정말 싫어했는데, 어머니께서 노란색 야쿠르트 아줌마 옷을 입고 교회 앞에서 저를 기다리셨다가, 야쿠르트를 건네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가 부끄러워서 뒷문으로 도망치곤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들이 교육감, 교장 선생님 등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세상적인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나중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과일 노점상을 시작하셨어요. 초등학생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 과외도 하셨고요. 어머니는 새벽 기도와 노점상, 과외를 통해 번 돈으로 저희 형제를 훌륭하게 키워주셨습니다. 지금 HY 그룹과 같은 대기업이 성장한 것도, 전국을 누비던 야쿠르트 아줌마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야쿠르트 아줌마를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저는 그 어머니들이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들의 열정과 땀방울, 헌신적인 노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은 저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어머니의 삶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변화를 보면서, '아,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하셨습니다. 늘 "죽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죠. 제가 어릴 적에는 농담으로 "왜 엄마만 죽으려고 해? 나랑 같이 죽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철없는 어린 마음에 어머니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거죠. 어머니가 예수님을 만나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곰 인형을 팔고, 나중에는 교회 권사님이 되셔서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되었는지 깨달았습니다.
🎤 🥰 감동적인 어머니의 이야기 감사합니다. 옥천에서 개척 목회를 시작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옥천은 목회하기 어려운 지역이라고 하던데요.
👨💼 네, 옥천은 정말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옥천 동네는 3~400년 된 오래된 마을인데, 바로 옆에 1500년 된 직지사라는 큰 절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무속적인 분위기가 강했고, 토속신앙이 깊숙이 뿌리내린 곳이었죠. 마을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했지만,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술에 의지하거나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고, 복음화율이 매우 낮은 지역이었습니다. 더욱이 경상도 지역이라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해서, 교회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곳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된 거죠.
🎤 😥 영적으로 척박한 땅에서 목회를 시작하셨군요.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성령 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으니, 영적인 어려움과 갈등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 아, 네. 정말 많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혈기왕성하게 시작했지만, 매일매일이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마귀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 마을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었으니, 마귀의 저항이 얼마나 거셌겠습니까. 1500년 된 절과 토속신앙에 굳게 뿌리내린 마을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스님들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죠. 인맥도 촘촘하게 얽혀 있었고요. 복음이 들어가니, 마치 약 주고 주사 놓으면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처럼, 마을 전체가 요동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예민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하고, 영적인 공격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 😨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나요?
👨💼 몇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중 하나가 교회 노인들을 위한 잔치 때 일어났습니다. 부탄가스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내려오셔서 잔치를 도와주셨습니다. 잔치가 끝나고 부탄가스 통을 소각하고 있었는데, 부탄가스에 구멍을 뚫지 않고 그대로 불 속에 넣어버린 거예요. 부탄가스통이 폭발하면서 엄청난 화력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순간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옆구리도 탔고요. 병원에서 한 달 넘게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녀야 했죠. 그런데 그때 깨달은 것이, 어머니께서 저를 부르셨다는 거예요. 만약 어머니가 저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폭발 화염이 정면으로 얼굴에 쏟아졌을 겁니다. 어머니께 "어머니, 그때 저를 안 불렀으면 어쩔 뻔했어요?"라고 여쭤봤더니, 어머니는 "나는 그때 동네 할머니들과 밑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너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나도 모르게 너를 불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 어머니의 기도가 나를 살렸구나. 중보기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기도가 없이는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목회는 단순히 신학 지식이나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 🙏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네요. 영적인 전쟁을 실감하게 된 또 다른 경험이 있으신가요?
👨💼 교회에 여러 종류의 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무당 집안에서 자란 분,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분, 술에 중독된 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분 등등.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석하정'이라는 자매입니다. 본명은 '인자 엄마'라고 불렸는데, 석하정 자매는 교회에 처음 왔을 때부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이었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비틀거리고, 헛소리를 하고... 하지만 교회는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분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이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석하정 자매는 심각한 우울증과 영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골이라 제대로 치료받을 수도 없었고, 남편에게 구타까지 당하는 상황이었죠. 교회에 와서 예배는 제대로 드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교회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밤, 석하정 자매가 갑자기 교회에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교회는 마구간을 개조해서 만든 작은 예배당이었고, 저는 사택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나는 소리가 사택에 그대로 들렸죠. 밤늦은 시간에 교회에서 굿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꽹과리 치고, 방울 흔들고, "엄마 찾아"라고 외치고... 밤중에 굿판이 벌어진 겁니다. 너무 섬뜩해서 아내에게 "당신이 가서 확인해봐. 여자가 하는 짓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가보니, 석하정 자매가 굿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기도해 주고 돌려보냈지만, 그 후로도 석하정 자매는 계속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돌멩이를 던지고, 쌀을 뿌리고,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심지어 칼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왜 칼을 들고 왔어요?"라고 물었더니, "배추 깎다가 목사님 생각이 나서..."라고 횡설수설했습니다. 속으로 '아, 이렇게 극진하게 나를 좋아하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김천에 볼일이 있어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오면, 교회 입구에서 석하정 자매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온몸에서 귀신 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요. 신학교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종로서적에 가서 귀신 쫓는 책을 잔뜩 사서 읽어봤습니다. '귀신 쫓는 방법'이라는 책들을 보면서, '그래, 이렇게 하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어떤 책에는 "귀신에게 재떨이를 던져라"라는 황당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정말 재떨이를 던져볼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재떨이를 던지지는 못했어요. 대신, 석하정 자매에게 사탕을 건네주면서 따뜻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자매님, 힘드시죠? 제가 기도해드릴게요"라고 위로해주고, 따뜻한 차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사탕을 주면서 따뜻하게 대해주니, 석하정 자매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은 제가 산에서 돌멩이를 주워 석하정 자매에게 던졌습니다. "자매님, 이거 던지면서 스트레스 푸세요!"라고 농담처럼 말했더니, 석하정 자매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돌멩이를 주워 가더군요. "감사합니다"라고 인사까지 하면서... 그때 제 능력이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죠. 돌이켜보면, 석하정 자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고, 사랑으로 품어주었어야 했는데, 어린 마음에 두려움과 부담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석하정 자매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마을에서 굿판을 벌이고, 횡설수설하는 행동 때문에, 더 이상 마을에서 감당할 수 없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석하정 자매를 통해 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골 교회는 영적인 문제가 원색적으로 드러나는 곳이지만, 도시 교회는 영적인 문제가 교묘하게 감춰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석하정 자매는 오랫동안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 😢 석하정 자매의 이야기는 정말 안타깝네요. 또 다른 기억에 남는 교인이 있으신가요?
👨💼 네, 무당 할머니 한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50년 동안 동자신을 섬겼던 무당 할머니였는데, 어느 날 교회에 찾아오셨어요.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여쭤봤더니, 김천에 사는 딸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는 거예요. 딸이 어머니를 보니까 너무 불쌍해서,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고 싶었던 거죠. 마침 옥천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께 "교회에 한번 가보자"라고 권유했던 겁니다. 무당 할머니도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50년 동안 무당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쉽게 무당 생활을 청산할 수 없었던 거죠. 딸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저희 교회에 찾아오신 겁니다. 어린 마음에 무당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쫓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무당 할머니는 교회에 오셔서 40일 새벽기도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큰 맘 먹고 "네, 좋습니다. 40일 새벽기도를 시작합시다!"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무당 할머니는 새벽기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으셨던 거예요. 새벽기도를 '새벽에 하는 특별 기도' 정도로 생각하신 거죠. 새벽기도 첫날, 무당 할머니는 새벽 2시에 교회에 오셨습니다.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한복으로 갈아입고, 새벽 2시에 교회에 도착하신 거예요. 새벽 5시에 시작하는 새벽기도를 3시간이나 먼저 오신 거죠. 새벽 2시에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자고 있는 저를 깨우셨습니다. "목사님, 왜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새벽기도 시작해야죠!"라고 호통치셨습니다. "아니, 새벽기도는 5시에 시작하는데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새벽기도는 원래 일찍 시작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새벽 2시부터 교회에 와서 기도하시는 열정을 보이신 거죠. 정말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무당 할머니가 세례를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세례받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50년 동안 섬겼던 무당 도구들을 태워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좋습니다. 50년 동안 섬겼던 우상들을 깨끗하게 청산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더니, 무당 할머니는 "제가 직접 태울 수는 없고, 목사님이 대신 태워주세요"라고 부탁하셨습니다. 50년 동안 섬겼던 우상들을 직접 태우려니, 두려움과 망설임이 컸던 것 같아요. 저에게 대신 태워달라고 부탁하신 거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그걸 왜 목사님이 태워줘? 자기가 직접 태워야지!"라고 화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무당 할머니는 완강했습니다. "목사님이 태워주시면 세례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세례를 안 받겠다"라고 하신 거예요. 교회 입장에서 무당 할머니를 세례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었습니다. 50년 동안 무당으로 살았던 분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무당 할머니를 위해 교회적으로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무당 할머니의 세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세례식이 거행되던 날, 무당 할머니는 50년 동안 사용했던 무당 도구들을 가지고 교회 마당으로 나오셨습니다. 집 마당 한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50년 동안 모아온 무당 도구들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부적, 깃발, 모자, 방울, 칼 등등, 정말 어마어마한 양이었습니다. 제가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였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 떨림과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정말 원색적인 영적 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무슨 신학을 공부했는지, 아무 소용이 없구나. 이 영적인 싸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능력도,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능력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때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무당 도구들이 활활 타는 불길을 지켜봤습니다. 교회 교인 몇 명과 함께 박수 치면서, 무당 할머니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했습니다. 무당 할머니는 세례를 받으신 후, 마지막까지 교회 집사님으로 헌신적으로 봉사하셨습니다. 그 후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무당 할머니의 변화는 저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말 강력하구나. 어떤 굳게 닫힌 마음도, 어떤 어둠의 권세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구나.' 무당 할머니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습니다.
🎤 😮 무당 할머니의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틱하네요. 목사님께서는 옥천에서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셨군요. 힘든 목회 환경 속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 아, 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습니다. 사실 몇 번 도망치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항상 믿음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힘들고 어려울 때는 도망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습니다. 특히 옥천 목회는 정말 힘든 여정이었기 때문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교인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혼자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고, 다시 힘을 내서 목회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옥천에서 목회하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저를 통해, 옥천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으셨고, 교회를 굳건히 세우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옥천 목회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옥천에서 겪었던 고난과 역경은, 저를 더욱 성숙한 목회자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 힘든 시간들을 잘 견뎌내셨군요. 옥천을 떠나 미국으로 목회지를 옮기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 옥천에서 7년 동안 목회하면서, 정말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영적으로 지쳐 있었고,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더욱이 옥천은 시골이라, 아이들 교육 문제도 고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좋은 교육 환경에서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목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미국 이민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하면서 미국행을 준비했습니다. 미국 목회는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옥천에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통해, 어떤 환경에서도 목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옥천 교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저를 축복해주셨습니다. 옥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쉬웠지만, 새로운 목회지를 향한 기대감도 컸습니다. 미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감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 ✈️ 미국으로 건너가셔서도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텐데요, 미국 목회는 어떠셨나요?
👨💼 미국 목회도 쉽지 않았습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교인들의 성향도 달랐습니다. 특히 이민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민자들은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 장벽에 부딪히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이민 교회는 이민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주고, 위로와 소망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민 교회 자체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교인들 간의 갈등, 재정적인 어려움, 리더십 문제 등등. 미국 목회는 옥천 목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옥천에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통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옥천에서처럼, 새벽기도와 심방, 말씀 묵상에 힘썼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울고 웃고, 아픔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국에서도 저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미국 교회를 부흥시키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미국 목회는 제 인생에서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계관이 넓어졌고, 목회자로서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 🥰 미국에서도 귀한 열매를 맺으셨군요. 목사님께서는 가난한 개척 교회부터 미국 대형 교회까지, 다양한 교회에서 목회하셨는데요, 목회를 하시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목회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가치'입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모든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존귀하고,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목회자는 바로 그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목회는 건물을 짓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영혼들을 사랑하고, 영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섬기는 종입니다. 저는 옥천 개척 교회에서부터 미국 대형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영혼의 가치'를 끊임없이 되새겼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영혼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영혼들의 존귀함과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부유하고 성공한 영혼들을 만날 때도, 그 영혼들의 내면적인 갈망과 아픔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영혼은 다 똑같이 목마르고, 외롭고, 상처 입은 존재입니다. 목회자는 바로 그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위로와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영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목회에 전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그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 🙏 '영혼의 가치'를 강조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새롭게하소서' 시청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강남중앙교회 장찬영 목사입니다. 오늘 제 간증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해 옥천 땅에 복음을 심으셨고, 미국 교회 부흥을 이끄셨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옥천 개척 교회에서부터 미국 대형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차별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모든 영혼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저는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장 목사님, 오늘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많은 시청자들이 큰 은혜와 도전을 받았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강남중앙교회 목회를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전파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조성제 님, 오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조성제 님 저는 원래 무서운 상황이 되면 잘 도망가는 타입입니다. 겁도 많고, 소심하고, 비겁한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목사님 간증을 들으면서,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무서운 환경이 나에게 닥쳐왔을 때, 그것은 도망치라고 온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성장하라고 주어진 환경임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싸워보겠습니다. 목사님 간증 감사합니다.
🎤 이정수 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이정수 님 저는 가끔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들은 어떻게 1년 52주, 수요 예배까지 포함하고 금요 철야 기도회까지 하면 150회 이상 설교를 하시는데, 어떻게 똑같은 설교 없이 저렇게 무궁무진하게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실 수 있을까? 그것도 한두 명의 목사님도 아니고, 수천, 수만 명의 목사님들이 어떻게 저렇게 설교 말씀을 끊임없이 쏟아낼 수 있을까?'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장 목사님 간증을 들으면서,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간증해주신 목사님의 삶, 그 한순간 한순간이 역사와 같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체험하시고 경험하신 그 모든 것들이 설교 말씀의 재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간증은 정말 간략하게 요약된 것이겠지만, 옥천에서, 플로리다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워싱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으셨겠습니까. 그 모든 경험들이 목사님의 삶 속에 녹아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목사님 간증은, 우리에게 큰 메시지와 위로를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목사님께서 강남중앙교회 목회를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전파하시기를 응원합니다. 더 많이 사용되시고, 더 많이 지도해주시고, 더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귀한 간증 정말 감사드립니다.
🎤 연예은 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연예은 님 오늘 장 목사님 간증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차별하지 않으시는구나. 개척 교회에서부터 미국 대형 교회까지, 가난하든 부유하든, 아프든 건강하든,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차별받지 않고, 똑같이 사랑받는구나.'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영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목사님의 성도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느껴져서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정말 감사드립니다.
🎤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장 목사님, 다시 한번 '새롭게하소서' 출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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