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주 목사 신앙 고백: 어머니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 체험
## 어머니의 신앙, 하나님의 깊으심을 만나다
깊고 진한 체험적 신앙 고백: 이덕주 목사의 삶을 통해 듣는 하나님의 깊으심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단연 신앙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도 당대에는 몰랐지만, 결국 후대에 길이 남을 훌륭한 믿음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덕주 목사님은, 어머니의 단호한 신앙 고백 이후 인생이 변화되었다고 고백하며, 40년 동안 한국 교회사를 연구해 온 학자입니다. 남의 신앙 이야기만 써 오던 이 목사님이 드디어 자신의 신앙 고백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감신대 교수를 은퇴하신 이덕주 목사님을 모시고, 깊고 진한 신앙 여정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
이덕주 목사님의 신앙은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시다가 37세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목사님이 네 살 때였으니, 어머니는 홀로 남겨진 세 남매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 전쟁, 그리고 60-70년대 가난의 시대라는 힘겨운 시간 속에서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삼남매를 키워내셨습니다.
신앙적으로 어머니는 다소 복합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절에도 다니시고, 굿도 하는 등 토속신앙에 기대는 평범한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남편, 즉 목사님의 아버지가 결핵을 앓기 시작하고, 큰 누님이 홍역을 앓으면서 가난과 고난이 겹쳐 닥치자 어머니는 삶의 막막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이상한 종소리를 듣게 됩니다. 댕, 댕 울리는 절의 종소리와는 달리, 땡그랑 땡, 땡그랑 땡 하고 맑고 청아한 종소리였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절의 종소리와는 다른, 낯선 종소리에 어머니는 이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밤중에 어머니는 열이 펄펄 끓는 누님을 업고, 콜록거리는 남편을 둔 채, 종소리를 따라 나섰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단양읍 교회의 새벽기도회였습니다. 어머니는 누구에게 전도를 받은 적도, 교회에 다녀본 적도 없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종소리에 이끌려 교회 문턱을 넘게 된 것입니다.
새벽 예배당에 들어선 어머니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20명 남짓한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습은 낯설었지만, 뒷자리에 앉는 순간 “바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구나” 하는 강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훗날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사님은 어머니가 느꼈던 감정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 즉 ‘선행 은총’ 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은혜가 바로 선행 은총입니다. 어머니는 종소리를 통해, 그리고 새벽 예배를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행 은총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단양읍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핍박, 특히 큰집 식구들의 “예수 귀신 믿는다”는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35세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큰집 식구들은 “거봐라, 예수 믿더니 남편 죽었다”며 더욱 심하게 어머니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어머니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아버지 장례 후 3년 만에, 어머니의 든든한 희망이었던 큰 아들 권주 형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권주 형님은 12살 위의 큰 형으로, 잘생긴 외모에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착하고 신앙심도 깊은, 그야말로 어머니의 자랑이자 희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대학교 진학을 꿈꾸던 수재였습니다. 주변에서는 “예수 믿어 남편 죽고 가난하게 살지만, 아들 하나는 잘 키웠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효심도 깊었던 권주 형님은 요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머니를 도왔고, 졸업 후에는 충주 시청 공무원으로 특채될 예정이었습니다. 공무원 발령을 기다리던 한 달의 공백 기간 동안에도, 형님은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극장 천장 배선 공사를 돕던 중 발을 헛디뎌 추락, 뇌진탕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희망이자 자랑이었던 아들이, 첫 출근 날 예기치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들판에서 놀다가 형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어린 목사님은, 집에 달려가 하얀 천에 덮여 있는 형님의 시신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1년 동안 제대로 기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예배당에 가도 감사도 기쁨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믿었던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어느 날 새벽,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그 순간, 어머니는 “네가 내 아들 권주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더 의지하느냐, 아들을 더 의지했느냐” 라는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지만, 실은 아들 권주를 더 의지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십계명 제1조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이전까지 어머니의 기도 제목은 남편의 건강 회복, 자식들의 성공, 가정의 부유함 등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 예배를 드리는 목적 또한 세상적인 복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어머니는 완전히 무너지고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남은 인생,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랑하겠습니다” 라는 진정한 신앙 고백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가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를 믿은 지 1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초등학교 2학년 어린아이였습니다. 어린 시절 목사님은 가난과 고독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늘 장사를 하러 집을 비우셨고, 형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어린 목사님은 외로움 속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가난과 고독은 목사님에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 특별한 축복 이었습니다. 부유하거나 친구가 많은 사람들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가난과 고독 속에서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믿음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후 며칠 뒤, 어머니는 꿈속에서 아들 권주 형님을 만났습니다. 환한 얼굴의 형님은 어머니에게 “여기(천국)도 엄청 바빠요” 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꿈을 통해 아들의 죽음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도 아들과 같이 똑똑하고 착한 천사가 필요했나 보다’ 생각하며 슬픔을 극복하고, 천국에서 아들과 다시 만날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고통과 절망은 오히려 어머니를 더욱 깊은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껍데기뿐이었던 신앙생활은 끝이 나고, 아들을 제물로 바친 후 비로소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이후 삼남매를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어느 날 철야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아침마다 드리던 가정 예배 시간에 삼남매를 앉혀 놓고 엄숙하게 선언했습니다. “잘 들어라. 어제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결심한 건데, 오늘부터 너희들은 내 자식이 아니다.” 어린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가족 해체 선언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어머니가 힘드셔서 우리를 포기하시는구나. 형은 머슴으로, 누나는 애 보기로, 나는 고아원으로 보내려나 보다’ 어린 마음에 온갖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기도하는 중에 너희 삼남매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어머니는 삼남매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날 이후 어머니 입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은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달라진 태도를 통해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매를 들지 않으신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잘못하면 회초리로 엄하게 훈육하셨지만,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매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때릴 수 없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를 때리겠느냐. 때리시더라도 하나님이 때리실 것이다.” 어머니의 선언은 훈육 방식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쌀이 떨어지면, 이전에는 이웃집에서 쌀을 빌리거나 외상으로 샀지만, 그 후로는 일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쌀이 떨어지면 예배당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이 쌀이 없어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교인들이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르는 쌀 한 봉지가 문 앞에 놓여 있곤 했습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쌀,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렸던 만나와 같았습니다. 어머니와 삼남매는 만나를 먹고 자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어머니는 쌀이 떨어져도, 돈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내일 또 만나가 내리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역시 어머니의 믿음대로 자라면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체험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했습니다.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해 학교에서 빨간 딱지가 붙은 독촉장을 보내왔을 때, 어머니는 독촉장을 들고 예배당으로 향했습니다. 목사님을 옆에 앉혀 놓고 “하나님, 당신의 아들 덕주가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하고 돌아왔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등록금을 낼 수 있는 길이 열리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선언,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다” 는 말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삶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는 강력한 믿음의 선포였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은 삼남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놀랍게도 어머니가 하나님께 바친 삼남매는 모두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큰 형님 이현주 목사님, 누님 이정희 장로님, 그리고 막내인 이덕주 목사님까지, 삼남매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헌신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목사님은 어머니의 일방적인 헌신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지만, 나는 과연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서원한 기도, 그리고 응답
목사님이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헌신이 개인적인 서원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봄 소풍을 앞두고 갑자기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더니, 열이 몹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소풍은커녕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뒤늦게 귀가한 어머니는 아픈 목사님을 보고 깜짝 놀라 교회로 데려갔습니다. 병원 대신 교회를 택한 것입니다. 당시 담임 목사님이셨던 이철상 목사님은 목사님의 상태를 보시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권유했습니다. 충주에서 가장 큰 병원, 김내과였습니다. 김내과 의사 역시 진찰 후 “당장 큰 병원으로 데려가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병명은 골수염, 뼈 속 신경 조직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병으로, 완치가 어렵고 수술과 재수술을 반복해야 하며, 심하면 다리를 절단하거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서울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고쳐주시면 안 되나요?” 의사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습니다.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 아들도 같은 병을 앓았는데, 5년째 치료 중이지만 완치하지 못하고 결국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목사님 아드님도 같은 병입니다.” 의사는 서울대병원에 아는 의사를 소개해 줄 테니, 서울로 가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서울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습니다. “저는 얘를 하나님께 바쳤는데요.” “이 병이 죽을 병이면, 서울, 미국 가서 수술해도 죽을 것이고, 살 병이면 엿 사발 수술해도 살 것입니다. 그냥 여기서 해 주세요.” 중학교 1학년 어린 학생 앞에서 어머니는 너무나 담담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목사님은 이미 당신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였던 것입니다.
수술실로 향하는 차가운 복도에서, 목사님은 어머니의 냉정한 태도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포기했구나. 나는 이제 죽는 건가.’ 수술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데, 담당 의사가 다가와 더욱 절망적인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들을 5년 동안 치료했지만 결국 다리를 잘랐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다. 잘못될 수도 있다.” 수술 결과에 대한 확신도 없이, 실패를 전제로 수술을 하겠다는 의사의 말에 목사님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마취 주사가 투여되고 점점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순간, 목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간절한 기도를 쏟아냈습니다. “하나님, 제발 다리만 자르지 않게 해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뱉은 서원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어머니의 믿음, 그리고 죽음 앞에서 드린 어린 학생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입니다. 실력 있는 의사의 손길, 5년간 아들을 치료하며 쌓은 노하우,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져, 가난한 과부의 막내아들은 단 한 번의 수술로 완치될 수 있었습니다. 군대까지 다녀온 건강한 두 다리, 지금 목사님이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날 목사님은 어머니를 원망했던 마음을 뉘우치고, 오히려 당신을 포기했던 어머니에게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내 새끼, 내 새끼” 하며 눈물로 매달렸다면, 의사에게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했다면, 목사님은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포기, 그리고 의사의 절망적인 선언이 있었기에, 비로소 목사님은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서원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포기가 오히려 목사님에게 최고의 행복이 된 셈입니다. 어머니의 포기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맡김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서원했다고 곧바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수술 후 건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욕심과 유혹에 흔들렸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서원했던 기도는 잊혀져 갔고, 평범한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목사님은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처럼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뛰어난 학업 성적은 의대 진학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대입 예비고사 후 갑작스럽게 폐결핵이 재발하면서 의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절망감과 좌절감에 휩싸여 있을 때, 먼저 신학대학을 졸업한 형님의 권유로 감리교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 생활은 재미없었습니다. 억지로 떠밀려 온 곳, 원하던 길이 아니었기에 방황과 갈등 속에서 신학교 3년을 보냈습니다. 데모, 유치장, 술, 방탕한 생활, 신학생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탈을 일삼았습니다. 여름 성경학교, 학생 수련회 등 교회 봉사 활동은 억지로 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고, 여름 사역을 피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도피성 기도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기도원 철야 집회, 그리고 잊었던 서원의 재현
기도원에 도착해서도 목사님은 기도 대신 딴 짓만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기도원에서 열린 청년 철야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 찬송과 율동, 간증과 기도,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목사님은 불편함과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미친 놈들’ 속으로 비웃으며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새벽 4시, 집회가 끝날 무렵, 다른 사람들은 은혜받았다고 기뻐했지만, 목사님은 여전히 냉랭하고 무덤덤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나, 나는 왜 억지로 신학교에 와서 이러고 있나, 나는 왜 목사가 되어야 하나.’ 깊은 회의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마치 오래된 녹음기처럼 낡고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 다리만 자르지 않게 해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술실에서 했던 서원이었습니다.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고 애썼던 서원이 10년이 지나 낡은 녹음기처럼 다시 재생된 것입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왜 신학교에 왔는지, 왜 목사의 길을 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방황했지만, 해답은 이미 10년 전에 내가 했던 서원 속에 있었다.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를 잊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을 목사의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깨닫는 순간, 목사님의 마음속에 뜨거운 감격과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찬송가가 터져 나왔습니다.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메마른 심령에 성령의 단비가 쏟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1974년 8월 16일 새벽 4시, 목사님의 영적인 생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잊었던 서원을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온 목사님은 3년 동안 복용했던 폐결핵 약을 한강에 버렸습니다. 기도원에 가기 직전 병원에서 “3년이나 약을 먹었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지만, 기도원 체험 이후 약을 끊고 병원에 갔더니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엑스레이 사진에는 폐결핵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분명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몸에는 두 가지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왼쪽 넓적다리에 중학교 1학년 때 수술했던 흉터, 그리고 가슴에 신학교 3학년 때 하나님을 만났던 영적인 흉터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목사님 역시 육체와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후 목사님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이전의 삶을 “기름칠 안 된 수레를 언덕길 위로 끌고 가는 것” 에 비유했습니다. 뻑뻑한 바퀴, 뒤에서 잡아당기는 사람들, 아무리 애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함, 만족도 감사도 기쁨도 평안도 없는 무거운 짐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원 체험 이후, 삶은 “기름칠 잘 된 수레가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것” 처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퀴는 부드럽게 굴러가고, 뒤에서 잡아줄 사람이 필요할 정도로 속도감 있는 삶,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 평안이 넘치는 삶이었습니다. 이후 목사님의 삶은 자신이 계획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곳으로 이끌려 가는 여정이 되었습니다. 목회, 신학교 교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경쟁하고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채워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체험적 신앙의 중요성, 그리고 어머니의 유산
목사님은 신앙생활에서 체험적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신앙의 네 기둥으로 성서, 체험, 이성, 전통을 제시했습니다. 목사님 역시 성경, 체험, 이성, 전통, 이 네 가지 기둥이 균형을 이루는 신앙을 추구합니다. 이전에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신앙에 치중했지만, 기도원 체험 이후 체험적 신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웨슬리, 칼뱅, 어거스틴, 루터, 베드로, 엘리야, 모세 등 위대한 신앙인들의 삶을 살펴보면, 모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즉 체험에서부터 신앙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렙산 불꽃, 가나안 만나,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부르심, 이처럼 하나님과의 생생한 체험은 신앙의 근본이자 원동력입니다. 체험 없는 신앙은 공허하고, 체험 없는 신학은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신앙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경험하는 신앙, 바로 체험적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어머니는 목사님에게 나오미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처럼, 어머니 역시 고난과 역경 속에서 믿음을 굳건히 지켜냈고,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했습니다. 삼남매가 모두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녀들의 성공을 자신의 공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내가 열심히 양육해서 자식들이 잘 되었다”는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머니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시다” 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고 고백했습니다. 가난 속에서 자녀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도 못했지만, 오직 하나님께 자녀들을 맡기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을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자녀들은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소중한 존재,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선언을 삶으로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목사님이 안수받던 날, 어머니는 눈물을 펑펑 쏟으셨습니다. 안수 받는 내내 옆에서 흐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목사님은 어머니의 깊은 사랑과 헌신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삼남매가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정작 어머니는 말년에 자식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홀로 외롭게 지내셨습니다. 70세에 은퇴하시고 7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어머니는 홀로 사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은퇴 후에는 하나님께 빨리 불러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은퇴식 날에도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못했고, 홀로 쓸쓸하게 은퇴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작은 수첩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덕주 보고 싶다, 슬기 보고 싶다”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목사님은 진정한 효도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부모님이 보고 싶어 하실 때 찾아뵙는 것이 진정한 효도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70세에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으시고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 건강하셨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발병, 삼남매는 망연자실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5세에 홀로 되어 3남매를 키우면서,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하나님께 가겠다”고 기도했던 어머니는, 정확히 70세에 하나님께 부름받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70세가 되던 해, 어머니는 신년 예배를 드리면서 “올해 안에 하나님께 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교통사고나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 마지막 전도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평소 “성도는 죽은 얼굴로 마지막 전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 대신 췌장암이라는 질병을 통해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으시고 정확히 3개월 후, 12월 15일, 어머니는 평화롭게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임종 직전 어머니는 마지막 시험을 치르셨습니다. 췌장암 말기 환자의 고통, 혼수상태에 빠진 어머니의 입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신이 나갔다”고 수군거렸고, 목사님 역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에 큰 혼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어머니가 천국에 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지만 새벽녘, 험한 말들은 사라지고 어머니의 입에서 성경 말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험한 말과 성경 말씀이 번갈아 나오던 혼수상태, 그것은 마치 천사와 사탄의 영적 싸움을 연상케 했습니다. 유다서에 묘사된 모세의 시신을 두고 다투던 천사와 사탄의 모습처럼,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영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이 밝아오면서, 험한 말들은 사라지고 오직 성경 말씀만 남았습니다. 어머니는 평안한 얼굴로 잠들듯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임종 과정을 지켜보면서, 목사님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를 떠올렸습니다. 평생 성경을 20번, 30번 통독했던 어머니, 암기력은 부족했지만, 늘 성경을 가까이하며 말씀을 묵상했던 어머니의 삶은, 등불과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았습니다. 평소에는 잊어버린 듯했던 성경 말씀들이, 마지막 순간,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어머니의 무의식 속에 저장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학자인 아들에게 체험적 신앙의 진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은퇴 후 목사님이 성경 필사를 시작하신 것도, 어머니의 삶을 본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은퇴 후, “너는 나를 아느냐?” 라는 질문
2018년 은퇴 후, 목사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좀 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던 목사님은, 사순절 숲길을 걷다가 깊은 침묵 속에서 “너는 나를 아느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 앞에 목사님은 한동안 멍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신학교 교수로서, 수많은 책을 저술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너는 나를 아느냐?” 물으셨을 때, 자신 있게 “예, 압니다” 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학생들 앞에서,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 척, 전문가인 척했지만, 실상은 껍데기뿐인 삶을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한 달 동안 깊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목사님은 새로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이제부터 알아가자.” 은퇴 후,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시작하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이제는 나를 좀 알아봐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목사님은 은퇴 후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했습니다.
은퇴 후, 목사님의 삶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선교사들의 삶과 신앙을 연구하는 집필 활동에 매진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깊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와 한국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이력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집필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를 감동시킨 한국 초대교회 교인들의 순수한 신앙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백 리 길, 이백 리 길을 걸어 사경회에 참석하고, 아기를 업고 예배당을 찾아오고, 남편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한국 초대교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와 한국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 집필 활동은 목사님에게 가장 행복한 사역이 되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 더욱 분명하고 친밀하게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불완전하게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완전하게 아시는 것처럼, 목사님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아가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은퇴 후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덕주 목사님의 깊고 진한 신앙 간증을 통해, 우리 역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와 헌신, 그리고 목사님의 파란만장한 신앙 여정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체험적 신앙의 중요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목사님의 귀한 저술 활동과 사역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깊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귀한 간증 나눠주신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