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서 존재의 가치와 사회적 기업 ‘보라’ 조은하 대표 간증
## 쎄도 괜찮아! 하나님 안에서 '나'는 이미 귀한 존재니까
쎄도 너무 쎈 언니의 솔직한 간증: 하나님 안에서 ‘나’는 존재만으로 귀해요 – 사회적 기업 ‘보라’ 조은하 대표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그리고 안수지, 정범균 씨와 함께합니다. 우리는 종종 남들이 생각하는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데요, 사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신 분은 바로 그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고 엄청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신다고 합니다. 저 역시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바라보실지 매우 궁금한데요, 사회적 기업 ‘보라’의 조은하 대표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사회적 기업 ‘보라’의 조은하 대표입니다. 반갑습니다. 새롭게 하소서 출연은 정말 긴장되는데요, 사실 제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밤잠을 설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편안하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회적 기업 ‘보라’의 대표로서,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담은 옷을 입고 오니 더욱 설레고 긴장되네요.
대표님의 이력을 보니, 성인이 된 이후 부모님께서 세 자녀를 입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놀라운데요, 입양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서 차례로 세 동생을 입양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20살이었고, 동생들은 100일, 50일, 60일 정도 된 아기들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저에게 “동생들이 정말 예쁘다, 질투 나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하셨고, 입양 사실을 알면서도 “무슨 관계냐”고 묻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저를 동생들의 엄마로 오해하는 분들도 계셨는데요, 언니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고 엄마라고 하기엔 어려 보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말 독특한 가족 구성인데요, 동생들과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동생들이 오면서 저희 가족은 돌림자를 사용하여 이름을 모두 바꿨습니다. 저도 ‘은하’로 이름을 바꾸었는데요, 동생들은 ‘은비’, ‘은별’, ‘은샘’으로 지었습니다. ‘은비’는 비관적인 성향, ‘은별’은 별난 성격, ‘은이’는 샘이 많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건강한 관계입니다. 자매들끼리 많이 싸우기도 하는데요, “누가 키워달랬냐”, “우리 엄마 찾아갈 거야”와 같은 격한 말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티격태격하면서도 끈끈한 자매애를 느끼며 성장했습니다.
보통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녀를 입양하는 경우, 성인 자녀의 동의가 필요할 텐데요, 대표님의 경우는 어떠했나요?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입양에 대한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사랑이 많으셨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즉 할머니의 반대로 입양이 늦어졌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입양은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일상과 같았습니다. 동생들이 너무 예뻐서 꿈을 포기할 정도로 좋았고, 사람들은 그런 저를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애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요, 이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기업 ‘보라’를 운영하게 된 계기가 동생들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동생들이 자라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동생들의 꿈을 든든하게 지원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동생들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특히 둘째 동생은 꿈이 없는 것에 더해, 느린 학습자 판정을 받아 더욱 마음이 쓰였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사회적 기업이라는 모델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수강생 중 한 분이 사회적 기업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회적 기업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사회적 기업을 통해 실제적인 삶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막연하게 선교사의 삶을 꿈꿔왔는데, 사회적 기업이 필드에서 선교적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기업 ‘보라’는 어떤 일을 하는 기업인가요? 사회적 기업 ‘보라’는 가드닝 플랜테리어 관련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농장도 운영하며, 자립 준비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성인 저와 동생들을 중심으로, 자립 준비 청년, 입양 청년, 미혼모, 한부모 가정, 취약 계층 여성 청년들과 함께 식물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라는 이름은 성경적인 의미와 환경적인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라는 성경 구절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가 보라색을 좋아해서 ‘보라’라고 지은 줄 알고 있습니다.
보라색을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어느 정도인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시겠어요? 보라색을 너무 좋아해서, 대학생 때 올(all) 보라색 패션을 선보인 적도 있습니다. 보라색 비니, 보라색 떡볶이 코트, 보라색 골덴 바지, 보라색 운동화, 심지어 보라색 가방까지 착용하고 지하철을 탔는데요,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창피함을 느껴 떡볶이 코트를 열어봤지만, 안에는 보라색 니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보라색 원피스에 보라색 스타킹, 보라색 구두를 신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름도 ‘보라’로 바꾸려고 했을 정도인데요, ‘조보라’라는 이름이 예쁘고 유치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있어서 바꿀 것이 너무 많아 포기했습니다. 신혼여행도 보라카이로 다녀왔고, 결혼반지도 자수정으로 선택했습니다. 청첩장 400장에 보라색 큐빅을 직접 붙이기도 했습니다. 결혼식 애프터 드레스도 보라색, 신혼 침구도 보라색, 심지어 휴지도 보라색을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가드닝 사업을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보라색 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예뻐서입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요, 보라색은 저의 삶 그 자체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라색은 왕의 색깔, 왕족의 색깔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자연을 나타내는 색깔이기도 합니다. 물론 보라색이 우울감을 나타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또라이 아니면 천재라는 말처럼, 극과 극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생들 입양 후, 20대에 세 명의 동생을 돌보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힘든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20대, 30대 삶은 동생들과 관련된 일이 많았는데요, 좋았던 점도 많았지만 힘든 점도 있었습니다. 특히 둘째 동생은 느린 학습자였기 때문에, 양육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첫째 동생은 순했지만, 둘째 동생은 울어도 달래지지 않고, 잘해줘도 반응이 없고, 모든 것이 어려웠습니다. 언어 치료사인 둘째 동생의 배우자(새언니) 덕분에 둘째 동생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지만, 서로 다른 방식 때문에 실생활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동생들과 1대1 데이트를 할 때면, 첫째, 셋째 동생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둘째 동생과는 항상 좋지 않게 끝났습니다. 하지만 동생들을 키우면서 웬만한 청년들을 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감사한 일입니다. 20년 가까이 동생들을 통해 훈련받은 덕분에, 자립 준비 청년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자녀가 있는 상황에서 세 명의 아이를 입양하는 어머니의 결정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머니는 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요?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랑이 많으셨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대한 마음이 간절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운 시집살이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으셨고, 아버지 제사를 예배로 바꾸고, 작은 아빠를 목사님으로 키워낼 정도로 신앙심이 깊으셨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힘든 마음을 교회에서 위로받고,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깨닫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입양을 결심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와 오빠는 입양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툴렀지만, 마음속으로는 동생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이 정말 대단하신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움 속에서 세 아이를 키우는 것은 더욱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입양 전부터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고, 입양 후에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돈을 못 받거나, 집이 넘어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수중에 500만 원만 남았을 때, 정말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덕분에, 경매 낙찰자가 집 수리를 아버지께 맡기고, 수리 기간 동안 살 집을 제공해 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의 돈으로 집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우리는 그대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된 것입니다. 정말 은혜로운 경험이었고, 가족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대표님은 이미 성인이었기 때문에,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힘든 시절, 어떤 일을 하며 지내셨나요? 정말 끊임없이 일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일했던 기억밖에 없을 정도인데요, 친한 언니는 저에게 “왜 이렇게 직업을 자주 바꾸냐, 끈기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유학도 가고 싶었고, 공부도 더 하고 싶었지만, 계속 일을 해야 했습니다. 월급을 많이 주는 곳을 찾아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주일 성수를 위해 퇴사하기도 하는 등, 여러 번 직업을 바꾸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부모님을 원망했을 법도 한데요, 부모님께 서운했던 적은 없었나요? 능력이 안 되는데 왜 동생들을 입양했을까 원망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큰 선택을 할 때 부모님과 의논하고 싶었고,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시길 바랐지만, 부모님은 그런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역시 힘든 삶을 살아오셨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셨기 때문에, 제가 기대하는 만큼의 역할을 해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서운함보다는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돈이 많으면 편하지만, 없으면 불편할 뿐,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자녀 양육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을 망설이는데요, 대표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키우신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연봉으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키우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내 연봉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생들을 양육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지 말고 살아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남편분과의 만남 이야기도 궁금한데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남편은 8년 정도 교회 오빠로 알고 지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알고 지내던 사이라, 특별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결혼은 타이밍이라고 하는데요, 당시 저는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남자라도, 이 오빠는 남자가 아니다”라고 주변에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씨가 되어, 정말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남편은 저를 좋아한다는 티를 냈지만, 저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집안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남편이 곁에서 힘이 되어주었고, 진지하게 기도하며 관계를 발전시켜 6개월 만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오빠에서 남자로 보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남편은 감성적인 스타일인데요, 남편의 동생들을 잘 챙겨주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여성에게는 모성애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결혼 전에는 남편 덕분에 공주처럼 살 줄 알았지만, 현실은 무수리처럼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리더십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결혼 후 저의 센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성향 때문에 갈등도 있었지만, 맞춰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신가요? 2013년에 결혼해서, 벌써 12년 차 부부가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는데요, 2019년에 남편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목뼈가 부러지고 하반신 마비 가능성까지 있는 큰 사고였는데요, 당시 정말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병원에 입원하고, 저는 사업 운영과 빚 문제, 간호까지 맡아야 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온몸에 피부병이 생기고, 대상포진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지쳐갔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축복을 함께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더욱 친밀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남편분 간호는 잘 하셨나요? 남편 간호에 소홀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병원에 자주 오지 않는 것에 섭섭해했지만, 당시 저는 제 삶이 너무 버거워서, 차라리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병원에서 게임을 하며 외로움을 달랬다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만 원이 없어 밥을 굶을 때, 남편은 노트북을 바꾸고 게임 아이템을 현질하기도 했습니다. 배신감을 느꼈지만, 원망하지 않는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힘든 시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요? 정말 힘들고 외로웠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고난과 축복을 함께 주셨습니다. 남편 사고와 빚 문제, 사업 실패 등, 겹겹이 닥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 주신다고 하셨는데, 당시에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가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습니다. 셀 공동체 식구들의 도움과 격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순수하고 아이 같은 마음, 아이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고, 다시 남편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부부 관계가 회복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부부 관계가 회복된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지금은 남편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오히려 장점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서로 다른 성향을 인정하고 맞춰가려고 노력합니다. 예전에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만 고집했지만, 지금은 남편의 의견을 경청하고, 함께 의논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편과 평생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여전합니다.
부부 상담 코너 같은 분위기가 되었는데요, 두 분은 정말 극과 극의 성향인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매력이 있었나요? 남편은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고, 저는 도전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남편은 감성적이고, 저는 이성적인데요,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주는 매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저의 강한 리더십에 매력을 느꼈다고 하고, 저는 남편의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에 끌렸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서로 다른 성향 때문에 부딪히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다행히 신앙, 정치관, 세계관은 일치해서, 갈등을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편분에게 서운했던 점은 없었나요?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시댁 사업을 돕다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업을 확장하다 빚을 지게 되었는데요, 남편은 안정적인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저의 사업 확장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빚을 진 것에 대해 원망하기도 했지만, 저는 남편이 경제적으로 안정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승리자”라고 말했고, 남편은 그 말에 기뻐했습니다. 저는 마르다, 남편은 마리아 같은 스타일인데요,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업 빚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요? 사업 확장을 위해 빚을 졌지만, 남편 사고와 코로나19 사태로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빚이 6억까지 늘어났습니다. 매달 5~6천만 원의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요, 정말 감당하기 힘든 빚이었습니다. 남편은 빚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저는 그런 남편에게 의리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빚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며 빚을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빚에 대한 부담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 속에서 에베소서 말씀을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점이 와닿았나요? 에베소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쪼개서 읽었지만, 고난 속에서 에베소서 전체를 묵상하면서, 말씀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부족한 모습 때문에 괴로웠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잘나서, 성공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과거 사진을 보니, 지금과는 다른 모습인데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나요? 어릴 때 못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까맣고 털도 많고, 원숭이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는데요, 아버지도 저를 쳐다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힘들 때 “너를 낙태하고 싶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고모는 저를 “못난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거절감과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절감이 오히려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관심이 없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제 옆에서 함께 울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영적으로 다시 살아났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저를 존재 자체로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회적 기업 ‘보라’의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사회적 기업 ‘보라’가 자립 준비 청년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안감을 안고 살아온 청년들이 ‘보라’에서만큼은 불안하지 않고, 안정감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멘토로 삼고 있는 분이 “보라에 가면 사라지더라, 살아내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정말 공감되는 비전입니다. 자립 준비 청년들이 진정한 자립을 이루도록 돕고 싶습니다. 경제적인 자립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자립을 의미합니다. 제가 없어도 굴러가는 회사를 만들고 싶지만, 최종 목표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선교사의 삶을 동경했지만, 지금은 현재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실수도 많지만, 하나님 안에서 빚어져가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가정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생명 살리는 일에 끝까지 쓰임 받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