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중독 가정에서 청소년 희망 멘토된 김형민 목사 이야기
도박 중독 엄마, 문제아 아들에서 청소년들의 희망 멘토로!
어머니의 도박 중독과 탈선, 모두가 두려워하던 아이에서 청소년들을 변화시키는 목회자로 거듭나기까지: 김형민 목사의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께서는 특별한 간증을 통해 깊은 감동과 교훈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과거의 어두웠던 경험들이 현재의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나아가 다른 이들을 돕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오늘 만나볼 김형민 목사님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아오신 분인데요, 청소년 시절, 꿈이 좌절되고 방황의 시간을 보내셨지만, 이제는 오히려 청소년들을 살리는 사역자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김 목사님은 단 하루 만에 하나님을 영접하셨다고 하는데, 과연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인생의 극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아둘람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김형민 목사님을 모시고, 그의 파란만장했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과 좌절: 야구 선수에서 문제아로
김형민 목사님은 어린 시절부터 야구 선수라는 꿈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포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였습니다. 실제로 김 목사님은 "우리나라 국가대표 포수"가 꿈이었을 정도로 야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꿈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의 반대 이유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구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는데, 당시 김 목사님 가정은 어머니의 독특한 취미 생활, 즉 보드게임이라고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화투 도박 중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도박 중독은 가정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결국 김 목사님은 야구를 포기하고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꿈을 잃은 어린 김형민은 큰 상실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운동장에서 땀 흘리며 꿈을 키워왔던 그에게 갑작스러운 학업은 낯설고 힘든 도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운동만 했던 아이가 갑자기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수업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고, 학교에서 인정받을 길을 찾지 못했던 그는 결국 일탈 행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일탈 행동"들을 섭렵했다고 고백합니다. 흡연과 음주는 물론, 어른 흉내를 내고 권위자에 반항하며 싸움을 일삼는 등, 문제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덩치도 컸던 그는 반에서 '짱'이었고, 전교에서도 알아주는 문제 학생이었습니다. 사춘기의 김형민 목사는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도박 중독과 가정 불화: 분노와 원망의 씨앗
김형민 목사님의 방황에는 어머니의 도박 중독이라는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도박은 가정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의 불화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도박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중독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고, 가정에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린 김형민은 부모님의 싸움을 지켜보며 깊은 절망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김 목사님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매우 컸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자신의 꿈을 좌절시킨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당연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어머니를 미행하여 도박 하우스까지 찾아갔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골목길을 따라 미행하여 찾아간 도박 하우스는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과 똑같았습니다. 현관에는 신발이 가득했고, 방 안에는 덩치 큰 아저씨들과 사람들이 가득 차 도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를 혼내주려 했지만, 오히려 위협을 느끼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사랑과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던 김형민은 더욱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짱' 노릇을 하며 힘든 현실을 잊으려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탈 행동들은 단순히 반항심의 표현이 아닌, 내면의 깊은 분노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했고, 원망과 불신만 쌓여갔습니다.
교회와의 만남: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
방황하던 김형민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 것은 친구의 전도를 통해서였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는 김 목사님에게 "교회에 예쁜 누나들이 많다"는 솔깃한 말로 접근했습니다. 순수한 청소년 시기에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큰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 목사님은 당시 순수한 마음보다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교회에 발을 들였습니다.
처음 방문한 교회는 강북구 수유리에 위치한 작은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간 목적은 '예쁜 누나'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누나는 예뻤지만, 김 목사님을 '보기 좋게 거절'했습니다. 만약 그때 누나와 잘 되었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김 목사님은 회상합니다. 어쩌면 그 누나의 거절은 하나님의 섭리였을지도 모릅니다.
뜻밖에도 김 목사님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 사람은 교회 선생님이었습니다. 노처녀 선생님은 겉모습은 누나처럼 예쁘지 않았지만, 김 목사님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선생님은 김 목사님을 분식점으로 데려가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마음을 열도록 했습니다. 두 줄 메뉴판의 모든 메뉴를 다 먹여줄 정도로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음식을 통해 마음을 여는 것은 훌륭한 양육 방식입니다.
선생님은 김 목사님에게 기도나 성경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사랑과 관심으로 다가갔고, 김 목사님은 선생님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공감, 그리고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태도와 행동으로 진심을 느낍니다. 특히 상처받은 영혼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진심은 김 목사님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김 목사님은 선생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선생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복음 영접: 인생의 전환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김 목사님의 삶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6개월 동안 꾸준히 김 목사님을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격려했습니다. 처음에는 지겨운 편지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선생님의 진심이 담긴 기도와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진심은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를 발휘합니다.
선생님은 김 목사님의 생일을 챙겨주고, 가정에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도록 도왔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따뜻함과 선생님의 헌신적인 사랑은 김 목사님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고,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사랑은 놀라운 치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는 사랑과 관심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선생님이 김 목사님에게 '사영리' 쪽지를 건네며 복음을 전했을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기도와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진심으로 준비된 복음은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김 목사님은 선생님의 진심 어린 복음 메시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6개월 동안 쌓아온 선생님과의 신뢰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처음부터 복음을 강요했다면 김 목사님은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김 목사님의 삶은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단 하루 만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전도 여행과 소명 발견: 복음 전파의 열정
예수님을 영접한 후, 김 목사님은 이전의 일탈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끊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참거나 노력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목적과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방황하는 삶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친구 관계도 자연스럽게 교회 중심으로 바뀌었고, 교회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소속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찬양 인도와 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김 목사님은 처음으로 '인정'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문제아로 낙인찍혔지만, 교회 안에서는 리더십과 재능을 인정받고 칭찬받았습니다. 인정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는 긍정적인 인정이 자존감을 높이고 건강한 성장을 돕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김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여름 수련회에서 '예수'라고 쓰인 흰색 티셔츠를 입고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감동을 받은 그는 사영리 300권을 자비로 구입하여 '거지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최소한의 경비만 가지고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하는 무모하지만 열정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용산 터미널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충청도 부여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하고, 저녁이 되면 십자가만 보고 교회를 찾아가 하룻밤 묵을 곳을 구했습니다. 놀랍게도 가는 교회마다 따뜻하게 맞아주고 밥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부여의 한 교회에서는 짜장면 곱빼기와 밥까지 얻어먹으며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입니다.
낙화암에서는 외국인에게 영어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영어가 서툴렀지만, 영어 방언까지 터져 나오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외국인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에는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던 중에는 자살하려던 사업 실패자를 만나 복음을 전하여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복음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지 전도 여행을 통해 김 목사님은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신의 인생을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합니다. 힘든 아이들을 돕고 살리는 청소년 사역자가 되겠다는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거지 전도 여행은 김 목사님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와 고난: 연단을 통한 성장
신학교 진학을 결심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는 여전했습니다. 불신 가정이었던 부모님은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등록금 지원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김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자신을 부르셨다면 등록금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등록 마감 전날,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익명의 헌금이 전달되었고, 기적적으로 신학교에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신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매 학기 등록금을 걱정해야 했고, 7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습니다. 택시 기사, 출판사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출판사 아르바이트는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책을 나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힘든 아르바이트 경험들은 오히려 훗날 사역에 필요한 훈련이 되었습니다. 고난은 때로는 축복의 disguised form으로 다가옵니다.
김 목사님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삶의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수많은 직업 체험과 땀 흘리며 일했던 경험들이 진정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었고,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얻은 공감 능력은 목회자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입니다.
신학교 동기들 중에는 장로님 아들이나 대형 교회 목사님 아들 등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매 학기 간증을 만들어가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김 목사님은 힘든 신학교 생활을 통해 더욱 성숙한 목회자로 준비되어 갔습니다.
목회와 아둘람 교회: 고난받는 이들의 안식처
목사가 된 후, 김 목사님은 2020년 아둘람교회를 개척합니다. '아둘람'은 빚지고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피신했던 아둘람 굴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자신의 과거와 아둘람 굴의 의미를 연결하여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교회 이름에서부터 김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 드러납니다.
아둘람교회는 개척 초기부터 도박 문제, 부부 불화, 자녀 문제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찾아왔습니다. 김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도들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고 위로하며,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도박 중독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은 오히려 다른 이들을 돕는 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개척 초기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김 목사님과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힘든 성도들을 상담하고 돕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목장이 형성되었고, 평신도 목자들은 김 목사님과 함께 공동체를 섬기는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힘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개척 4년 만에 아둘람교회는 단독 건물 성전과 비전센터를 갖게 되었고, 장로, 권사, 안수집사 임직식을 거행하며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많은 개척교회가 문을 닫는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아둘람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아둘람교회는 지역 사회에 꼭 필요한 교회, 힘들고 지친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꿈은 아둘람교회를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역 사회에 꼭 필요한 교회,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의 기도 제목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크기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둘람교회는 작지만 강한 교회,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교회로 나아갈 것입니다.
가정과 사역: 든든한 동역자, 아내와 장모님
김 목사님의 목회 여정에는 든든한 동역자인 아내와 장모님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좋은 가정 모델이 없었던 김 목사님은 결혼 전에 결혼 및 가족 상담 관련 책을 60권이나 읽을 정도로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을 깨닫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장인 장모님은 김 목사님을 목회자로 존경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장모님은 권사님으로서 김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새벽 기도와 금식 기도를 하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처가 식구들의 사랑과 지지는 김 목사님이 목회에 전념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가정의 평안은 사역의 원동력입니다.
둘째 딸 요한이는 6개월 만에 800g으로 태어난 조산아였습니다. 생명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딸의 이름 '요한'은 세례 요한처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지만 기적적으로 태어나, 우리를 깨우고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되는 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딸 요한이는 김 목사님 가정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입니다.
아내와의 관계는 때로는 갈등도 있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극복해나가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아내에게 영상 편지를 통해 "결혼해서 너무 수고 많았고, 앞으로 아내 말을 잘 듣겠다"는 진심을 전하며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화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 목사님 부부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동반자입니다.
어머니의 변화와 교훈: 하나님의 응답과 기다림
오랜 시간 도박 중독으로 가정을 힘들게 했던 어머니는 김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한 후 변화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전히 도박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고, 아들의 목회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때로는 '예', 때로는 '아니오', 때로는 '기다리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변화는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어머니의 도박 중독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힘든 성도들을 공감하고 돕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아픔이 오히려 자신의 사역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고난은 때로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김 목사님은 어머니의 고난을 통해 오히려 목회자로서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김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합니다. 아이들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지만, 어른들의 잘못된 행동과 무관심 속에서 상처받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과 관심으로 돌봐야 합니다. 김 목사님의 삶은 우리에게 다음 세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메시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관심
인구 절벽 시대, 다음 세대를 세우는 것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김 목사님은 "아이들을 낳는 것만큼이나,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잘 키우고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청소년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김 목사님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했던 제사장과 레위인과 달리,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주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주었습니다. 교회 선생님은 문제아 취급받던 김형민 목사님을 포기하지 않고 떡볶이를 먹여가며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선생님의 헌신적인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품고 기도하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세대를 위한 첫걸음이며,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히는 길입니다. 김형민 목사님의 간증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어두운 과거를 딛고 일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아가는 김 목사님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오늘 귀한 간증 나눠주신 김형민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