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순 유예은 모녀 피아노 감동 실화: 눈물과 희망 이야기
눈물, 웃음, 희망의 피아노: 박정순 모녀 감동 실화
감동과 웃음, 눈물과 희망으로 가득 찬 삶: 박정순, 유예은 모녀의 특별한 이야기
이번 글에서는, 깊은 감동과 웃음, 때로는 눈물과 희망이 뒤섞인 특별한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유튜브 영상 "🎹감동에 눈물 흘리다가 마지막에 빵 터져서 데굴데굴^^👩👧ㅣ박정순 유예은 모녀ㅣ새롭게하소서"를 상세히 정리하고, 그 내용을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 영상은 새롭게하소서 채널에서 방영된 박정순 원장님과 피아니스트 유예은 모녀의 감동적인 인터뷰를 담고 있는데요, 특히 예은 양의 놀라운 피아노 연주 능력과, 시련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모녀의 굳건한 사랑과 믿음은 보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과 따뜻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먼저, 영상 초반부에서는 예은 양의 피아노 연주 장면이 소개됩니다. 사회자인 주영훈 씨와 송지은 씨는 과거 SBS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했던 예은 양의 영상을 자료 화면으로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녀가 단 한 번 들은 음악을 피아노로 완벽하게 재현하는 모습은 당시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과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자료 화면 속 어린 예은 양은 "피아노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고 밝혀 더욱 놀라움을 자아냈는데요, MC들의 질문에 "딱 한 번 듣고 피아노를 쳐요" 라고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모습은 순수함 그 자체였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스타킹" 출연 이후 10년이 훌쩍 지난 현재, 예은 양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날 방송에는 예은 양의 어머니인 박정순 원장님이 출연하여 예은 양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게 된 계기와 입양 스토리, 그리고 장애를 가진 딸을 키우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극복 과정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박정순 원장님은 예은 양의 음악적 재능을 처음 발견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회상했는데요, "저희가 성가대 연습을 하잖아요. 근데 예은이가 피아노 치면 그쪽으로 아장아장 두 돌 때, 첫돌 지나서 반응을 보였던 것 같아요." 라며, 예은 양이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 소리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습니다. "정확하게는 3살 때 저희가 장애인 생활시설을 운영하다 보니까 노래 연습도 많이 하거든요. 그때 이제 치더라고요. 저희 노래했던 곡들을. 어느 날 교회가 가지고 점심시간에 연주를 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그때 이제 알게 됐어요." 라며, 3살 무렵부터 자신들이 연습하던 노래를 피아노로 따라 치는 예은 양을 보고 음악적 재능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박정순 원장님은 예은 양의 특별한 연주 방식에 주목했는데요, "아기 손은 작잖아요. 세 살이라 하더라도 건반이 옥타브를 건너뛰면서 치는 거예요. 만약에 봤다라고 하면 그냥 감으로 치겠지만 피아노라는 자체를 안 봤잖아요." 라며, 눈으로 보지 않고 오직 귀로만 듣고 옥타브를 넘나들며 연주하는 예은 양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어서 피아니스트 유예은으로 소개된 예은 양은 "제가 3살 때 엄마가 무슨 노래를 부르셨는데 제가 그 노래를 피아노 앞에 가서 그 노래의 음을 찾아서 쳤었대요. 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됐어요." 라며,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를 듣고 스스로 피아노 건반을 눌러 음을 찾아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예은 양에게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를 넘어선 특별한 존재였는데요, "나의 기분을 알아주고 그 기분을 이제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저의 분신, 호흡이 되어주고 또 친구가 되어주는 존재인 것 같아요." 라며,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위로받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예은 양에게 피아노는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가장 친밀한 친구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박정순 원장님은 예은 양과의 특별한 만남, 즉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우리 예은이가 이제 입양한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또 입양 과정을 거쳤고, 우리 원장님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는지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라는 MC의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먼저 꺼냈습니다. "자존감이 굉장히 낮은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셨어요?"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그때는 저희가 좀 시골, 전라도 쪽이거든요. 거기에 이제 그때 당시 저희가 7살에 제가 학교를 입학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시대에서는 좀 빠른 나이였죠. 대부분 8살이니까 다들 선배들이죠. 나이 상으로는 선배고 저는 7살이니까 언니는 오빠들인데 지금에서는 그때는 그런 말들이 없었는데 왕따, 학교 폭력이라고 해야 되나요." 라며,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학교에 입학하여 또래 친구들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왕따와 학교 폭력을 겪었던 힘들었던 과거를 고백했습니다.
"수업 끝나면 친구들이 막 이제 제자리로 오는 거예요. 이제 한 서너 명이 와가지고 지금 학폭 애들이랑 비슷하죠. 그냥 또 돈 가지고 와, 내 필통에. 그때만 연필이 10원, 노트가 20원 그랬거든요. 그러면 이제 필통에 새 연필이 있으면 가져가고 그냥 가져가는 거죠." 라며, 당시 귀했던 학용품들을 뺏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몽땅 연필 쓰고 그냥 뺏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냥 힘이 없으니까 어떻게 그냥 당하는 거죠." 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학교 폭력은 어린 박정순 원장님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학교생활이 그냥 좀 별로, 이렇게 무서워. 학교 가는 게 좀 무서웠죠. 근데 무서웠는데 가긴 가야 되고, 그러니까 그런 기억들이 아직까지도 이렇게 잊혀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라며, 학교 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고 회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학창 시절 내내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요, "학교생활이 정말 얌전했어요. 학교 안에서는 무서우니까. 자존감도 낮고, 그러다 보니까 뭐 학업에 대한 공부도 막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은 또 공부를 못 하게 되면 또 선생님들한테 또 혼나게 되고 이중 삼중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그냥 계속 그래서 가야 되니까 그냥 다녔던 거죠." 라며, 낮은 자존감과 학업 부진으로 더욱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박정순 원장님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엄마가 좀 신앙이셨어요. 엄마가 아빠는 유교 집안이었고 엄마는 기독교. 그러니까 엄마의 역량이 좀 있었던 거죠. 근데 그냥 그 뭐랄까 우리 그때는 좀 어렸을 때는 막 교회에서 그러면서 한 번쯤은 막 성경학교다 막 크리스마스 때 관심 얻어먹으려고 그랬었던 시기랑 그때 잠깐 잠깐 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쯤 그냥 교회는 가고 싶었던 거예요. 그냥 뭐에 이끌리지 않고 그냥 교회는 가고 싶은데 교회에서는 뭔가 널뛰고 친절하고 또 아무래도 분위기가 또 좋지 않았을까요?" 라며,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진정으로 교회를 찾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라고 밝혔습니다.
교회에서의 경험은 박정순 원장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는데요, "학교랑은 다르게 그냥 예배가 좋았어요. 그냥 그냥 이유 없이 그냥 예배가 좋았고 또 그 예배 드리고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라며, 학교와는 전혀 다른 따뜻하고 긍정적인 교회 분위기 속에서 예배와 봉사 활동을 통해 큰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특히, 수요 예배 시간에 성령 체험을 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수요 예배 때 예배 시간에 그 뭐라고 할까요. 인격적으로 좀 만난 거죠, 성령님을. 가슴에 확 꽂히는 거죠. 평상시에는 내가 우리가 기본 그냥 아 뭐랄까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냥 그렇게는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정말 사랑한다고 할 때는 그 표현이 좀 다른 거잖아요. 그러니까 예배도 형식적으로 아 나는 죄인이야, 나는 뭐 구원받은 예수님이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는 그래 나는 죄인이야, 꼭 말씀을 그랬으니까 예수님이 나 우리를 위해서 오셨어. 근데 그랬던 게 그날은 확 꽂힌 거예요." 라며, 형식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성령 체험 이후, 박정순 원장님은 "고등학생이 확 꽂혔어. 아 내가 나도 아 나는 착한가 학교 다닐 때 나쁜 짓은 안 했으니까 나는 선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 이제 그 성령이 딱 체험하면서부터는 나도 누구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라는 존재. 그리고 그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그러니까 이게 그냥 성경에서 보여지는 그 죄인이 아니라 그냥 아 그거를 나를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해 주셨다라는 게 그래서 쓸모없었던가 힘이 없고 보잘것 없고 그랬던 내 존재가 막 갑자기 있잖아요, 세상이 바뀌었어요." 라며,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후, 박정순 원장님은 선교 활동에 헌신하고, 장애인 시설 운영이라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되는데요, "선교도 하고 또 그렇게 꿈꾸셨지만 지금은 또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그 장애인 분들을 만나게 된 계기가 또 있으셨을까 궁금하거든요."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시골에서 서울로 와서 그 교회를 다니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어떤 교회를 선정해서. 너무 교회들은 많은데 그러다 보니까 그중에 이제 순복음교회를 다니게 됐죠. 이제 거기에서부터 이제 그 순복음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기 시작해서 장애인 교구에서 그때 그 장애인과 장애인들을 제가 처음 접한 무섭거나 어렵거나 이런 건 아니었어요." 라며, 서울 순복음교회 장애인 교구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며 장애인들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애인 봉사를 하면서 박정순 원장님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는데요, "어떻게 내가 봉사를 해야 될지 그런 걸 몰라서 그러지 우리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가지고 그냥 가서 이제 거기서 그 저가 들어갔을 때 그 장애인 그 저희가 청년부가 없었는데 들어가면서 좀 활성화를 시켰죠." 라며, 장애인들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진심으로 봉사하면서 장애인 청년부 활성화에 힘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열정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요, "열심히 해 가지고 그랬더니 이제 거기 그 교사 저랑 같이 하셨던 그 집사님이 계세요. 좀 나이가 오래 봉사하셨던 분이 저를 보시더만 자 좀 뭐라 그래야 되나, 좀 너무 하니까 너무하니까 그러면서 이제 하시는 말씀이 우물 안에 있는 우물을 한꺼번에 다 푸게 되면 다시 물이 차오를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냐. 그러니까는 밥만 빼라. 너무 열정적으로 다 해버려도 내가 에너지가 쏟아지면 또 다시 내가 회복해서 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아예 포기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라며, 지나친 열정보다는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과거 봉사 활동 당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박정순 원장님은 장애인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는데요, "그때는 제가 이렇게 체구가 좀 이렇게 크진 않고 왜소했어요. 왜소했는데 장애인 분들 친구들은 이제 조금 그래도 남자들은 남자 장애인들 같은 경우는 좀 크죠. 뇌병변 장애 같은 경우는 이제 빌라가 3층이에요. 엘리베이터가 없어요. 그러면은 안고 가든지, 업고 가든지 어떻게 구축해서 3층까지 올라가야 돼요. 그렇게 올라가도 가고, 어떤 업고서 이렇게 올라가셨어요. 차라리 없는 게 나아요. 근데 어쨌든 남자분들은 그렇게 하는 게 20대 때예요. 그때가 25살 때인가 26살 째인가." 라며, 엘리베이터 없는 3층 빌라에 사는 장애인을 업어서 계단을 오르내리던 젊은 시절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떠올렸습니다.
또한, 지하철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 먼 거리에 사는 장애인을 직접 데려다주었던 일화도 소개했는데요, "한 친구는 집이 방화였어요. 근데 그때는 막 지금처럼 막 이렇게 시설이나 이런 게 좋은 건 아니었고, 지하철도 이렇게 많이 전철로 생긴 게 아니었고. 그러니까는 그 친구 그 데려다 줘야 돼요. 근데 택시는 타려면 택시비가 그때 말해서 뭐 1, 2만 원 나오면 꽤 나왔던 식이죠. 90년대 그쪽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방어니까 데려다 줘야 되잖아요. 그러면은 방화역은 어떨 때는 방화역에서 내려요. 그러면 방화역이 좀 계단이 많아요. 그러면 혼자 이게 못 해요. 그러면 이제 지나가는 분들은 어떨 때는 이제 김포까지 가요, 공항까지. 거기는 이제 계단이었고 이게 있으니까 타고 온다는데 문제는 공항에서 방화까지 1시간을 지하철 타고 김포공항 역에 내려서 걸어온다고요, 계단을 올라가기 힘드니까. 그리고 이제 1시간을 밀고 가요. 그거는 중간에 길이 뭐 평지가 아니니까 어느 다리가 너무 힘든 거야, 엉덩이가 좀 빠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고 저 사람 웃긴다 그렇게 했어요." 라며, 장애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놀랍게도, 박정순 원장님의 배우자 또한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남편분도 장애인이라고 저희가 들었거든요. 자기 배우자를 또 장애가 있는 분을 만나고 이런 과정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이런 질문을 좀 받아요. 결혼은 어떻게 했고 가족들은 어떻게. 근데 저는 그게 그냥 숨 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되나, 그 와중에 이제 그 교회에서 장애 부서에서 이제 활동하다 보니까 언니, 그 같은 곳에 장애를 가진 분이 신랑 친구를 소개를 시켜줬는데 너가 한번 이런 친구가 있는데 네가 한번 와서 볼래." 라며, 교회 장애인 부서 봉사활동을 통해 현재 남편을 소개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옷을 본 거예요. 와서 보고 신랑이 마음이 든 거예요. 제가 근데 비장애에서 그러니까 그리고 비장애니까는 선뜻 선뜻 마음 표현을 못 하죠. 남자 친구가 있다라고 막을 쳤죠." 라며, 첫 만남 당시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자신은 비장애인이라는 생각에 선뜻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남편의 장애는 19살 때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는데요, "그분은 어떤 사고로? 네, 만 19살 때쯤 교통사고로 가다가 택시에 차 갖고 떨어졌는데 경추 3, 4번을 다친 거예요. 사고로 3, 4번이니까 거의 못 밑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데 이제 재활 노력을 많이 해서 재활 그 훈련을 많이 해서 그래도 5, 6번 정도 쓸 수 있는 정도까지 이렇게 한 거예요." 라며, 교통사고로 경추 3, 4번을 다쳐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지만, 끊임없는 재활 노력으로 상체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의 어떤 면에 끌렸는지 묻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저요? 몰라요. 그냥 그냥 처음으로 다니시게 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돼서 저는 그게 남들이 보기에는 큰 건데 저한테는 그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 않아요. 너무 그냥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따뜻하게 한다든가 뭐 이런 게 있잖아요." 라며, 첫 만남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관계 속에서 남편의 따뜻한 마음에 끌렸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복지 쪽에서 그 사람도 이제 자기가 장애를 잃다 보니까 그쪽에서 이제 같이 이렇게 뜻을 합해서 복지 좀 장애 선교를 하고 싶다라는 걸 좀 내리니까 그런 거기에서부터 이제 대화가 되고 저도 앞으로도 이제 그쪽에 이제 문이 열리니까 이렇게 좋으니까 근데 새로 대화가 되다 보니까 그러면은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같이 이렇게 하면 더 같이 일하다 보면 다 같은 뜻을 바라보니까 뭐 새끼손가락이 참 예쁘더라고요." 라며, 같은 장애인 복지 분야에 대한 공통된 비전과 따뜻한 심성에 이끌려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결혼 후, 박정순 원장님 부부는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며 장애인들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결혼하셔서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게 되셨고 예은이는 어떻게 유명하게 되셨어요?"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저희가 결혼하면서부터 2세는 계획을 안 했어요. 원체 이제 장애도 심하고 또 장애 시설을 또 운영을 하고 또 신랑도 또 나름 또 협회 활동을 하다 보니까 저도 벅차서 이제는 이제 하지 말자 그랬는데 그냥 예은이를 누군가가 이렇게 이제 놓고 간 거죠. 보니까는 이제 생후 한 달 됐어요." 라며, 결혼 초부터 2세 계획은 없었지만, 생후 1개월 된 예은 양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고 밝혔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예은 양을 입양하기로 결심하는데요, "그래서 그때는 저희가 준비가 안 됐던 거죠, 부모로서. 기간에 다른 거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서 문의는 해봤어요. 거기에서 연락 오는 거는 아직 너무 어리고 신생하고 그 다음에 장애가 있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안고가 없으니까. 그러니까는 이제 거절을, 최소한 자기네들도 이렇게 하겠다라고 했는가. 그래서 그냥 이렇게 했는데 그냥 이제 그래도 아이 애기니까는 또 해야 할 건 했잖아. 예방접종도 해야 되고 또 해야 되고 그러다가 이제 예방접종 다니 마치 시기가 돼서 이제 다니면서 딱 순광자 이름을 불러야 돼요. 이름을 지어야 이름이 뭐예요? 그랬더니." 라며, 입양 기관에 문의했지만 어린 나이와 장애 때문에 거절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예은이라는 이름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이라고 하는데요, "그러다가 이제 아 그냥 문득 예은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그냥 진짜로 그냥 예은이, 예은이요. 그냥 이게 저기 안 바꾸실 거죠? 그냥 저희가 바로 했어요." 라며, 고민 끝에 "예은"이라는 이름이 떠올랐고, 깊은 고민 없이 바로 입양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고민은 너무 많이 하면은 안 될 거 같더라고요. 너무 많이 하면은 아무것도 못 하고 그래서 짧고 굵게 했어요." 라며, 오랜 고민보다는 빠른 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입양 결정에 대한 단 하나의 고민은 "자녀로서의 의미" 였다고 합니다. "입양 결정을 크게 고민 안 하시고 그냥 고민 딱 하나 했던 건 어차피 이제 제가 장애인 시설을 선교를 하려고 작정을 했고 이렇게 가려고 했으니까 그거는 이제 별거 아니었는데 아 자녀로서는 다른 의미잖아요. 그거는 이제 가족이니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데 딸이잖아요. 그러니까는 그거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중에 후회하면 안 되잖아요. 또 굉장히 그 고민에서 이제 짧고 굵게 했어요. 그래야 그냥 하나님이 주신 거, 하나님이, 하나님이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그래도 정확하시고 실수하지 않는다는 거." 라며,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예은 양을 딸로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예은"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은혜" 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지." 라며, 이름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스베이비라 만화 보면 툭 떨어져서 오거든요. 그래서 그냥 뭐랄까 이게 그냥 저는 자연스럽게 받았지만 그냥 있었어, 그냥 뭐 예은이로 했어. 돌아보면 너무 이게 하나님이 계획과 준비가 있었던 거 있었고, 그게 개입이 있었고 간섭이 있었고, 우리 신랑도 그렇고 예은이도 그렇고 또 장애인 우리 지금 재생하는 식구들도 다 이렇게 엮어 주시는 거 같아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런 것들이. 그래서 정말 이제 그래서 정말 감사해요." 라며, 예은 양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선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은 양을 처음 만났을 때 "안구가 없는 아기" 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냐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솔직히 아 그래요?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는 무섭지 않고 그냥 그냥 저는 그냥 정말 귀한 존재, 생명의 귀한 존재인데 이제 내가 이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거예요. 임신 과정을 거쳐서 준비를 하고 뭐 어떻게 이런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는 엄마가 된다는 게 뭔지를, 부모가 된다는 그런 부담감 왜냐하면 결혼을 하면 당연히 근데 그거는 우리는 이미 약속을 해서 빼기로 했던 부분이니까 그런 부담감이 좀 컸던 거지 뭐 장애나 이런 거 그럼 결혼도 안 했겠죠." 라며, 장애보다는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더 컸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우리 너무 예뻤겠네요?" 라는 MC의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아니 근데 그렇잖아요. 이미 원장님은 장애 시설을 운영하고 계셨고 예은이가 왔어도 그냥 장애 시설에서 케어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인 거죠." 라며, 예은 양의 입양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예은 양의 가장 예쁜 점을 묻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수줍게 웃으며 "눈이 이뻤어요. 눈이 이뻤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겉모습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정순 원장님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장애를 가진 딸을 키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요, "그래도 이렇게 참 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운 예은이를 키우다 보면 장애를 갖고 있으니까 그런 딸을 두고 좀 속상한 일도 있고 그러셨을 것 같아요."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많아요. 왜냐하면 저도 다른 장애인들 케어하고 하다 보니까 많은데 그거를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너무 좀 어렵고 너무 너무 그런 아픔들은 가슴에 묻어둬야 되고." 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음을 암시했습니다. 예은 양 또한 "기억나는 일들이 좀 있으세요?" 라는 질문에 "일반학교에, 이 친구, 관, 저희는 특수학교를 이제 가라고 했는데 그냥 이 친구가 나중에 성인이 돼도 일반 사회 속에서 이제 같이 공유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반 학급을 원해서 일반 학교를 가게 됐어요, 보냈어요. 그런데 이제 거기에서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죠." 라며, 일반 학교에 진학하면서 학교 폭력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구체적인 학교 폭력 사례를 묻는 질문에 예은 양은 "예은이가 전교사는 아니고 보조 교사님이 계세요. 실무사님이라고. 그분자 예은이를 3년 동안 케어를 해서 같이 이제 계속 했는데 2학년 때인가 2학년 때 그랬을 거예요, 아마. 그때는 또 예은이도 막상 바로 이야기를 해준 게 아니라서 그냥 몰랐죠. 근데 이제 그랬대요. 이제 복도 위에 한가운데 세워 놓고 공을 굴리고 자버라고, 안 보이는 거 다 아는데 소리를 듣고 잡으라고요. 예은이가 원체 또 원수네요, 원수네요, 반항하거나 이제 그런 기가 없어요. 그래 가지고 왜 이유도 모르는 거죠. 예은이는 세워놓고 그렇게 하니까 예은이가 잡아 올 수 있는 입장은 아니잖아요. 가만히 있던 자 이제 그 선생님이 자기도 한번 그렇게 눈 감고 해봤더니 못 잡으니까 예은이한테 사과는 했다고 하더라고요. 미안하다고. 근데 이제 같은 반에 못된 친구가 뭐 이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하면은 지금도 앞으로도 좀 그라기 그런 것들이 많은데 아프죠." 라며, 보조 교사로부터 복도 한가운데 세워놓고 공을 굴려 잡으라는 황당하고 잔인한 괴롭힘을 당했던 과거를 털어놓았습니다.
"기억나는 일을 몇 가지 얘기하셨지만 비웃기도 했겠죠."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그런 세상에 차별 속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원에 있는 보시면서 느꼈겠지만 내 딸이기 때문에 더 가슴 아팠던 느끼셨겠죠." 라며, 장애인 딸이 겪는 차별과 고통에 더욱 마음 아파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근데 아파요. 그게 아프죠." 라는 짧은 한마디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박정순 원장님의 남편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분 얼마 전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좀 있으면 기일인데 딱 만 4년대에요." 라며, 남편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30년간 전신마비를 겪었고, 박정순 원장님과 18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전신마비가 교통사고 다니니까 후유증이 많은 거죠. 그러니까 이제 저가 결혼할 때 저랑 결혼할 때쯤에 뇌경색이 한번 왔었고 이게 뇌경색이 와도 이게 몸에는 어차피 밑에는 마비니까 그렇게 특별하게 움직이지 못하니까 잘 못하고. 그 다음에 이제 결혼하고 나서 신장이 하나가 망가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하나 가지고 버티면 살아왔던 거죠." 라며, 뇌경색, 신장 질환 등 합병증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음을 설명했습니다.
남편의 건강 악화는 박정순 원장님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데요, "욕창 수술만 했는데 만약에 대부분 이제 마비 환자다 보니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앉아 있으면 엉덩이에 많이 생기거든요. 엉덩이에 많이 생기면 앉아 있는 거를 못 해요. 거의 나을 때까지 누워 있던 엎드려야 되는데 그게 이제 너무 힘든 거죠. 이게 쉽게 낫지도 않아요. 죽기 전 2년 전이죠. 아파서 입원을 했어요. 근데 새벽에 이제 갑자기 딴짓 180도로 딴 사람이 되더라고요. 언제 그만하고 싶다고. 그때는 이제 저는 좀 너무 힘들죠. 왜냐면 저도 아무리 막 좋고 막 이게 막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육체는 점점 지쳐가는 거는 어쩔 수 막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몸도 막 몸도 많이 망가져가고 있고. 근데 갑자기 나 이제 그만할래, 이게 이제 날벼락이야." 라며, 남편의 잦은 입원과 욕창 수술, 그리고 돌연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새벽에 병실 4인실인 6인실인데 새벽 1시인가 2시인가부터 기도하자고 이게 떠들면서 막 기도를 못 하잖아요. 손잡고 막 기절했더니 옆에 침상에서 아들이 이제 보호하시는 간혹 아들이었나 봐요. 왜 그래, 그런 거야 들리는 거야, 기도하면서도 기도하는 거 같다. 한 1시간 정도 그냥 기도를 했더니 이게 좀 가라앉으면서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이제 다시 회복은 했긴 했는데 뭐랄까 힘들었죠." 라며, 남편의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과 힘겨웠던 간병 생활을 떠올렸습니다. "저희가 막 가진 것인가 있어서 한 게 아니라 그냥 진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맨바닥에서 했어요. 그러니까 또 하나님도 좀 열심히 하면 이뻐서 좀 축복도 많이 있는 게 아니라 딱 그만큼만 우리가 기도하면 그만큼만. 그래서 왜 항상 주변에선 그래요, 왜 우리는 우리만큼만 교만해지지 말라고. 그래서 또 기도하라고." 라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하며 장애인 시설 운영을 이어왔다고 합니다.
남편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고 슬펐습니다. "가다가 18년 17년, 17년 12월 달부터 이제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망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좀 힘들었어요. 막 예은이도 힘들고 잠도 못 잤어요. 그리고 마음 있는데 어 그냥 그 시기가 되면 저는 트라우마가 생긴 거 같아요. 그러니까 12월 달부터 되면은 그냥 기분이 이상해져요. 그래가지고 이제 병원에 입원하자고 했더니 거절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뭐랄까 그냥 아무래도 이제 안 하겠다 하는데 복수가 차기 시작하니까 그때는 병원에 가겠다고 했어요. 대화는 그게 마지막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응급실로 갔죠. 복수를 차고 오니까 응급실을 가니까 요거는 투석해야 된다 그래갖고 막발로 응급실로 가니까 가고 이제 그 호수를 끼우게 되니까 말은 못 하게 되고.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작별 인사 없이 그냥 갔어요." 라며, 남편의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결국 작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남편을 떠나보내야 했다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이제 집중 치료 받다가 새벽에 전화가 왔더라고요, 응급 상황이라고. 그때 또 생각이 나시죠. 근데 그 심폐소생술도 하고 했을 거 아니에요, 나 줘야 되겠다는 생각 아 그냥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는 못 했어요. 진짜 예은이도 인사 못 했어요." 라며,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망 소식에 큰 슬픔에 잠겼지만, "신변수술하고 다 끝나고 이제 불, 혼자 딱히 인공에게 다 띄고 이제 사망을 했으니까 다 뛰고 가서 보니까 웃고 있더라고요. 없으면서 가셨군요." 라는 말처럼 남편의 편안한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잘 가라는 말도 안 했고. 그래서 저는 우리 편히 쉬세요라고 그러잖아요.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라며, 남편의 편안한 안식을 빌었습니다.
남편을 떠나보낸 후 박정순 원장님은 "그러고 이제 결혼 생활 이게 이제 제 몸이 아까 말했듯이 힘들었고 지쳤고 저도 이제 좀 쉬고 싶었는데 이제 힘이 없었거든요. 거의 저희는 결혼해서 24시간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어디를 가도 같이 가고 무엇을 해도 같이 하고 뭔가 24시간이 있었고 24시니까 제가 결혼해서 예은이 때문에 딱 한번 외박한 적이 있어요, 예은이들 방송 때문에. 그 위에는 계속 붙어 있었으니까 다른 부부들보다 두세 배 더 함께 보낸 시간이 힘들잖아요. 그게 이제 하나가 떨어져 나갔잖아요." 라며, 24시간을 함께 했던 남편의 빈자리에 큰 공허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어떤 사람들은 그런 편하겠다 위로 차원에서 이야기인데 신랑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이 케어하는 부분이 살 안 해도 되니까 좀 낫지 않냐. 근데 그거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 그게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그 아픔은 공허함이라고 하기가 내 몸에 완전히 매미가 나무에 딱 맺혀서 울어야 되잖아요, 날면서 울지는 않잖아요. 근데 붙어 있을 나무가 없어. 그러니까 모든 초점이 이 사람한테 신랑한테 맞춰져 있었던 그 초점이 이제는 딱 없어지니까 내가 하나님을 향하면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일당에서 살아가면서는 또 이제 그런 대상이 없어져 버리니까 이게 나는 어떻게 해야 될지 이제 모르는 거죠. 오래서 한 이게 허공이 떠 있는 붕 떠 있었냐." 라며, 남편과의 갑작스러운 이별로 인해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생활은 해야 되고 이걸 운영도 해야 되고 예은이도 또 계속 케어를 해야 되는 거니까는 이제 붕 떠올라서 이제 최근에서야 제가 조금 찾아가고 있고 그전에는 뭘 했는지 이렇게 또 다행히 저한테는 다행인게 이제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서 모든 활동이 좀 중단되면서 스톱되고 하니까 그때서 조금 저는 쉼을 얻은 거죠. 아니면 계속 이거를 또 해야 되는 거니까 그랬던 거 같아요. 50 흰색 그러니까는 좀 일찍 그렇죠." 라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활동이 잠시 중단되면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쉼을 얻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은 양은 엄마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는데요, "예은이가 많이 위로가 됐을 것 같아요. 예은이가 없었으면 더 힘들었을 텐데요. 뭔가가 또 다른 기대일 수 있는 뭔가가 있구나 이런 그런 존재 힘들어도 뭔가가 위로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뭐 하나가 있으니까 이제 거기에서도 이제 많이 소중한 거죠. 하나님이 안 주셨으면 어떡할 뻔했나요, 이런 얘기가 이런 생각이 계속 더 좋겠어요."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당연하죠. 그걸 어떻게 말이라고 말 표현해요." 라며, 예은 양의 존재가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피아니스트 유예은 양의 특별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예은이 건강하게 잘 컸죠? 너무 잘 컸어요, 이뻐요. 그때가 그 스타킹에 출했을 때가 몇 살이라 그랬죠? 그때 다섯 살. 그때 연주만 보고 우리가 그 후에 이제 예은이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같이 오셨잖아요. 우리 오늘 예은이의 연주를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라는 MC의 소개와 함께 예은 양은 자작곡 "나의 하나님" 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아름다운 찬양을 불렀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 손을 놓지 않으리라. 너는 너의 보배롭고 존귀한 나의 기쁨이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라는 가사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연주 후, 예은 양은 "이거 무슨 곡이에요?" 라는 질문에 "아 이거 제가 작곡한 나의 하나님이라는 찬양인데요. 제가 작곡해서 찬양을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요. 저희 그 믿음의 고백을 곡에 담아서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작곡하게 됐어요." 라며, 자신의 믿음 고백을 담아 직접 작곡한 찬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너무 좋아요. 찬양 불렀었어요?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고 또 멜로디가 워낙 좋았어, 코드를 너무 좋고. 많은 분들이 찬양을 앞으로 볼 거 같은데 어떻게 앞으로 그런 비전을 갖고 있어요?" 라는 칭찬에 예은 양은 "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렀으면 좋겠어요. 아 그래요? 그래서이 곡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되게 두려워하지 않고 진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찬양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네, 많이 만들고 싶어요." 라며, 자신의 찬양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어릴 때 스타킹에 출연했던 거 아시죠? 기억나시죠? 네, 기억나요. 그 어린이가 이렇게 대학생이 돼서 어떤 마음으로 연주해요?" 라는 질문에 예은 양은 "이제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딸이라고 계속 말씀해 주셨는데 저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어요." 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밝혔습니다. 과거 "스타킹" 출연 당시 불렀던 곡을 묻는 질문에 예은 양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대답하며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고, 변함없는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은 양은 앞으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어떤 꿈을 갖고 있어요? 이제 앞으로 엄마랑 얘기했었는데요. 일단은 제가 평소에 교회에서 많이 반주도 하고 가끔 특성도 했을 때 되게 너무 좋았어요. 근데 이제 엄마가 순복음교회 영상을 많이 틀어 주시는데 중학교 때 유난히 잘 때 순복음교회에서 설교를 하기 전에 찬양을 부르는데 그 찬양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나도 저렇게 찬양 연주를 멋있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그리고 이제 성가곡을 들으면서 성가곡도 작곡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그 성가곡해서 천국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고 그래서 이제 엄마한테 엄마랑 같이 이야기한 게 있는데 음악 선교가 꿈이에요, 음악 선교. 엄마랑 같이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라며, 음악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꿈을 밝혔습니다.
박정순 원장님은 "이 자리를 빌어서 우리 사랑하는 예은이를 건강하게 잘 자라줬는데 어떤 격려의 말씀을 좀 해주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에 "저희가 운영케 하면서 좀 구입을 할까 이제 많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을 하는데 이제 조금 살짝 이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있어요. 저희가 아까 막 풍족해서 한 게 아니니까 하나님이 딱 그만큼 채워주신다고 했잖아요. 근데 뭔가가 딱 채워 놨는데 빠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그때 희한하게 또 예은이를 통해서 그걸 또 채워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고맙다고 너무 예쁘죠. 저는 이제 앞으로도 계속 이런 마음이 변하지 않고 계속 더 성장을 해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녀가 됐으면 좋겠어요." 라며, 예은 양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앞으로도 변치 않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딸이 되기를 바라는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습니다.
"예언을 통한 후원이 또 많이 있군요." 라는 질문에 박정순 원장님은 "그러지는 않는데 딱 그때 필요할 때 그렇죠. 너무 아직까지는 막 넘치게 주면은 교만해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기도를 좀 더 크게 해요. 하나님이 좀 내려 주시더라고. 그래서 100만 원 필요하면 1000이라고 대충 한 200선에 오시더라고요." 라며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정순 원장님은 "마지막으로 뭐 기도 제목 있다면 좀 나눠주시죠." 라는 질문에 "너무 많아요. 그런데 우선은 제일 가장 예은이 그렇게 하고 예은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또 많은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쓸 수 있는 그 성경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 너희가 머리가 될지는 좀 꼬리가 되지 말라는 말. 예은이가 좀 뿌리가 되지 않고 항상 어디 가도 머리가 될 수 있는 자녀가 돼서 그런 걸 먹고 기도하고 있고 운영하고 있는 시설 그냥 순수하게 둘이 한 마음인데 그걸 이런 시설들이 잘 끝까지 운영되어지고 또 저희가 올해 3월부터 다시 이제 다시 그 열린 예배를 다신 제기를 하려고 하거든요. 신랑이 남편이 있을 때하고 좀 많이 조금 어렵겠지만 그래도 또 다시 장애인분들하고 모임을 갖고 또 그분들하고 예배를 통해서 전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들이 좀 더 이제 구체적으로 활성화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며, 예은 양의 성장과 성공, 그리고 장애인 시설 운영의 어려움 극복과 열린 예배 재개를 위한 기도 제목을 나누었습니다.
방송 말미, MC 주영훈 씨는 "오늘 원장님 그 말씀 중에 유독 그냥 그런 마음을 주셨어요, 이런 내용이 많았잖아요. 그냥 그런 마음을 주셨는데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그런 거 같아요. 그냥 정말 그냥 그런 마음을 주셨는데 저희는 그냥 때로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거 정말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맞나요라고 의심하고 계속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원장님의 순종을 통해서 남편분의 팔과 다리가 되어 주시고 우리 예은 양의 눈이 되어 주셔서 이렇게 멋진 삶을 살아나가시는 원장님과 예은 씨의 삶이 너무 멋져 보였고요. 그리고 예은 씨 찬양 들으면서 정말 아름답지만 그 묵직한 진정성이 느껴져서 앞으로 찬양으로 크게 쓰임 받을 예현 씨들을 위해서 또 늘 응원하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라며, 박정순 원장님의 순종적인 삶과 예은 양의 아름다운 찬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송지은 씨 또한 "저도 이제 아니 정말 우리 마음속에이 찬양이 계속 아시죠,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큽니다. 진짜 아까 쉬는 시간에 말씀을 아니 근데 진짜로 우리 원장님도 웃음 저도 더 많이 기도하고 아마 저뿐만 아니라 기도하시고 다들 더우신데 인재가 너무 그린다고 아니 그 많은 분들이 이제 자녀들 저에게 이제 물어봐요, 우리 아이 음악 시키는데 소질이 있을까요? 뭐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밀어 줄까요? 뭐 이런 얘기 하실 때마다 제가 어떻게 답을 드리냐면 못 본 척 하세요, 스스로 잃었을게 스스로 재능이 있다면 스스로 일어날 거니까 그냥 못 본 척 하세요라고 하는데 우리 원장님 그냥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주신 달란트로 우리 혜은이가 이렇게 멋진 연주자 멋진 아티스트로 잘 자랐잖아요. 우리가 교회에서 부를 찬양 중에 제가 볼 때 90% 이상이 다 서양 찬양이에요. 우리 우리가 만든 찬양이 굉장히 드물고 그런데 우리 예은이라는 훌륭한 아티스트를 하나님께서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이 세상에 모든 더러운 것들 나쁜 것들 보지 않고 어찌 음악에만 집중해서 우리 차 좀 대대로 불려질 명찬송들 많이 만드시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행에 훌륭한 달란트를 주신 거 같아요. 앞으로 그 달란트 더 열매를 많이 맺어서 정말 우리나라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울며 불며 기쁨으로 찬양하는 찬양들 많이 만들어 주시고 그렇게 쓰임 받는 예언량을 저희도 열심히 응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원장님 감사합니다." 라며, 예은 양의 음악적 재능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칭찬하며 앞으로 한국 찬양계를 빛낼 아티스트로 성장하길 응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예은 양의 찬양 "너는 두려워 말라" 가 흘러나오며 영상은 마무리됩니다. 이처럼 박정순, 유예은 모녀의 이야기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과 사랑으로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깊은 감동과 따뜻한 위로를 전해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