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희 작가 자살 유가족 이야기: 절망을 희망과 치유로
절망에서 희망을 찾다, 곽경희 작가
[수어통역] 자살 유가족으로 산다는 건: 곽경희 작가의 절망과 희망, 그리고 치유의 여정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의 주용훈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안수지입니다. 그리고 이정수입니다. 오늘 저희가 함께 이야기 나눌 주제는 자살 유가족, 즉 가족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한 분을 둔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분들은 단순히 슬픔과 괴로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몰려오는 우울감과 죄책감 때문에 더욱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오늘 모신 특별한 손님 역시 자살 유가족인데요, 바로 남편을 잃고 깊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통해 그 시간을 이겨내신 곽경희 작가님입니다.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아픔을 극복해 온 곽경희 작가님의 눈물겹고 감동적인 이야기, 지금부터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곽경희 작가님, 어서 오세요. 작가님의 저서 제목이 "남편이 자살했다"인데요, 제목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소설이나 영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의 실제 경험을 담은 이야기라고요? 정말 믿기지 않는데요.
곽경희 작가님: 네, 맞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목만 보고 소설이나 드라마인 줄 아시더라고요. 벌써 2015년 12월 7일, 6~7년 전 일이네요. 당시 저는 정말 극심한 절망에 빠져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이혼 요구 바로 전날,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더욱이 그날은 제 생일이었어요. 차마 생일에 이혼 서류를 접수할 수 없어 다음 날로 미뤘는데, 그 전날 밤에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주용훈: 정말 안타까운 사연인데요. 듣자 하니,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완벽한 절망에 빠지셨다고 하셨는데, 당시 심정이 어떠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절망, 그 자체였죠. 숨 막힐 듯한 고통 속에서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하지만 4명의 아이들을 키워야 했기에, 이혼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수지: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며 버티셨을 것 같은데요, 어떠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네, 정말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시편 18편 29절 말씀인데요.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보통 우리는 적을 보면 숨거나 피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을 의지할 때 비로소 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 앞에 놓인 현실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담과 같았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었죠.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한 걸음 내딛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그 담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이 고난의 담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이정수: 남편분의 죽음을 한동안 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 공개하기까지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또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경험하셨는지 오늘 자세히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우선 남편분과는 어떻게 처음 만나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남편과는 대학교 동아리 선배, 후배 사이로 만났습니다. 우연히 함께 밥을 먹으면서 가까워졌고, 남편이 적극적으로 구애했습니다. 당시 저는 가정환경이 너무 힘들어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남편의 적극적인 모습에 '이 남자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 생각했습니다. 저를 너무나 좋아해 주는 남편이 마치 '안전한 우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용훈: 남편분에게 지병이 있었다고요? 결혼 전에 알게 되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네, 결혼을 앞두고 남편이 베체트병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베체트병은 입안, 눈, 주로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으로, 심하면 내장 기관까지 손상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간호학과 출신이라 베체트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결혼을 망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심한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는데, 병약한 남편이라면 '나를 때리지는 않겠구나' 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늘 "너는 때리는 놈한테나 시집가라"고 폭언하셨습니다. 건강하고 힘센 남자는 폭력적일 거라는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을 피하고자 병약한 남자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입니다.
안수지: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은 익히 들어봤지만, 어머니로부터 폭언과 폭행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인데요.
곽경희 작가님: 네, 저희 어머니는 좀 특이한 분이셨습니다. 보통 엄마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아서인지,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했습니다. 엄마는 저를 보호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줘야 할 존재인데, 오히려 공포와 폭력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늘 죽고 싶었고,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이정수: 남편분이 술을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알코올 중독 증상도 있으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네, 남편은 술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술 마시는 것과 알코올 중독을 연결 짓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도 늘 술을 즐겨 드셨지만, 자상하고 좋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남편 또한 대학교 때부터 늘 술에 취해 다녔지만, 저는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수지: 아버님은 술을 드셨지만 폭력은 없으셨고, 오히려 어머님이 폭언과 폭행을 하셨다니, 정말 특이한 케이스인데요.
곽경희 작가님: 네, 어머니는 술은 전혀 안 드셨습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냉정하게 폭언을 쏟아내셨습니다. "나가 죽어라", "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냐" 등 입에 담기 힘든 폭언을 일상적으로 하셨습니다. 심지어 제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왜 또 살아서 왔냐, 죽었어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죽었어야 했다"는 어머니의 말에 더욱 절망했습니다. '나는 정말 죽어야 되는 존재인가 보다'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를 좋아해 주는 남편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컸습니다.
주용훈: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자 일찍 결혼을 선택하셨는데, 결혼 생활은 어떠셨나요? 행복하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원래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매일 술에 취해 늦게 귀가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혹시 이 집 남편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나가보니 남편이 집 앞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던 겁니다. 더 황당했던 것은, 남편이 한쪽 발에는 구두, 다른 발에는 식당 슬리퍼를 신고 있었던 것입니다. 술에 취해 정신을 놓고 다닌 것이죠. 출근도 제대로 못 하는 날이 많았고, 심지어 술 취한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술 취한 남편을 주인이 찾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다사다난한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안수지: 남편분의 알코올 문제가 심각했던 것 같은데, 치료나 상담은 받아보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치료와 상담을 수없이 권유했지만, 본인이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딱 한두 번 상담을 받긴 했지만, 본인의 의지가 전혀 없으니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결국 남편은 경제사범으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술에 취해 어울리던 나쁜 친구들 때문에 사기를 당했는데, 오히려 남편이 사기꾼으로 몰린 것입니다. 몸도 아픈 상태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에서는 술을 전혀 마실 수 없으니, 오히려 건강이 회복되어 출소했습니다. 술을 끊으니 병이 낫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이죠. 저는 '이제 정말 달라지겠구나' 기대했지만, 출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고,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결국 첫 번째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남편이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되면 다시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사업 수완이 좋았기 때문에, 재기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정수: 지금까지 이야기를 너무나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정말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만취해서 집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는 여성들이 많은데, 매일 술에 취해 있고,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잠만 자고, 맨 정신으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정말 처절한 시간이었습니다. 금식기도, 새벽기도를 수없이 했고, 잠든 아이들을 옷을 입혀 교회로 데려가 기도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찬양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괴로운 세상도 천국으로 변한다"는 가사가 제 마음에 큰 위로와 소망을 주었습니다. "높은 산이든 거친 들이든,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가사처럼,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남편이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먼저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남편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제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봤어야 했습니다. 알코올 중독 남편과 함께 사는 여성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무조건 참고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이 심각해지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곁을 지키는 배우자는 극단적인 상황을 각오해야 합니다. 배우자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알코올 중독자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새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저 역시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만약 알코올 중독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헤어졌더라면, 오히려 남편이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정수: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고부 갈등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곽경희 작가님: 고부 갈등, 정말 심각했습니다. 저희 시어머니는 좀 특이한 분이셨습니다. 아들은 서울에, 어머니는 지방에 계셨는데, 자주 서울에 올라오셨습니다. 시어머니가 오시면 남편도 술을 덜 마시고 일찍 귀가하는 등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새벽 5시쯤 물소리가 들려 욕실에 가보니, 시어머니가 남편을 목욕시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 큰 아들을 그것도 새벽 5시에, 그것도 며느리가 있는데... 충격적이었습니다. 팬티만 입은 아들을 씻기는 어머니, 정말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제가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아들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가슴을 만지면서 TV를 보셨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시어머니의 행동들, 제 책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와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았습니다.
안수지: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며느리 험담을 하거나 갈등을 부추기는 일은 없었나요?
곽경희 작가님: 네, 늘 며느리 험담을 하셨습니다. 저희 집에 오신 날, 남편이 과일을 사 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가 과일을 깎아 드리는데 맛이 너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머니, 과일이 맛이 없네요"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야, 너 그거 애들 아빠한테 말하지 마라. 과일 맛없다고 하면 다시는 안 사 온다"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남편이 술 취한 상태에서 과일을 사 와서 질 나쁜 과일을 산 것 같은데, 어머니는 아들 탓은 전혀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며느리 탓을 하시는 겁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아들 방에 들어가더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문을 활짝 열고 "너, 다시는 과일 사다 주지 마라. 며느리가 과일 맛없다더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시어머니는 늘 저런 식이었습니다. 아들과는 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저에 대한 험담을 했을 겁니다. 시어머니는 끊임없이 아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주용훈: 시어머니의 끊임없는 며느리 험담과 이상 행동 때문에 자괴감과 외로움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심적으로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요.
곽경희 작가님: 네, 정말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늘 늦게 귀가하고, 술에 취해 들어오고, 시어머니는 아들만 감싸고돌고,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아이를 넷이나 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남편이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술도 끊고 착한 남편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교회 권사님, 장로님 부부처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고, 남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안수지: 결혼 생활 20년 만에 첫 번째 이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편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1년 전이었다고요. 오랜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곽경희 작가님: 20년 넘는 결혼 생활 동안 끊임없이 남편의 알코올 문제와 시어머니와의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혼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기 1년 전, 드디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정수: 이혼 후 재결합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재결합을 결심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곽경희 작가님: 이혼 후, 남편이 정말 놀랍게 변했습니다. 술을 완전히 끊고, 40kg이나 체중 감량을 했습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이죠. 저는 남편의 변화를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정말 새 마음을 먹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원래 결심하면 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업도 한때 성공했었고요. 재결합을 결심한 또 다른 이유는 아이들 때문입니다. 당시 셋째, 넷째 딸이 어렸는데, 딸들은 어릴 때 아빠와의 스킨십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느껴야 건강한 이성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 때문에 아이들이 아빠와 단절된 채 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더욱이 남편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못 살지도 모르는데, 내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아이들에게 아빠 없는 아이라는 상처를 줘야 할까' 하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다시 재결합을 결심했습니다. 남편의 극적인 변화와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 이 두 가지가 재결합을 결심하게 된 주요 원인입니다. 남편은 저와의 재결합을 위해 술을 끊고, 체중 감량을 하는 등 놀라운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안수지: 재결합 후, 남편분은 달라지셨나요?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았나요?
곽경희 작가님: 재결합한 첫날부터 남편은 술을 마셨습니다. 네, 정말입니다. 저는 남편을 믿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했습니다. 아이들 학교도 모두 전학시키고요. 당시 아이들은 어린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재결합하자마자 남편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저는 또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또다시 이혼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아이들 학교를 또다시 전학시키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죽을 것 같고 미칠 것 같아서, 남편에게 "당신이 죽든 말든, 나는 아이들을 살려야겠다. 제발 이혼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남편은 2주 정도 매일 매달리며 무릎 꿇고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지만, 그 다음 날 또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 두 번째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정수: 두 번째 이혼을 결심하는 과정에서 남편분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징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곽경희 작가님: 두 번째 이혼을 결정하기 며칠 전, 남편은 손목을 그은 사진을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며 "제발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남편의 진심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날 아침, 남편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습니다. 저에게 "토치 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고기를 구워 먹으러 가려나 보다 생각하고 별 의심 없이 토치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날 남편은 정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안수지: 토치는 왜 달라고 했던 걸까요? 어디에서, 어떻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가요?
곽경희 작가님: 남편은 집 근처 산으로 차를 몰고 가서,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토치는 번개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침부터 극단적인 선택을 계획했던 것이죠.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계획된 행동이었습니다.
주용훈: 남편분에게 연락이 안 돼 걱정이 많으셨을 텐데, 최초로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남편에게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저는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어서, 수업 중에는 전화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 전화를 확인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 남편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남편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혹시 남편이 친구 집에 있나' 생각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보니 남편은 없었습니다. 남편 친구는 "오늘 하루 종일 남편이 안 보인다"며 걱정했습니다. 평소 남편이 술에 취해 차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딘가에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친구는 "뭔가 이상하다"며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 신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로부터 남편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설마 '아니겠지'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에서 남편의 사망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현실임을 깨달았습니다.
안수지: 경찰로부터 남편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1분도 안 돼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당시 경황이 없으셨을 텐데, 경찰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유서는 있었나요?
곽경희 작가님: 네, 정말 1분도 안 돼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유서가 없다'는 경찰의 말에 의아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서가 없다는 점이 저를 의심하게 하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남편 사망이라는 황망한 상황 속에서, 저는 경찰 조사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경찰은 "자살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차마 "아빠가 자살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아빠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비명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고, 저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전해 듣고서야 제가 기절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응급실에서 남편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저는 차마 남편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간호사 출신이라 죽음을 많이 접해봤지만, 남편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시어른들이 대신 남편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경찰 조사는 형식적인 절차였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경찰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했지만, 남편의 휴대폰에 저와 싸웠던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저를 계속 의심했습니다. 유서도 없었고요. 경찰은 저에게 계속 질문했습니다. 과거 부부 관계부터 사건 당일 행적까지, 자세하게 진술해야 했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시간은 정말 공포스러웠습니다. '내가 정말 남편을 죽인 건가? 내가 잘못해서 남편이 죽은 건가?'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모멸감, 절망감에 휩싸여 '내가 뭔가 잘못해서 재판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느꼈습니다. 집에는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텐데, 저는 밤늦도록 경찰서에 붙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고 암담했던 순간입니다.
이정수: 가족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경우에도 충격이 큰데, 남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돌아가셨으니,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본인도 힘드셨겠지만, 아이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요.
곽경희 작가님: 네, 저도 힘들었지만, 아이들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아이들이 넋이 나간 듯 땅만 쳐다보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하는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나 하나만 참았으면 될 것을, 내가 못 참아서 애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구나' 후회와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셋째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말을 하면서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죽지만 말고 살아 있으라'고 남편에게 모질게 말했지만, 결국 살아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은 결과가 된 것입니다. 저절로 원망의 소리가 나왔습니다.
안수지: 죄책감,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크셨을 것 같습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에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죄책감이 너무 심해서 혼자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간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정신과 상담에 대한 편견이 없었습니다. 크리스천이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선생님뿐만 아니라, 상담 교수님들께도 찾아가 상담을 받았습니다. 정신과 선생님은 저에게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운명대로 살다 간 겁니다. 당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남편에게 토치를 건네준 것도 저이고, 남편 친구가 신고한다고 했을 때, 솔직히 '남편이 살아있을 때 연락이 되면 곤란한데' 하는 생각을 했다"고요. '중환자실에 가면 내일 이혼 못 하는데, 저 사람과는 정말 끝내야 하는데, 아예 깨끗이 끝난 다음에 찾던가, 아니면 멀쩡히 살아 있어서 찾던가' 하는 끔찍한 생각까지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죄책감에 너무나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혼하자"고 말한 바로 전날, 남편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시더니 "아, 남편이 한 방 먹이고 갔네요!"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남편에게 '한 방 먹었다'는 것이죠. 선생님의 뜻밖의 반응에 제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죄책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오히려 내가 한 방 먹었구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보통 상담 선생님들은 환자의 감정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의 정신과 선생님은 매우 직설적이고 단호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불쌍하고, 남아있는 사람은 뭔가 잘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시선과는 달리, 선생님은 저의 편에서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에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이정수: 당시 아이들은 몇 살이었나요?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팠을 것 같습니다.
곽경희 작가님: 큰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 둘째는 고등학교 1학년, 셋째는 초등학교 4학년, 막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안수지: 현실적인 문제,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을 텐데요. 네 아이를 키우며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정말 늘 걱정이었습니다.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빚이 많았지만, 그래도 직장 생활을 안 하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당장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몇 달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간호사 3교대 일을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간호사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나이도 많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었습니다. 다른 어려움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지만, 나이트 근무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나이트 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하면, 아이들끼리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네 명의 아이들에게서 동시에 문자가 온 것입니다. "엄마, 학교에 늦었어요!" "엄마, 빨리 깨워주세요!" "엄마, 밥 줘요!" "엄마, 학교 가기 싫어요!"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갔으면 어쩌나'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큰일 났다' 싶어서 집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허둥지둥 학교에 가려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학교로 뛰쳐나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이들을 잘 다녀오라고 해야 하나, 혼내야 하나'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이트 근무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늘 침대에 엎드려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안수지: 남편분이 빚을 남기고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빚 때문에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은데요.
곽경희 작가님: 네, 남편은 많은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담을 받으면서 파산 신고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빨리 파산 신고를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저는 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너보다 앞서가서 험한 것을 평탄하게 하고 놋문을 쳐서 부수고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에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이사야 45장 2절, 3절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앞서가서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걸까?' '흑암 중에 보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숨겨진 보물을 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믿지 못하는 걸까?' 더 이상 빚에 쫓기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직장을 그만두면서 대출받은 돈을 통장에 넣어두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이제 당분간은 굶어 죽지 않겠구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집 하나 가지고 죽느니, 차라리 단칸방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살아남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장을 보고, 아이들이 밤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해서 밤늦게 편의점에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두 개씩 골라보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나 풍요로운 겁니다.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말 행복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저에게 "부모가 여지껏 나를 안 밀어줬다고 원망하지 말고, 이제 컸으니 여러분이 여러분을 밀어주세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전에 누군가 서울로 유학 간다고 하면, 집도 팔고 소도 팔아서 자녀를 뒷바라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늘 그런 이야기가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그래, 이제 내가 나를 밀어줘야겠다. 내가 집을 팔아서 나를 밀어주자!' 그때 집을 팔았습니다. 집을 팔고 나서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상도 못 할 만큼 채워주셨습니다. 제가 경산중앙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교회에서 장학금을 많이 받았고, 여러 목사님들께서도 장학금을 주시고, 아이들 먹을 것도 사다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어느 과부의 기름이 계속 채워지는 기적처럼, 늘 부족함 없이 채워주셨습니다. '아, 정말 내가 먼저 시작해야 되는구나.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 되는구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는 늘 '하나님은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제 자신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사랑하면서, 정작 나는 사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로소 제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안수지: 그래도 아이들을 볼 때마다, '아빠 없는 아이들'이라는 생각에 눈물로 기도를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떻게 기도하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네, 교회에 가서 정말 많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애비 없는 자식을 만들어놓으셨습니까?"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너 아버지 뭐 하시냐?" 묻는 문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만약 아빠 없다고 하면, "너 애비 없는 자식이냐?" 놀림을 받을까 봐 늘 걱정했습니다. 남편을 원망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새벽 예배에 가서 기도를 하면, 너무 울어서 창피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조용히 기도하시는데, 저만 엉엉 통곡하니 방해가 될까 봐 신경 쓰였습니다. 혼자 기도할 곳을 찾다가, 집 앞에 작은 개척교회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 교회에 가서 기도해볼까?' 조심스럽게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교회에 성도가 단 한 명도 없는 겁니다. 오히려 텅 빈 교회가 저에게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목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교회 문을 잠그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때나 와서 기도하라"고 허락해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 후, 저는 텅 빈 교회에 가서 마음껏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남편에게 욕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애들하고 나를 버리고 갈 수 있어! 할 말이 그렇게 없었어? 유서 한 장 안 남기고 어떻게 그렇게 갈 수 있어!" 막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순간 문득 떠오른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책만 읽지 말고, 책을 써라!" 남편은 평소에 책을 좋아하는 저에게 "책만 읽지 말고, 책을 써보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남편의 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그래, 잘 됐다! 평소에 유서 대신 책을 쓰라고 했던 거구나! 너와 나의 어리석은 이야기를 책으로 써야겠다! 내가 꼭 책을 쓸게!' 복수심 같은 마음으로 다짐했습니다. 책을 쓰겠다고 결심하자,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 빼고 모든 사람에게 남편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차마 책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강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보고 쓰지 마라. 내가 그 책을 받을게. 나에게 써라!" 정말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지껏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찬 기도를 했는데, 갑자기 마음에 기쁨이 넘쳐 흘렀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려 드려야겠구나!' 교회 강단 주변을 빙빙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원래 춤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날, 정말 발레리나처럼 가볍고 아름다운 춤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악을 쓰며 원망의 기도를 했던 제가, 그날 처음으로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아, 내가 이 책을 써야 할 사명이 있나 보다!' 춤을 추면서 혼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정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책을 집필하게 되셨다니,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책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했을 때,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두려움은 없으셨나요?
곽경희 작가님: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아이들에게 언젠가는 진실을 알려줘야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살 유가족 중에는 또다시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자살은 가족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또 다른 비극을 낳을 수 있습니다. 저는 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이런 경우를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진실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쓸 때는 계속 숨겼지만, 출판이 확정되고 출판을 바로 앞두었을 때, 큰아이와 둘째 아이에게 책 원고를 보여주었습니다. 큰아이는 책을 읽고 "엄마가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제 알겠다"며 펑펑 울었습니다.
안수지: 아이들이 어머니를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는 않았나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곽경희 작가님: 아이들은 오히려 저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었습니다. 제 힘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엄마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엄마 때문에 지켜졌다"며 고마워했습니다. 큰아이는 늘 저에게 "엄마, 고마워"라고 말합니다.**
이정수: 남편분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이제 모두 사라졌나요? 용서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곽경희 작가님: 혼자 있을 때는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상담 치료, 집단 상담을 받으면서 남편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상담 모임에서 상담가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남편분이 그렇게 심하게 다투고 힘들 때, 어떤 집은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혼을 앞둔 부부는 빨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안전합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욱하는 성격의 남편이 혹시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멀리 떠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차마 나를 해치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에 대한 예의를 지킨 것은 아닐까?' 남편이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나를 사랑했구나' 비로소 남편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정수: 마지막으로 자살 유가족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남편분과 같은 아픔을 겪으며 죄책감과 슬픔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많은 분들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주세요.
곽경희 작가님: 자살 유가족 여러분, 부디 힘내십시오. 절대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 때문에 그분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자살 유가족들은 가족 중 누군가 자살했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다' 자책합니다. 더욱이 자녀가 자살한 경우에는 부모님이 '내가 자녀를 잘못 키워서 그런 것 같다' 자책하고, 배우자가 자살한 경우에는 배우자가 '내가 뭔가 잘못해서 배우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 자책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했던 사람은 바로 자살 당사자입니다. 자살 유가족은 비난받을 대상이 아니라, 위로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앞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살 유가족을 잘못 돌보지 않으면,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살 유가족은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립니다.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 전문적인 상담 치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 역시 자살 유가족으로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힘을 냈습니다. 대출을 받아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고, 상담 치료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빨리 정신 차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도 없는데 아버지 노릇까지 해야 한다"며 책임감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 엄마 노릇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에게 대들지도 못하고, 제가 해주는 대로 묵묵히 밥을 먹고, 제가 시키는 대로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아이들이 불쌍해서 직장에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에게 화부터 냈습니다. "집이 왜 이렇게 어질러져 있어! 밥은 먹었어? 식탁이 왜 이렇게 더러워!" 늘 아이들에게 짜증만 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도대체 우리 애들 어떻게 키워야 하나' 걱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다가 울고 있는 저를 보면서, 아이들이 "엄마, 죽으면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아이들은 "엄마, 왜 울어?" 묻겠지만, 저희 집 아이들은 "엄마까지 죽으면 어떡해?" 걱정부터 했습니다. "엄마, 우리 천년은 같이 살아야 돼" 말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 이러다 우리 애들까지 다 죽겠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마침, 둘째 아이가 저에게 "혹시 엄마 때문에 아빠 죽은 거 아니야?" 대든 적이 있습니다. 가뜩이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들의 돌직구 질문에 정말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내 때문에 남편이 죽은 건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들이 저에게 대들었다는 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였습니다. 아들이 저를 힘 있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엄마가 너무 힘이 없어 보이면, 아이는 차마 대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 내가 아직 힘이 있는 사람이구나!' 그때 용기를 내서 집단 상담을 받으러 갔고, '다시 살아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다시 살아날 힘을 얻은 것입니다.
안수지: 오늘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자살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오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자살한 사람에 대해서만 '불쌍하다' 생각했지,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작가님의 말씀처럼, 자살 유가족은 만신창이가 된 피투성이 환자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깊은 상처와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살 유가족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살 유가족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바로잡고, 그분들을 따뜻하게 품어안아야 합니다. 오늘 작가님의 이야기를 통해 자살 유가족에 대한 저의 무지와 편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정수: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살 유가족도 많다는 뜻이겠죠. 곽경희 작가님께서 겪으신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있을 분들이 정말 많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그분들을 품고 안아줘야 할까요? 특히, 우리 크리스천은 자살 유가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자살 유가족들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곽경희 작가님께서 상담 공부를 하신 것도 본인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겠지만, 부디 힘내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더 큰 기쁨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작가님의 딸들이 나중에 정말 좋은 남편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아들들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간증을 나눠주시고, 지금도 나약하고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상담 활동을 열심히 해주십시오. 오늘 귀한 간증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곽경희 작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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