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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선교 이야기: 윤상수 선교사와 희망의 메시지

요약

잿더미 속 희망: 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

[수어 통역]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ㅣ윤상수 우크라이나 선교사ㅣ김현숙 수어통역사ㅣ새롭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새롭게 하소서 주영훈 님과 송지은 님의 진행으로, 우크라이나 선교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주실 윤상수 선교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오랜 시간 사역해오신 윤상수 선교사님은 최근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직접 만나고 오셨다고 하는데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도전을 줄 것입니다. 그럼, 바로 윤상수 선교사님을 모시고 우크라이나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상수 선교사님께서는 오랜 기간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시다가 전쟁 발발 후 한국으로 잠시 귀국하셨는데요, 전쟁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심정이 어떠셨는지 여쭤보겠습니다. 선교사님께서는 현지에 계실 때 전쟁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전쟁 위험 소식과 철수 권고에 당황하셨다고 하는데요, 선교사님께서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항의도 해보았지만, 한국 대사관의 강력한 철수 권고와 여권 말소 가능성 때문에 결국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벌써 두 달이나 되었지만, 이후 정부의 뚜렷한 조치가 없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시라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당시 26가정의 선교사들이 함께 귀국했으며, 일부는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 미국 시민권자 선교사들은 우크라이나 내에 남아 계신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선교사님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윤상수 선교사님께서는 한국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즉시 우크라이나 현지로 전화를 걸어 고려인 목사님들과 연락을 취하셨는데요, 새벽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현지 상황을 직접 확인하시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현지 목사님들은 오히려 전쟁 발발 소식을 실감하지 못하고 되묻는 상황이었다고 하는데요, 다음 날 선교사님들은 모여 기도하며 전쟁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온라인 기도회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약 20일간 매일 온라인 기도회를 통해 힘든 마음을 위로받고 극복해 나가셨으며, 이후 왕성교회 철야 기도회와 오륜교회 초청 집회에 참석하면서 한국 교회와의 연대를 통해 큰 위로와 감사를 느끼셨다고 합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눈물과 불평 대신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방법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최근 폴란드에 방문하셔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직접 만나고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현장에서 어떤 상황들을 목격하셨는지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폴란드 현지에서 윤상수 선교사님은 겨울옷을 입고 있는 난민들의 모습과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깊은 수심과 두려움을 목격하고 마음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일상을 누렸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난민이 된 현실을 보면서 자유와 주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뉴스에서 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현장의 참혹함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오랜 기간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시면서 현지 교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오셨을 텐데요, 교인들의 상황은 어떠한가요? 윤상수 선교사님께서는 교인들이 전쟁 발발 후 2주 동안 피난을 망설였지만, 계속되는 폭격에 결국 피난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피난을 결정하기 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렸다는 소식을 듣고 윤상수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눈물로 함께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1000km가 넘는 피난길에 올랐지만, 3일 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모두 안전하게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18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들은 출국 금지되어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도 목격하셨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의 소중함과 예배의 가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과는 어떻게 연락이 닿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폴란드에서 난민들을 돕던 중, 과거 사역했던 교회의 부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목사님은 국경을 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 국경 도시에 남아 난민들을 돕고 있었고, 그곳에서 하루 2~300명의 난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교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부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난민들을 돕는 사역을 시작했고, 윤상수 선교사님은 폴란드에서 350kg의 구호 물품을 구입하여 국경까지 전달하는 방식으로 협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국경에서는 우크라이나 여성 운전사들이 나와 물품을 전달받았다고 하는데요,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화장품 등의 물품을 지원하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사모님의 생일날 화장품을 선물했을 때, 전쟁으로 슬픔에 잠겨있던 사모님이 크게 기뻐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보람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선교 센터 CCTV를 통해 현지 상황을 계속 확인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선교 센터 CCTV를 통해 센터가 폭격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인터넷은 연결되어 있는지 등을 수시로 확인하신다고 합니다. 어느 날 CCTV 화면에서 낯선 차량을 발견하고 연락해보니, 며칠 전 국경으로 보냈던 구호 물품을 교인들이 선교 센터까지 직접 전달해 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나눔과 연대의 모습을 보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강인함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현재도 온라인 뱅킹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재정 지원을 하고 계시며, 인터넷 연결이 끊기면 현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신다고 합니다.

윤상수 선교사님은 우크라이나에 처음 발을 디딘 초기 선교사라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래 윤상수 선교사님은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에서 결핵 진단을 받고 군 면제를 받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결핵은 불치병으로 여겨졌기에 젊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치료 과정에서 직장 생활과 교회 봉사를 병행했지만, 술도 마시는 등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삶을 살지 못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몸이 아프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서원 기도에 대한 믿음이 떠올랐고, 하나님께 거래하듯 "제 몸을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인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고 합니다. 서원 후 갑자기 밀려오는 두려움에 당황했지만,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운전대 뒤에서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서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지만, 순탄치만은 않았을 텐데요,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고 어떻게 극복해나가셨는지 궁금합니다. 신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재정적인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지만, 부족한 생활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데요, 6인용 밥상을 팔아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등록 마감일이 지나도록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새벽마다 기도하던 중,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등록금을 지원받아 무사히 등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매 학기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도움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고, 교회가 인재를 키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나 선교의 길을 선택하기 어려워하는데, 윤상수 선교사님께서 해외 선교를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당시 많은 동료들이 국내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윤상수 선교사님은 국내 교회 경쟁적인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서 하나님의 관심이 온 열방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신약 성경의 지상명령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통해 해외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공수부대처럼 전략적으로 선교지에 뛰어들어 복음을 전하는 '공수부대 선교관'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파송 교회인 왕성교회의 요청에 따라 얄타 회담 장소인 크림반도 얄타로 향하게 되었고, 통일의 역군이 되겠다는 사명을 품고 얄타 선교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크림반도 얄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인데, 얄타를 선교지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얄타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냉전의 시작을 알린 얄타 회담이 열린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윤상수 선교사님은 남북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을 이루는 역군이 되고자 얄타를 선교지로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얄타에 도착해보니 얄타 회담 장소는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고, 통일 역군으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처럼 도시와 시골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현지 지도자를 세워 교회를 개척하는 방식으로 사역 방향을 전환하셨다고 합니다. 23년간 7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현지 지도자를 양성하며 사역을 확장해나가던 중,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인해 얄타에서 철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3년간 사역했던 얄타에서 갑작스럽게 철수하게 되면서 큰 상실감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23년간 헌신했던 얄타를 떠나야 했을 때, 고향과 같은 곳을 잃은 듯한 상실감과 아픔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매주 교회들을 순회하며 설교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연합 집회를 개최하는 등 안정적인 사역 기반을 구축했지만, 러시아의 합병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는 더 이상 얄타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추방과 같은 상황 속에서 얄타를 떠나면서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습니다. 이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사역지를 옮겨 8년간 사역했지만,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또다시 철수하게 되면서 두 번의 강제 철수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의 철수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의 강제 철수를 겪으면서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한국에 돌아와 31년간의 선교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 사역하면서 많은 것을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와 보니 가방 하나만 들고 온 빈털터리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내려놓음'의 의미를 깨닫고,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 잠잘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물질적인 풍요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며, 세상 사는 동안에도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졌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역설적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깨달음이 인상적입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현지 교인들의 소식을 듣고 계신가요? 예배 상황은 어떠한가요? 부차에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 현장으로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던 부차 지역 교인의 감동적인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부차 지역에 파병된 우크라이나 군인인 성도가 휴가를 받아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는 소식인데요, 마지막 예배 이후 다시 모인 예배에서 한 살배기 아이를 데리고 온 성도의 모습은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도 신앙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모습은 윤상수 선교사님께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특히, 전쟁에 참여하여 받은 월급의 십일조를 헌금하는 성도의 모습은 평소 가르쳤던 신앙의 원리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의 믿음을 보면서 선교를 포기할 수 없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되었고, 전쟁이 빨리 끝나고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고 합니다.

두 번이나 러시아로 인해 사역지를 잃게 되면서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와 러시아 국민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러시아라는 나라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며, 21세기에 있어서는 안 될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의 정의가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면서 영적인 전쟁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의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공의를 세우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며, 유럽 사회의 재복음화에 앞장서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새로운 유럽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는 희망찬 전망을 제시하셨습니다.

러시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들과도 교류하고 계신가요? 러시아 선교사님들과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며, 러시아 선교사님들로부터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선교사님들은 전쟁에 책임이 없으며, 오히려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과 이동 제한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귀국하실 때 특별히 함께 오신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아 MK(선교사 자녀) 빅토르와 함께 한국에 오셨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빅토르는 6개월 전 74세의 아버지(선교사)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난 고아였다고 합니다. 파송 교회도 없이 어렵게 선교하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선교사의 장례식을 한국 선교사 협의회에서 치르게 되었고, 윤상수 선교사님은 장례식 설교를 통해 고인을 '인생의 승리자'이자 '선지자'로 칭송하며 위로를 전했다고 합니다. 장례식 후 고아가 된 빅토르를 누가 돌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한 달 동안 기도하며 후원자를 찾았지만 나타나지 않자 윤상수 선교사님께서 직접 빅토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선교사 자녀들이 고아가 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고아 MK를 돌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번 기회를 통해 빅토르를 입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아 MK 빅토르를 입양하신 이야기가 정말 감동적인데요, 빅토르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요? 빅토르는 현재 전주의 한 교회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5월까지 온라인으로 우크라이나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졸업할 예정이며, 한국 대학 특례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빅토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으며, 윤상수 선교사님과 전 세계 선교사들이 빅토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빅토르를 통해 고아 MK 사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생 같은 질문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이 땅에 전쟁과 같은 고통을 허락하시는 걸까요? 이 질문은 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며, 하나님의 허용과 전쟁의 책임을 연결시키는 것은 모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지만, 전쟁이라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구약 성경 아사왕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싸움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의지할 분임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윤상수 선교사님은 한국 사회도 총칼만 없을 뿐이지 전쟁과 같은 상황이라고 느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전쟁이 나면 국경을 넘어 피난이라도 갈 수 있지만, 한국 사회는 갈 곳이 없는 상황이라고 비판적으로 진단하셨습니다. 우크라이나가 31년간 평화를 추구하며 국방력을 약화시킨 결과, 강대국의 침략에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방력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도 국방력 강화에 힘써야 하며, 남의 나라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6.25 전쟁 당시 많은 나라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이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호소하셨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 대한 한국 국회의원들의 무관심한 태도를 지적하며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방송을 시청하시는 분들에게 기도 제목이나 중보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인생은 어려움의 연속이며,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없을 때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매몰되지 말고, 눈을 감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소망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격려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대한민국 국민 모두 희망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희망의 에너지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기를 축원하셨습니다.

앞으로의 비전과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폴란드 난민 캠프에서 구호 활동을 계속하고, 한국 정부에 예외적 여권 사용을 신청하여 우크라이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습니다. 전쟁 후에는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의료 선교를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윤상수 선교사님은 절망 속에서도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희망찬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자고 격려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진행자들은 윤상수 선교사님의 헌신과 용기에 감탄하며, 우크라이나 재건의 역사를 기대하며 응원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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