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 출신 선교사 카일 윌슨의 멕시코 감동 실화 인터뷰
## 버려진 아이, 멕시코의 아버지로! 입양아 출신 선교사의 감동 드라마
외로운 입양아에서 든든한 입양 부모로 성장한 감동적인 이야기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삶에 따뜻한 변화를 선사하는 새롭게하소서 주영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분을 모시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함을 잊을 때,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마치 마법과 같이 잃어버렸던 감정을 되찾아주는 경험인데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으신가요? 오늘 저희가 초대한 손님은 바로 입양 후 학대와 방황을 겪었지만, 결국 타인을 돕는 삶을 선택하신 카일 윌슨 선교사님이십니다. 정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데요, 어서 모셔보겠습니다. 멕시코에서 오신 카일 윌슨 선교사님, 어서 오세요!
멕시코에서 직접 오셨다는 말씀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멕시코 목회자들을 섬기시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왠지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뵙던 분과 이미지가 겹치는 것 같습니다. 혹시 드라마 촬영도 하시는 건 아니시죠? (웃음) 선교사님께서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셨다고 들었는데요, 한국말은 어떻게 이렇게 유창하게 구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피가 흐르지만, 사실 한국말을 20대에 배우기 시작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는데요, 전혀 어색함 없이 한국어로 소통하시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영어에 능통하신 두 진행자분들 덕분에 더욱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멕시코 선교는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요? 멕시코, 그 중에서도 1905년 한인 후예들이 정착한 유카탄 반도에서 사역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특히 칼(Cal)이라는 마을과 산 안토니오(San Antonio) 마을, 이 두 곳에서 삶을 나누는 사역을 펼치고 계신다고 하는데요, 샌안토니오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지명입니다.
선교사님의 사역은 단순한 ‘사역’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그 깊이와 넓이를 담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삶을 ‘함께’하는, 즉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곧 사역이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진정한 섬김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데요. 좁은 의미의 사역을 넘어, 아이들의 다양한 문제들을 아빠가 자녀를 키우듯 기도하며 사랑으로 함께하는, 삶 자체가 녹아있는 사역을 지향하신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되셨다는 소개를 들었는데, 입양 과정이 조금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고아원에서 입양되는 경우가 많은데, 선교사님은 어떤 과정을 거치셨나요?
선교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일반적인 입양과는 조금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서울대학교, 어머님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신 엘리트셨지만, 결혼 후 곧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셨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이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체면 문화 때문에, 가정의 불화를 숨기기 위해 아이를 고아로 위장하여 입양을 보내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셨다고 하는데요, 정말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여섯 살 무렵 미국으로 입양되셨다고 하는데,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입양되는 것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뉴욕, 그 중에서도 롱아일랜드라는 좋은 동네에서 성장하셨다고 합니다. 롱아일랜드는 부촌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선교사님 가족은 센트럴 리치라는 중간층 지역에 거주하셨다고 하네요. 교사이셨던 아버님과 백인 어머니 밑에서 일곱 형제와 함께 자라셨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일곱 형제 모두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데요, 백인 부모님이 세 명의 백인 아이들과 네 명의 한국인 아이들을 입양하여 가정을 이루셨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짜 돌림자를 사용한 형제들의 이름(크리스, 키, 캐리, 카일, 코리, 킴미, 케시)에서 화목한 가족 분위기가 느껴지는데요, 선교사님은 형제들 중 몇 번째였나요?
선교사님은 일곱 형제 중 딱 중간인 네 번째, 그것도 ‘안 좋은 중간’이라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셨습니다. 형들은 이미 성장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바빴고, 어린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위치였기에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책임감이 컸다고 하는데요, 마치 ‘낀’ 세대와 같은 역할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에, 양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양부모님 모두 좋은 분들이셨지만, 갱년기를 겪으시면서 어머니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중학교 시절 어머니의 극심한 감정 변화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는데요. 80년대 뉴욕 사회는 여성의 갱년기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심지어 정신 질환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힘든 감정을 숨기셨고, 선교사님은 학대와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의 변화에 무서움을 느껴 집을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새벽 4시에 출근하여 밤늦게 귀가하는 생활을 반복하셨다는데요, 어머니의 갱년기 증상과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선교사님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곱 명이나 입양할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셨던 양부모님이었기에, 갱년기로 인한 힘든 시기를 제외하면 좋은 분들이셨다고 회상하셨습니다. 사춘기 시절 학대는 더욱 큰 상처로 남았을 텐데요, 사춘기 자녀와 갱년기 어머니의 갈등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갱년기 어머니의 힘이 훨씬 셌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당시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청소 문제로 해병대 훈련과 같은 강도 높은 훈육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체벌까지 당했다고 하는데요, 80년대 미국 사회에서도 아동 학대는 심각한 문제였지만, 피해 아동들은 공포감 때문에 쉽게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부모님과 외모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정체성 혼란과 방황을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입양아들이 겪는 갈등은 상상 이상일 텐데요, 학교 생활은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자신이 백인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백인 가정에서 자랐고, 학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백인이라고 착각했던 것인데요, 13살 무렵 댄스 캠프에서 겪은 일을 통해 자신이 동양인임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함께 댄스 캠프에 참가했던 친구들은 모두 여자친구가 생겼지만, 자신만 외톨이가 된 경험, 샤워 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동양인임을 깨달은 순간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학교에 있던 한국인 친구를 ‘칭크(Chink)’라고 부르며 백인인 척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예민한 시기에 어머니의 갱년기까지 겹치면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환경에서는 가출을 선택하는 청소년들도 많은데요, 선교사님은 어떠셨나요? 집을 떠나고 싶었지만,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면 방에 숨어 어머니를 피하는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차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하게 혼나고, 15살에 가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80년대는 지금과는 달리 친구 집이나 선생님 댁에서 머무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친구 집, 선생님 댁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밤에는 공원에서 노숙하기도 했다는데요, 정말 힘겨운 생활이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 다이어트하는 아가씨들이 버리는 음식을 주워 먹기도 했다고 하니, 얼마나 배고프고 힘들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교는 꾸준히 다녔다고 합니다. 학교만이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가출 후에도 학교는 계속 다녔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학교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가출 전까지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으로 학교에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학교가 있었기에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고,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고모님이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가출 소식을 듣고 입양된 조카를 찾아 먼 길을 오셨다니,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친부모님은 어떤 이유로 찾지 않으셨을까요? 친부모님은 나름의 상처 때문에 아들을 찾지 못했지만, 고모님은 조카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미국까지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연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시던 고모님은 능력 있는 집안의 자녀였던 것 같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양부모님께 연락하여 선교사님을 찾으셨을까요?
고모님은 뛰어난 능력으로 양부모님께 연락하여 선교사님을 찾으셨고, 양부모님은 고모님께 친권을 양도하는 것에 동의하셨다고 합니다. 가출 후 학교에서도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고모님의 등장은 한 줄기 빛과 같았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모님 댁으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사실상 고모님께 입양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드라마 같은 만남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잘 지내셨던 것 같은데, 고모님 댁에 간 후 갑자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고모님 댁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고모님 댁으로 이사 간 곳은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버팔로라는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뉴욕 주에 속하지만, 버팔로는 롱아일랜드와는 전혀 다른 시골 분위기의 도시였다고 하는데요, 특히 동양인이 거의 없는 백인 중심적인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전학 간 학교에서 처음으로 인종차별적인Experiences을 겪게 되는데요, 학교 복도를 걷다 ‘칭크(Chink)’라는 인종차별적인language를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인종차별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력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결국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되는데요, 사람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주변에서 문제아로 낙인찍으니 정말 문제아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싸움, 퇴학, 정학 등의 징계를 반복적으로 받게 되고, 고모님은 매주 학교에 불려 다니셨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셨는데요, 정말 굴곡진 10대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스스로를 ‘쓰레기 같은 삶’이라고 자책하며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필수 과목은 대부분 이수했지만, 영어 과목에서 세 번이나 낙제하면서 간신히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친구 관계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버팔로에서는 이탈리아 갱스터들과 어울리며 싸움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싸움을 잘한다는 이유로 갱 친구들에게 이용당하고, 주말마다 싸움에 휘말리는, 폭력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 후 해병대에 지원하신 것을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해병대 지원은 현실 도피적인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삶을 향한 갈망이었을까요? 해병대 지원은 현실 도피와 새로운 시작을 향한 갈망이 뒤섞인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정체성을 찾고 싶었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해병대 입대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셨을 시기에, 버려진 친부모님에 대한 생각, 특히 친아버지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고 합니다. 고모님을 통해 친아버지와 연락이 닿았지만, 고모님과 친아버지는 관계가 소원했다고 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친아버지를 만났지만, 기대했던 아버지의 모습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상상했던 재회 장면과는 달리, 한국적인 문화와 아버지의 무뚝뚝함은 선교사님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기대했지만, 차가운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학교에 다녀왔지만, 한국 아버지들의 표현 방식은 여전히 서툰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받고 실망한 선교사님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하여 삶의 희망을 잃고 자살을 시도했다니,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자살 시도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희미했습니다. 이후 어머니도 만나게 되었지만, 어머니 역시 상처가 많은 분이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만났을 때는 이미 하나님을 만난 후였기에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의 아픔에 갇혀 술에 의존하며 후회 속에서 살아가고 계셨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선교사님을 위해 매일 5시간씩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외할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선교사님이 고난 속에서도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살 시도 후 더욱 방황하며 막 사셨다고 하는데, 어떤 삶을 사셨나요? 자살 시도 후 삶을 포기한 듯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막 살았고,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고 합니다. 갱단과 싸움을 벌이는 등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며, 술과 폭력으로 얼룩진 10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지금의 사모님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혼은 어떻게 결심하게 되셨나요? 깡패보다 더 험악하게 살았던 시절, 장사하는 분의 소개로 지금의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선교사님을 볼 때마다 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는데요, 정말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뉴욕에서 노스캐롤라이나로 소개팅을 하러 갔을 당시에는 지금의 아내분이 이상형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시골적인 분위기의 아내분에게 실망했지만, 소개받았으니 예의상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하는데요, 첫 만남에서 아내분은 믿음 생활과 선교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했고, 선교사님은 그런 아내분의 모습에 반감을 느껴 담배를 피우며 “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라고 선을 그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며칠 후 아내분은 “몇 년생이세요?”라고 물었고, 선교사님이 88년생이라고 답하자 갑자기 반말로 “저는 저보다 어린 사람은 안 만나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연상이었던 아내분의 단호한 태도에 오히려 호기심이 생겨 아내분을 꼬셔서 버리겠다는 삐뚤어진 마음을 먹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다고 합니다. 매일 두 시간 거리를 운전해 아내분을 만나러 갔고, 결국 아내분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쫓아가야 하는 사람은 오히려 아내분이었다고 고백하며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결혼까지 이어진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한국 교회에 대한 상처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차별 의식 때문에 교회에 실망한 경험이 많았다고 합니다. 교회에 가면 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한국 사람들은 배경, 집안, 학벌 등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고, 입양아 출신인 자신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분과 장모님은 달랐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이 장모님은 선교사님의 과거를 알고도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3일 금식 기도 끝에 선교사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장모님의 사랑과 기도 덕분에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교제 시작 후 6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하는데요, 정말 짧은 시간 안에 결혼을 결정하셨네요. 결혼식 당일에도 30분이나 늦게 나타나 아내분을 불안하게 했다니, 정말 예측 불허의 결혼 생활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식부터 삐걱거렸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결혼식에 30분 늦은 신랑이라니, 정말 상상하기 힘든데요, 결혼 후에도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술, 담배는 물론 폭력적인 성격까지 여전했다고 하는데, 사모님 고생 많으셨겠어요.
결혼 초, 노스캐롤라이나는 술과 담배, 싸움을 좋아하는 선교사님에게는 재미없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교회에 가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골이었기에 억지로 교회에 다녔지만, 여전히 방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 장로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집사님들을 꼬드겨 술을 마시는 등 문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학생들까지 술자리에 끌어들이는 등 엉망진창인 생활을 했다는데요, 어느 날 술에 취해 욕설을 퍼붓는 선교사님을 보고 장모님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장모님의 눈물은 선교사님에게 큰 충격과 죄책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해병대에서 배운 욕설은 상상 이상으로 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분도 이해하지 못하는 욕설을 사용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혼 위기까지 겪었다고 하는데요, 결혼 생활 1년 동안 아내분은 눈물로 기도하며 이혼을 고민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이혼 소문이 파다했다고 하니, 정말 위태로운 부부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혼 1년 만에 변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9일 동안 아내분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가지면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9일 만에 아내분과 재회했을 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9일 동안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선교사님은 비행기표를 예매하려던 순간, 문득 아내분의 기도와 교회의 사랑을 떠올리고 무릎 꿇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질문했고, “네가 변하면 된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을 듣고 변화를 결심하고 아내분과 장모님께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장모님과 아내분의 기도의 힘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 정말 변화된 삶을 살게 되셨나요? 용서를 구한 후 교회에 나가면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이 닫혀있던 마음을 녹인 것입니다. 그 이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통역 일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어 실력을 활용하여 교회에서 동시통역 봉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구글 번역기와 같은 편리한 도구가 없었기에, 사전을 찾아가며 12시간 이상 번역 준비를 했다고 하는데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통역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경험을 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설교 말씀을 통역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는데요, 정말 놀라운 경험입니다.
통역 봉사를 통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선교사님은 자신의 상처가 오히려 사명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멘토 목사님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좋은 가정에서 입양되지 않고 평범하게 자랐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고난과 역경 속에서 성장했기에 오히려 지금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아와 같은 외로운 아이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교사님 자신이 고아로 자랐고, 고통스러운Experiences를 통해 성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아픔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시골에서 2세 학생들을 만나면서, 1세 부모들이 알 수 없는 2세들의 고독과 아픔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열심히 일하지만, 2세들은 미국 문화 속에서 정체성 혼란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2세들이 겪는 고통이 닮아있음을 느끼고, 그들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대 졸업 후 교사가 되었을 때, 멕시코 아이들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안한 삶에 안주하며 과거의 고통을 잊고 살아가던 중, 학교에서 만난 멕시코 학생들을 통해 다시 한번 고아와 같은 아이들의 아픔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매일 화장을 하고 숙제를 하지 않는 12살 멕시코 소녀 예은이의 이야기를 통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은이는 멕시코 갱단에게 성 착취를 당하고 있었고, 충격적인 현실에 선교사님은 큰 슬픔과 죄책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예은이와 같은 아이들을 외면했던 자신을 회개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야 함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안아주고 사랑을 표현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선교사님의 아픔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두려운Experiences일 수 있지만, 선교사님은 순순히 순종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격이 순종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죽은 목숨과 같았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주시고, 성령을 통해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순종을 가능하게 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에 감사한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강조하시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교에 진학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안정된 교사 생활을 내려놓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는데요, 사모님이 힘드셨겠어요. (웃음) 사모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웃음) 선교사님은 유머러스하게 웃으셨지만, 아내분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미국에서 목회를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풀타임 사역 자리를 얻지 못하고 실망했을 때, 멘토 목사님의 권유로 단기 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단기 선교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교만함을 깨닫고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선교지를 니카라과로 정하고 홈리스 사역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멕시코로 선교지를 변경하게 됩니다. 멕시코 선교는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멕시코 선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니카라과 선교를 준비하던 중 갑작스럽게 멕시코 선교를 제안받고 당황했지만, 기도하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멕시코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멕시코는 위험하고 낯선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2009년, 여섯 살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떠나 낯선 땅에서 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멕시코 선교 초기,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합니다. 파송 교회에서 후원을 약속했지만, 교회 내부 사정으로 후원이 중단되고, 자비량으로 선교를 해야 했습니다. 한 달 50달러로 생활하며 멕시코 시골 마을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는데요, 멕시코에 아는 교회도 없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헤쳐나가셨을까요? 멕시코 시골 마을에서 볶음밥 장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장 앞에서 볶음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남은 볶음밥은 가난한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볶음밥을 팔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오히려 그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먹을 밥조차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지인들의 따뜻한 마음과 나눔을 통해 선교사로서의 자세를 다시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현지인들을 돕기 위해 왔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경험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선교사의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멕시코에 뼈를 묻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후원 교회 없이 볶음밥을 팔면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삶을 선교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걸어가기로 한 것입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오히려 굳건한 믿음을 다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1만 달러 정도의 돈이 있었는데, 렌트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작은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돈마저 아이들의 집을 지어주는 데 사용하게 되면서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아이들의 집을 지어주고 나니, 막막했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집을 오픈하여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6년 동안 선교지에서 가정을 꾸리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왔다고 합니다. 고아로 자랐던 자신의Experiences을 바탕으로, 집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언제나 열려있는 가정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볶음밥을 팔면서 번 돈으로 미국, 멕시코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자고 먹으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요, 정말 헌신적인 삶입니다. 지금도 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계신가요?
지금도 위탁 센터, 대학생 기숙사 등에서 50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찬 규모인데, 어떻게 운영하고 계신가요? 워싱턴 한인교회의 후원과 현지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워싱턴 한인교회의 든든한 후원은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 역시 월급의 절반을 사역에 헌신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물질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으로 헌신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계산적인 마음으로는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자녀가 신발이 없고, 아이들의 치아 교정을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사역에 헌신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역하신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현지 동역자들과 함께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딸이 8살 때부터 새벽 기도를 함께하며 성장하여, 현재는 동역자로서 함께 사역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축복을 통해 현지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딸도 입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입양한 딸은 어떤 아이인가요?
13살에 입양한 딸은 16군데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어려운 상황에서 낳아 버려진 딸로, 위탁 센터에 맡겨졌지만, 위탁 가정이 파양을 선언하면서 친어머니에게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친어머니는 어려운 환경에서 술에 의존하며 살고 있었고, 딸을 제대로 양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입양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친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법적으로 입양 절차를 마무리하고 딸을 가족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아내분에게는 입양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고, 딸을 데려와서야 알렸다고 하는데요, 정말 놀라운 결단력입니다. 사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웃음)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딸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지금은 26살이 되었고, 잘 성장했다고 합니다. 입양 초기는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18세까지 아빠,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줌마,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요, 상처가 많은 아이였기에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18세 생일날, 딸에게 통장을 만들어주며 진심을 전했다고 합니다. 법적으로 딸이며, 재산의 절반을 물려줄 것이라고 약속하며 딸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딸은 그 진심에 감동하여 마음을 열고 가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딸은 18세 이후 비로소 마음을 열고 가족이 되었고, 지금은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로펌에 다니며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지만, 아빠의 사역을 돕기 위해 풀타임으로 사역에 헌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학생들을 돌보고 새벽 기도를 인도하는 등 헌신적인 사역을 펼치고 있다고 하는데요, 정말 자랑스러운 딸입니다. 선교사님 자녀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방문하실 때 친아버지를 만나 뵙는다고 들었습니다. 친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떻게 회복되었나요? 친아버지와의 관계는 7년 전 하나님을 만난 후부터 서서히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친아버지를 용서하기 어려웠지만, 교회 허락을 받고 손자, 손녀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뵙고 화해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려던 순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님에게 “네가 뭔데 아버지를 용서하느냐”라고 질문하셨다고 합니다.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의 교만함을 깨닫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50년 동안 아들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며 아버지께 효도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드렸다고 하는데요, 감동적인 화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쿨하게 “오케이, 콜!”이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웃음) 부산 여행도 함께 다녀오셨다고 하는데요,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말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은 정말 기적과 같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내일 멕시코로 돌아가신다고 하는데, 앞으로의 기도 제목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멕시코 사역과 앞으로의 비전에 대한 기도 제목을 나누어주셨습니다. 50명의 대학생들을 양육하는 사역은 쉽지 않지만, 믿음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하셨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 요청하셨습니다. 내년에 기독교 중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학교 설립을 위해 기도와 사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설립 허가를 받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교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학교 설립을 위해 기도와 재정적인 후원을 부탁하셨습니다. 선교사님과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건강을 챙기기 어렵지만,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하셨습니다. 선교사님의 건강은 정말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선교사님과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오늘 간증 어떠셨나요?
오늘 간증을 들으면서, 외로운 입양아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든든한 입양 부모로 성장한 선교사님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사님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만, 결국 하나님의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된 선교사님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정수 형제는 오늘 간증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은 정수 형제는 선교사님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로펌 변호사가 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계신 선교사님을 존경하며 응원하겠다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먼 곳에서 응원하겠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예일 자매는 오늘 간증을 통해 무엇을 느꼈나요? 예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아와 과부는 단순히 부모가 없는 사람, 남편이 없는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모든 소외된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역시 고아와 같은 존재이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품고 섬기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사님의 어린 시절Experiences은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해 선교사님을 더욱 강하게 만드시고, 고아와 같은 아이들을 섬기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았던 과거를 회개하고,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볶음밥을 볶으며 땀 흘리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땀방울 속에 과거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씻어내고, 깨끗한 영혼으로 거듭나 굶주린 영혼들을 먹이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선교사님을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모님을 원망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자신은 과연 부모님께 훌륭한 아들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는 솔직한 고백을 전했습니다. 앞으로도 멕시코에서 굶주린 영혼들을 먹이고 입히고 살리는 일에 더욱 크게 쓰임 받기를 응원하며,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