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마비 장애 극복, 차인홍 교수 미국 음대 성공 스토리
소아마비 딛고 미국 음대 교수 되다: 차인홍의 기적 실화
기적의 삶, 한국 장애인 최초 미국 음대 교수 차인홍 교수 이야기
오늘 우리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아온 특별한 손님, 차인홍 교수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볼 예정입니다. 소아마비라는 역경을 딛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기적과 같은 순간들을 경험하며 한국 장애인 최초로 미국 음대 교수가 되신 차인홍 교수님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함께 들어보시죠. 오하이오 라이트 주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차인홍 교수님,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놀랍게도 차에서 내리시는 속도가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시네요! 마치 카메라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인데요, 이렇게 직접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작년 대통령 취임식 때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셨던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취임식 총감독님께서 직접 연락을 주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시고, 한국에는 이렇게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 방문하시는 건가요?
여름 방학 기간이라 한국에 잠시 들어와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서의 여러 일정을 소화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첼로와 바이올린 연주 모두 능숙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첼로는 주로 앉아서 연주하고, 바이올린은 서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혹시 바이올린 연주 시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정말 날카로운 질문이시네요! 물론 솔리스트로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서는 서서 연주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더 자유롭고 유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단원이나 실내악 연주자의 경우, 앉아서 연주하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착 펄만 역시 소아마비로 평생 앉아서 연주했지만,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결국 실력이 있다면 장애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다만, 지휘를 할 때 휠체어를 타는 것은 분명히 제약이 있습니다.
악기 연주는 앉아서도 충분히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지만, 지휘는 온몸을 사용해야 하니까 훨씬 더 역동적이어야 할 텐데요. 지휘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이끌어야 하므로, 더욱 자유로운 몸놀림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지휘의 특성 때문에 휠체어를 탄 지휘자로서 느끼는 답답함과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악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바이올린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악기는 가격도 비싸고 배우기 쉽지 않은 악기라는 인식이 있는데, 혹시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셨는지 궁금합니다.
바이올린은 확실히 배우기 쉽지 않은 악기이고, 당시에는 부유한 집안 자녀가 아니면 배우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저 역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6남매 중 막내로,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형제, 자매들 중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9살 때 소아마비 재활 시설인 성세재활원에 맡겨지면서부터입니다. 가난한 형편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바이올린을 재활원에서 배우게 된 것이죠.
오프닝에서 말씀드렸듯이, 교수님께서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묘한 타이밍, 즉 기적을 경험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재활원에서 바이올린을 처음 접하게 된 이야기가 바로 그 기적의 시작이었을까요? 재활원에는 몇 살 때, 어떤 계기로 가게 되신 건가요?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소아마비는 당시 백신이 없던 무서운 바이러스였죠. 부모님께서 저를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9살 때 대전 성세재활원에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재활원에서의 생활은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이어졌습니다. 기적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제가 음악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소아마비라는 역경 때문에 재활원에 맡겨진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가정 형편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바이올린을 재활원에서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오히려 가장 화려한 악기인 바이올린을 접하게 된 것은 분명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재활원의 환경은 어떠했나요? 많이 열악했을 것 같습니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9살 어린 나이에 겪기 힘든 슬픔과 외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배고픔은 물론, 시설 운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9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고통이었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것 자체가 어린아이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텐데요. 계속 재활원에서 지내셨던 건가요?
네, 재활원에서 쭉 지냈습니다. 저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아홉 살 무렵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고생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재활원에 보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어머님께 떼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저는 떼쓰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방학 때 집에 왔다가 다시 재활원으로 돌아갈 때는, 안 가려고 울고불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성세재활원은 미션스쿨이었나요?
네, 재활원은 독지가이자 의사이셨던 장로님께서 사재를 털어 설립하신 곳입니다. 소아마비 아이들을 치료하고 교육하기 위한 시설이었죠. 아무래도 미션스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앙을 접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신앙을 '접했다'고 표현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션스쿨이었기에 성경 공부, 예배, 새벽 기도 등 종교적인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강압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설립자님의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재활원에서 접한 신앙 교육은, 제가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데 큰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의 재활원에서 고급 악기인 바이올린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기적과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던 걸까요? 제가 5학년 무렵이었을 겁니다. 당시 서울에서 강민자 선생님이라는 분이 대전으로 오셨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신 30대 초반의 선생님이셨는데, 재활원을 지나시다 불쌍한 아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봉사처럼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강민자 선생님의 헌신적인 봉사 덕분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재활원에는 변변한 오디오 시스템이나 스피커조차 없었습니다. 음악이라고는 라디오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는 환경에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접하게 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을 배우려면 악기가 있어야 하는데, 혹시 선생님께서 악기를 준비해 주셨나요? 아닙니다, 당시 재활원에도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다 어려웠던 것은 아니니까요.
바이올린 레슨을 받을 수 있었던 아이들은 주로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었습니다. 당시 바이올린 제일 싼 것이 5천 원 정도 했는데, 그 돈도 당시에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저처럼 가난한 집 아이들은 엄두도 못 냈죠. 처음에는 바이올린 레슨에 참여하지 못하고, 밖에서 소리만 듣고 있었는데, 6개월 정도 지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재활원에 오셨습니다. 그날따라 바이올린이 너무 배우고 싶어 어머니께 떼를 썼습니다. 어떻게 5천 원이 마련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 바이올린 살 돈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렇게 6개월 늦게 바이올린 레슨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 떼를 썼는지 신기합니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음악가의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바이올린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 어머니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이올린을 갖게 된 후에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악보대도 없이 방바닥에 악보를 놓고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강민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가 가장 소질이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약간의 재능도 있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 바이올린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방에서 바이올린 연습만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죠. 선생님께서도 저를 예뻐해 주시고,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실력이 점점 늘면서, 콩쿠르 같은 목표가 생겼을 것 같습니다. 네, 바이올린을 배운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충청남도 음악협회 콩쿠르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충청남도 음협 콩쿠르는 권위 있는 콩쿠르였습니다. 선생님의 추천이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선생님께서 나가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저에게 콩쿠르에 나가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선생님 말씀에 따라 콩쿠르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콩쿠르에 다른 아이들도 많이 참가했는데, 왜 저를 콩쿠르에 내보내냐는 항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제일 잘하는 애가 나가야지, 누가 나가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편견 없이, 실력만으로 저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강민자 선생님은 교수님께 정말 은인과 같은 존재이시네요.
강민자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99% 확신할 수 있습니다. 콩쿠르 이후, 바이올린을 계속 전공으로 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기셨나요? 확신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했습니다. 제가 바이올린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만 꼽아도 열 번은 족히 될 겁니다. 바이올린을 그만둬야 할 위기의 순간마다, 기적처럼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나타났습니다.
"너는 바이올린을 계속 해야 한다", "내가 너를 가르쳐주겠다"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신기하게도, 바이올린을 포기하려는 순간마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님께서 저를 음악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계획하신 은혜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을 계속 하신 거죠? 네, 물론입니다. 일본 유학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유학은 정확히 말하면 유학은 아닙니다.
강민자 선생님께 4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우고, 중학교 졸업할 나이가 되었을 때, 성세재활원과 일본 태양의 집이라는 장애인 시설 간의 교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에 연수를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16살 때, 바이올린 연주 실력과 똑똑함을 인정받아 5명의 연수단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1년간 기술 연수를 받았습니다. 처음 6개월은 목공소에서 일하며 월급도 받고 사회생활도 경험했습니다. 그 후 6개월은 인쇄소에서 재본 일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일본 연수 1년은 음악가의 길을 걷는 저에게는 아까운 시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1년 동안 바이올린을 전혀 만지지 못했으니, 바이올린을 그만둘 뻔한 첫 번째 위기였죠.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네,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바이올린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목공소나 인쇄소에 취직하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경험은 제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공장 생활을 하면서도, 휠체어 스포츠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휠체어 농구팀에서 활동하면서, 운동에 놀라운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일본 코치님들의 지도 아래, 휠체어 농구, 휠체어 달리기, 휠체어 장애물 경기 등 다양한 종목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놀랍게도, 휠체어 장애물 경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까지 획득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딸 정도로 운동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까 휠체어 타는 모습을 보고 놀라셨다고 하셨는데, 그때 보여드린 휠체어 기술은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의 실력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간증할 때,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버려지는 경험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일본에서 1년간 바이올린을 놓았던 시간은, 음악가로서 보면 낭비였을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귀한 경험들을 얻었습니다.
일본에서 선진 장애인 복지 시스템을 경험하고, 휠체어 스포츠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휠체어 장애물 경기 금메달리스트로서 얻은 휠체어 조작 능력은, 지금 지휘봉을 들고 무대를 오르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일본에서의 1년은 음악가 차인홍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의 기적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기적을 만들어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기적은 유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유학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학은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또 다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재활원에서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들과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베데스타 현악 4중주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똘똘 뭉쳐 연습에 매진했습니다.
3년 정도 현악 4중주단 활동을 했을 무렵, 서울대학교 교수님께서 저희 4중주단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주실 계획을 세워주셨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이야기네요! 혈연, 지연, 학연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오직 저희의 연주 실력만으로 유학을 제안하신 겁니다. 교수님께서는 저희 4중주단의 연주 테이프를 신시내티 대학교, 특히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인 라살 현악 4중주단에 소개해주셨습니다. 라살 현악 4중주단은 저희를 흔쾌히 받아주었고, 교수님께서는 현대그룹 아산재단에 지원을 받아 저희의 유학 비용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비행기 표 값부터 생활비까지, 모든 것을 지원해주셨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손을 잡고 이끌어주신 것 같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전공하신 건가요? 네, 현악 4중주단 활동과 함께 바이올린 전공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뉴욕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학업을 이어간 것이죠. 지휘는 언제부터 시작하신 건가요? 지휘는 박사 학위를 마친 후에 시작했습니다.
사실 박사 학위는 처음부터 목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자 연장을 위해 박사 과정에 등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휘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어차피 비자 연장 때문에 학위를 하는 김에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보기로 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지휘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휘가 악기 연주보다 쉬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악기 없이 몸만 있으면 되니까 준비물에 대한 부담도 적고요.
물론 지휘가 쉬운 분야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었고, 지휘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박사 학위 후에는 치과 기공사가 되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고려하셨던 건가요? 네, 박사 학위를 마치고 보니 현실적인 문제가 눈앞에 닥쳐왔습니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고, 비자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여러 번 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경쟁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미국 오케스트라 시장은 경쟁이 매우 치열했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좋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이올린 연주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치과 기공 기술자인 친구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치과 기공 기술을 배우면 영주권 문제도 해결하고, 안정적인 수입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과 기공 기술자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습니다.
치과 기공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있을 때, 지금 계시는 오하이오 라이트 주립대학교 교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타이밍이네요! 그 채용 공고를 본 순간, 하나님께서 또 다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수 채용 공고는 어떻게 보게 되신 건가요? 평소 교수 채용 사이트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는데, 우연히 그 사이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경제 호황기라 교수 채용 공고가 많이 올라왔습니다.
수많은 채용 공고 중에서, 오하이오 라이트 주립대학교 채용 공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교수라는 직업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미국 대학 교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어 실력도 부족하고, 미국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채용 공고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저에게 딱 맞는 조건이었습니다. 채용 공고에는 세 가지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바이올린 전공자, 둘째, 현악 4중주단 리더 경험자, 셋째, 지휘 가능자.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 겁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현악 4중주단 활동 경험, 바이올린 전공, 지휘 박사 학위까지. 이 채용 공고는 마치 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끌렸습니다.
교수 채용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경쟁률도 높았을 텐데요. 채용 공고를 보고 서류를 제출했는데, 당시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새벽기도는 재활원 시절부터 다녔지만, 그때처럼 간절하게 매달린 적은 없었습니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은 무겁고, 비자는 만료되어가고, 수입은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1년간 새벽기도를 꾸준히 다녔습니다. 새벽기도를 통해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교수 채용 공고를 보기 며칠 전, 아내와 교수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오케스트라 오디션 대신 교수 자리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습니다. 아내는 바이올린, 실내악, 지휘 세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정말 좋겠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정말로 그런 채용 공고가 나타난 것입니다. 혹시 사모님께서 미리 정보를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요? 아닙니다, 아내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못하고, 당시에는 인터넷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과 섭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새벽기도를 통해 간절히 기도했던 시간들, 아내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예언과 같은 이야기, 그리고 기적처럼 나타난 채용 공고까지. 제가 교수 자리에 합격할 확률은 1%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쟁률이 얼마나 높았나요? 83대 1의 경쟁률이었습니다. 83명 지원자 중 단 한 명을 뽑는 채용이었죠. 서류 심사부터 최종 면접까지 7개월이나 걸렸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합격 통보를 받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총장님이나 채용위원회 위원장님께서 교수님을 채용한 특별한 이유를 말씀해주셨나요? 한국 방송팀에서 저를 취재하러 왔을 때, 채용위원회 위원장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위원장님께서는 장애 때문에 특별히 배려한 것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오직 능력만을 보고 판단했으며, 제가 가장 뛰어난 지원자였기 때문에 채용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말씀이었습니다. 장애가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애는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스토리가 있는 사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선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되신 후,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교수 임용 소식이 알려지기 전까지, 장인어른, 장모님과의 관계는 어색했습니다. 저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제가 미국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이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LA에 계신 연합뉴스 기자님께서 한국 일간지에 제 기사를 크게 실어주셨습니다. 전국 일간지에 제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린 것을 장인어른께서 보신 겁니다. 며칠 후, 장인어른께서 미국에 오신다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딸을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저를 보러 오신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공항에서 장인어른을 만난 순간, 어색함은 사라지고 따뜻한 가족애를 느꼈습니다.
그 후로 10년 넘게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고,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한 번도 그때 왜 그랬냐, 잘했다,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공항에서 만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실 텐데요.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원로 목사님께서 저에게 "차 교수가 잘한 것 하나는, 오래 참고 기다린 것이다"라고 칭찬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삶은 좌절과 포기의 순간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절묘한 타이밍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며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도우시고, 약할 때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저는 삶으로 경험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저를 늘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기다림 끝에는 반드시 은혜와 축복이 있다는 것을 제 삶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어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더라도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결과가 따르고, 신앙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교수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교수님께서 못다 하신 이야기는 자서전 "휠체어는 나의 날개"에 자세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 해주신 차인홍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