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규 감독의 삶과 세 번의 임신, 성령 체험 그리고 북한 축구 감독 이야기
세 번의 임신, 삶을 뒤바꾼 성령 체험과 북한 축구 감독 꿈
세 번의 임신, 뼛속까지 스며든 불교에서 성령 체험, 그리고 북한 축구 감독까지: 이민규 감독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상세 정리
오늘, 여러분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특별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뼛속까지 불교 신자였던 한 남자가 세 번의 '임신'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북한 장애인 축구팀 감독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인데요.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인간의 깊은 고뇌와 종교적 깨달음, 그리고 숭고한 헌신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지금부터 이민규 감독의 놀라운 인생 여정을 텍스트 내용 그대로 상세히 정리하여,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임신: 죽음의 그림자와 소록도, 그리고 불교에서 성령으로의 극적인 전환
이민규 감독의 첫 번째 '임신'은 중학교 시절, 죽음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보여준 홍콩 영화 "영웅본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주인공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 깊이 몰입하며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사람은 왜 죽는가?" 라는 질문은 어린 이민규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그는 죽음의 의미를 찾기 위해 화장터를 방황하며 고뇌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장애인들을 접하며 또 다른 질문을 품게 됩니다. "나는 왜 건강하게 태어났을까?" 이 질문은 그를 소외된 이웃, 특히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소록도로 이끌었습니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불교적 세계관, 즉 '장애는 전생의 죄 때문'이라는 인과응보 사상에 갇혀 있었는데요.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직접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주인공 만적 스님이 소신공양으로 부처님께 헌신하는 모습에 감명받은 그는, '나도 한 목숨 바쳐 한 명에게라도 부처님을 전하면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소록도에서의 생활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불교를 전했지만, 오히려 소록도 주민들은 그에게 "예수 믿으면 행복할 텐데" 라며 복음을 전했는데요. 한센병과 맹인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이민규에게 큰 충격과 의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부처님을 전하러 왔는데, 왜 오히려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걸까?' 그는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들의 강한 믿음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마을에서조차 주민들이 그를 불쌍히 여기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모습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소록도에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화장터에서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우며 불교에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의문이 남아 있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좌선을 하던 중 그의 입에서 갑자기 염불 대신 낯선 찬송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는 혼란과 당혹감에 휩싸였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며 영적인 방황을 겪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를 불교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끌었고, 결국 기독교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는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네, 소명 받은 것 같네" 라며 성경을 건네주었는데요. 선생님의 권유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소리'만 들릴 뿐, 의미는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우면서도, 낮에는 꾸준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던 중, 요한복음을 읽던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이 자신이 믿어왔던 불교 교리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의 이 구절은 그에게 마치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마치 밥을 먹듯이 요한복음을 통째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밥에 비벼 먹고, 미역국에 말아 먹고, 심지어 비빔밥에까지 비벼 먹으며 요한복음을 탐독했는데요. 이러한 독특한 방식으로 말씀을 섭취한 결과, 놀랍게도 성경의 의미가 그의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고, 해석이 가능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는 그저 '글자'로만 느껴졌던 성경이, 이제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 속 모든 사건들이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함께, 그는 법당에서 염불을 하던 중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염불은 입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찬송만이 흘러나왔으며, 온 몸은 혼미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아, 이것이 성령이 임한 것이구나!' 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는데요. 뼛속까지 불교 신자였던 그가, 죽음의 그림자를 쫓아 소록도까지 갔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민규 감독의 첫 번째 '임신', 즉 불교에서 기독교로의 극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두 번째 임신: 선교사의 삶, 우즈베키스탄과 축구, 그리고 두 번의 추방
첫 번째 '임신'을 통해 성령을 체험한 이민규 감독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통해 두 번째 '임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질문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 사명을 주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던 그는, 예수님의 질문이 단순한 사랑 고백을 넘어, '나처럼 남을 사랑하라' 는 숭고한 사랑의 명령임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에게 '네 양을 먹이라' 하신 말씀은, 그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선교사의 사명으로 다가왔습니다.
신학대학에 진학한 그는, 당시 팽배했던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 속에서, 소련의 붕괴는 곧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고 믿었는데요. 하지만 1991년 소련이 실제로 붕괴하자, 그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 했는데, 왜 세상은 그대로인 거지?'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천국과 지옥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직접 경험한 그는, 더 이상 종말론적 기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련 붕괴 후, 그는 곧장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소외된 이웃, 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 고통받는 장애인들과 고려인들을 섬기기 시작했는데요. 우즈베키스탄에서 길거리 아이였던 고려인 3세 소년 '영광'을 만나 6개월 동안 함께 살며 한국어와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영광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는데, 묶어놓고 요한복음을 강제로 먹이거나, 군대 시절 교도소에서 배운 폭력적인 훈육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인권 문제로 비판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당시 그는 순수한 열정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했다고 회고합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그는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신혼여행도 소록도로 떠날 만큼 헌신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약사였던 아내는 9년간 운영하던 약국을 정리하고, 그의 선교 사역에 동참했는데요. 부부는 이슬람 땅에서 장애인들을 섬기며, 의료 봉사와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축구를 통해 장애인들과 소통하고 복음을 전하는 독특한 선교 방식을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축구 선수 생활을 했던 경험을 살려, 장애인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마음을 열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장애인 축구팀을 창단하고 열정적으로 지도한 결과, 놀랍게도 팀은 아시안게임 출전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역사상 최초의 장애인 아시안게임 출전이었고, 팀은 동메달까지 획득하며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열정적인 복음 전파 활동은 현지 당국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결국 '목사'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추방당하고 맙니다.
첫 번째 추방 후, 그는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기 위해 국경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추방까지 당하며, 절망감과 좌절감에 휩싸였는데요.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요? 이 모든 헌신이 헛된 것인가요?'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고 원망하며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특히, 자신이 쏟아부었던 모든 열정과 사랑을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두 번의 추방은 그에게 마치 '임신'했지만 '출산'하지 못하는 고통과 같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유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유서에는 자신이 죽으면 우즈베키스탄 장애인 축구팀 마당에 묻어달라는 내용을 담았는데요. 그만큼 우즈베키스탄과 장애인 축구팀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서를 쓰면서 그는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를 되찾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던 중, 그는 모든 별들이 마치 콩처럼 보이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콩'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주셨다고 그는 믿습니다. 두 번째 '임신'은 추방이라는 고난 속에서 '콩'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콩나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장애인 축구팀 감독과 콩나물 장수를 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는데요. 콩나물 장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장애인 축구팀을 지도하며 아시안게임 출전을 준비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 또 다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고, 선수 중 한 명이 성경책을 훔치는 사건을 통해 선수단 전체에게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임신'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선교 열정과, 새로운 방식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세 번째 임신: 북한 장애인 축구 감독,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통일의 꿈
세 번째 '임신'은 2012년, 북한에서 열린 세계 장애인의 날 행사에 초청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카자흐스탄 장애인 축구팀 감독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그는, 북한 장애인들의 열악한 현실을 목격하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얇은 옷을 입고 있는 장애인들의 모습은, 마치 소록도에서 처음 한센병 환자들을 만났을 때 느꼈던 아픔과 슬픔을 다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20년 넘게 중앙아시아에서 장애인들을 섬겨왔지만, 북한 장애인들의 고통은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평양에서 묵었던 호텔에서 그는 또 다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통일되고 싶으냐?" 라고 질문하셨는데요. 그는 "통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잘 모릅니다" 라고 솔직하게 답했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통일"을 이야기하며 그를 압박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된 병자처럼, 그 역시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콩나물 장사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극복한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도전을 망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그에게도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그에게 20년간 헌신했던 중앙아시아 사역을 내려놓고, 북한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새로운 부르심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소록도 법당에서 성령을 체험했던 순간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북한 장애인 축구팀 감독이라는 낯선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세 번째 '임신'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북한 장애인들을 향한 새로운 사명을 품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북한 장애인 축구팀 감독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여 설득하고, 유엔 장애인 권리 협약에 근거하여 장애인 인권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장애인 축구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경험을 어필하며, 북한 장애인들에게도 희망과 자존감을 심어줄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북한 장애인 축구팀 감독 계약을 맺고, 3년 계약으로 북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했습니다. 해외 전지훈련을 위해 호주와 브라질까지 데려가 훈련시키고, 아시안게임 출전을 목표로 땀 흘렸습니다. 하지만 2019년 홍콩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아시안게임이 갑작스럽게 취소되면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북한에 발이 묶이고, 현재는 남한에 머물면서 북한 장애인 축구팀과의 연결이 끊긴 상황입니다. 세 번째 '임신'은 아직 '출산'하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북한 장애인 축구팀을 향한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 목포에서 열리는 농아인 월드컵을 통해 북한 선수들과 재회하고, 함께 뛰는 날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북한 장애인 축구팀은 단순한 스포츠팀이 아니라,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입니다. 세 번의 '임신'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던 그는, 이제 북한 장애인 축구팀 감독으로서 네 번째 '출산', 즉 남북 화합과 통일이라는 숭고한 열매를 맺기 위해 묵묵히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민규 감독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선사합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쫓던 방황하는 청년에서,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헌신적인 선교사로, 그리고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끌어안는 북한 장애인 축구 감독으로 변화해온 그의 삶은, 진정한 '임신'은 고통과 희생을 동반하지만, 반드시 아름다운 '출산'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세 번의 '임신'을 통해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이민규 감독의 네 번째 '출산'을 우리 모두 함께 응원하며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