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에서 멕시코 빈민의 아버지로, 카일 윌슨 선교사 감동 스토리
## 멕시코 빈민의 아버지, 버려진 아이에서 희망을 찾다: 카일 윌슨 선교사
# 외로운 입양아에서 든든한 입양 부모로: 카일 윌슨 선교사의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오늘, 여러분께서는 단순한 간증을 넘어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카일 윌슨 선교사님의 인생 여정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게 될 것입니다. 과연, 외로운 입양아였던 그는 어떻게 수많은 아이들의 든든한 아버지가 되었을까요? 지금부터, 그 감동과 은혜가 넘치는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 버려진 아이, 미국으로 입양되다
카일 윌슨 선교사님의 어린 시절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출신 아버지와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불행히도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매우 심했는데요. 집안의 체면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결혼과 이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문의 중대사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선교사님은 고아라는 이름으로 미국으로 입양되게 됩니다.
여섯 살 무렵, 낯선 땅 미국에 발을 디딘 선교사님. 뉴욕 롱아일랜드의 넉넉한 가정에 입양되어, 일곱 남매와 함께 자라게 됩니다. 백인 부모님은, 사랑으로 일곱 아이들을 품어주셨습니다. 세 명의 백인 아이들과 네 명의 한국인 아이들은, 피부색은 달랐지만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양어머니의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갱년기로 인한 호르몬 변화는, 양어머니를 극심한 감정 기복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다정했던 어머니는, 순식간에 괴물처럼 변하여 아이들에게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가했습니다. 80년대 뉴욕은, 여성의 갱년기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했던 시기였습니다. 호르몬 문제를 정신 질환으로 오인하여,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거나 전기 충격 치료와 같은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양어머니는, 갱년기라는 고통 속에서 학대를 멈출 수 없었고, 가정은 점점 더 불행해져 갔습니다. 아버지 또한, 무서운 어머니를 피해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사춘기는, 선교사님에게 더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백인 가정에서 자라며 자신을 백인이라고 착각했던 그는, 댄스 파티에서 자신만 여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샤워 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정체성 혼란과 양어머니의 학대는, 선교사님을 방황으로 이끌었습니다. 학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는 최대한 늦게 들어가려 했으며, 심지어 가출까지 감행하게 됩니다.
80년대는, 가출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지금처럼 잘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힘든 시기를 겨우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친구 집과 선생님 댁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고, 공원에서 노숙하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배고픔에, 날씬한 아가씨들이 버린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는 비참한 경험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출과 방황을 반복하던 선교사님에게, 뜻밖의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한국에 계시던 친고모가, 미국으로 건너와 그를 찾은 것입니다. 친부모님은, 아픈 과거 때문에 아들을 찾을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고모는 조카를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수소문 끝에 선교사님을 찾아냈습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고모는, 넉넉한 경제력과 따뜻한 마음으로 선교사님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고모의 보살핌 덕분에, 선교사님은 안정을 되찾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은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습니다. 고모가 살던 버팔로는, 동양인이 거의 없는 백인 사회였습니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인종 차별을 경험하며, 심한 소외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칭크"라는 인종 비하 발언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해 싸움을 벌이면서,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듯, 점점 더 삐뚤어진 행동을 일삼았고, 학교와 집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결국,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를 결심합니다. 현실 도피와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그를 해병대로 이끈 것입니다.
## 해병대, 그리고 아버지와의 재회
해병대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선교사님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군 생활 중, 우연히 친아버지의 연락처를 알게 되어 꿈에 그리던 재회를 결심합니다. 한국에서 팀스피릿 훈련을 받던 중, 드디어 친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리워했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선교사님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습니다.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린 뿌리를 찾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선교사님은, 아버지와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서로에게 더 큰 상처만 남겼습니다. 미국에서 상상했던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실망감만 가득했습니다. 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한 선교사님은, 극심한 절망감에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릅니다. 수면제 180알과 맥주 12캔을 한꺼번에 삼키고 쓰러진 것입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빠른 대처로 목숨을 건졌지만, 마음에는 깊은 상처만 남았습니다.
자살 시도 후, 선교사님은 더욱 방황했습니다.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주말마다 술에 취해 싸움을 일삼았고,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운명적인 만남이 그를 찾아옵니다.
##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새로운 시작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된 선교사님. 첫 만남은,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촌스러운 아내의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진심과 헌신에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두 시간 거리를 왕복하며 데이트를 신청하는 정성에 감동했고, 점점 사랑에 빠져들었습니다.
결혼을 결심했지만, 과거의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혼식 당일, 술에 취해 결혼식에 30분이나 늦게 나타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결혼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하객들은 웅성거렸습니다. 주례를 맡은 목사님과 신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놀랍게도 남편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결혼은 시작부터 험난했지만, 두 사람은 사랑과 믿음으로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선교사님의 방황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술과 담배를 끊지 못했고, 교회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교인들을 꼬드겨 술을 마시는 등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였습니다. 장모님 앞에서 심한 욕설을 퍼붓고, 집 안의 물건을 부수는 난폭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고, 교회에서는 이혼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습니다. 결혼 1년 만에, 두 사람은 9일 동안의 별거 기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헤어짐을 눈앞에 둔 순간, 선교사님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네가 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선교사님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9일 간의 금식 기도 중이던 아내와 장모님을 찾아가 무릎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 며 눈물로 간청했고, 드디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내와 장모님의 기도와 사랑은, 길 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 멕시코 선교사,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을 만난 후, 선교사님의 삶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교회에 헌신하며 통역 봉사를 시작했고,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과거의 상처는, 오히려 사명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고아와 같이 외로운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멕시코 단기 선교를 통해 선교에 눈을 뜨게 됩니다. 오랜 고민과 기도 끝에, 멕시코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2009년, 아내와 갓 여섯 살이 된 아들과 함께 낯선 땅 멕시코로 떠난 선교사님. 후원 교회의 재정 지원이 끊긴 상황 속에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볶음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가난과 고난 속에서 힘겨운 선교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가정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했고, 현지인들과 사랑과 신뢰를 쌓아가며 선교의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집을 개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과 같이 상처 입은 아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집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열려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찾아오는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한 방에서 열 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물질은 부족했지만,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공동체 생활은, 아이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현재, 선교사님은 멕시코에서 50명의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위탁 센터와 35명의 대학생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은 아니지만, 워싱턴 한인교회의 후원과 현지 교회들의 협력으로 사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역에도 힘쓰고 있으며,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봉사 활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현지 동역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선교 사역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의 가정은, 단란한 4인 가족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아들, 딸)와 함께 멕시코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입양한 딸은 가슴으로 낳은 소중한 딸입니다. 16번이나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상처 투성이였던 딸은, 선교사님 가정의 사랑 속에서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선교 사역을 헌신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친아버지와의 관계 또한 회복되어, 지금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오히려 더 단단한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카일 윌슨 선교사님의 인생은, 고난과 역경, 기적과 감동으로 가득 찬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버려진 아이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그의 삶은 끊임없는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그 결과, 상처는 사랑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미움은 용서로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카일 윌슨 선교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전해줍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오늘 카일 윌슨 선교사님의 간증을 통해, 우리 모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는 귀한 시간이 되었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