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집사 광야를 지나며 간증, SM 데뷔 무산 후 찬양 사역자의 길
광야를 지나며' 김동욱, 고난 끝에 찾은 찬양의 길
[Hiswill Vocal🎤] '광야를 지나며' 주인공은 누구?! 히즈윌 보컬 김동욱 집사님의 감동적인 이야기
유튜브 영상 링크: https://youtube.com/watch?v=tYEGrjAc0FU
## #새롭게하소서 찬양의 시작, 그리고 특별한 만남
오늘, 여러분과 함께 정말 특별한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새롭게하소서 채널의 문을 여는 은혜로운 찬양, 바로 '광야를 지나며'로 시작을 알렸는데요, 이 찬양을 부르신 특별한 분을 오늘 초대했습니다. 피스 2렙 찬양팀의 간증 연주곡 '광야를 지나며'의 보컬리스트, 김동욱 집사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욱 집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따뜻하고 깊이 있는 목소리가 시작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데요, 첫인상부터 느껴지는 진정성이 정말 대단합니다. 많은 자매님들이 좋아하실 만한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셨어요. 원래 보컬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게 되니 더욱 멋있으시네요. 마치 외국인 뮤지션 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집니다. 일본의 유명 가수 히라이 켄과 닮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으신다고요.
김동욱 집사님: 아,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어 저희 새롭게하소서 채널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동욱 집사님에 대해 알아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국내 대표적인 기획사,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동방신기, 슈퍼주니어와 함께 연습생 동기였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운데요. 함께 꿈을 키우고 데뷔를 준비했던 시절이 있었다니,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김동욱 집사님: 네, 맞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 때 SM에 들어갔었는데요. 연습생 동기가 동방신기의 유노윤호, 최강창민 씨, 그리고 슈퍼주니어의 동해, 성민 형 등이었어요. 슈퍼주니어, 소녀시대와 함께 데뷔를 준비하며 SM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제가 속했던 팀은 배우 김지우 씨와 함께하는 5인조 아이돌 그룹이었어요. 만약 저희 팀이 먼저 데뷔했더라면,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보다 먼저 데뷔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인연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박진영 씨, JYP와 인연이 있을 뻔했습니다. 커피를 마시다가 캐스팅 제의를 받았었는데, 아쉽게도 이어지지는 못했죠. 당시 SM에서 거의 데뷔 직전까지 가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유로 데뷔가 무산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동욱 집사님: 사실, 제 실수 때문에 데뷔가 무산되었어요. 중간 오디션 때였는데, 춤과 노래 실력을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연기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그 연기 테스트가 데뷔를 결정짓는 정말 중요한 기회였죠. 하지만 제가 수없이 연습했던 대사를 잊어버린 거예요. 대사를 잊어버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더 충격적인 것은 안면 근육이 마비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오른쪽 얼굴 근육이 마비되면서 입을 열 수도, 다물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얼굴은 일그러진 채 굳어버리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경험이셨겠네요. 당시 경기대학교에서 연기 전공을 하셨고, 실제로 연극 무대에도 서셨다고 들었는데, 더욱 당황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김동욱 집사님: 네, 맞습니다. 연기를 전공했고, 무대 경험도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오디션을 위해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 10시간씩 연습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니 허탈함을 넘어 절망스러웠습니다. 당시 오디션 관계자들과 다른 연습생들도 충격적인 상황을 지켜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잘하던 친구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다들 당황한 분위기였죠.
상상만 해도 끔찍한 순간입니다. 그 일 이후에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 같은데요.
김동욱 집사님: 네, 맞습니다. 그 이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무대 공포증과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극심해졌죠. 그때부터 무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오디션장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사대문 안 연극영화과 학생이라는 자부심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엄청난 두려움과 실패감이 저를 덮쳤습니다. 더 이상 데뷔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SM을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결정이었네요. SM 측에서는 만류하지 않았나요?
김동욱 집사님: 놀랍게도 이수만 사장님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붙잡는 스타일이 아니신데, 이사님을 통해 제 의사를 다시 물어보셨다고 해요. 계획안에 아직 제가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사했지만, 당시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실패자로 볼까 봐, 또 데뷔 후 무대에서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SM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안타깝고 억울했을까요? 이야기만 들어도 정말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집니다. 데뷔를 바로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어쩌다 본인이 먼저 나가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한 번 더 기회를 잡고, 이를 악물고 한두 달 안에 실력을 보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때는 너무나 어렸던 것 같습니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회 경험도 부족했고, 깊이 생각하는 힘도 부족했던 거죠. 만약 지금처럼 성숙했다면 주변 선배들이나 어른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텐데, 당시에는 그럴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아요. 그저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고, 자존심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을 겁니다.
김동욱 집사님: 네,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너무 어렸고, 어리석었던 결정이었죠.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했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후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함께 연습했던 동기들이 동방신기, 슈퍼주니어로 데뷔해 큰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박탈감도 느끼셨을 테고요.
김동욱 집사님: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꿈을 한순간에 잃어버렸다는 공허함이었어요. 고등학교 3년 동안, 일산 마두동 지하 숙소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데뷔를 준비했는데, 알 수 없는 실수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허무함이 컸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실패는 족쇄처럼 저를 옭아맸습니다. 10년 넘게 그 트라우마가 저를 따라다녔죠. 마음속 깊은 곳에 억울함과 실패에 대한 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SM을 나와 바로 군대에 입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군 생활은 어떠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네, SM을 나오고 바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 생활 중에도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요, 특히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습니다. 저녁 점호 시간, 고참이 침상 정리를 시키지 않고 침상 사이 복도를 닦으라고 했습니다. 웬 횡재냐 싶었죠. 무릎 꿇고 편하게 청소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복도를 닦고 있는데, 갑자기 TV에서 동방신기 데뷔 무대가 나오는 거예요. '허그'를 부르는 동방신기 멤버들의 모습이 화면에 꽉 찼습니다.
정말 묘한 기분이 드셨겠네요.
김동욱 집사님: 마대자루를 놓쳐버렸습니다. 멍하니 TV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봤죠. 너무 충격을 받아서 넋을 잃고 있었는데, 고참들이 머리를 툭툭 치면서 "이등병 정신 안 차려? 편하게 청소하라고 마대 줬더니 딴짓하고 있어!"라며 야단을 쳤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오직 TV 화면 속 동방신기 모습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2~3분 동안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어요. 동생들의 빛나는 모습과 초라한 제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과거 연습생 시절 추억과 함께 씁쓸함이 밀려왔습니다. 저 친구들은 꿈을 이뤄 승승장구하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죠.
그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 것 같습니다.
김동욱 집사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야외 화장실에서 엉엉 울면서 하소연했어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저는 왜 이렇게 초라하고 불쌍합니까?"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소리 내어 울었는데, 하필 그때 직속 선임이 화장실에 있었던 거예요. 선임이 깜짝 놀라 "누구냐!" 하고 소리쳤고, 저는 더 놀라 엉겁결에 "접니다!" 하고 대답했죠. 그때 연예병사 특혜 논란 때문에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시기라, 저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선임은 의외로 저를 위로해줬습니다. "동욱아, 괜찮아. 남자답게 울지 마."라며 다독여줬어요. 선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엉엉 울면서 넋두리를 쏟아냈습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위로였네요. 선임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풀렸을 것 같습니다.
김동욱 집사님: 네, 선임의 위로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동기들과 저를 비교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얼마 전 동창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만약 그때 포기하지 않고 버텼더라면, 우리도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처럼 성공했을 수 있었을까?"라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씁쓸하지만,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네요.
찬양 사역에 대한 비전이 원래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노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동욱 집사님: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할머니는 눈물의 권사님이셨고, 어머니도 새벽마다 저를 위해 기도하시는 권사님이십니다. 어머니 허현희 권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의 새벽 기도 덕분에 신앙의 유산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함께 기도원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비전을 놓고 기도하던 중 갑자기 회개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눈물 콧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늘에서 제 몸보다 더 큰 밝은 불이 쏟아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었죠.
정말 강렬한 체험이었네요.
김동욱 집사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순간,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고개가 하늘로 들려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방언이 터져 나오고, 입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음표와 악상 기호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환상도 보았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제 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멜로디가 언어로 바뀌면서 제게 쏟아지는 거예요. 'ㄱ, ㄴ, ㄷ, ㄹ, ㅁ, ㅂ, ㅅ' 쏟아지는 글자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찬양 사역자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멜로디를 하늘로 향해 불렀으니 노래하는 사람은 맞는데, 성령 체험을 통해 찬양 사역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멜로디가 언어로 바뀌어 땅으로 쏟아지는 환상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찬양 사역자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SM에서 데뷔가 무산되었지만,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이었네요.
김동욱 집사님: 네,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음악적 재능이 부족했습니다. 오히려 공부를 잘해서 인문계로 진로를 정하려 했는데, 찬양 사역 서원을 하면서 음악의 길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어머니께 찬양 사역자가 되겠다고 말씀드리고, 음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졸랐습니다. 당시 찬양 사역자가 되는 구체적인 방법은 몰랐지만, 가수가 되면 찬양 사역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어머니께서는 여의도 MBC 아카데미에 등록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SM까지 가게 된 것이죠. 기도 덕분에 음악의 길로 인도받게 된 셈입니다.
음악을 시작하면서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가정 환경에 어려움도 있으셨다고 들었는데요.
김동욱 집사님: 네, 찬양 사역과 대중음악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SM에서 화려한 세계를 경험하니, 굳이 찬양 사역을 바로 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수로 성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남았던 거죠. 군 제대 후에도 주변에서 다시 데뷔를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러던 중 경기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복학했는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트라우마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대학교 스튜디오 수업에서 SM 오디션 때 겪었던 안면 마비 증상이 재발한 거예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봐 두려웠고, 결국 2달 만에 자퇴를 했습니다. 힘들게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나올 때는 너무나 쉬웠습니다.
두 번째 좌절을 겪으신 거네요.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떠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저희 가정은 화목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적이셨고,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혼은 당사자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기는 아픔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26살 때, 부모님 이혼이 확정되고 아버지께서 짐을 싸서 집을 나가시던 날이 기억납니다. 몹시 추운 날씨였는데,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아빠 어디 가'라고 불렀지만,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들어가"라고 짧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처음 본 아버지의 뒷모습은 너무나 작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혼 후 힘든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27년 동안 다녔던 교회가 저희 가족에게는 전부였습니다. 부모님 모두 교회에서 중책을 맡으셨고, 교회는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이혼 후 교회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첫 주에는 아버지, 그다음 주에는 어머니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교인들은 부모님의 부재를 눈치채고 제게 "두 분 어디 가셨냐"고 물어봤지만, 차마 이혼 사실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부모님 이혼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큰 집에서 셋이 살다가 단칸방으로 이사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PC방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겹쳤네요.
김동욱 집사님: PC방 야간 아르바이트는 쉽지 않았습니다. 밤새 담배 연기 속에서 일하고, 몸에 밴 담배 냄새를 지우지 못한 채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성가대 가운을 입고 찬양하는데, 뒤에 앉은 성도님이 제 몸에서 나는 담배 냄새를 맡으신 거예요. 예배 후 저를 불러 "가정도 저렇게 됐는데, 요즘 하는 짓이 왜 그러냐"며 비난했습니다. 교회에서 위로받고 싶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정죄뿐이었습니다. 사랑했던 교회에 실망했고, 깊이 실망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나면서 하나님과 완전히 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졌지만,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김동욱 집사님: 네, 교회를 떠난 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제 안에 신앙과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평소 교회는 열심히 다녔지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제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과거 성령 체험, 방언, 환상 등 신앙적인 경험들은 순간적인 사건일 뿐, 예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신앙이었던 거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자 본성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기도도 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에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윤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을 살았던 거죠.
힘든 시간을 보내셨네요. 어떻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멍하니 앉아있거나, 딴생각만 했습니다. 이상한 습관도 생겼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새벽까지 밖을 배회하는 거예요. 불면증인지, 불안감인지, 밤만 되면 밖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누가 저를 찾아올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죠.
정처 없이 걷다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김동욱 집사님: 어느 날 밤, 정처 없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밤 10시에 집을 나서서 새벽까지 넋 놓고 걸었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목적지 없이 6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인천 부평역 번화가에 서 있더라고요. 네온사인 불빛이 번쩍이고, 술 취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시끄러운 거리 한복판에 혼자 서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에 취한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행복할까? 걱정 없이 사는 걸까?' 질투심과 함께 깊은 외로움과 지침이 밀려왔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거리 벤치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습니다.
거리에서 잠이 드셨다니, 정말 힘든 상황이었네요.
김동욱 집사님: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떠보니 새벽 6시쯤 되었더라고요. 겨울 새벽,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발길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향했습니다. 길을 걷다 보니 작은 교회가 눈에 들어왔는데, 어둠 속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는 작은 창문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빛이 마치 저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홀린 듯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교회 문을 열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 주님께서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밤새도록 추위에 떨었던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듯했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구나' 하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교회 뒷자리에 앉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극적인 재회였네요.
김동욱 집사님: 기도하는데, 그때가 마침 주일 새벽 예배 시간이었어요. 새벽 예배를 드리는 권사님, 장로님들이 계셨는데, 꾀죄죄한 모습으로 교회에 들어와 엎드려 기도하는 저를 안쓰럽게 쳐다보셨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 품이 너무 좋습니다. 다시 한번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기도 중에 갑자기 유학에 대한 마음이 강렬하게 밀려왔습니다. 10년 전 환상 속에서 보았던 멜로디, 언어, 찬양 사역자의 비전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음악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클리 음대 유학은 제 인생의 마지막 관문이자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유학을 준비했지만, 미국 유학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훈련시키고, 인내하게 하시고, 소망을 품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유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버클리 음대 유학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요.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버클리 음대는 제게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유학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죠. 버클리 음대 장학금을 받으려면 재즈 화성을 잘해야 했는데, 재즈 화성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좋아하는 재즈곡을 통째로 카피하기로 했습니다. 피아노 전공이 아니었지만,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피아노 연습도 병행했습니다. 1년 동안 한 곡만 집중적으로 연습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 이야기를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 험난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는 여정을 묵상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세처럼 저도 광야를 지나 가나안, 즉 버클리 음대 합격이라는 꿈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하신 만큼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오디션 당일 에피소드가 궁금하네요.
김동욱 집사님: 드디어 오디션 당일, 대학로에 있는 예술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혜화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또 실수하면 어떡하지?' 1년 동안 칼을 갈며 준비했지만, 막상 시험을 앞두니 자신감이 흔들렸습니다. 믿음과 불안함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끝에서 뿌연 먼지가 바람처럼 제게 쏟아져 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먼지 속에서 사람 발목이 보이는 거예요. 모세의 발이었습니다. 샌들을 신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세의 발, 그리고 그 옆에는 광야를 헤쳐 나가는 군중들의 발, 애굽 군인들의 발, 말발굽 소리까지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환상 속에서 광야의 모습이 펼쳐진 것이죠.
정말 신기한 경험이네요. 그 환상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환상 속에서 다양한 발자국들을 보면서, 광야를 걸었던 수많은 발자국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걸었던 그의 발걸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버클리 음대 합격에 대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시험을 보기도 전에 이미 합격했다는 확신, 100% 합격이라는 강렬한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오디션에 임하셨군요. 실제 오디션은 어떠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오디션장에 들어갔습니다. 교수님들 앞에서 준비한 곡을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피아노 앞에 섰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연습했던 키보드와 달리 그랜드 피아노 건반이 너무 무거웠던 거예요. 순간 당황했지만,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는 순간 등 뒤에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제 어깨에 손을 얹어 주는 듯한 느낌,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손을 잡아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첫 음을 치는 순간, 무겁게 느껴졌던 건반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그때부터 막힘없이 연주와 노래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 솔로, 보컬, 재즈 즉흥 연주까지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오디션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됐다!'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정말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네요. 오디션 결과는 어땠나요?
김동욱 집사님: 오디션 후 교수님께서 제게 질문하셨습니다. "버클리에 왜 오고 싶어 하느냐?" 저는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찬양 사역자가 되기 위해, 찬양 사역을 공부하고 싶어서 왔다." 교수님께서 찬양 한 곡 불러보라고 하셨습니다. 자작곡 찬양을 불렀는데, 찬양을 듣고 바로 장학금 합격을 통보해주셨습니다. 기적적으로 버클리 음대 장학생으로 합격하게 된 것이죠.
정말 놀라운 결과입니다! 유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 걱정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김동욱 집사님: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 여름 학기 시작이었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왔지만, 한국에서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왔구나. 앞으로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겠구나.' 직감했습니다. 단순히 음악적 스킬을 배우고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라, 훈련받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요, 특히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미국 유학은 현실적인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첫 학기 등록금과 세 달치 방값, 총 1800달러를 들고 갔는데, 공항에서 방값을 잃어버렸습니다. 수중에 남은 돈은 300달러, 막막했습니다. 다행히 현지 교회 커뮤니티 도움으로 목사님 댁에서 보름 동안 머물 수 있었습니다. 보름 안에 집과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께서 교회 찬양 인도 아르바이트를 제안해주셔서 교회에서 지내며 찬양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찬양 사역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셨군요. 그래도 여전히 부족했을 것 같은데요.
김동욱 집사님: 생활비는 늘 부족했습니다. 보컬 전공이라 영양 섭취가 중요했지만, 하루에 던킨도너츠 하나로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습니다. 3년 동안 던킨도너츠를 천 개는 넘게 먹었을 거예요. 교회와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차비가 없어 걸어 다녔습니다. 왕복 5시간 거리, 차비가 없을 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가야 저녁 기도 후 목사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갈 수 있었거든요. 워커 밑창이 3개월 만에 닳아 구멍이 날 정도로 걸어 다녔습니다. 가방끈이 끊어지고, 신발이 닳고, 고생스러운 유학 생활이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습니다.
고생스러운 유학 생활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네요.
김동욱 집사님: 네, 맞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영적으로는 풍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이사짐 나르는 일, 부잣집 강아지 목욕시키는 일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강아지보다 못한 신세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항에서부터 훈련받을 것을 예상하고 왔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 같은 시간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했지만, 하나님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맺어졌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광야의 길,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 길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거리가 예배당이었고, 걷는 발걸음이 기도였습니다. 힘든 삶 속에서도 행복했던 이유는, 주님만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지셨군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어느 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묵상했습니다. 웅장한 산, 푸른 나무, 지저귀는 새들을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도 지으셨구나.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마음속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너를 만들었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따뜻한 음성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날은 1년 동안 홀로 예배를 드렸던 날이었습니다. 집, 학교, 교회 어디든 혼자 예배드릴 공간을 찾아 피아노나 기타를 치며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지는 기도가 하늘에 닿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까?' 의문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예배는 달랐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제 찬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 예배 중에 성령의 불이 임하는 듯했습니다.
성령 체험을 통해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셨군요.
김동욱 집사님: 네, 예배를 통해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제 안에 깊숙이 박혀있던 인생의 가시, 상처들이 녹아내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동안 실패와 좌절에 갇혀 어둠 속에서 헤매었지만, 이제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가족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신기하게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학비가 기적처럼 채워지고, 마지막 학기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상처가 치유되니, 이후의 모든 과정이 쉬워졌습니다. 졸업을 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가도 괜찮다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학기 등록금이 기적적으로 채워졌다는 이야기가 감동적인데요. 자세히 들려주시겠어요?
김동욱 집사님: 마지막 학기,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등록 마감 3일 전,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도, 교회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쳐야겠다는 생각에 재정 담당관을 찾아갔습니다. 높은 분이라 쉽게 만날 수 없었지만, 로비에서 흑인 여성 직원 3분을 만났습니다. 가장 친절해 보이는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3일 뒤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학비가 없어 졸업을 못 하게 생겼다. 파트타임이라도 할 수 있는지, 장학금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습니다. "방법이 없다, 돌아가라"는 차가운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실망한 채 돌아서는데, 뒤에서 빛이 쏟아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또다시 환상을 보셨네요! 이번에는 어떤 환상이었나요?
김동욱 집사님: 빛이 제 옆으로 인도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빛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보였습니다. 문틈 사이로 흰 셔츠를 입은 남자분이 업무를 보는 모습이 보였는데, 왠지 모르게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남자분은 제게 "네 이야기를 다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다시 설명했더니, 제 이름을 묻고 컴퓨터를 켜서 제 정보를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제 학비 잔액을 '0'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마이너스 잔액을 플러스로 바꿔주시고 엔터를 치신 거예요. 그분이 바로 버클리 음대 장학금 담당 책임자였습니다. 기적적으로 학비 문제가 해결된 것이죠.
정말 믿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그분께 감사를 표했나요?
김동욱 집사님: 감사 인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뛰쳐나왔습니다.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8층 사무실에서 로비까지 뛰어 내려왔습니다.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할렐루야!'를 외치고, 기도하고, 울고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마치 아빠 같은 분이십니다. 아빠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잘 아시고, 구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제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신 것이죠. 그렇게 기적적으로 학비 문제를 해결하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만났던 장학금 담당 책임자분은 마치 예수님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성함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네요. 마이너스 인생을 플러스 인생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의 은혜, 감동적입니다.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서 예상했던 대로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왔지만, 예상했던 길과는 달랐습니다. 교수가 꿈이었어요. 찬양 사역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중, 버클리 음대 졸업장이 수료증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점 인정 문제로 졸업 학점을 채우지 못했던 거예요. 졸업이 아닌 수료라니,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대학원 진학에도 차질이 생기고, 교수 임용은 꿈도 꿀 수 없게 된 거죠. 3개월 안에 미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자가 만료되는 상황, 다시 미국에 가서 졸업장을 받아와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또다시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했네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좌절감과 실망감에 휩싸였지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왜 이런 결과가 주어졌을까? 억울하고 속상했습니다. 저를 응원하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뜻밖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졸업장을 내려놓으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미국에 돌아가지 말고, 수료증으로 만족하고, 한국에서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걸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뜻밖의 결정이네요. 쉽지 않았을 텐데요.
김동욱 집사님: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일주일 동안 기도하며 씨름했습니다. 졸업장을 포기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학위를 내려놓고, 오직 찬양 사역에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것이, 한국에서 찬양 사역을 시작하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었네요. 그 후 찬양 사역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미국에서 돌아와 찬양 사역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막막했습니다. 뚜렷한 계획도, 인맥도, 수입도 없는 상황, 집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른두 살, 적지 않은 나이에 막막함과 불안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 소개로 작곡가를 만났습니다. 작곡가 장지서 PD님이었는데, 쌀국수 집에서 편안하게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별 기대 없이 만났는데, PD님께서 제게 '광야를 지나며' 라는 곡을 불러줄 수 있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곡 제목을 듣는 순간, 운명처럼 이끌렸습니다. '이 곡은 꼭 불러야 한다!'는 강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곡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광야를 지나며'는 김동욱 집사님의 인생곡이 되었네요.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이 어떠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악보와 가사를 메일로 받았는데, 가사가 제 이야기 같았습니다. 광야를 지나온 제 삶,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 모든 것이 가사 속에 녹아있는 듯했습니다. '이 곡은 꼭 불러야 한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렇게 '광야를 지나며'는 제 인생곡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광야를 지나며' 찬양을 직접 불러주시겠어요?
김동욱 집사님: 네, 그럼요. '광야를 지나며' 찬양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김동욱 집사님, '광야를 지나며' 찬양)
정말 가슴을 울리는 찬양입니다. 광야에서 눈물로 부르짖었던 기도,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 모든 감정이 찬양 속에 녹아있는 듯합니다. 본인의 경험을 담아 찬양하니, 듣는 이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힘든 시간을 보내셨는데, 이제는 아픔이 회복되셨나요?
김동욱 집사님: 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아픔이 회복되었습니다. 과거 SM에서의 실패, 버클리 유학 생활의 고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빚어가시는 과정이었던 거죠. 얼마 전 '나 혼자 산다'에 출연했던 동방신기 민호 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과거 SM 연습생 시절 이야기를 웃으면서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픔이 아닌, 추억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교수 사역의 길도 열어주셔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실수와 실패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회복시키시고, 사용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붙잡고 살아갈 때, 어떤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고쳐 쓰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간증하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비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동욱 집사님: 묵묵하게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제 목소리가 닿는 곳 어디든, 주님이 부르시는 곳 어디든 달려가 찬양하고 싶습니다. 한 명이라도 있는 오지, 많은 사람이 모인 무대,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어디든 가서 찬양하는 찬양 사역자가 되고 싶습니다. 광야를 지나며 만난 하나님, 그 사랑을 노래하며, 광야를 걷는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귀한 비전입니다. 오늘 귀한 간증 나눠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김동욱 집사님: 이 찬양은 제가 제작년에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서 발표한 솔로 앨범 타이틀곡입니다. '금을 만드는 시간' 이라는 곡인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색깔 없던 제 인생을 금빛으로 만들어주셨다는 고백을 담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연단되어 정금같이 나아가는 인생, 찬양으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김동욱 집사님, '금을 만드는 시간' 찬양)
오늘 김동욱 집사님과 함께 '광야를 지나며' 찬양에 담긴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고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 그 은혜와 사랑을 간증해주신 김동욱 집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광야를 지나는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신 김동욱 집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찬양 사역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동욱 집사님: 감사합니다.
(마무리 인사 및 찬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