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공동체 이재영 장로, 상처 입은 영혼의 쉘터 이야기
상처 입은 영혼들의 안식처, 오두막 공동체의 따뜻한 동행
“상처 입은 자들과 일구는 복음의 공동체 1부”: 오두막 공동체 이재영 장로, 새롭게하소서 심층 해설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께서는 특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접하게 되실 겁니다. 저는 새롭게하소서의 김학중 목사입니다. 옆에는 전혜진 님도 함께 자리했습니다. 흔히들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을 하는데요, 이는 친구 관계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 가치관, 철학, 심지어 성품까지 엿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저희가 모신 특별한 분은, 놀랍게도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시다고 합니다. 단순한 친구를 넘어 가족, 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생활하며,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 계신 분입니다. 과연 어떤 분일까요? 지금 바로 경남 합천에 위치한 오두막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그 주인공을 만나보시겠습니다.
경남 합천, 이곳에는 사회가 외면하는 사람들이 모여 ‘오두막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를 따뜻한 사랑으로 섬기는 분은 바로 이재영 대표입니다. 출판사를 운영하며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던 그는, 전국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책을 보내며 전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진심이 담긴 책을 받은 출소자들이 감동하여 하나 둘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오두막 공동체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용서와 화해를 배우는 공동체, 오두막 공동체 이재영 대표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들어보시죠.
[음악]
오두막 공동체의 이재영 장로님, 귀한 시간을 내어 저희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TV에 출연하신 소감이 어떠신지, 시청자분들께 따뜻한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경남 합천군 백면에 위치한 오두막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 이재영 장로입니다. ‘합천’ 하면 낯설게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더군다나 ‘오두막 공동체’라고 하면 ‘정말 오두막을 짓고 사는 걸까?’ 하고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오두막이라는 이름은 거창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작고 친근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 지었습니다. 또한, 오두막을 영어로 번역하면 ‘쉘터(shelter)’라는 단어가 가능한데, ‘피난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작은 피난처, 상처 입은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오두막 공동체’라고 이름 짓게 되었습니다.
현재 오두막 공동체에는 35명 정도의 식구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출소자와 알코올 중독자가 약 30%,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30%, 그리고 정신적으로 힘든 부모님들을 따라 함께 온 가족들이 나머지 40%를 차지합니다. 정말 다양한 배경과 사연을 가진 분들이 서로 섞여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음악]
장로님, 오두막 공동체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공동체를 설립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셨던 건지, 아니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건지, 그 시작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시겠습니까?
글쎄요,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83년, 제가 30대 초반이었을 무렵,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예배를 드렸는데, 마태복음 5장을 묵상하던 중 예수님의 질문이 제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47, paraphrased)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과연 남들과 다른 어떤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원수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적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고민 끝에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책을 만들어 교도소에 보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월간지를 제작하여 교도소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검열이 엄격해서 정식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교도소에 책을 보내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1983년 당시, 저는 월간지를 만들어 교도소에 보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으니,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고 스스로 자평했던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들이 책에 적힌 주소를 보고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당시 저는 그들을 도울 만한 경제적, 사회적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책에는 온갖 좋은 말들을 써놓고, 정작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이 과연 책의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그들을 돕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두막 공동체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출소자들은 사회적으로 쉽게 환영받지 못하는 분들이고, 오갈 데 없는 분들도 많을 텐데요. 새로운 시작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 오두막 공동체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처음에는 공동체라기보다는, 단순히 출소자들을 돕는 차원에서 시작했습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학교 입학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취업 준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돈만 낭비하고 사라지거나, 술을 마시고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서 후원금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가 90%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단순한 물질적 지원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으로 도와주는 방식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직접 제공하고, 함께 생활하며 삶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살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판사 근처 달동네에 방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다섯 칸, 나중에는 열 칸까지 늘렸습니다. 방은 잠만 자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식사는 사무실에서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함께 모여 살면서 공동체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처음 공동체를 시작했을 때, 몇 분이나 함께 하셨나요?
처음에는 대여섯 명 정도였는데, 금세 20명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정말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단순히 도움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외부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당시 공동체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했던 ‘사고’는 어떤 종류였나요?
가장 흔했던 문제는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출소자들끼리 모아놓으니, 마치 교도소 축소판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서열을 정하려고 하고, 형님 동생 관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서열 싸움 때문에 코피가 터지는 일도 잦았고, 심지어 보복 폭행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물건을 던져 부수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119 앰뷸런스가 쉴 새 없이 드나들 정도였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출소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사회적 편견도 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시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출소자들이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도와주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해를 끼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서로 경쟁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너무나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무면허 의사가 함부로 수술하는 것처럼, 우리는 좋은 마음으로 돕는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부족함 때문에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계속 발생했고, 우리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이대로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 부족, 경험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1년도 버티기 힘든 일을, 장로님께서는 3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이어오셨습니다. 젊은 청년의 꿈을 가지고 시작하셨지만,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많았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해준 특별한 경험이나 기억이 있으신가요?
물론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열 번 중에 아홉 번은 실패하더라도, 단 한 번의 성공, 단 한 명의 변화된 모습이 큰 보람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특히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목사가 된 분들이 세 분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과거에 술과 방탕한 생활로 몸을 망가뜨렸었지만, 회개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헌신적으로 목회 활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들을 통해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합천으로 공동체를 이전하면서, ‘이것은 정말 내가 해야 할 사역인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그러던 중 독일의 바시스 공동체(Basiss Community)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우연히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바시스 공동체 관계자들은 자신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서, 똑같은 문제(출소자, 알코올 중독자 등)를 가진 사람들만 모아놓는 것은 진정한 삶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고 조언했습니다. 원래 사람이 살아가는 공동체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자와 여자가 적절히 섞여 있어야 하고, 다양한 문제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야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남자들만 있고, 비슷한 문제만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균형 잡힌 공동체가 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한 분 한 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우리가 특별히 홍보하거나 알리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서 지금과 같은 다양한 구성원을 가진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역’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삶의 방식을 터득했을 뿐입니다. 그들을 억지로 변화시키거나 특정한 모습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알코올 중독자나 출소자들이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을 돕기도 하고,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대한적인 역할을 하면서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연약한 노인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소위 ‘무료 병원’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무료 병원 사역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무료 병원은 공동체 시작보다 훨씬 이전, 1984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의료 보험 제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장기려 박사님의 청십자 보험 정도만 있었지만, 혜택을 받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양로원 전도 활동을 하면서 충격적인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중병에 걸린 노인들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방 한쪽에 모아놓고 방치하다시피 하는 양로원이 많았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이분들을 살려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출소자 가족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출소자들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설립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가 1984년이라고 하셨으니, 공동체 시작 직후에 무료 병원을 시작하신 거군요. 재정적으로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출소자 공동체 운영과 무료 병원 운영을 동시에 하려면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을 텐데, 재정적인 준비가 충분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지는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굶어 죽게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힘들었지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을 통해 채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후원이 줄어들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심화되면서 결국 1년 6개월 만에 무료 병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월간지 ‘에바다’도 재정난으로 폐간되었고, 무료 진료소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무료 병원과 월간지 발행을 동시에 운영하려면 정말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사재를 많이 털어 넣으셨을 것 같습니다.
네, 처음에는 후원금과 개인적으로 모아둔 돈, 심지어 집까지 팔아서 운영했습니다. 집 두 채를 팔았는데, 나중에는 더 이상 댈 돈이 없어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아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우리 가족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했습니다. 아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역을 잠시 축소하고, 돈을 벌어서 다시 사역을 확대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사업이 바로 ‘학원 급식 사업’이었습니다.
아내분께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하셨을 정도면, 정말 힘든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 두 채를 팔 정도면 원래 부유하셨던 것 같은데요. 한 채도 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두 채나 되는 집을 모두 팔아서 사역에 헌신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내분께서 ‘이혼’까지 언급하셨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사모님의 말씀대로 사역을 잠시 내려놓으셨을 때, 마음은 편안하셨나요?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죠. 하지만 돈을 벌어서 빨리 다시 사역을 재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업에 매진했습니다. 3년 정도만 사업에 집중하면 다시 사역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사업은 순조롭게 풀렸습니다.
사역을 중단하시고 시작하신 사업이 급식 사업이라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이었습니까?
학교 급식이 막 시작되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학교 급식과 병원 급식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꽤 잘 되셨나 봅니다.
네, 직원이 50명 정도 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꽤 성공적인 사업이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벌어서 사역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주신 소명은 ‘돈 없이, 맨손으로 사역하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신뢰하던 분이 와서 보증을 부탁했고, 거절하지 못하고 큰 금액의 보증을 섰는데, 그 보증이 문제가 되어 사업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인데, 장로님께서 가진 모든 것을 털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신 것을 아실 텐데요. 다시 사업을 일으켜 돕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사업인데, 보증 문제로 모든 것을 잃게 하시다니,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거나, 사역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지는 않으셨습니까?
네, 물론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풀이 죽어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저를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말씀하시면서, 환상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언덕과 계곡이 있는 산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화가 나는 장면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 장례식의 주인공이 바로 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 그곳에서 뼈를 묻으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빈손으로 공동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환상까지 보셨다니, 정말 특별한 경험이네요. 하지만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내분과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이미 한 번 실패를 경험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공동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자녀분들도 셋이나 있었고, 아내분도 몸이 아프셨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처럼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을 텐데요.
네, 맞습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내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아내는 와사풍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추운 공장 창고에서 생활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드렸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저에게 학개와 스룹바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성경 인물에 대해 잘 몰랐던 아내는, 계속해서 학개와 스룹바벨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개서를 찾아 아내에게 읽어주었습니다. 학개서에는 “너희가 많은 것을 심을지라도, 조금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가 다 흩어버릴 것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이렇게 텅 빈 집에 살고 있느냐? 나의 집은 황폐하게 버려져 있는데!” (학개 1:6-9, paraphrased)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아내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당을 지으라고 하시는구나!’ 아내는 순수한 마음으로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예배당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불평은 했지만,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말씀을 주셨군요. 성경 말씀을 통해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으신 거네요.
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명확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무조건 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버리지 못할 이유가 많았습니다. 해결해야 할 빚 문제, 책임져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들을 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실 테니, 그저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빚 문제도 해결해주시고, 필요한 물질도 채워주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익명의 후원자가 돈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그 돈으로 다시 교도소에 보낼 월간지 ‘에바다’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인도해주셨고,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참 은혜롭고 쉽게 해주시지만, 당시 상황을 짐작해보면 정말 막막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집도 절도 없는 상황, 아내분은 병약하시고, 과거에 섬겼던 공동체 사람들은 여전히 어려움 속에 놓여있고…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상황이었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실마리, 시작점은 무엇이었나요?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시작했습니다. 경상도 사람 특유의 무모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내가 대학 매점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활비를 벌었고, 저는 매주 갱생보호공단을 찾아가 상담 봉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동네 장로님 한 분이 산속에 있는 3만 평 땅과 작은 집을 빌려주셨습니다. 싼 임대료로 땅과 집을 빌려주셔서, 그곳에서 다시 상담 봉사를 통해 만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데려와 공동체를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을 아시는 분이셨군요. 장로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땅과 집을 빌려주신 건가요?
아닙니다, 저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르셨을 겁니다. 싼 임대료로 빌려주셨고, 그곳에서 다시 두 번째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을 텐데요. 과거처럼 어려움과 문제들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극복해나가셨습니까?
네,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질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 나에게 무엇을 물으시는 걸까?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항상 성경 말씀, 특히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니,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매일매일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장로님의 삶은 아버지의 마음, 숭고한 철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공동체를 시작하실 때, 두려움은 없으셨나요? 한 번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나 두려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 실패의 원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내가 믿음이 좋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셔야 한다’는 생각, 즉 ‘나’ 중심적인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진정으로 이끌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시려고 택하셨다는 생각을 하니,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습니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니, 정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더 큰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데요. 처음부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평화를 기대하거나, 성숙한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닐 텐데요. 교도소 출소자, 알코올 중독자 등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장로님께서는 그분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들의 변화를 기대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사랑만 줄 수는 없고, 그분들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 텐데요. 언제, 어떻게 그분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고 느끼셨나요? 오늘 장로님께서 이 이야기를 해주시기 위해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신 것 같은데요.
변화는 저에게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구성원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능력이나 지각 능력, 배경 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나와 비슷할 것이다’라고 섣불리 판단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나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조금만 가르치고, 조금만 도와주면 ‘나처럼’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오두막 공동체 구성원 중에는 한국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우리의 언어와 논리, 기준으로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화되는 척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억지로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할 뿐입니다. 진정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구성원들이 변화될 수 없다면, 우리가 그들의 언어와 시간, 수준에 맞춰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문제는 발생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없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오두막 공동체의 핵심 가치입니다.
모든 것이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속도에 맞춰 함께 가려면 인내심이 필요할 텐데요.
네, 모든 것이 느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원래의 속도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분들은 아침잠도 많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뛰어난 신앙심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종종 모자이크 작가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모자이크 작가는 쓸모없는 유리 조각이나 사금파리 조각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하나하나의 조각은 볼품없고 위험한 쓰레기일 뿐이지만, 작가의 손길을 거쳐 섬세하게 붙여나가면 놀라운 예술 작품으로 탄생합니다. 가치가 없던 조각들이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품에서 단 한 조각이라도 떼어내면 작품 전체가 훼손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쓸모없어 보이던 사람들도, 공동체 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변화할 수 없습니다. 모자이크 작가처럼, 누군가가 그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적절한 자리에 배치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위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변화해야 합니다. 그들이 먼저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 식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엉성해 보일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쉽게 이해되는 비유입니다. 결국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변화해야 할까요? 능력 없는 사람은 변화하기 어렵습니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중에 누가 변화해야 할까요? 착한 사람이 변화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처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함께 가주는 사랑, 그것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장로님의 생각이 바뀌고, 공동체 운영 방식이 바뀌면서, 실제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바뀌니 세상이 평화로워졌습니다. 과거에는 끊임없이 구성원들을 지적하고, 변화를 강요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끊임없이 잔소리했지만,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변화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 변화를 강요하는 저에 대한 반감만 커져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적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살아라, 싸우지만 말고 마음대로 살아라’라고 말합니다. 신기하게도, 싸우지도 않고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는 대신, 서로를 이해하고 돕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서로 협력하여 해결하고, 갈등이 생겨도 대화로 풀어나갑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서로 친밀해지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님의 생활 방식과 마음가짐이 변화하면서, 공동체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군요. 하지만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기 마련인데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도 과거와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네, 가장 크게 변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인데, 사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말로는 ‘내가 변하겠다,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라, 싸우지만 말고 잘 지내라’라고 하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사고방식과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려는 본능적인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려는 마음이 끊임없이 솟아오릅니다. 그럴 때마다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옳아서는 안 된다. 저들이 옳아서도 안 된다. 내가 옳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옳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옳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옳음 안에서는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너도 옳지 않고, 나도 옳지 않다. 예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저의 옳음을 포기하기 시작하니, 오랜 습관에 젖어 있던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공동체 안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내 옳음을 포기해야지, 예수님의 옳음을 따라야지’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다스립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위로와 격려의 말이 나오고,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혼내는 대신, ‘그럴 수 있어, 나도 그래’라고 공감하고 위로하게 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감싸주면서 공동체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있습니다.
장로님, 이제부터는 오두막 공동체를 마음껏 자랑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오두막 공동체만의 특별함, 자랑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두막 공동체의 자랑은, 역설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엉망진창이고, 부족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끼리는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거나,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처럼, ‘나라’는 우리가 서로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고,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함께 하려고 노력합니다. 효율성이 떨어지고, 비효율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습니다. 함께 일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관계가 깊어지고, 관계의 빈도가 높아지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관계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공동체, 그것이 오두막 공동체의 가장 큰 자랑입니다. 좋은 관계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귀한 말씀입니다. 보통 부부들에게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절대 아니오’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그 사람의 진심과 살아온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장로님께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태어나셔도 오두막 공동체를… 다시 힘든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네,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지만, 지금의 결과, 공동체의 행복을 생각하면, 다시 그 길을 걸어갈 의향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실 텐데요. 특히 열심히 노력하는 분들일수록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실패했을 때 더 큰 좌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지만, 거룩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세속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속적인 수단을 통해 거룩한 목표를 이루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사람을 수단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저의 오랜 고통과 실패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오늘 정말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장로님 말씀을 듣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아쉽지만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저희 ‘새롭게하소서’에서는 다음 주에도 오두막 공동체 2부를 준비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장로님 사모님 대신, 최영희 권사님께서 출연하셔서 오두막 공동체의 이야기를 더욱 자세하고 생생하게 들려주실 예정입니다. 다음 주 방송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귀한 말씀해주신 이재영 장로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함께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