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준경 전도사 순교와 헌신, 한국 교회 순교 영성 회복 이야기
섬들의 어머니 문준경: 순교 영성으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다
"순교 영성 전파를 위한 사명"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김헌곤 관장 심층 인터뷰: 숭고한 헌신과 꺼지지 않는 믿음의 불꽃
섬들의 어머니 품, 전라남도 신안에서 만난 순교의 향기
대한민국 섬의 수도, 천혜의 자연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신안. 이곳은 단순한 휴양지를 넘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숭고한 순교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땅입니다. 그 중심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에 헌신했던 문준경 전도사가 있습니다. 그녀의 삶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매년 수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인데요. 이 기념관을 묵묵히 지키며 순교 정신을 전파하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김헌곤 관장 목사입니다.
김헌곤 관장은 단순한 기념관 관장이 아닌,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입니다. 그의 가족사는 한국 기독교 순교사의 아픈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그의 친할머니, 친형, 친척 등 22명의 가족이 교회에서 인민군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끔찍한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믿음은 헛되지 않아, 김 관장 목사를 포함하여 9명의 목사와 7명의 전도사가 그의 가문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순교 영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깨닫고 있는 김헌곤 관장 목사님은, 오늘도 순교 기념관에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았던 선배들의 정신을 뜨겁게 전하고 있습니다.
새롭게하소서 밥 줏 목사: 목사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 정말 기대가 되는데요.
김헌곤 관장: 아닙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밥 줏 목사: 목사님께서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관장으로 계신 곳이 특별히 신안이라고 들었습니다. 신안은 어떤 곳인가요?
김헌곤 관장: 신안은 섬이 1004개나 되는, 우리나라에서 섬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과거에는 교통이 불편했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 육지와 연결되면서 접근성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특히 제가 관장으로 있는 증도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690년 전 원나라 시대 무역선이 침몰했던 보물섬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섬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곳이 바로 신안입니다.
밥 줏 목사: 정말 매력적인 곳이네요. 문준경 전도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많은 분들이 존경하지만,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김헌곤 관장: 문준경 전도사님은 1891년 전라남도 암태도 부잣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는데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결혼 후 남편의 외도와 학대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36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예수를 믿었지만, 그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습니다.
밥 줏 목사: 예수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화되셨나요?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헌곤 관장: 예수님을 만난 후, 문준경 전도사님은 헌신적인 복음 전도자로 변모하셨습니다. 당시 신안은 복음화율이 매우 낮았는데, 섬들을 누비며 논두렁, 밭두렁, 갯벌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배를 타고 먼 섬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열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사랑도 컸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밥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며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기적도 많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병원도 없고 약도 없던 시절, 문준경 전도사님의 간절한 기도와 헌신으로 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보며 숭고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삶으로 인해, 문준경 전도사님은 그 지역에서 영적, 도덕적으로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신안군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여 "섬들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밥 줏 목사: 정말 놀라운 헌신이네요. 사택을 항상 개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헌곤 관장: 네, 문준경 전도사님의 사택은 사랑방과 같았습니다. 누구든 찾아와서 쉼을 얻고, 위로를 받고, 기도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80세가 넘은 노인들도 "문준경 전도사님은 친정 부모보다 더 따뜻하고 좋았다"고 회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셨던 분입니다. 교회도 많이 개척하셨습니다. 6개의 교회를 개척하셨는데, 현재는 그 씨앗이 자라 190개의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밥 줏 목사: 삶 자체가 헌신과 사랑이었던 분이시군요. 순교는 어떻게 맞이하게 되셨나요?
김헌곤 관장: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인민군이 증도에 들이닥쳤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목포에 피난해 계셨지만, 증도에 교인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다시 섬으로 돌아왔습니다.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셨던 것 같습니다. 증도에 도착하신 문준경 전도사님은 인민군에게 붙잡힌 두 명의 교인, 전도사님과 장로님을 구출하려고 애쓰셨습니다. 결국, 자신을 희생하여 두 사람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준경 전도사님은 인민군에 의해 붙잡히셨습니다.
밥 줏 목사: 본인은 살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순교를 택하신 거네요.
김헌곤 관장: 그렇습니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문준경 전도사님은 인민군에 의해 참혹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인민군들은 문준경 전도사님을 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확인 사살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당신들도 예수 믿고 천국 가라" 외치며 복음을 전했고, "하나님,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기도하며 순교하셨습니다. 숭고한 죽음이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수많은 영혼들을 깨우고, 한국 교회의 부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밥 줏 목사: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숭고한 순교 정신이 느껴집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의 가르침과 순교 정신이 한국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김헌곤 관장: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 정신은 한국 교회의 영적 거목들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 정태기 박사님, 윤성범 목사님, 이봉성 목사님, 고훈 목사님, 최훈 목사님 등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문준경 전도사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특히 김준곤 목사님은 문준경 전도사님을 "내 인생의 최초이자 최대의 임팩트를 주신 분"이라고 존경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문준경 전도사님 덕분에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폐병으로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문 전도사님의 헌신적인 간호로 회복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김준곤 목사님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밥 줏 목사: 정말 놀라운 이야기네요. 문준경 전도사님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한국 교회의 상징이 된 목사님들이 많다는 것이 감동적입니다.
김헌곤 관장: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인재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임자도에서 끔찍한 학살 사건이 있었는데, 이 집사님의 가족 13명이 순교했습니다. 주민 23%, 2700명이 학살당하는 비극 속에서도, 이인재 집사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문준경 전도사님의 가르침을 실천했습니다. 가해자들을 잡아 처벌하는 대신, 용서하고 화해를 선택했습니다. 오히려 가해자들을 보호하고,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힘은 놀라웠습니다. 가해자의 아들이 장로가 되고, 가해자 후손 가운데 목회자가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문준경 전도사님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순교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밥 줏 목사: 용서와 사랑의 실천, 정말 큰 감동입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 문준경 전도사님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들었습니다.
김헌곤 관장: 네, 맞습니다. 2009년 1월 1일, 김준곤 목사님께서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셔서 문준경 전도사님에 대한 간증을 하셨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문준경 전도사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해 9월 29일, 김준곤 목사님은 소천하셨습니다. 그리고 12월, CBS에서 문준경 전도사님의 삶을 그린 드라마 "시루섬"이 방영되면서 문준경 전도사님은 한국 교회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이 세워지게 된 것도 김준곤 목사님과 CBS의 역할이 컸습니다.
밥 줏 목사: "시루섬" 드라마, 저도 감명 깊게 봤습니다. 영상 잠시 함께 보실까요?
(드라마 "시루섬" 영상 시청)
밥 줏 목사: 영상 다시 봐도 감동적이네요.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순교 기념관 관장이 되셨나요?
김헌곤 관장: 2013년, 교단 총회에서 순교기념관 관장으로 저를 파송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부족한 자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단 어른들의 권유와 순교자 자녀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와보니, 목회 현장보다 더 바쁘고 보람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밥 줏 목사: 순교자 자녀라고 말씀하셨는데, 가족분들 중에 순교하신 분들이 계신가요?
김헌곤 관장: 네, 그렇습니다. 저희 집안은 순교자 가문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저희 할머니, 형님, 친척 등 22명이 순교했습니다. 정읍 칠보교회에서 예배드리던 중 인민군에게 붙잡혀 끔찍하게 학살당했습니다. 할머니는 칼로 난자당하고 불태워졌고, 어린 형은 끌려가다 저항하자 맞아 죽었습니다.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그 순교의 피 위에 저희 가문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놀랍게도, 저희 가문에서 29명의 목사와 7명의 전도사가 배출되었습니다. 순교의 열매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밥 줏 목사: 슬픈 가족사가 있으셨군요. 하지만 순교의 고난을 통해 귀한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집니다. 아버님도 목사님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김헌곤 관장: 네, 아버님은 무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토지, 통장, 주택 하나 없이, 오직 복음만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은퇴 후에는 교회 사택까지 반납하고, 시신까지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평생을 사셨습니다. 고아, 장애인, 교도소 출소자들을 돌보셨고, 전라북도 농아학교와 맹아학교를 설립하는 데도 기여하셨습니다. 아버님과 작은아버님은 40년 이상 교도소 사역을 하셨고, 국가로부터 교정대상까지 받으셨습니다.
밥 줏 목사: 목사님의 훌륭한 신앙은 부모님의 신앙 유산 덕분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기는 언제인가요?
김헌곤 관장: 어머니의 신앙, 부모님의 가르침도 중요했지만,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 방황했습니다.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1972년, 춘천성시화 집회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학을 공부하고, 1976년부터 목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밥 줏 목사: 목회 사역을 하시면서, 아버님처럼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갈등은 없으셨나요?
김헌곤 관장: 아버님은 아버님의 길을 가신 것이고, 저는 저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님처럼 장애인들을 집에서 돌보는 것은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헌신적인 삶, 순교자의 삶에 대한 마음은 항상 있었습니다. 순교자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순교 영성을 늘 묵상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밥 줏 목사: 목사님의 자녀들은 어떤 길을 걷고 있나요?
김헌곤 관장: 저희 부부는 두 자녀를 두었습니다. 큰딸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성악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억지로 목회자의 길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밥 줏 목사: 자녀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헌신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는 위험한 일도 많을 텐데, 걱정은 안 되시나요?
김헌곤 관장: 걱정되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초대 한국 선교사들의 삶을 보면,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는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파의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자녀들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밥 줏 목사: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정말 중요합니다. 얼마 전 사모님께서 먼저 천국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김헌곤 관장: 네, 금년 3월 폐암으로 소천하셨습니다. 40년 넘게 함께 해온 동반자를 먼저 떠나보내니, 슬픔이 큽니다. 하지만 사모님은 천국에서 편안히 쉬고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를 위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밥 줏 목사: 사모님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 위로가 됩니다. 섬에서 혼자 지내시다 보면 외로움을 느끼실 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김헌곤 관장: 기념관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웃음) 한국 교회가 물질주의, 기복신앙으로 인해 아픔을 겪고 있는데, 순교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교 기념관을 통해 순교 정신을 전파하는 사역에 헌신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해주시는 것에 감사합니다.
밥 줏 목사: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매년 많은 분들이 방문한다고 들었습니다.
김헌곤 관장: 연간 20만 명 정도 방문합니다. 신안군에서 신안 홀리랜드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서, 앞으로 방문객이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순교 기념관이 복음적이고 순교 영성이 흐르는 공간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밥 줏 목사: 마지막으로, 새롭게하소서를 시청하는 분들과 한국 교회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기도 제목과 앞으로의 계획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헌곤 관장: 저는 순교기념관에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매일 세 번씩 예배드리는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예배자가 되지 않으면 순교의 자리에서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예배를 통해 순교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순교자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저의 기도 제목은, 순교기념관이 복음적이고 순교 영성이 충만한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배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밥 줏 목사: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기념관에서 늘 부르시는 찬양 한 소절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헌곤 관장: 네, 좋습니다. 제가 늘 부르는 찬양입니다.
(김헌곤 관장 찬양)
강 건너편에 총소리
내 귀에 쟁쟁
구름 속 헤엄치는
광채는 눈에 안 닿아
앞서 가신 성도들이
주와 함께 기다리니
어서 가자 본향으로
야훼여 어서 가자
밥 줏 목사: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 목사님 말씀을 통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김헌곤 관장: 감사합니다.
밥 줏 목사: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 정신이 고이 간직된 아름다운 섬 증도. 이번 여름, 많은 분들이 증도를 방문하셔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순교 영성을 회복하는 귀한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오늘 새롭게하소서는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마무리: 오늘 김헌곤 관장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문준경 전도사님의 숭고한 삶과 순교 정신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지, 헌신과 사랑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 정신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줍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바로 순교자 정신입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이 한국 교회의 순교 영성 회복에 큰 역할을 감당해주기를 기대하며, 오늘 방송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