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누명 극복한 김종두 작가의 기독교 만화 인생 이야기
간첩 누명 벗고, 만화로 희망을 그리다
간첩 누명으로 고통받은 아버지, 그리고 기적적인 삶의 반전: 기독 만화가 김종두 작가의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오늘 우리는 과거 간첩 조작 사건으로 인해 한 가정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 속에서 피어난 놀라운 희망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한 기독 만화가 김종두 작가는, 그의 아버지께서 간첩 누명을 쓰고 겪으셨던 억울한 사건과 그로 인해 풍비박산 났던 가정사를 담담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격동의 시대 속에서 억압받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하며, 동시에 절망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줍니다.
김종두 작가가 태어난 1968년은 남북 관계가 극도로 긴장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 납포 사건과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한반도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서해 연평도 근처에서 조기잡이를 하다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당시 서해는 '황금어장'이라 불릴 만큼 조기가 풍부했는데, 아버지께서는 풍족한 어획량을 기대하며 바다로 나갔다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북한에 1년 동안 억류되었고, 송환되었지만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송환 후, 아버지는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됩니다. 당시 북한에서 내려올 때, 아버지는 북한 어부들에게 쌀 두 가마니를 받았는데, 이것이 간첩 혐의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 시대는 간첩 조작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던 때였고, 간첩을 잡으면 막대한 포상금이 주어졌습니다. 형사들은 실적을 위해, 혹은 포상금을 노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갔습니다. 특히 어눌한 어투의 거부(배를 거느리고 고기를 잡는 사람)나 재일교포 등이 표적이 되기 쉬웠는데, 김종두 작가의 아버지 또한 그러한 희생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억압수사를 받으며, "무슨 지령을 받았느냐", "국가 기밀을 누설했느냐"는 추궁에 시달렸습니다.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물구나무를 세워 코에 고춧가루를 들이붓는 물고문,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등 끔찍한 고통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고문에 굴복하여 허위 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고, 국가보안법, 반공법, 어업법 위반 혐의로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2개월간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1년여의 수감 생활 후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이미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간첩 누명을 쓴 아버지는 술에 의존하며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술만 마시면 괴물이 되어 가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어머니를 폭행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어린 김종두 작가는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버지를 피해 가족들과 산으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피신 중에 동생이 보이지 않아 온 가족이 발을 동동 굴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은 마루 밑에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가정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9살의 어린 김종두 작가를 남겨두고 알코올 의존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후, 어머니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1년간 북한에 억류되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절망감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부엌에서 쥐약을 먹거나, 어린 누나를 업고 바다에 빠지려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고, 가난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형은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 가구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형은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누나들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도시로 나가 가정부 일을 하며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네 명의 누나 중 두 명은 연락이 끊겨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 소녀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지만, 가족들은 서로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은 동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멸시를 불러왔습니다. 이웃들은 김종두 작가의 집 장독대에 돌을 던지거나, 어린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간첩 표어 그림을 그리게 하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방첩 훈련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김종두 작가는 아버지 사건으로 인한 고통과 수치심을 느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고, 왜 자신만 이런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원망하며, 하루빨리 이 고통스러운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가난은 그의 어린 시절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준비물을 사 오라고 할 때 돈이 없어 쩔쩔매거나, 500원짜리 동전을 구하기 위해 40분이나 읍사무소 앞에서 서성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를 무시하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감에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이사 온 집은 대문도 없는 빈집과 다름없었고, 술 취한 어른들이 새벽마다 마루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쥐가 들끓는 집에서, 김종두 작가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두 작가에게는 그림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학교에 늦는 날이 잦았지만, 그는 학교 대신 바닷가 백사장에서 그림을 그리며 슬픔을 달랬습니다. 파도가 밀려와 그림을 지워버리면, 다음 날 또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백사장은 그의 스케치북이자 캔버스였고, 그림 그리기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김종두 작가는 군산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하지만 가난은 여전했고, 학교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금강 하굿둑을 건너 5km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배를 타고, 다시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매일 10km가 넘는 험난한 통학길은 어린 학생에게 너무나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등굣길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길에서 마주하는 풍경들은 훗날 그의 작품 세계에 영감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특히 코스모스 핀 둑길은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아름다운 배경이 되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꿈꿀 수 없었고, 군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그곳에서의 학교생활 또한 순탄치 않았습니다. 상고 학생들은 주산과 부기 학원을 필수적으로 다녀야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가난한 김종두 작가는 학원 대신 학교에서 엎드려 낙서만 했습니다. 교과서와 공책에 빼곡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의 낙서는 점점 발전해 나갔습니다. 어느 날 미술 교생 선생님이 그의 낙서를 발견하고 칭찬하며 그림 공부를 권유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미술 교생 선생님은 김종두 작가에게 석고 데생을 가르쳐주고, 그림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은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했습니다. 교생 선생님은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에게 미술의 기초를 가르쳐주었고, 미술대학 진학이라는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방학 때 서울에서 함께 그림을 배우자고 제안했고, 김종두 작가는 난생 처음 서울 구경을 하게 됩니다.
서울 화실에서 김종두 작가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유명 미술 평론가였던 화실 원장 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3년간 무료로 지도해주었습니다. 원장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 덕분에 그는 미술대학에 진학할 실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학비를 지원해주었고, 그는 재수 끝에 지방 국립 미술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고단한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학원 원장 선생님의 권유로 난생 처음 교회를 가게 됩니다. 추운 겨울, 따뜻함을 찾아 교회 문을 두드렸지만, 그곳에서 그는 따뜻함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십자가를 보는 순간, 그는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때 그는 마치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경험을 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영접하고, 삶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김종두 작가의 삶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교회 예배와 새벽기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틈만 나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신앙생활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는 선교사의 꿈을 꾸게 됩니다. 중국 선교를 준비하며 중국어 공부에 매진했지만, 안타깝게도 안기부의 출국 금지 조치로 인해 선교사의 꿈은 좌절됩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국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출국 금지 조치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김종두 작가는 노동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교회 벽돌을 쌓고, 미장일을 하고, 벽화를 그리면서 육체적인 노동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던 중, 영화 '서편제'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자신이 태어난 땅, 조국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의 시를 읽으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됩니다. 그의 그림 또한 차가운 색채에서 따뜻한 색채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시사만화를 그리게 되면서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고 기독교 만화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됩니다. 그는 세계 선교 역사 만화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기독교 만화 창작 활동에 뛰어들었고, 그의 만화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최초의 기독교 학습 만화 '만화로 보는 세계 선교 발달사'는 1만 부 이상 판매되며 선교 단체 필독서가 되었고, 이후 '만화로 보는 세계 기도 정보', '만화 윌리엄 캐리' 등 다양한 기독교 만화를 출간하며, 기독 만화가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가장 큰 역작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만화였습니다.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내용으로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만화로 풀어내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그는 5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만화 기독교 강요'를 완성했습니다. 대상포진으로 쓰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도를 통해 작품을 완성해나갔습니다. '만화 기독교 강요'는 한국 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7살 어린아이부터 신학자까지, 다양한 독자층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만화 기독교 강요'는 중국어로 번역되었고,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행사에 프랑스 개혁교회의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김종두 작가의 아버지에게 씌워졌던 간첩 누명은 49년 만에 벗겨지게 됩니다. 섬에서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탔던 생존 어부의 증언으로 재심이 청구되었고, 2017년 아버지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눈이 쏟아지는 날, 무죄 판결 소식을 들은 김종두 작가는 마음속 응어리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희년이 찾아온 것입니다. 재판부는 아버지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형사보상과 민사보상까지 이루어졌습니다. 김종두 작가는 보상금을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나누어주며, 오랜 고통의 시간을 마침내 마무리했습니다.
아버지의 무죄 판결 이후, 김종두 작가는 가족들과 함께 고향 섬을 방문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섬의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그는 어린 시절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렸던 백사장을 거닐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섬에서 만난 외국인 어부들을 통해 국내 선교의 비전을 발견하고, 자신이 만든 만화 전도지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하여 섬 교회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만화 전도지는 인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60만 명 이상이 그의 만화를 읽고 복음을 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김종두 작가의 다음 비전은 드론으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드론 축제를 준비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보며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창세기 15장 5절 말씀을 떠올리며, 드론으로 밤하늘에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선교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의 비전은 드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창조, 타락, 구속의 이야기를 밤하늘에 그림으로 펼쳐내고,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그의 만화를 통해 온 땅에 충만해지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그림 묵상과 창작 활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김종두 작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만화 작품들이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그의 만화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쉽고 재미있게 기독교 교리를 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앞으로 웹툰, 웹툰 교육, 새로운 형태의 출판 등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더욱 확장해나갈 계획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인터넷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만화 기독교 강요'와 '만화 성경 개관'은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했습니다. 힘겨운 인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받는 김종두 작가의 앞날을 응원하며, 그의 작품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고 구원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