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총장 이재서, 고난을 축복으로 바꾼 이야기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총장 이재서: 고난을 넘어 축복으로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총장" 총신대학교 이재서 총장 심층 인터뷰: 고난을 넘어 축복으로, 삶의 역경을 간증하다
오늘 우리는 특별한 분을 모시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볼 예정입니다. 바로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대학교 총장"이라는 놀라운 타이틀을 가지신 총신대학교 이재서 총장님이십니다. 김학중 목사님과 김정은 님의 진행으로 진행된 '새롭게하소서' 인터뷰를 바탕으로, 총장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깊은 신앙 간증을 상세히 정리하여 여러분께 전달해 드리고자 합니다. 단순 내용 정리를 넘어, 총장님의 삶 속에 녹아있는 핵심 노하우와 삶의 지혜를 구체적이고 정량적으로 풀어내어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마치 옆에서 직접 듣는 듯한 친근하고 자세한 설명 방식을 채택하여, 쉽고 편안하게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이재서 총장님의 감동적인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1.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총장 취임, 감격과 사명감
먼저, 이재서 총장님의 총신대학교 총장 취임 소감부터 들어보겠습니다. 2023년 5월 30일, 총신대학교 제7대 총장으로 취임하신 이재서 총장님은 당시의 감격과 벅찬 마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셨습니다. 특히 시각장애인으로서 세계 최초로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 장애인 사회 전체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총장님은 취임식 당시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특히 아시는 대로 제가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총장이라는 것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장애인들이 기대를 하고 또 제가 총장이 되는 것을 축하해 주셨기 때문에 저의 기쁨이 더 컸습니다." 라고 소감을 밝히셨는데요. 이 짧은 소감 속에는 총장님의 겸손함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갈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원래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셨던 상황에서 총장직에 도전하게 된 배경에 대한 질문에, 총장님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일"이라고 회상했습니다. 25년간 총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 오셨지만, 총장이라는 자리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교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정상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변의 강력한 권유와, 본인의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총장직을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 총장 도전 과정, 11명의 경쟁 뚫고 만장일치 추대
총장직 도전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총 11명의 후보가 경쟁하는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이재서 총장님은 4단계에 걸친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총장추천위원회는 서류 심사, 면접 심사, 정책 발표 평가 등 다각적인 평가를 통해 후보들을 압축해 나갔고, 최종적으로 2명의 후보를 놓고 재단이사회의 투표를 통해 총장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마지막 재단이사회 투표에서 이재서 총장님이 100%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전 조율이나 합의 없이 이루어진 결과였기에, 이사회 관계자들조차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결과는 총장님의 탁월한 리더십과 인품, 그리고 학교 구성원들의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만장일치 추대 과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성공 스토리를 넘어, 하나님의 섭리와 공동체의 화합이라는 더욱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장 선거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경쟁 과정에서 발생한 오해와 갈등, 그리고 시각장애인이라는 핸디캡에 대한 우려는 총장님께 큰 마음의 짐이 되었습니다. 특히 "장애를 이유로 총장 직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일부의 시선은, 총장님께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총장님은 이러한 어려움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리더십과 경영 능력은 장애와 무관하며, 오히려 장애를 통해 얻은 깊이 있는 통찰력과 공감 능력이 총장 직무에 더욱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노력했습니다.
3. 시련과 고통의 10대 시절, 삶의 방향을 바꾸다
이재서 총장님의 인생 여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5세, 꽃다운 나이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력 상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열병을 앓은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된 총장님은, 당시의 절망감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합니다.
잘 보이던 눈이 갑자기 안 보이게 되면서, 책을 읽는 것은 물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조차 잃어버린 채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의 인생은 끝났다",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자격을 상실했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혔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왔는가"라는 원망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겪는 장애는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왔고, 세상을 향한 깊은 원망과 분노는 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총장님은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서울맹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맹학교에서 같은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을 만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는 점차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외부 강사로 초빙된 목사님의 "인간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다"는 강연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4. "네 가지 눈" 깨달음, 육신의 눈 넘어 마음의 눈을 뜨다
목사님은 강연에서 "인간에게는 육안, 심안, 지안, 영안 네 가지 눈이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육안은 사물을 보는 눈, 심안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눈, 지안은 지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눈, 영안은 영적으로 진리를 깨닫는 눈을 의미합니다. 목사님은 "여러분은 육신의 눈 하나만 잃었을 뿐, 나머지 세 가지 눈은 얼마든지 밝고 건강하게 가꿀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강연은 어린 이재서 총장에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을 잃었지만, 나머지 세 가지 눈을 건강하게 만들자"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 결심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절망과 좌절 대신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신의 장애에 갇혀 있던 시야를 넓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영적인 눈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총장님을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맹학교에서 학업에 매진하며, 잃어버린 꿈을 다시 키워나갔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지적인 능력을 키우고, 신앙생활을 통해 영적인 성장을 추구했습니다.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마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훈련은, 훗날 그가 세계적인 장애인 선교 단체를 설립하고 대학교 총장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5. 예수 그리스도 영접, 영원한 소망을 발견하다
맹학교를 다니면서 신앙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대규모 집회에 참석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집회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Personalized 영접하고 깊은 은혜를 체험하면서, 그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 총장님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졌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였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세상적인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장애로 인해 겪는 고통과 불편함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영원한 천국의 소망은 그러한 고통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는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생각이 바뀌었다"는 총장님의 고백은, 단순한 심경 변화를 넘어, 삶의 가치관과 목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아름답고 예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가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가치를 두게 되면서, 그는 육신의 장애를 넘어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6. 장애인 선교 사명, 밀알복지재단 설립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총장님은 장애인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장애인으로서 겪었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신앙을 통해 얻은 위로와 소망을 바탕으로,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들을 돕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장애인 선교는 나의 사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는 장애인 선교 단체 설립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신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79년, 그는 "밀알선교단"이라는 장애인 선교 단체를 창립했습니다. "전도, 봉사, 계몽"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시작된 밀알선교단은,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들을 돕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신촌의 한 교회 청년들과 함께 시작한 작은 봉사 모임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계적인 장애인 선교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밀알복지재단은 국내외 다양한 장애인 복지 사업을 펼치며, 장애인들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 참여 확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은 밀알선교단 사역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사회복지학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장애인 복지 사역을 위해,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미국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장애인 복지 분야의 전문성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미국 유학은 단순히 학문적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밀알선교단을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시키고, 장애인 선교 사역을 더욱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7. 총신대학교 입학, 괄시와 차별을 극복하다
장애인 선교 사명을 이루기 위해 신학대학 진학을 결심한 총장님은, 1977년 총신대학교 입학 원서를 접수하러 갔지만, 예상치 못한 괄시와 차별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신학은 어렵고 외국어도 많이 배워야 하는데,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 "학교에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없다"는 이유로 입학 거부를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총장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간절하게 부탁하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총신대학교 입학을 허락해 주세요" 라는 간절한 기도와 끈질긴 설득 끝에, 마감 시간을 겨우 30분 남기고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단, 조건은 "학교를 다니다가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총장님은 오히려 이를 악물고 학업에 더욱 매진했습니다. "이러한 차별과 괄시를 극복하고 실력으로 보여주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그는 밤낮으로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놀랍게도 입학 첫 학기에 수석으로 장학금까지 받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입학 당시의 괄시와 차별은 오히려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학업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총장님은 당시 경험을 회상하며 "만약 그때 입학 거부를 당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총신대학교 입학 과정은, 그의 인생 여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난과 역경 중 하나였지만, 그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 아내와의 만남, 사랑과 헌신의 동반자
힘든 유학 생활과 밀알선교단 사역 속에서, 총장님께 큰 힘이 되어준 존재는 바로 아내였습니다. 아내와의 첫 만남은 순천 성경학교에서 중고등부 학생과 교사로 만난 특별한 인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총장님이 총신대학교에 진학한 후 전국 대학 밀알 서클 조직을 위해 전남대학교에 방문했을 때, 6년 만에 재회하게 되면서,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 당시 아내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고,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장애를 가진 남편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처가에서는 시각장애인 사위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아내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장님을 향한 굳건한 사랑과 믿음으로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세탁소와 식당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며, 총장님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습니다.
총장님은 아내에게 깊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며,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지지는, 총장님이 밀알선교단 사역과 총신대학교 총장 직무를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아내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며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사랑합니다" 라고 진심을 담아 고백하는 모습은, 듣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9. 장애를 통해 얻은 축복, 삶의 모든 것이 기회
인터뷰 마지막 질문은 "하나님께서 총장님께 장애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였습니다. 총장님은 "장애는 나에게 고통과 눈물을 주었지만, 동시에 나의 모든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다"고 단언했습니다. "실명은 나의 기회였고, 축복의 통로였으며, 행운의 열쇠였다"는 역설적인 고백은, 그의 인생 여정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만약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시력 상실이라는 고난은 오히려 그에게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고, 밀알선교단을 설립하여 세계적인 장애인 선교 사역을 펼치도록 이끌었으며, 마침내 총신대학교 총장이라는 놀라운 자리까지 오르게 했습니다.
"고난이라는 포장 속에 감춰진 축복"이라는 비유는, 총장님의 인생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입니다. 고난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 고난을 인내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더욱 귀한 축복을 예비하신다는 진리를, 총장님의 삶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먼 자의 비유"를 언급하며, 총장님은 "장애는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육신의 장애는 오히려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장애는 육신의 장애가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장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습니다.
10. 결론: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
이재서 총장님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 스토리를 넘어,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자세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영감과 도전을 줍니다.
"내게 실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총장님의 고백처럼,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가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단순히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고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고난을 통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넘치 못할 시련은 없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고난 앞에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연단된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고난을 통해 얻은 지혜는 더욱 값진 열매를 맺게 해줄 것입니다. 이재서 총장님의 삶이 바로 그 증거이며,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재서 총장님의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새기고, 각자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고난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더욱 성숙하고 아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총신대학교와 밀알복지재단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총장님의 놀라운 사역들을 응원하며, 이 글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