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에서 힐링필드로, 캄보디아 윤찬수 선교사 간증 이야기
윤찬수 선교사, 킬링필드를 힐링으로
“킬링필드에서 힐링필드로” 캄보디아 윤찬수 선교사 간증 상세 정리
이번 글에서는 캄보디아에서 15년간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계신 윤찬수 선교사님의 간증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윤찬수 선교사님은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 출연하시어 킬링필드로 악명 높았던 캄보디아에서 힐링필드를 일구어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셨는데요, 본 글은 윤 선교사님의 간증 내용을 20,000자 내외로 상세히 정리하고, 그 안에 담긴 핵심 노하우와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특히, 윤 선교사님의 파란만장했던 과거와 극적인 회심, 그리고 캄보디아 선교 현장에서 겪으신 생생한 체험들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에게 깊은 영감과 도전을 선사할 것입니다. 더불어, 척박한 땅 캄보디아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 맺기까지의 숭고한 헌신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윤찬수 선교사님은 서울 월계동, 속칭 ‘각심절’이라는 마을에서 자라셨다고 합니다. 마을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데요, 그는 어린 시절 무당을 불러 굿을 할 정도로 미신적인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무당을 통해 굿을 하여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그의 성장 배경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캄보디아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윤 선교사님은 고백합니다. 캄보디아 역시 불교 문화가 깊게 뿌리내려 있어 몽골반점처럼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 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윤 선교사님은 자신의 성장 배경 덕분에 캄보디아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 근처를 맴돌았지만, 교회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합니다. 교회 앞에서 연탄재를 쌓아놓고, 교회 다니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등 교회를 향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보여주는 슬라이드 영화가 싫어서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는데요, 그만큼 교회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가 어떻게 선교사가 되었을까요? 그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은 바로 군대, 논산 훈련소에서 일어났습니다.
군 입대 후,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강당에서 울려 퍼지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그의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위로와 평안을 주었습니다. 예배 후 영접 기도 시간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을 만났음을 직감했지만, 개인적으로만 간직했을 뿐,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훈련소에서 받은 감동은 컸지만, 제대 후 그의 신앙생활은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술에 의존하게 되고, 힘들 때면 교회를 찾아 하소연하는 등 방황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치 ‘양다리’를 걸친 신앙생활과 같았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그의 아내는 꾸준히 교회에 다니며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힘든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비자 문제로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던 중, 몸마저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알코올성 간염이라는 심각한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힘든 시간 속에서도 아내는 끊임없이 그를 교회로 인도했고, 담임목사님과 함께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회심은 아내와 교회의 끈질긴 기도와 사랑의 결실이었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변화는 큰 집회에서 였습니다. 집회 강사 목사님의 사사기 6장, 기드온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슬라이드처럼 그의 인생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동안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압도되었고,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집회 이후 그는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 매달리며 뜨겁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솟구쳐, 길거리, 전철역, 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그는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선교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철야 기도 중 받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는 구절이 그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금식 기도 중 캄보디아 지도를 보여주시고, 캄보디아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지만, 그는 캄보디아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로 향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 언어 장벽, 문화 차이 등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은 컸습니다. 후원 약속은 있었지만, 실제로 후원은 미미했고,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언어 공부를 위해 노력했지만, 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재정에 대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현지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의 고생에 대한 미안함은 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특히 자녀들의 학비가 밀릴 때면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캄보디아 현지인들의 헌금으로 자녀들의 학비를 충당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아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아들 또한 신학을 공부하여 아버지의 뒤를 잇는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과거 단기 선교팀이 없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캄보디아 선교를 짊어질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현재 윤 선교사님이 섬기는 교회는 건물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3년간 사용하던 예배당 건물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당황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예배 공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센터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기도하며 나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캄보디아 복음화는 외부의 도움에 익숙한 현지 목회자들의 변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현지 목회자들이 말씀 안에서 변화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립하는 리더십을 갖추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후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캄보디아 현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향한 끊임없는 기도라고 강조합니다. 그들의 영적인 성장과 변화를 위해, 그리고 캄보디아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며 간증을 마무리했습니다.
윤찬수 선교사님의 간증은 척박한 땅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숭고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과 극적인 회심, 그리고 캄보디아 선교 현장에서 겪으신 수많은 어려움들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선사합니다.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꿋꿋이 사역을 감당하고, 현지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선교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 선교사님의 간증을 통해 캄보디아 선교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와 함께,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더욱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전을 받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캄보디아 선교와 윤찬수 선교사님의 사역을 위해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