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빈민 30년 헌신,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의 감동 사역
## 30년 헌신, 인도네시아 빈민 섬김의 눈물과 기적 -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
녹화 후, 담당 PD가 직접 인도네시아 현장에 다녀왔습니다!ㅣ최원금 이현주 선교사ㅣ새롭게하소서
30년 8개월, 인도네시아 도시 빈민 사역에 헌신하신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의 주영훈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받으신 두 분을 만나 뵙게 될 텐데요, 건강도 잃고 부모님도 아프신 상황 속에서도 오직 사역지를 향한 굳건한 마음으로 묵묵히 헌신의 길을 걷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과연 어떤 분들일까요? 궁금하시죠? 바로 인도네시아에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시 빈민 사역에 헌신하고 계시는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님이십니다.
두 분은 스튜디오에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을 입고 등장하셨는데요, 그 모습이 마치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바로 오신 듯했습니다. 특히, 이현주 선교사님의 의상은 마치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님 역시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처럼 늠름한 모습이셨습니다. 두 분은 밝은 미소와 함께 스튜디오를 환하게 밝혀주셨는데요, 30년 8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사역을 펼쳐오셨는지, 또 그 헌신 속에서 어떤 은혜를 경험하셨는지, 지금부터 함께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도시 빈민을 위한 30년 헌신, 무료 급식과 교육 사역
최원금 선교사님은 인도네시아에서 30년 8개월째 도시 빈민 사역을 하고 계신다고 소개했습니다. 그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첫째는 오늘의 배고픔을 달래줄 무료 급식 사역, 둘째는 가난의 대물림을 끊어줄 교육 사역입니다. 흔히 알고 있는 급식 사역은 빈민 아이들을 돕고 교육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두 분은 사택도 없이 사역 센터에서 생활하신다고 합니다.
사택 대신 사역 센터에서 생활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요, 2020년 코로나가 발발했을 당시, 이석증으로 인해 극심한 어지럼증과 고통을 겪으셨다고 합니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어지럼증 때문에 침대에서 쓰러지기도 하셨고, 코로나 상황이라 병원에도 제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밤에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높은 층에 있는 사택에 대한 불안감마저 커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사역 센터 3층에서 잠을 청했을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셨고, 그때부터 아예 사역 센터로 거처를 옮기게 되셨다고 합니다.
사역지와 사택을 분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오히려 사역 센터로 옮긴 것이 코로나 시국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사택 유지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고, 사역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사모님의 고생 덕분에 비용도 절감하고 사역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물론 사택이 없어 불편한 점도 있지만, 지금은 사역 현장에서 더 큰 행복과 보람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폐쇄된 기차역에서 시작된 사역의 불꽃
두 분은 밝은 모습으로 30년간의 사역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전 인터뷰에서 최원금 선교사님은 교회 목회를 그만두게 된 계기가 '폐쇄된 기차역'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셨는데요, 과연 어떤 이야기일까요? 최원금 선교사님은 대학 졸업 후 신학대학원과 선교 훈련을 거쳐 인도네시아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장 합신 교단에서 인도네시아 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파송 제안을 받았고, 인도네시아 선교를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며 10년간 한인교회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창기 언어 선생님이었던 지미 선생님이 찾아와 어려운 이들을 위한 예배 인도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현지 교회는 가난하고 냄새나는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례비를 드릴 형편도 안 되었기에 외국인이자 어차피 설교를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 인도네시아에 온 최원금 선교사님은 흔쾌히 승낙했고, 한인교회 목회와 현지인 사역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첫 설교 후, 다음 주에는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은 다름 아닌 폐쇄된 기차역이었습니다. 10년 동안 기차가 멈춘 폐쇄된 기차역에는 300명의 노숙자들이 철로 위에 널빤지를 놓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박스 더미가 옷장이 되고, 낡은 담요가 이불이 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희망 없는 아이들의 모습은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바로 이 폐쇄된 기차역이 최원금 선교사님의 인생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인교회 목회를 내려놓고 도시 빈민 사역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도시 빈민 문제의 심각성, 그리고 좁은 길을 택하다
흔히 자카르타는 발전된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도시 빈민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적인 도시 집중화 현상 속에서, 인도네시아 역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는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농작물 소득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시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빈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자카르타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교회 목회와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빈민 사역에 뛰어드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원금 선교사님은 주님의 좁은 길을 택했습니다. 오전에는 한인교회 목회를 하고, 저녁에는 폐쇄된 기차역을 찾아 노숙자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며 4년간 사역을 병행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는 최원금 선교사님에게 도시 빈민 사역에 전념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원금 선교사님은 마침내 한인교회 목회를 내려놓고 좁은 길, 험난하지만 의미 있는 도시 빈민 사역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나눔의 씨앗이 되다
최원금 선교사님이 도시 빈민과 어려운 아이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 배경에는, 어린 시절 가난했던 경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넷째로 자라면서 가난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학비 300원을 제때 내지 못해 교무실에 불려 가던 기억, 밥그릇의 밥이 너무 빨리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웠던 기억, 건빵 한 봉지를 동생과 나눠 먹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 등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최원금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도 희망의 빛은 있었습니다. 바로 이름 모를 미국 후원자의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는 매달 5달러씩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그 후원은 어린 최원금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후원은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을 넘어,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과 나눔의 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그때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빈민 사역을 통해 빚을 갚는 심정으로 헌신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고난 받는 이웃을 향한 깊은 공감과 헌신으로 이어졌고, 이는 30년 넘게 도시 빈민 사역을 이어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내 이현주 선교사의 헌신, 그리고 80년대 여의도 성회
최원금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사역 뒤에는 아내 이현주 선교사의 든든한 지원과 동역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현주 선교사님에게 남편 따라 고생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사실 이현주 선교님 역시 고등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만난 후 선교사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1980년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에 참석했을 때, 선교 헌신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이현주 선교사님은 당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외로 나갈 사람"이라는 외침에 응답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의 순수한 헌신 기도는 훗날 인도네시아 선교사로서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남편 최원금 선교사님의 선교 결심에 흔쾌히 동의했고, 오히려 자신을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금까지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최원금 선교사님 역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선교 헌신을 결단했다고 합니다. 80 세계 복음화 대성회에서, 두 사람은 모르는 사이였지만, 같은 시간에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서약한 것입니다. 10년 후, 두 사람은 운명처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과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10년 전 여의도 성회에서 함께 선교 헌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연은 두 사람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700인분 밥 짓는 어머니, 헌신적인 봉사
이현주 선교사님은 마치 대기업 회장님 사모님처럼 세련된 인상을 풍기지만, 실제로는 700인분의 밥을 직접 짓는 헌신적인 봉사자입니다.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는 밥을 사서 나누어주었지만, 도시락의 질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직접 밥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뜻있는 성도들과 함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준비하여 기차역으로 나갔습니다.
초창기에는 100인분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늘어 700인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주방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맨손으로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현주 선교사님은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봉사활동에 전념했습니다. 밥뿐만 아니라, 닭튀김, 야채볶음 등 다양한 반찬도 직접 만들어 도시락에 담았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닭튀김은 인기 메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봉사활동 중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밥을 받지 못한 남자가 옆집 여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고 온 남자는, 밥을 받기 위해 깨워달라고 부탁했지만, 옆집 여자가 깜빡 잊고 깨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밥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에 이현주 선교사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혹시 밥이 부족하면 어쩌나, 다 나누어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그 후, 이현주 선교사님은 하나님께 넉넉한 밥을 준비할 수 있도록 재정을 채워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인 목회 포기, 그리고 좁은 길을 택하신 이유
최원금 선교사님은 안정적인 한인교회 목회를 하면서도 무료 급식 봉사를 할 수 있었지만, 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좁은 길을 택했을까요? 14년간의 한인교회 목회는 안정적인 수입과 사택을 제공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료 급식 사역에 전념할 것을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널 때는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내딛었을 때, 비로소 물이 갈라졌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요단강을 건너는 믿음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좁은 길을 택했습니다. 한인교회는 다른 목회자가 섬길 수 있지만, 도시 빈민 사역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절박함도 있었습니다. 더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이라고 믿었기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기적적인 응답, 그리고 쌀 5포대
막막했던 현실 속에서, 기적적인 응답들이 이어졌습니다. 급식 장소를 찾지 못해 기도하던 중, 현지 목사님의 도움으로 교회 건축 공간을 임시 급식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개월 후에는 그곳에서 나와야 했지만, 또 다른 기적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통도 편리하고 안전하며, 임대료도 저렴한 새로운 장소를 찾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렌트비가 부족한 상황, 그때 한 교회 담임 목사님이 2년간 렌트비를 지원해주겠다는 놀라운 제안을 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아대책과 연결되어 재정적인 지원도 받게 되었고, 익명의 독지가로부터 쌀 5포대를 후원받는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기아대책 본부로 전화가 걸려와 쌀 지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남편 생일을 맞아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부부가, 잔치 대신 쌀을 기증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 후, 매년 남편 생일마다 쌀 5포대가 해피센터로 배달되었습니다. 장소 마련부터 쌀 후원까지, 모든 것이 기적과 같은 응답이었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조지 뮬러의 5만 번 기도 응답처럼,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검버섯 핀 손, 그리고 눈물 젖은 빵의 의미
물질적인 어려움은 해결되었지만, 육체적인 고통은 여전했습니다. 특히, 초창기에는 냉장고, 에어컨, 제대로 된 주방 시설도 없이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더운 날씨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짓다 탈수 증세가 오기도 했고, 소금을 먹어가며 버텨야 했습니다. 뜨거운 밥을 식히기 위해 밖으로 들고 나르다 햇볕에 그을려 손등에 검버섯이 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현주 선교사님은 힘든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사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힘든 노동 속에서도 보람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살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직접 대접할 기회가 있겠냐며,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에 임했습니다. 14년간의 한인교회 목회는, 무료 급식 사역을 위한 든든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한인교회 성도들은 재정적 후원뿐만 아니라, 봉사 인력으로도 헌신하며 사역을 도왔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잠언 16장 9절 말씀을 인용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튀김 도시락 고집하는 이유, 그리고 700인분의 무게
현재 해피센터는 일주일에 세 번, 700인분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여전히 힘들지만, 감사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시장에 갈 때면, 혹시 밥을 굶는 사람이 생길까봐 불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하나님의 일이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며 격려해주었고, 그 말에 힘을 얻어 염려와 불안을 덜 수 있었습니다.
17년 동안 무료 급식 사역을 이어오면서, 놀라운 것은 단 한 번도 식자재가 부족했던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기적처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도시락 메뉴는 닭튀김과 밥, 오이, 칠리소스로 단촐하지만, 튀김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더운 날씨에 음식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고, 봉사자들의 일손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닭튀김을 매우 좋아하고, 밥과 함께 먹는 것을 즐깁니다. 해피센터 도시락은 밥 한 공기에 닭튀김 한 조각, 오이 한 조각, 칠리소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주 세 번, 준비된 도시락은 여덟 곳의 빈민촌으로 전달됩니다. 일부는 빈민학교에서 직접 찾아오고, 일부는 봉사자들이 직접 배달합니다. 이날은 특별히 두 곳의 빈민촌에 직접 도시락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이 진행되었습니다. 봉사자들은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빈민촌 골목길을 누볐습니다. 아이들은 도시락을 보자 환호하며 기뻐했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게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이들에게 해피센터의 도시락은 단순한 한 끼 식사를 넘어,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무료 급식이 게으름을 만들까? 오해와 진실
무료 급식 사역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있었습니다.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면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의존적이 될 것이라는 우려였습니다. 하지만 17년간 사역하면서, 오히려 무료 급식이 빈민들의 삶에 활력을 주고,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루 한 끼를 제대로 먹기 힘든 빈민들에게, 무료 급식은 생명줄과 같습니다. 일단 배를 채우고 살아야, 다른 일을 할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무료 급식은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자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는 의미있는 사역입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중금속 중독으로 인해 치료를 받고 있지만, 완치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렵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어 더욱 힘든 상황입니다. 원인을 알았으니, 음식과 공기 등 건강에 해로운 요인들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현주 선교사님 역시 몸에 종양이 발견되어 3cm 이상 커지면 위 절제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역 때문에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없고, 현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곁에서 중보기도 해주는 동역자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역은 몸으로 뛰는 것이기에, 건강을 챙기기 어렵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극복해나가고 있습니다.
존경의 눈빛, 그리고 사역을 멈출 수 없는 이유
인도네시아 아이들은 존경의 표시로 악수 대신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댑니다. 아이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엄마처럼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사역을 멈출 수 없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을 몰랐지만 누군가의 사랑과 헌신으로 인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목회자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되갚기 위해,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지금은 작은 씨앗이지만, 이 아이들 중에서도 미래에 세상을 변화시킬 훌륭한 인재들이 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희망이 있기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사역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사역자 부모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사춘기 시절 방황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바르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최선을 다해 양육했습니다. 이현주 선교사님은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늘 최선을 다해 사역했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자녀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했고, 자녀들은 오히려 엄마의 진심에 감동하며 기뻐했습니다.
자녀 교육,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최원금 선교사님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면, 모든 것을 더해주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면,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약속하신 말씀대로 우리 아이들을 책임져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네 사역 대상도 중요하지만, 네 자녀는 내가 너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사역 대상"이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사역과 가정을 균형있게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그 후, 자녀 양육에도 더욱 힘쓰며, 지혜롭게 사역과 가정을 병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두 아들은 모두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큰 아들은 대한항공 조종사 훈련 과정에 합격하여 파일럿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둘째 아들은 군 복무를 마치고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두 아들 모두 부모님의 헌신적인 삶을 존경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님 부부는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자녀들을 축복하시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두 분의 간증은, 다음 세대 부모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지나친 불안과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줍니다. 자녀를 위해 학원, 과외 등 억지로 스펙을 쌓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자라도록 인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나는 자녀 교육에 무관심했다"고 고백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통해 놀라운 방법으로 보상해주셨습니다. 두 아들의 성공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서 헌신하는 가정을 어떻게 축복하시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교육의 중요성, 그리고 미래를 향한 투자
급식 사역뿐만 아니라, 교육 사역에도 큰 열정을 쏟고 계십니다. 급식 현장에서 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이 밥을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가난 때문에 학용품, 교복, 학비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학교를 세웠지만, 처음에는 출석률이 저조했습니다. 원인을 분석해보니, 교복 미착용으로 인한 소외감, 오전/오후반 운영으로 인한 학습 단절, 부모님의 무관심 등이 문제였습니다. 교복 지원, 교실 증축, 출석 우수상 지급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출석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출석 우수상은 아이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성적 우수만이 아니라, 성실한 출석도 인정받고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학교에 대한 애착심이 높아졌습니다.
해피센터는 전인격적인 교육을 목표로 합니다. 단순히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인성 교육, 영성 훈련, 사회성 발달 등 다방면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성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말씀 암송 교육에 힘쓰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며, 삶의 지침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 암송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감을 얻고, 긍정적인 자아 개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 암송을 어려워했지만, 격려와 칭찬, 다양한 활동을 통해 즐겁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현재 해피센터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들은 후원을 통해 일반 학교에 진학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누르마 이야기, 그리고 희망의 씨앗
물론, 모든 아이들이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 환경이 어렵거나, 부모님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랑과 관심을 쏟으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봅니다. 누르마라는 학생의 이야기는 큰 감동과 희망을 줍니다. 누르마는 빈민촌 출신으로, 해피센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후원을 받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JIU 대학을 거쳐 한국 한동대학교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도네시아 대기업에 취업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누르마의 성공 스토리는 해피센터 후배들에게 큰 희망과 동기부여가 되고 있습니다. 누르마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누르마는 졸업 후에도 종종 해피센터를 방문하여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빈민촌 아이들에게 누르마는 단순한 선배가 아닌, 롤모델이자 희망의 상징입니다. 최원금 선교사님은 누르마와 같은 성공 사례가 계속해서 나오기를 기대하며, 교육 사역에 더욱 매진하고 있습니다. 5달러 후원의 기적은 누르마와 같은 열매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더 큰 나눔과 헌신의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 그리고 끝나지 않은 사역
물론, 모든 아이들이 누르마처럼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손 가정이거나,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학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여름성경학교 때, 한 아이가 유독 심하게 울어서 이유를 물어보니, 부모의 사랑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습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아이들을 돌보니, 소극적이었던 아이가 적극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갑자기 할머니와 함께 야반도주하듯 사라져버린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른들의 무책임함 때문에 아이들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빈부 격차를 느끼며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빈민촌에서만 살다가, 외부 세계를 접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슬럼프를 극복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직업 훈련 학교를 준비했지만, 아이들이 오지 않아 속상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도 내 속을 썩이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힘입어, 다시 힘을 내고 사역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와 헌신으로 세운 학교는, 현재 7개 지역 430명의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미래 인도네시아를 바꿀 리더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30년 헌신, 그리고 안식년의 의미
30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님 부부에게 안식년은 사치일까요? 선교부의 강제적인 권유로 2-3개월 짧게 안식월을 가진 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안식년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 사역 현장을 비울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입니다. 자원봉사자, 급식 운영, 재정 관리 등 모든 것을 현지인에게 맡기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잠시 한국에 머무는 동안 건강 검진도 받고, 부모님도 뵙고 싶지만, 마음은 늘 인도네시아 사역 현장에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제2의 고향과 같습니다. 인도네시아만 생각하면 "우리 인도네시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입니다. 그만큼 인도네시아를 사랑하고,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물론 건강도 좋지 않고, 부모님 걱정도 있지만,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큽니다. 부모님은 한국에 언제 돌아올 거냐고 자주 물으시고, 이현주 선교사님은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역시 딸의 헌신적인 삶을 자랑스러워하실 것입니다. 새롭게하소서 시청자들에게 부모님의 평안한 노후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60세, 인생의 환갑을 맞이한 최원금 선교사님은 지난 30년을 돌아보며 감사와 감격에 젖었습니다. 의미있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보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해서 사역할 수 있다는 감사, 그리고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도 있었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시편 23편 말씀처럼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셨기에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30년이었고, 앞으로도 믿음이 더욱 성장하길 소망한다고 밝혔습니다.
마지막 기도 부탁, 그리고 해피센터를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최원금 선교사님은 간절한 기도 부탁을 전했습니다. 가장 큰 기도 제목은 해피센터 운영과 건물 매입입니다. 무료 급식 사역과 교육 사역의 중심인 해피센터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기를, 그리고 렌트 계약이 만료되는 해피센터 건물을 매입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최근 건물주가 건물을 매각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더욱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17년간 해피센터는 이 자리를 지켜왔고, 이 곳보다 더 좋은 장소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피센터를 통해 밥을 기다리는 빈민들을 위해, 그리고 4억원에 달하는 건물 매입을 위해, 새롭게하소서 시청자들의 뜨거운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렸습니다.
주영훈 엠씨는 지난 인생을 돌아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 했다는 최원금 선교사님의 고백에 깊이 공감하며, 해피센터를 위한 기도와 후원을 약속했습니다. 해피센터를 통해 인도네시아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리고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사역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헌신과 나눔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두 분의 사역에 귀한 열매가 맺히기를, 그리고 해피센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