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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목사 고봉준의 28년 만의 기적과 교정선교 간증

요약

28년 만의 기적 재회, 꼴통 목사의 인생 드라마

"꼴통 목사의 전도행전": 고봉준 목사의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 고봉준 목사님을 모시고 오늘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예측 불허의 드라마처럼, 고봉준 목사님의 삶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이야기인데요. 차가운 철문과 높은 담벽, 세상과 단절된 교도소 안에서 25년 넘게 묵묵히 재소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교정 선교에 헌신하신 고봉준 목사님.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셨기에 '꼴통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토록 깊은 감동을 전하는 걸까요? 지금부터 고봉준 목사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사마리아 교정선교회 대표, 고봉준 목사님, 반갑습니다. 목사님, 건강하신 모습 뵈니 정말 좋습니다.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분들께 힘찬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웃음) 네, 역시 에너지가 넘치시는군요. 본격적으로 사마리아 교정선교회에 대한 소개부터 들어볼까요? 교정 선교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교정 선교는 쉽게 말해 교도소, 구치소 등 갇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입니다. 저는 법무부 장관의 위촉을 받아 의정부교도소 종교위원으로 활동하며, 재소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정 선교, 참으로 특별하고 숭고한 사역인데요. 목사님께서는 26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이 길을 걸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26년째 교도소와 유치장 등 갇힌 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보다 훨씬 더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6년간 교정 선교에 헌신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교정 선교에는 크게 두 가지 부류의 목회자가 있습니다. 첫째는,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목회를 하시던 분들이 소명감을 느껴 교정 선교에 뛰어드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저처럼 과거에 교도소 수감 생활을 했던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어 목사가 된 후, 교정 선교에 헌신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당연히 후자에 속합니다. (웃음) 목사님의 파란만장한 과거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지는데요. 목사님께서 과거에 교도소에 수감되셨었다니, 놀랍습니다. 어떤 과거를 겪으셨던 건가요? 제 어린 시절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68세, 어머니가 43세에 저를 늦둥이로 낳으셨습니다. 부모님 나이 차이가 무려 25살이나 되셨죠. 제주도가 고향인데요, 배우 고두심 씨가 저희 학교 선배입니다. (웃음)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5살 위 형마저 자살하는 바람에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 났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를 안 믿으셨고, 제사에는 철저했지만 교회는 멀리하셨죠. 어머니는 평생 해녀로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 7남매를 키우셨지만, 안타깝게도 2명만 살아남고 5명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14살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고기잡이 배를 탔습니다. 11명의 선원이 있는 큰 배였는데, 저는 막내 선원으로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하루 20시간 넘게 일하며 밥하고 청소하고, 회 뜨고, 술 따르고, 담배 심부름까지 해야 했죠. 선원들의 구타와 폭언은 일상이었고, 제대로 된 밥조차 얻어먹기 힘들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커서 절대로 맞고 살지 않겠다' 다짐했습니다. 힘든 배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육지로 올라와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하지만 절에서 하루 만에 쫓겨났습니다. (웃음) 주지스님이 보시더니 "너는 중이 될 사람은 절대 아니다"라며 내쫓으셨죠. 결국 17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공장 노동자, 쌀집 머슴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억눌렸던 반항심 때문이었을까요? 싸움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 방어용으로 배운 기술이었지만, 결국 18살 때 술김에 싸움이 벌어져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고 소년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라 장발 단속이 심했는데, 단속 경찰에게 반항하다 폭행 사건까지 벌어진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시절이었지만, 가정 환경과 사회에 대한 불만, 반항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소년 교도소에서 죗값을 치르고 나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냉혹했습니다. 구두닦이를 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중,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가 쌓여갔습니다. 결국 20살 때 노상강도를 저질렀습니다. 술에 취해 길 가던 사람을 폭행하고 돈을 빼앗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적으로 완전히 어둠에 갇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노상강도 혐의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는데, 놀랍게도 구치소 안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예배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드려본 적 없었던 저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형수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생 형제가 설교를 하고, 사형수 형제가 대표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제 마음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사형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부르짖고, 울면서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곧 사형당할 사람이 뭐가 감사하다는 거지?'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형제는 구원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형수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형수 형제는 제게 "자신 몫까지 예수를 믿어달라" 부탁하며,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사형수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사형수의 간절한 외침은 제 가슴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1년 후, 교도소를 출소하여 우연히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가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난생 처음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중앙교회, 당시에는 대광교회였는데, 최복음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최복음 목사님은 7-80년대 유명한 부흥 강사셨죠. 신기하게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귓속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제 가슴속으로 뜨거운 불덩이처럼 파고 들어왔습니다. '내가 미쳤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체험이었죠. 그날 밤, 교회에서 철야 기도를 했는데, 새벽기도 직전,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를 해주신다고 회개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회개기도를 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목사님이 아니라 장로님이 지나가시다가 어깨를 스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온몸에 뜨거운 불이 쏟아지는 듯한 강렬한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마이크를 잡고 "나는 깡패였지만, 이제 목사가 되어 전국 교도소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전 세계를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입에서 막 쏟아져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은 정말 뜨거움 그 자체였습니다. 과거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성령 체험이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22살 때 성령 체험 후 선포했던 목회 비전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미국에서 20일, 3월에는 시애틀에서 30일 동안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해외 부흥회만 58번, 국내 집회는 3-400번 정도 인도했습니다. 과거의 저를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최근에는 3,500명 성도가 모이는 대형 교회에서 부흥회 강사로 초청받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2살에 성령 체험을 하시고 바로 선교를 시작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1년 정도는 방황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믿음도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뜨거웠지만, 말씀으로 뒷받침되지 못하니 금방 식어버리더군요. 결국 하나님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것이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 생활을 했습니다. 소위 '거지' 생활을 한 겁니다. 미국에는 노숙자 수가 4-5만 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미국 노숙자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며 그들을 안수하고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거지 생활에도 나름의 철학이 있더군요. 거지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 거지 근성이 있어야 하고, 둘째, 게을러야 하고, 셋째,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거지들에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고, 자유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10원 한 푼 없이 다 털어버리고, 노숙자들과 평안을 누린다고 하더군요. 버리는 법을 배울수록 자유로워진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과 죄책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늘 있었지만, 벗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20대 초중반, 넝마주이,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던 목사님께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거지 생활을 하면서도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혼자라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죠. 결국 술집 아가씨를 꾀어 거지 막사로 데려왔습니다. 동거 생활을 시작한 겁니다. 83년 10월 25일,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낳고 보니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너는 어쩌다 거지 막사에서 태어나 이런 고생을 하는 거냐' 탄식하며 아들을 바라보는데, 문득 '아들을 축복해줘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당시 알고 지내던 목사님은 영락교회 부목사였던 헌앙기 목사님이었습니다. 무작정 헌앙기 목사님께 연락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돌봐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헌앙기 목사님은 흔쾌히 거지 막사까지 찾아와 주셨습니다.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영락교회 구제 물품을 잔뜩 가지고 오셨습니다. 초라한 거지 막사에서 드려진 돌 예배, 헌앙기 목사님은 눈물을 글썽이시며 아들을 축복해주셨습니다.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는 믿음 없는 저에게도 응답될 것 같은 강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적어도 헌앙기 목사님의 축복기도라도 아들에게 남겨줘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의 축복기도 덕분이었을까요? 28년 후, 놀랍게도 그 기도가 100% 응답되었습니다. 목사님의 기도는 정말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던 아기 엄마와는 어떻게 되셨나요?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사셨나요? 아닙니다. 호적에 올리려고 알아보니, 아기 엄마는 이미 다른 남자 호적에 올라가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술집에서 도망쳐 나오느라 주민등록증조차 챙기지 못했고, 자신의 이름과 나이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던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결국 아기를 호적에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아이를 동방 아동복지시설에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들을 시설에 맡기고 나니,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일부러 사고를 쳐서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죄수들을 훈련시키는 혹독한 곳이었습니다. 8개월 동안 훈련을 받으며 겨우 죗값을 치르고 나왔지만, 여전히 거지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해장술을 마시고 있는데, 거지 막사 대장 '조마리'라는 사람이 이유 없이 저를 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30대 넘게 매를 맞을 때까지 술기운에도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하게 맞고 있는데, 문득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말씀이 마치 망치처럼 제 머리를 때리는 듯했습니다. '그래, 내가 22살 때 성령 체험하며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었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성경책을 찾아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담배 꽁초와 술병이 널브러진 엉망진창 성경책이었지만, 그것이 제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3일 동안 금식하며 회개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도 여러 번 금식기도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몰래 도둑질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조마리에게 매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든 덕분일까요?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3일 금식 동안 배고픔이나 갈증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술 담배는 물론 세상적인 욕심과 생각 자체가 싹 사라졌습니다. 집 근처 마트에 가서 3개월 작정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목사가 되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아뢰고, 동역할 아내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3개월 기도를 마치자, 하나님께서 놀라운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신앙 매거진에 아내를 구하는 광고를 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신앙 매거진에 광고를 냈는데, 50통이 넘는 편지가 답장으로 왔습니다. 그중 여섯 번째 편지가 지금의 아내, 천사 같은 아내와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내는 편지에 "목사님의 고생길을 함께 하겠다"고 적었습니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속으로 외쳤습니다. 아내와의 만남은 제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헌신 덕분에 제가 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 둘째 아들 역시 목사가 되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가 분명합니다.

천사 같은 아내를 만나 1년 8개월 동안 처갓집에서 살면서 암 투병 중인 장인어른을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아들로서, 데릴사위로서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장인어른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처갓집 살이를 하면서 굳게 다짐했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죄 짓고 깡패처럼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땀 흘리지 않고 얻는 것은 절대 먹지 않겠다. 정정당당하게 살아가겠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한문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아들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겠다!' 외골수적인 고집과 고든 정신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처갓집에서 나와 서울 변두리 방 한 칸에서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쉴 새 없이 파출부, 화장지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저는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야간 신학교를 다니며 목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사글셋방부터 시작해, 10년 만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10년 만에 얻은 작지만 소중한 보금자리였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에 물질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회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98년, 드디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 안수 받은 지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목사 안수 후, 놀라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정복지선교회에서 전국 교도소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서경석 장로님께서 저를 교도소 설교자로 추천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설교하러 간 곳은 제가 1년 동안 수감되었던 서울 구치소였습니다. 강도사 신분으로 서울 구치소 강단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설교 3일 전부터 잠을 설칠 정도로 긴장했지만,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한 복음을 힘차게 전했습니다. "과거 깡패였던 제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새 삶을 시작하십시오!" 제 진심 어린 외침에 재소자들은 뜨겁게 반응했습니다. 설교 후, "고봉준 강사에게 은혜가 있다"는 소문이 교정선교회 회장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교도소 설교 강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10번 이상 전국 교도소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교도소마다 재소자들이 제 설교에 열광했습니다. 점점 인기가 높아지면서, 저도 모르게 교만해졌습니다. 스스로 자만에 빠진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갑자기 교정선교회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갑자기 스케줄이 취소되고, 강사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쫓겨나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휩싸였습니다. 3개월 동안 하나님께 항의하며 원망했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저를 쫓아내십니까?' 하지만 3개월 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저를 낮추시기 위해 징계하신 것이구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다시 교정선교회에 복귀시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교정선교회 복귀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1년 동안 생선 장사를 하며 밑바닥 생활을 다시 경험해야 했습니다. 생선 비린내 나는 냉장고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생선을 팔며 땀 흘려 일했습니다. 3년의 연단 기간이 끝나갈 무렵, '하나님,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저를 창피하게 만드십니까?' 울부짖으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13년 동안 생선 장사를 하면서, 비로소 교만과 혈기, 미움과 원망, 불평불만이 완전히 깨지고 죽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장사꾼들과 부딪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화가 나도 속으로 삭이며 인내했습니다. 13년쯤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집회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집회 강사로 초청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황무지와 같았던 제 인생을 연단하시고, 비로소 불같은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혈기 넘치던 제 성격을 다듬으시고, 진정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주시기 위해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생선 장사 13년, 그 고생을 묵묵히 견뎌낸 아내에게 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아내 생각만 하면 눈물이 핑 돌고, 어디를 가든 아내 생각뿐입니다. 지난해 추석, LA 집회에 아내와 함께 가서 처음으로 그랜드캐니언을 구경시켜주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한 아내에게 작은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목사 되는 일이라면 어떤 고생도 감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충청도 안씨 집안 딸이라 억척스럽고 강단 있는 여인이지만, 속정 깊고 헌신적인 아내입니다. 돌이켜보면, 제 인생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함께했습니다.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사람 만나는 복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쁜 사람, 제 것을 빼앗아간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교정선교회에 소개해준 서경석 장로님, 영락교회 헌앙기 목사님, 그리고 지금의 담임 목사님이신 김봉주 목사님까지, 모두 제 인생의 귀인들입니다. 특히 김봉주 목사님은 저를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지원해주십니다. 미래목회포럼 회장이신 김봉주 목사님은 저를 하구목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게 해주시고, 장로 목사로 예우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분들을 통해 저를 끊임없이 인도해주셨습니다. 목사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20대 초반 헤어진 아들 이야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28년 만에 아들을 만나게 된 감동적인 스토리를 들려주시겠다고 하셨는데요. 28년 동안 아들을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아무리 설교를 해도, 재소자들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외쳐도, 집에 돌아오면 아들 생각에 괴로움뿐이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당신은 아들을 버린 나쁜 놈, 위선자 중에 최고 위선자야!' 스스로 자책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아들을 버린 놈이 무슨 목사 자격이 있어?' 끊임없이 자문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28년 동안 풀리지 않던 아들에 대한 죄책감, 하나님의 시간표가 되니, 기적처럼 해결되었습니다. 2011년 3월 24일, 홍성교도소 집회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내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당신 아들이 당신을 찾고 있대요!" 아내가 건네준 쪽지를 보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버린 아들이 28년 만에 나를 찾을 수 있다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동방 아동복지시설 사후관리팀에 연락하여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유치부 목사님과 함께 동방 아동복지시설을 찾아갔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긴장된 순간이었습니다. 시설 담당자는 제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미국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영어 편지를 한국어로 번역했고, 사진도 함께 보내왔습니다." 봉투를 열어 편지와 사진을 보는 순간, 함께 간 친구 목사님이 먼저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저 역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마시며 답장 편지를 썼습니다. '아들아, 용서해다오. 네가 용서해준다면, 아버지가 미국으로 가마.' 눈물 때문에 편지가 젖어 번지고, 글씨를 제대로 쓸 수조차 없었습니다. 겨우겨우 편지를 써서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28년 만에 아들을 만날 희망을 품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동방 아동복지시설과 연계된 미국 입양 기관 '딜런 인터내셔널'에서 28년 만에 아들과 재회했습니다.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 내 아들이 맞구나!' 직감했습니다. 얼굴에서 제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듯했습니다. 저는 원래 다혈질적인 성격이라, 아들을 보자마자 껴안고 "아아아!" 울부짖었습니다. 아들을 앉혀놓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들 앞에서 꿇어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탈진할 정도로 울고 나니, 통역사가 들어왔습니다. 통역사는 아들이 아버지께 전하는 말을 통역해주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기 힘들겠지만,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용서 선언에, 마음속에 맺혀있던 28년 묵은 응어리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양부모님과 장인, 장모님도 함께 자리했습니다. 저는 양부모님께 한국 속담을 인용하며 말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합니다. 28년 동안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들께 천 냥 빚을 졌습니다." 양부모님께 깊이 감사하며, 아들을 끌어안고 "My son!" 외치며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6개월쯤 지나 아들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아버지, 제가 박사 졸업을 합니다. 꼭 졸업식에 참석해주세요." 아들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미국 시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28년 만에 만난 아들이 어떻게 자랐을까, 정말 궁금했습니다. 만나는 과정 자체가 기적이었죠. 아들은 완벽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입양 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었을 겁니다. 첫째, 삐뚤어져 엇나가는 길. 둘째, 훌륭하게 성공하여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길. 아들은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밤낮으로 공부하여 명문 위스콘신 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까지 수석으로 받았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무려 15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입양아로서, 아시아계 입양아로서 겪었던 삶의 고통과 아픔을 책에 담아냈습니다. 아들은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밀워키 캠퍼스에서 도시계획학 박사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식에서 아들은 가장 먼저 저에게 학위 증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양부모님보다 먼저 저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진도 함께 찍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후로도 아들은 한국에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한양대학교 학술대회에도 참석하고, 한국 문화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현재 아들은 메트로폴리탄 주립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난 6월 15일 부교수로 승진했습니다. 지금까지 21권의 책을 썼다고 합니다. 아들의 꿈은 장관이 되어, 입양아와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들은 토요일마다 딸 셋을 데리고 와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한국 문화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며느리는 알레르기 전문 간호사로 아동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슬하에 11살, 9살, 5살 딸 셋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손녀딸이 셋이나 되니, 저에게는 늦둥이 복이 터진 셈입니다. 저는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늦둥이 손녀딸 셋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부모로서, 아들들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큰 아들, 둘째 아들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지만, 두 아들 모두 삐뚤어지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늘 기도하며 키운 보람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군대에서 군종 사병으로 복무하며 목사의 꿈을 키웠고, 둘째 아들은 신학대학에 진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셋째 아들은 요리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 아들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이해해줍니다. 과거 험악했던 아버지의 삶을 이제는 자랑스러워합니다. 늘 아들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제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삶을 잘 이해해주고 극복해준 아들들이 정말 대견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하나님의 시간표, 하나님의 계획표대로 이끌어오셨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인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도, 결국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이야기가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께 용기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또한 기대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앞으로 어떤 사역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도 설교 전문가, 복음 전파 부흥사입니다. 제게는 특별한 만남의 복이 있습니다. 쿰란 출판사 사장님을 만나, 제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은 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시며, 감동적인 책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제 책을 교도소에 기증하고 있습니다. 전도와 설교를 병행하며, 캐리어 가득 책을 싣고 교도소를 방문하여 재소자들에게 책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놀라운 간증도 있었습니다. 제 책을 읽은 재소자가 자신을 체포했던 형사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형사님, 제 책을 읽어보시고 예수님을 믿어주세요." 며칠 후, 일산 경찰서 김동국 형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재소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목사님 책을 읽었는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 편지를 드립니다." 김 형사님께 1만 권의 책을 기증받아,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가지 못하는 곳까지 책이 대신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간증 집회뿐 아니라, 책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문서 선교 사역에 힘쓸 것입니다. 또한, 영치금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재소자들을 돕는 사역도 계속할 것입니다. 교도소 재소자 10명 중 1명은 영치금이 전혀 없는 빈털터리라고 합니다. 아파도 약을 사 먹을 수조차 없는 불우한 재소자들을 위해, 몰래 영치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과거 저처럼 힘들고 어려운 재소자들을 돕는 일에 헌신할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 외에는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목사님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쓰신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운 과거까지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시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듣다 보니, 교도소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교도소 안에 있는 재소자들만 죄인인 것이 아니라, 교도소 밖에 있는 우리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법에 걸리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고봉준 목사님의 인생 후반전, 그리고 마지막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음악]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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