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금·이현주 30년 인도네시아 빈민 사역 감동 실화
## 30년 헌신, 눈물의 씨앗이 희망의 꽃으로: 인도네시아 빈민 사역 감동 실화
30년 헌신, 눈물의 씨앗이 희망의 꽃으로: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의 인도네시아 빈민 사역 감동 스토리
유튜브 채널 '새롭게하소서'에 공개된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 부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인도네시아 빈민들을 위해 헌신한 두 선교사의 삶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믿음의 힘을 보여주는 귀한 본보기인데요, 본 글에서는 2만 자 내외의 분량으로 방송 내용을 상세히 정리하고, 두 분의 놀라운 사역 노하우와 감동적인 스토리를 자세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함과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두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삶과 사역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떠날 수 없어요" 고난 속에서 피어난 굳건한 헌신
방송은 MC 주영훈 님의 밝은 인사와 함께 시작되었는데요, 이어 안수지, 정봉길 님의 소개로 오늘의 주인공인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 부부가 등장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을 입고 환한 미소로 인사하는 두 선교사의 모습은 30년이 넘는 사역의 연륜과 따뜻한 마음씨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했습니다. 주영훈 MC는 "건강도 잃고, 부모님도 아프신 상황 속에서도 인도네시아를 떠날 수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라며 두 선교사를 소개했는데요, 이 짧은 소개만으로도 두 분이 얼마나 굳건한 헌신을 가지고 사역에 임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는 유창한 인도네시아어로 인사를 건네 놀라움을 자아냈는데요, 이현주 선교사는 아름다운 인도네시아 전통 의상에 대한 칭찬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MC들은 두 선교사의 밝고 긍정적인 모습에 감탄하며, 30년 사역의 여정 동안 겪었을 수많은 어려움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밝고 건강해 보이는 두 선교사에게도 말 못 할 고충과 아픔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었는데요,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두 선교사가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고 사역을 이어왔는지 자세히 소개될 예정입니다.
2. 폐쇄된 기차역, 운명을 바꾼 결정적 순간
최원금 선교사는 교회 목회를 그만두고 인도네시아 빈민 사역에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폐쇄된 기차역"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는데요,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10년간 안정적인 목회를 이어가던 중, 인도네시아 선교의 길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요?
이야기는 10년 목회 중 만난 지미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지미 선생님은 어려운 이웃들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지만, 일반 교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형편상 목사님을 모셔 예배를 드릴 수도 없는 상황임을 전하며 최 선교사에게 예배 인도를 부탁했습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던 최 선교사는 흔쾌히 수락했고, 이를 계기로 한인 교회 목회와 현지 빈민 사역을 병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예배 후 방문한 "폐쇄된 기차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최 선교사는 지미 선생님을 따라 폐쇄된 기차역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300명의 노숙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기차가 끊긴 기차역은 더 이상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가난과 절망,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로 가득 찬 "빈민 촌락"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기차 레일 위에 널빤지를 대충 덮어 만든 "방", 박스 쪼가리로 만든 "옷장" 등 최악의 주거 환경은 충격적이었는데요, 특히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 뒤에 감춰진 가난과 고통은 최 선교사의 마음을 deeply 울렸습니다. 이 폐쇄된 기차역은 단순히 "버려진 공간"이 아니라, 최 선교사의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꾼 "운명적인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최 선교사는 한인 교회 목회를 정리하고 빈민 사역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3. 도시 빈민의 현실, 외면할 수 없었던 고통
자카르타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발전된 도시이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도시 빈민 문제가 존재합니다. 세계적인 도시 집중화 현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도시로 몰려들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농촌 생활은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농작물 수입에 의존해야 하지만, 도시에서는 일용직 노동이라도 통해 매일 작은 돈이라도 벌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빈민들이 도시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시 생활은 높은 물가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더욱 힘겨울 수밖에 없고, 결국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최 선교사는 자카르타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빈민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후원 어린이를 만나기 위해 자카르타에 온 아이가 수십 시간 버스를 타고 와서 처음 쇼핑몰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도시 빈민의 현실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고 합니다. 쇼핑몰의 화려한 조명과 넘쳐나는 상품들은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처한 "가난"과 "절망"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시키는 "잔인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최 선교사는 도시 빈민, 특히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교육 사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4. "눈물 젖은 빵"의 기억, 사역의 원동력이 되다
최원금 선교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최 선교사는 어머니와 함께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학비는 300원이었는데, 그 작은 돈조차 제때 내지 못해 교무실에 불려 가 혼나기 일쑤였습니다.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 상실"과 "사회적 소외감"을 동반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최 선교사는 어린 시절 겪었던 "눈물 젖은 빵"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특히 건빵 봉지에 얽힌 가슴 아픈 추억은 듣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용돈이 생겨 건빵 한 봉지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최 선교사는 여동생과 함께 논두렁에 앉아 건빵을 나눠 먹었습니다. 고소하고 달콤한 건빵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빈 봉지를 들고 아쉬워하는 여동생에게 최 선교사는 "오빠가 군대 가면 건빵 많이 가져올게"라고 약속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약속이었지만, 그 속에는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설움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최 선교사에게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미국 후원자와 연결되어 매달 5달러의 후원금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의 작은 정성은 어린 소년에게 큰 힘이 되었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최 선교사는 어린 시절 받았던 사랑을 잊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갚고자 빈민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는 최 선교사의 모습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5. 운명적인 만남, 사모님의 헌신과 동역
이현주 사모님 역시 고등학교 시절 예수님을 만나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1980년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집회에 참석했던 이 사모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선교 헌신을 결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집회 현장에서 최원금 선교사 역시 동시에 선교 헌신을 서약했습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던 두 사람은 10년 후 운명처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고 함께 인도네시아 선교 길에 나섰습니다. 마치 영화 같은 운명적인 만남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현주 사모님은 헌신적인 남편을 내조하며 빈민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 남편 따라 고생하겠다"고 걱정했지만, 이 사모님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주신 것에 감사하며 사역에 동참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모님은 무료 급식 사역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인 "밥 짓는 일"을 도맡아 하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밥을 사서 나눠줬지만, 점점 질이 떨어지는 도시락을 보며 직접 밥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성도들과 함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준비하여 기차역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고된 육체노동을 요구했지만, 사모님은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사모님은 봉사자들과 함께 700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방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건물에서 밥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는 과정은 탈수 증상을 일으킬 정도로 힘들었지만, 사모님은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특히 밥이 상하지 않도록 식히는 과정에서 햇볕에 장시간 노출되어 손에 검버섯이 생길 정도로 고생했지만, 사모님은 오히려 "예수님을 대접할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며 사역에 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현주 사모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헌신은 최원금 선교사의 사역에 큰 힘이 되었고, 함께 인도네시아 빈민 사역을 이끌어가는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6.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믿음으로 나아간 급식 사역
무료 급식 사역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두 선교사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한인 교회 목회를 그만두고 무료 급식 사역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걱정했습니다. 안정적인 수입과 사택이 보장된 목회를 포기하고, 당장 재정적인 후원도 약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료 급식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무모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 선교사는 "좁은 길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마치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어려움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급식 사역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밥을 지을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막막한 상황 속에서 기도하던 중, 놀랍게도 현지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교회 건축 현장의 임시 처소를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8개월 후에는 그곳에서 나와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장소를 예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기차역 근처는 우범 지역이라 오히려 안전하고 교통도 편리하며 가격도 싼 새로운 장소를 찾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렌트비"라는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가 닥쳤습니다. 바로 그때, 한 교회 담임 목사님이 2년간 렌트비를 지원하겠다는 기적적인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조지 뮬러의 5만 번 기도 응답 처럼 기적적이었습니다.
쌀 문제도 기적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새로운 센터 공사를 마무리할 무렵, 얼굴도 모르는 한 성도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쌀을 후원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성도는 남편 생일마다 잔치를 여는 대신, 쌀을 기증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결심했고, 최 선교사의 사역 소식을 듣고 연락했습니다. 이후 매년 남편 생일마다 5포대의 쌀이 해피 센터로 배달되었습니다. 장소, 렌트비, 쌀 등 급식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기적처럼 채워지는 과정을 경험하며, 최 선교사 부부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특히 남편 최 선교사는 시장 볼 때 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아내의 말에 힘을 얻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7. 나눔의 손길, 사랑과 섬김의 결정체
무료 급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나눔의 결정체"입니다. 최 선교사 부부는 매주 세 번, 700인분의 식사를 준비하여 8개의 빈민 촌을 방문합니다. 메뉴는 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닭튀김과 밥, 오이, 칠리소스로 구성된 도시락입니다. 더운 날씨에도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튀김 요리를 선택했고, 봉사자들의 일손을 고려하여 조리 과정이 간단한 메뉴를 결정했습니다. 도시락은 위생을 최우선으로 하여 꼼꼼하게 준비됩니다.
급식 사역 초기에 주변에서는 "무료 급식이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역을 진행해 보니, 무료 급식은 오히려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하루 한 끼 식사조차 어려운 빈민들에게 무료 급식은 "생명줄"과 같은 존재입니다. 끼니를 걱정 없이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최 선교사는 "배고픔은 게으름의 핑계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먼저 먹여 살려야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료 급식은 단순히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빈민들의 삶을 지탱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소중한 발판"입니다.
8. 고난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사랑, 사모님의 건강 악화
헌신적인 사역 가운데 최원금 선교사 부부의 건강에는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남편 최 선교사는 과거 중금속 중독으로 고생했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렵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어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내 이현주 선교사 역시 몸에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종양 크기가 점점 커져 3cm가 넘으면 위 절제 수술까지 고려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두 선교사는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멈출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무료 급식 사역은 누군가에게 쉽게 맡길 수 있는 사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선교사는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실 것"이라며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이 사모님은 "사역을 하다 보면 자기 몸을 돌볼 겨를이 없다"며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두 선교사의 헌신적인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현주 선교사는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 때문에 사역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도네시아 아이들은 인사할 때 악수와 함께 얼굴에 손을 대는 "존경의 표시"를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귀한 엄마"처럼 생각하는 모습을 보며 사역을 계속해야 할 "동기 부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최 선교사 역시 어린 시절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목회자와 선교사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들의 수고와 사랑이 아이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두 선교사의 사랑과 헌신은 단순히 "봉사활동"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과 "미래"를 바꾸는 "숭고한 헌신"입니다.
9. "꽁으로 얻었어요" 자녀들의 성장,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선교사 부부에게 자녀 문제는 늘 마음 쓰이는 부분입니다. 헌신적인 사역 때문에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아들은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큰 아들은 대한항공 조종사 훈련 과정을 밟고 있고, 둘째 아들은 군 복무 후 로스쿨 진학을 준비 중입니다. 두 선교사는 자녀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사춘기 시절 방황하기도 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현주 선교사는 무료 급식 사역 초창기에 자녀들에게 소홀했던 미안함을 털어놓았습니다. 사역 때문에 아이들에게 인스턴트 식품을 자주 먹이고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큰 아들은 인스턴트 식품 섭취 때문에 아토피 피부염과 체중 감소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은 오히려 엄마 아빠를 이해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갔습니다. 두 선교사는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함께 전했습니다.
최원금 선교사는 자녀 교육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일반 부모들처럼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친히 돌보시고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꽁으로 얻은 것"이라고 표현하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자녀 교육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고백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기대로 힘들어하지만, 최 선교사의 고백은 자녀 교육의 본질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면 자녀 문제 또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10. 교육의 힘, 미래를 만드는 놀라운 변화
최원금 선교사 부부는 무료 급식 사역뿐만 아니라 "교육 사역"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급식 현장에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밥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을 보며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학용품이나 교복 등을 마련하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 전달"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전인격적인 성장"을 돕는 "사랑의 터전"입니다.
학교 운영 초기에는 출석률이 저조했습니다. 교복 문제, 교실 부족, 부모님의 무관심 등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최 선교사 부부는 포기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후원을 받아 교복을 지원하고, 교실을 확충하고, 출석 우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점점 출석률이 높아지고 교육 환경이 개선되었습니다. 특히 "말씀 암송"을 강조하는 교육 방식은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성취감"을 심어주는 효과를 보였습니다. 말씀 암송 대회, 성경 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은 말씀 안에서 꿈을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육 사역의 결실은 누르마라는 학생의 성공 스토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누르마는 빈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최 선교사의 후원으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한국 한동대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에도 참여했고,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대기업에 취업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누르마의 성공 스토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누르마 이후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에 성공하는 등 교육 사역의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 선교사 부부는 눈물의 기도로 세운 학교를 통해 430명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래 인도네시아를 짊어질 "리더"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1. 멈추지 않는 사랑, 안식년 없는 헌신
최원금 선교사 부부는 30년 사역 동안 단 한 번의 "안식년"도 제대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선교 단체에서 강제적으로 안식년을 권유했지만, 현실적으로 사역을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매주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을 관리해야 하고, 위험 물품 관리, 회계 처리 등 현지인에게 맡기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료 급식 사역은 하루라도 멈추면 당장 굶주리는 빈민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쉽게 중단할 수 없었습니다. 두 선교사는 자신들의 "건강"보다 "사역"을 먼저 생각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안식년 없이 쉼 없이 달려온 두 선교사에게 "휴식"은 사치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선교사는 "인도네시아가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생각하면 "우리 인도네시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두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를 향한 "특별한 사랑"과 "사명감"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육신하신 것처럼, 누군가는 인도네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두 선교사를 계속해서 사역의 현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힘든 사역이지만, 두 선교사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하며, 사역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12. "부모님을 부탁드립니다" 무거운 마음, 기도로 승화
고령의 부모님 문제는 두 선교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또 다른 짐입니다. 94세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시고, 장모님 역시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15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하셨고, 최근에는 치매 증상까지 보이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아버지는 18년 동안 아픈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하고 계시지만, 점점 지쳐가시는 모습을 보며 자식으로서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 선교사는 "선교사로서 후회는 없지만, 딸로서 부모님께 다 하지 못하는 죄송함은 늘 마음속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어머니는 전화를 할 때마다 "언제 한국에 들어오느냐"고 물으시고, 만날 때마다 "언제 가느냐"고 재촉하십니다. 자녀들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어머니의 말씀은 최 선교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하지만 두 선교사는 부모님 문제를 "기도"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돌봐주시고, 돕는 사람들을 붙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사모님은 "새롭게하소서 시청자분들이 함께 기도해 주시면 큰 힘이 될 것 같다"며 "부모님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에게 부모님 걱정은 가장 큰 짐이지만, 두 선교사는 "믿음"과 "기도"로 이 또한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13. 해피 센터를 지켜주세요, 간절한 기도
방송 마지막에 최원금 선교사는 "해피 센터"를 위한 간절한 기도 부탁을 전했습니다. 해피 센터는 무료 급식 사역의 중심지이자, 교육 사역과 교회 활동의 중요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건물 주인이 건물을 팔려고 하면서 해피 센터가 존폐 위기에 놓였습니다. 4억 원의 매각 대금은 두 선교사에게 너무나 큰 돈입니다. 하지만 해피 센터를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건물이 매각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해결된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해피 센터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해피 센터는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빈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랑의 공간"입니다. 매일 700명의 빈민들이 해피 센터에서 따뜻한 식사를 하고, 아이들은 꿈을 키우며 미래를 준비합니다. 해피 센터가 없어진다면 당장 수많은 빈민들이 갈 곳을 잃게 됩니다. 최 선교사는 "해피 센터는 빈민들에게 생명줄과 같은 존재"라고 강조하며 "해피 센터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두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에 "새롭게하소서 시청자"들의 따뜻한 마음과 기도가 더해진다면, 해피 센터를 지켜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선교사의 30년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해피 센터를 통해 더 많은 희망의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14. 마지막 인사, 감사와 축복
방송 마지막 인사에서 최원금 선교사는 지난 30년 사역을 돌아보며 "의미 있는 일,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게 사역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늘 격려와 힘이 되어주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이현주 선교사는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도 있었지만, 시편 23편 말씀처럼 주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믿음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앞으로도 믿음이 더욱 성장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주영훈 MC는 두 선교사의 감동적인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마지막 장면은 여의도 집회에서 선교 헌신을 서약하던 두 분의 모습으로 장식될 것 같다"며 두 선교사의 앞날을 축복했습니다. 정봉길 MC 역시 "정답을 알면서도 가기 힘든 선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두 분의 모습에 존경심을 표하며,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해 놓으셨을 것"이라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MC들은 시청자들에게 두 선교사와 해피 센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며 방송을 마무리했습니다. 30년 헌신, 눈물의 씨앗이 희망의 꽃으로 피어난 최원금, 이현주 선교사의 감동 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