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선교사 공인현의 헌신과 사랑, 감동적인 나눔 이야기
[새롭게하소서] 케냐, 눈물과 사랑으로 일군 헌신: 공인현 선교사
눈물을 닦아주는 케냐인의 친구, 공인현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롭게 하소서 김학중 목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전혜진입니다. 혜진 집사님은 워낙 성격이 좋으셔서 주변에 친구나 지인들이 굉장히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긍정적인 성격과 좋은 친구의 조건을 갖추고 계신 혜진 집사님께 좋은 친구의 조건이 무엇인지 여쭤보았습니다. 혜진 집사님께서는 숨김없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속마음을 그대로 나눌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친구의 조건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오늘 저희가 만나 뵐 분은 피부색과 환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의 친구야"라는 마음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시는 케냐에서 오신 공인현 선교사님이십니다. 과연 공인현 선교사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화면을 통해 함께 만나보시겠습니다.
"그들 또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자녀란다." 찬양 사역자의 안정된 자리를 내려놓고 아프리카 케냐로 떠난 공인현 선교사님은 그곳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병으로 고통받는 자의 마음을 치유하며 주님이 흘리신 눈물을 생각했다는 공인현 선교사님.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쁨으로 섬겼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케냐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공인현 선교사님의 진솔한 고백을 지금부터 함께 들어보시겠습니다.
공인현 선교사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아프리카 케냐에서 살고 있는 공인현 선교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케냐에 가신 지는 얼마나 되셨는지 여쭤보자,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2002년 2월 22일에 케냐에 도착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월드컵 때 케냐에 가셨다는 김학중 목사님의 말씀에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그전에 혼자 잠시 케냐에 갔었다고 덧붙이셨는데요, 공인현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선교 단체, 특히 대학생 모임에서 찬양 인도자로 사역하셨고, 강의 집회도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2010년 안식년에는 예배 찬양 앨범을 발매하시기도 했으며, 작년에는 3집 앨범까지 발매하며 케냐 선교사이자 찬양 사역자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언제부터 찬양 사역자의 꿈을 꾸게 되셨는지 궁금한데요,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고등학교 1학년 때쯤 우리나라에 기타와 드럼을 치는 찬양 선교단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찬양 사역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성대가 매우 약하여 통성기도를 조금만 해도 일주일 정도 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하루는 작정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성대를 강하게 해 주시면 평생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놀랍게도 기도 이후 성대가 강해진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루에 10시간씩 강의를 해도 목에 무리가 없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 노래를 부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성대 상태가 80대 노인의 성대와 같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오히려 의학적으로 약한 성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찬양 사역자로 사용하시는 통로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찬양에 대한 목마름, 부족한 여건 속에서 더욱 간절했던 갈망이 은혜로운 찬양 사역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부르셨는지 여쭤보자,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음악을 공부하고 음대에 진학했지만, 대학 시절에는 노래 공부 대신 학생 운동에 열심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7학번으로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학에 진학하면 진실과 정의를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이 학생 운동으로 표현되었고, 음대생임에도 불구하고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학생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지명수배 생활을 하기도 했고,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26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 연루되어 20일 동안 가혹행위를 당하고 독방에서 겨울을 보내는 고초를 겪기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공인현 선교사님의 삶 속에서 일어난 것인데요, 두 번째 구속되었을 때는 억울한 마음이 컸다고 합니다. 처음 출소 후 학생 운동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운동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게 다시 연행되어 20일 동안 독방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면서, 75억 인구가 살아가는 지구촌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함과 무고한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말씀 묵상과 찬양,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을 부르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한 영혼의 존귀함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통해 더 깊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되셨군요. 그렇다면 그 이후 찬양 사역자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오셨는지 궁금한데요.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5~6년의 대학 생활과 학생 운동, 두 번의 수감 생활을 통해 가치관의 혼란과 우울증을 겪으며 자살 시도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삶의 마지막 끈을 붙잡고 싶었던 그는 전임 사역자의 삶을 택하게 되었고, 선교 단체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예수원가는길에 들어가 찬양 사역에 대한 꿈보다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1994년 르완다에서 종족 갈등으로 인한 학살과 희생을 담은 신문 기사를 보게 되면서 멈출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 "공부도 싫어하고, 깔끔한 성격이라 열악한 환경도 힘들겠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선교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찬양 사역과 말씀 전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계획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획은 아프리카 선교였던 것입니다.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찬양 인도와 강의를 통해 아프리카에 대한 마음이 점점 사라져갈 때쯤, 2001년 찬양 인도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아들아, 네 찬양을 기쁘게 받는다. 하지만 가난과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가는 나의 자녀들을 잊지 말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2002년 첫째 아들 다니엘이 33개월, 둘째 아들 이삭이 9개월 되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 케냐로 향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시지만,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케냐에서의 삶은 어떠셨을까요?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어려움은 지금도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어려움은 결국 연약함의 문제이며, 연약함을 통해 더욱 소망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외국인으로서 겪는 일상적인 어려움, 풍토병으로 두 번의 생명 위협, 네 번의 무장 강도 습격 등 환경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깨어진 관계, 말로 인한 상처와 루머 등 내면적인 어려움도 겪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케냐를 떠나지 않고 꿋꿋이 사역을 이어가고 계신데요, 그렇다면 케냐에서 처음 시작하신 사역은 무엇이었을까요?
아프리카 최대 빈민 지역인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키베라 지역에서 2003년부터 점심 급식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키베라 지역은 우리나라 종합대학교 정도의 면적에 1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곳으로, 위생 시설이 열악하여 '나는 변기'라고 불리는 비닐 봉투에 용변을 보고 길거리에 던지는 일이 일상적인 곳입니다. 좁은 골목길은 오물로 가득하고, 비가 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에이즈 환자 비율 또한 매우 높은 지역이라고 하는데요, 이곳에서 시작한 급식 사역은 학교 건축으로 이어졌고, 현재는 현지 사역자들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급식 사역을 시작으로 교회 학교 사역, 지역 사회 개발 사역 등 다양한 사역으로 확장되었는데요,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사역을 계획하거나 준비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눈물과 마음, 열정으로 생명을 살리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키베라 급식 사역을 마치고 학교 문을 나설 때, 눈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사역 시작 전 교통사고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기에, 첫 사역을 마친 감격과 안도감에 눈물이 났던 것인데요, 그때 주님께서 "아들아, 네가 흘리는 눈물은 나의 눈물이다. 이 아이들보다 더 고통받는 나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후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땅, 투르카나를 향하게 됩니다. 투르카나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1,000km 떨어진 사막과 광야 지역으로, 험난한 여정과 무장 강도의 위험, 차량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입니다. 키베라 급식 사역을 이어가던 중 미국 전도여행팀의 도움을 받아 투르카나를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나의 자녀들을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먼저 너를 변화시키고, 네가 택한 나의 자녀들이 예배하는 공동체가 조건 없이 나누기 시작하면 이들의 삶이 변화될 것이다." 투르카나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살아있어 달라. 식량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실적으로 식량을 나눌 재정이 부족했습니다. 나이로비로 돌아와 아내와 상황을 나누고 통장을 확인했지만, 키베라 급식 사역과 월세 지출을 감당하기에도 빠듯한 상황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투르카나로 향했습니다. 옥수수와 옥수수 가루를 가지고 투르카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고, 아이들은 옥수수와 모래를 함께 주워 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지쳐있었습니다. 그때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다섯 살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의사가 아니었기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아이에게 "하나님이 너를 치료하실 거야"라고 말하고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아이가 네 아들 다니엘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는 마음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다시 아이에게 돌아가 "살아있어 줘. 약과 의사 선생님을 데려올게"라고 약속하고, 나이로비로 돌아왔습니다.
나이로비에서 현지 동역자와 새로운 현지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친구가 의사였습니다! 투르카나 사역을 간절히 원하던 의사 형제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역을 계획하거나 재정을 준비한 적 없이, 하나님의 눈물과 마음, 열정만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항상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이후 선교사가 없고 교회가 없는 마을을 찾던 중 마사이 지역의 렌토라이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렌토라이 역시 사막과 광야 지역으로 야생동물이 출몰하는 위험한 곳인데요, 10년 전 렌토라이에서 어린아이들의 귀에서 고름이 흘러내리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저는 예레미야이고, 저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전하고 치료해주었습니다. 한 달 후 다시 렌토라이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의 고름이 멈추고 눈의 짓물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라움과 감격에 휩싸였습니다.
마사이 사람들은 조건 없이 자신들을 치유해 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다며 교회 설립을 요청했습니다. 통나무와 가시나무 그늘 아래에서 예배를 시작했고, 함석판으로 임시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이후 벽돌 교회 건축, 유치원 설립, 교회 공동체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 200명의 아이들이 교회에서 예배하고 공부하며 점심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마을의 중요한 결정을 함께 기도하며 내리고, 교회와 학교, 강당, 주민회관, 학교 식당 건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인현 선교사님은 렌토라이 지역에 보건소 건축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의료 시설이 부족한 렌토라이 사람들에게 기초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현지 의사 형제와 함께 의료 사역을 확장해나갈 계획입니다. 설사약 하나, 항생제 하나, 해열제 하나가 없어 생명을 잃는 사람들을 살리는 의료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이 변화되는 모습 또한 감동적인데요, 마사이 공동체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 국제적으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여쭤보았습니다.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그분들의 변화된 모습보다 그분들로 인해 제가 더 변화되는 것 같다"고 겸손하게 답하셨습니다. 2년 전 마사이 교회 공동체는 공인현 선교사님이 없을 때 자발적으로 모여 10km 떨어진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나누고자, 가난한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선교적인 공동체로 변화된 것입니다. 공감하는 공동체, 찾아가는 공동체, 아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을 기꺼이 나누는 청지기 공동체의 모습을 마사이 공동체를 통해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특별 예배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는 삶을 살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예배 후 마사이 교우 가정이 염소 한 마리를 예배당으로 가져왔습니다. 염소 네 마리가 전 재산인 가정이 크리스마스에 염소들이 도망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세 마리는 잃고 한 마리를 찾은 후, 남은 염소를 고아와 과부,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른 교우들도 염소를 나누겠다는 감동적인 고백이 이어졌고, 모두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눔이 일상화된 마사이 공동체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광야와 같은 케냐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불렀을 찬양이 궁금한데요, 찬양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재정에 대한 태도와 세상의 영광과 인정을 받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 사역을 돌아보며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는데요, 2년 전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내가 너의 미래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찬양 "내 마음에 주여 소망되소서"를 함께 불렀습니다. (찬양 가사)
찬양 사역과 선교 사역을 하시면서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리셨을까요? 아프리카 케냐 사막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말라리아로 죽어가던 아이는 약을 전달받아 살아났는지 궁금해 하시는 김학중 목사님의 질문에,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아이들이 20대가 되었고, 10년 전의 일이라고 답해주셨습니다. 주부 입장에서 급식 사역, 에이즈 환자 돌봄, 의료 봉사 등 다양한 사역을 위한 경제적인 지원은 어떻게 감당하는지 질문했는데요,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파송 교회나 단체 없이, 친구가 되어준 후원 교회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의료 봉사 사역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보건소 건축 후 다시 시작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방송을 보시는 분들 중에 후원을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연락을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전하며, 2주 전 에이즈 사역 식량 헌금이 중단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줄이고 덜 먹으며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끝으로 기도 제목과 비전을 나눠달라는 요청에, 공인현 선교사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태도라고 강조했습니다. 선교사로 나갈 때 붙잡았던 빌립보서 2장 5절~8절 말씀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가장 낮은 자세로 섬기는 삶,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에이즈 가정 사역을 위한 식량 헌금이 필요한 상황과 내년에 마사이 교회 공동체가 개척한 교회를 벽돌 교회로 건축하고 싶은 비전을 나누며, 축복의 통로가 되어줄 교회와 사람들을 만나기를 소망했습니다. 오늘 간증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공인현 선교사님의 사역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공인현 선교사님을 통해 나눔의 진정한 의미와 공동체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듯이, 우리 또한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어주고, 눈높이를 낮춰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높은 곳에 있다면 아래로 내려와 눈높이를 맞추고,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새롭게하소서, 오늘 여기서 인사드리고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