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만원과 성경으로 중국 요식업 성공신화 전용희 간증
## 120만원과 성경으로 쓴 중국 기적, 요식업 성공신화 간증
차이나드림 성공신화, 기적의 사나이 전용희 대표의 간증: 120만 원과 성경으로 이룬 놀라운 성공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 김학중 목사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정말 특별한 분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유독 사람들이 북적이는 가게들, 소위 대박 가게라고 불리는 곳들이 눈에 띄는데요, 이런 대박 가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공의 1% 비밀, 즉 그들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죠.
전혜진 집사님도 장사를 해보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혹시 장사를 한다면 어떤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으신가요? 저는 어릴 적부터 옷가게를 운영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친구 옷가게에 가서 옷을 팔아주는 것을 돕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제가 판매를 도울 때마다 옷이 잘 팔리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전혜진 집사님은 손재주와 감각이 뛰어나시니 무엇을 하시든 성공하실 것 같습니다. 저는 단순히 옷만 파는 것이 아니라, 옷을 판매하면서 예수님을 전하는 특별한 옷가게를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늘 품고 있습니다.
역시, 새롭게하소서의 안방마님다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오늘 저희 새롭게하소서에서는 특별히 중국에서 보따리 장사라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요식업계의 대부로 우뚝 선, 자랑스러운 한국인 전용희 대표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중국에서 전용희 대표님의 가게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사업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역도 감당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자, 그럼 지금 바로 기적의 주인공, 전용희 대표님을 만나 뵙겠습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일찍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청년이 되어 120만 원이라는 적은 돈과 성경책 한 권을 들고 낯선 땅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충우돌을 겪은 끝에, 마침내 그는 기적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 총 30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CEO 전용희 대표님을 모시고, 그의 놀라운 성공 스토리를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전용희 대표님,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소개해 드린 대로 중국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시고, 복음 전파에도 힘쓰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대표님을 직접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전용희 장로입니다. 오늘 귀한 프로그램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하여 시청자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부족한 사람의 지난 삶을 간증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더욱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저는 장로님이라고 하셔서 연세가 지긋하신 분일 줄 알았는데, 뵙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젊고 활력이 넘치시는 모습입니다. 올해 장로님으로 임직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중국에는 몇 년째 거주하고 계신가요?
중국에서 생활한 지 벌써 18년째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국에서 운영하시는 매장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몇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계신가요?
현재 베이커리 매장이 25개, 이탈리안 레스토랑 '내소화피자' 매장이 5개로, 총 30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전용희 대표님을 '기적의 사나이', 한국에서는 '로또 맞은 사나이'라고 부를 정도로 성공적인 사업가로 인정받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번듯한 사업체의 CEO가 되셨지만, 과거에는 매우 힘든 시절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12살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12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아버님은 폐결핵을 앓고 계셨는데, 돈만 있었다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셨습니다. 결국 아버님은 12살의 어린 저와 어머니, 그리고 세 명의 어린 동생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겨우 36세의 젊은 나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사님보다도 어리셨을 것 같습니다.
36세의 나이에 네 아들을 홀로 키우셔야 했던 어머니의 고생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요즘 시대라면 36세 여성은 충분히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는 나이이지만, 어머니는 오직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며 사셨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를 돕기 위해 12살 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동아일보 신문 배달을 했는데, 무려 120부나 배달했습니다. 120가구에 신문을 배달해야 했으니, 어린 나이에 정말 힘든 일이었죠. 신문 배달 가방과 배낭에 신문을 가득 싣고, 때로는 신문 묶음을 옆에 끼고 다니며 배달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지만, 어떻게든 어머니를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신문을 배달했습니다. 신문 배달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늦은 시간이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하는 고된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렇게 신문 배달을 시작으로 어머니를 돕기 위한 저의 생활 전선이 시작되었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신문 배달부터 시작하여 정말 쉴 틈 없이 고생하셨습니다. 신문 배달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하시면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장남인 저에게 어떻게든 공부를 시키려고 애쓰셨지만,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결국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장안동에 있는 '만리장성'이라는 짜장면집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리장성'이라는 짜장면집에서 일한 것이 묘하게 중국과 연결되는 인연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중국에서 성공할 것을 미리 아시고, 중국과 인연을 맺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짜장면집에서 열심히 일하여 처음으로 받은 월급이 3만 원이었습니다. 1984년, 당시 3만 원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돈이었죠. 짜장면집 일이 늦게 끝나 밤 10시쯤 되어 퇴근했는데, 장안동에서 천호동 집까지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빨간 내복과 동생들과 나눠 먹을 단팥빵을 샀습니다. 빵집 쇼케이스 안에 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있었는데, 너무나 먹고 싶었지만 차마 살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달 월급을 받으면 꼭 사다 줘야겠다고 마음먹고 단팥빵만 사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지금도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보면 그때 생각이 나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밤 12시가 넘어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제가 좋아하는 아욱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서는 소리에 동생들이 부스스 일어나 빵 봉지를 보고 달려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고, 우리 아들 고생했다" 하시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밥상을 차려주셨지만 어머니는 드시지 않고, 빵이라도 드시라고 권해도 괜찮다며 동생들에게 양보하셨습니다. 겨우 단팥빵 하나를 어머니께 드렸는데, 어머니께서 빵을 입에 넣으시자마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짜장면 배달을 하면서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고, 찬물에 손을 담그고, 온갖 궂은일을 하다 보니 제 손은 늘 갈라지고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제 손을 보시고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을 멈추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너희들을 고생시켜서 너무 미안하다"며 우셨고, 저는 어머니께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빵집 사장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단팥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배고픔 없이 살 수 있도록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저는 진심으로 빵집 사장이 되겠다고, 꼭 성공해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린 마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효심과 가족을 위한 헌신, 그리고 빵집 사장이 되겠다는 꿈은 훗날 제가 중국에서 성공하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장로님의 효심이 느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장로님도 힘든 시간을 보내셨지만, 어머니께서는 더욱 힘든 삶을 사셨을 것 같습니다.
네, 어머니는 정말 억척스럽게 저희 네 형제를 키우셨습니다. 36세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어린 네 아들을 홀로 키우셔야 했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어머니께서 막내 동생을 임신하셨을 때, 공사장에서 함바집 일을 하셨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무거운 짐을 나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여성으로서의 삶은 포기하시고, 오직 어머니로서의 삶만을 사셨습니다. 온몸이 붓고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정말 온갖 힘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노점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장사를 다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쉴 새 없이 일하시느라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셔서 장애를 갖게 되셨습니다. 어머니의 장애를 생각하면 평생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이 죄송함과 안타까움을 떨쳐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장애는 장로님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네, 어머니의 시각 장애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첫째 아이인데, 저를 임신하셨을 때 임신 중독에 걸리셨다고 합니다. 저를 낳으시고 한 달 동안 앞을 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눈이 안 좋아지셨는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을 하시다 보니 시력을 잃게 되셨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한쪽 눈을 완전히 실명하셨고, 지금은 시각 장애 2급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어머니의 시각 장애 사실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오랜만에 집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여전히 저를 위해 아욱국을 끓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거동이 불편해 보이셨습니다. 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제 앞에 놓으시려다 엉뚱한 곳에 놓으시고, 국그릇을 주시려다 쏟을 뻔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어머니의 방을 둘러보다가 시각 장애 2급 진단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어서 병원에 전화해서 확인해보니, 어머니께서 한쪽 눈이 안 보이시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작은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고생과 희생에 대한 죄송함, 그리고 어머니의 불행에 대한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비로소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어머니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께 존댓말을 쓰고,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잘할게요. 용서해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께 용서를 구하고, 효도를 다짐하면서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장애를 통해 저를 겸손하게 하시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장애는 저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동시에 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시각 장애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으셨군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특별한 계획을 보여주시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자꾸 보여주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네, 어머니의 시각 장애 사실을 알고 어머니께 용서를 구한 후부터 신기하게도 제 눈에 중국이 자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잡지책을 펼치면 중국 관련 기사가 나오고, 신문을 펼쳐도 중국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TV 채널을 돌리면 중국 뉴스가 나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저에게 중국이라는 나라를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인천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왜 인천에 갔는지, 무엇에 이끌려 갔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다가 동인천역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역에서 내려 걷다 보니 부두가 나왔고, 큰 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중국을 오가는 국제 여객선이었습니다. 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검은 배낭을 메고 짐을 끌고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호기심에 다가가 보니, 그들은 보따리 상인들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물건을 떼어 한국에 와서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저것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나도 보따리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중국에 가서 보따리 장사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걱정하시면서도, 제가 간절히 원하자 돈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교회 권사님께 사정을 말씀드려 100만 원을 빌리시고, 자신이 모아둔 20만 원을 더하여 총 120만 원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 돈이 바로 기적의 120만 원의 시작이었습니다. 120만 원과 성경책 한 권을 들고, 저는 중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120만 원으로 시작한 보따리 장사, 쉽지 않았을 텐데요. 특히 중국은 언어도 문화도 낯선 땅인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요?
처음 중국에 갈 때, 120만 원과 함께 톰슨 성경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성경책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성경책을 뺏기거나, 선교사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박스처럼 위장하여 배낭 깊숙이 숨겨 가져갔습니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는 동안, 마치 성경 속 요나처럼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밤새 배를 타고 아침에 산둥성 웨이하이(위해)에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내리니 정말 낯선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혼자 남겨지니 막막하고 두려웠습니다. 마치 광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그때, 저 멀리 보따리 상인들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사람들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보따리 상인들은 농산물 도매 상점으로 들어가 참깨, 고춧가루 등의 물건을 사서 나왔습니다. 그때 보따리 장사의 방식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농산물을 사서 한국에 가져가 파는 것이 보따리 장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보따리 상인들을 따라 농산물을 사서 배에 싣고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보따리 장사였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장사는 실패였습니다.
첫 번째 장사가 실패였다니, 뜻밖입니다. 수익을 전혀 내지 못하신 건가요?
네, 첫 번째, 두 번째 장사는 모두 손해만 보고 끝났습니다. 인천항에 도착해서 세관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세관 검사가 생각보다 까다로웠습니다. 보따리 상인들은 세관 직원들과 친분이 있는지, 별다른 제재 없이 통과하는 것 같았지만, 저는 처음이라 세관 검사에서 많은 물건을 압수당했습니다. 세 번이나 중국과 한국을 오갔지만, 세 번 모두 세관 검사에서 물건을 압수당하고 손해를 봤습니다. 세 번째 장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여비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절망감에 휩싸여 배에서 내렸는데, 저도 모르게 고개가 세관 검사대 쪽으로 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관 검사대 앞에 섰는데, 놀랍게도 줄이 하나도 없는 검사대가 눈에 띄었습니다. 평소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 곳인데, 그날따라 유독 그 검사대만 텅 비어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끌려 그 검사대로 향했고, 세관 검사를 받았습니다. 세관 직원은 여느 때와 같이 짐을 검사하며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어 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가 시각 장애인이고, 어린 동생들이 있다는 사실, 어머니께서 어렵게 빌려주신 돈으로 장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 세 번이나 손해를 보고 마지막으로 한국에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애인 복지 카드를 보여드리며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던 세관 직원은 잠시 굳은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짐을 다시 싸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짐을 들고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관 검사를 무사히 통과시켜 준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만에 기적적으로 세관 검사를 통과한 것입니다. 세관을 통과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저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장사로 5만 원이라는 작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5만 원은 제게 단순한 돈이 아니었습니다. 실패와 좌절 끝에 얻은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 저는 객실 2층 침대에 앉아 성경책 위에 5만 원을 올려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처음으로 5만 원을 벌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며, 이 돈을 종잣돈 삼아 중국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도록, 어머니와 동생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5만 원은 기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작은 창고를 얻어 '서울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본격적으로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중국 도매상들에게 농산물을 떼어다가 한국 보따리 상인들에게 도매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6개월 만에 놀라운 속도로 사업이 성장했고, 남들이 6년 동안 이룰 것을 저는 6개월 만에 이루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보따리 장사로 크게 성공하신 후, 요식업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하셨습니다. 요식업 진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보따리 장사로 돈을 벌면서 중국 웨이하이(위해)라는 도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웨이하이는 국영 기업들이 많았는데, 백화점, 호텔 등이 대부분 국영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후 4~5시만 되면 도시 전체가 텅 비는 유령 도시처럼 변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퇴근 시간이 빠르고, 저녁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대부분 일찍 귀가했습니다. 저녁에 커피 한 잔 마실 곳도 없고, 편안하게 쉴 공간도 부족했습니다. '이곳에 24시간 운영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만만디(慢慢地)'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천천히'라는 뜻인데, 식사할 때도 '만만디', 갈 때도 '만만디'라고 말합니다. '만만디'라는 단어가 재미있고, 친근하게 느껴져서 레스토랑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만만디 레스토랑'입니다. '만만디'라고 택시 기사에게 말하면 누구나 '만만디 레스토랑'을 알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름도 쉽고, 발음도 재미있어서 중국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만만디 레스토랑'은 웨이하이 최초의 24시간 영업 레스토랑이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이 없던 웨이하이에서 24시간 운영하는 '만만디 레스토랑'은 금세 입소문이 났고,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만만디 레스토랑'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만만디 2', '내소화피자' 등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지금의 요식업 성공은 '만만디 레스토랑'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따리 장사에서 시작하여 요식업계의 대부로 성장하신 전용희 대표님의 이야기는 정말 놀랍습니다. 120만 원으로 시작하여 18년 만에 중국에서 기적을 이루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단순히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뜻, 즉 선교를 위해 사업을 확장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교와 나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선한 일들을 하고 계신가요?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을 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구호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가게로 마대 자루 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마대 자루에는 땅콩, 옥수수 등의 농산물이 가득 들어있었고, 편지 한 통이 함께 들어있었습니다. 편지를 열어보니, 저의 아내 앞으로 온 편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아내가 5명의 아이들을 몰래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후원하는 아이들은 모두 부모를 잃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등 친척 집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의 학자금을 지원해주고, 물품을 보내주는 등 꾸준히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아이는 아내의 후원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게 되었다는 감사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보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편지를 읽고 아내와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내의 숨겨진 선행을 통해, 나눔의 기쁨과 보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선교와 나눔에 적극적으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기적의 사나이 전용희 대표님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성공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응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사업을 계속 확장해 나가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부의 이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악인들에게 부가 흘러가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부가 흘러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부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의 일을 더욱 적극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100개, 200개, 300개 매장을 운영하는 CEO가 되어, 중국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업가가 되는 것이 저의 비전입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업과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새롭게하소서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귀한 간증 들려주신 전용희 장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장로님의 삶은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낸 선교사의 삶과 같습니다. 앞으로 더욱 큰 성공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종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젠가 100개 매장, 더 큰 영광을 이루어 새롭게하소서에서 다시 만나 뵙기를 기대하며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전용희 장로님과 함께하며, 그 눈빛에서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수한 마음을 보시고 축복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어진 환경을 탓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 느끼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저는 장로님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사람이 선포하고 믿으면 된다는 말씀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새롭게하소서 가족 여러분 모두 이 도전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될 줄 믿고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멋진 한 해가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새롭게하소서가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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