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 대표 인터뷰: 죄의 굴레를 벗고 사랑으로 아이들을 품다
## 죄의 굴레 벗고, 사랑으로 세상을 품다
죄의 굴레를 벗고 세상을 향하다: 서정인 한국컴패션 대표의 감동적인 이야기
안녕하세요, ‘새롭게 하소서’의 진행자 주용입니다. 오늘도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옆에는 정보길 목사님께서 함께 해주고 계십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주용 목사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속성이 남아있어 구원의 확신을 흔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어떠신가요?
정보길 그렇습니다, 주용 형제. 구원의 확신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중요한 부분인데요. 저 역시 때때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주용 오늘 ‘새롭게 하소서’에는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죄와 치열하게 싸우며 구원의 확신을 갈망했던 분인데요. 끊임없는 싸움 끝에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지금은 전 세계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전하고 계십니다. 바로 국제 어린이 양육 기구 컴패션의 한국 대표이신 서정인 대표님이십니다.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서정인 안녕하세요. 귀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용 대표님, 목사님과는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서정인 네, 오래 전부터 목사님과 컴패션 활동을 함께 했고, 필리핀에도 함께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아이티에 갔을 때의 충격적인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주용 목사님께서는 서정인 대표님을 오랫동안 지켜보셨는데요, 어떤 분이신가요?
정보길 서정인 대표님은 주용 형제와 마찬가지로, 정말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변화 없는 신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동역하면서 늘 즐거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분입니다.
주용 저도 서정인 대표님을 10년 넘게 뵈어 왔는데요, 정말 사람이 너무나 순수하고 착하셔서 거절을 잘 못하시는 분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서정인 대표님의 어린 시절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 모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보길 네, 솔직히 대표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주용 저도 대표님의 인터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표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13살 때부터 베이비시터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아이를 돌볼 생각을 하셨나요?
서정인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데요, 그 아이들은 쌍둥이였습니다. 배경을 설명드리자면, 한국에서는 아마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저희 아버님이 30여 년을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너무나 강직하고 정직하신 분이셨고, 교사 월급으로는 네 형제를 교육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셔서 미국 이민을 결심하셨습니다. 제가 13살 때 이민을 갔는데, 아파트에 살던 중국인 부부가 아기를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기를 안아보니 너무 잘 자는 거예요. 그걸 보더니 베이비시터를 제안했고, 저는 용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하루에 다섯, 여섯 시간씩 쌍둥이를 돌봤습니다.
주용 정말 어린 나이에 쉽지 않았을 텐데요.
서정인 네, 쌍둥이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성격도 달라서 한 아이를 웃기면 다른 아이가 울고, 또 다른 아이가 웃으면 먼저 웃던 아이가 울고, 쉽지 않았습니다. 밥도 해놓고, 집안일도 도왔습니다. 부모님들은 퇴근 후에 아이들을 인계받았으니까요.
주용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을 돌보고 가까이 지내는 경험이 있으셨네요.
서정인 신기하게도 저는 원래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들어하고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저를 훈련시키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용 대학교 시절, 사춘기 시절에 죄와 굉장한 싸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갈등이 있으셨나요?
서정인 감사하게도 저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늘 교회와 가까이 있었고, 목사님, 전도사님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교회는 저에게 익숙한 삶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이 신앙이 정말 나의 진짜 신앙일까?’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인 욕망과 교회에서 배우는 가르침 사이에서 괴리를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완전히 빠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회에 헌신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저것이 옳은 길인데,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주용 고등학생 때부터 그런 고민을 하셨다니, 쉽지 않았을 텐데요.
서정인 예를 들면, 제가 좋아했던 팝 음악, 예를 들어 빌리 조엘이나 스티비 원더 같은 가수들의 앨범을 용돈을 모아 샀다가, 수련회에 가서 헌신하고 앨범을 다 버리고 남들에게 나눠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팝 음악을 듣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팝 음악을 듣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클래식이나 복음성가를 들려주셨지만, 저는 팝 음악이 더 좋았습니다.
주용 그 당시에는 팝 음악 듣는 것까지 죄책감을 느끼셨군요.
서정인 네, 고등학생 때는 주일학교에서 영상도 틀어주고 했는데, 그때부터 죄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죄를 짓는 걸까?’ ‘하나님은 정말 계실까?’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하나님과 분명한 결판을 내고 싶었습니다.
주용 하나님과의 결판이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서정인 하나님께 항복하든지, 아니면 그냥 세상적으로 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치는 삶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각종 집회와 말씀을 접했지만,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제발 답을 주세요.’ ‘구원의 확신을 주시든지, 아니면 그냥 편하게 세상적으로 살게 해주세요.’ ‘왜 자꾸 죄책감을 주시면서 놓아주시지 않는 건가요?’ 이런 고민이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저를 괴롭혔습니다.
주용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고, 목사님 말씀도 잘 듣는,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 있는 학생이었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군요.
서정인 목사님 입장에서 보면 저는 굉장히 반항적인 학생이었을 겁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니까요. 예를 들어 목사님 설교 시간에 딴 책을 펴놓고 읽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출석했지만, 설교 듣기는 싫었습니다. ‘왜 나에게 강요하는 거지?’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만, 정말 가능한가?’ ‘나는 해보니까 안 되는데.’ ‘그렇다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해 설명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자꾸 죄책감만 주지 말고.’ 이런 반항심이 끊임없이 제 마음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끝까지 싸우든지, 아니면 포기하고 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주용 언제, 어떻게 그런 갈등에 대한 답을 얻게 되셨나요?
서정인 주변 친구들, 특히 대학생 친구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 간증을 들으면서, 오히려 질투심과 반항심이 더 커졌습니다. ‘왜 나만 안 되는 거지?’ ‘나는 왜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걸까?’ 대학교에 들어가서 정말 하나님과 끝장을 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부회장, 총무 등 직책도 맡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시절, 얼마나 하나님과 씨름했는지 모릅니다. 방학이 되면 하루에 7-8시간씩 성경을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말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답을 얻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응답해주세요.’ ‘저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든지, 아니면 저를 포기하시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주세요.’ ‘이러다 안 되면 그냥 세상적으로 살겠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저를 포기 직전까지 몰아가셨습니다. ‘나는 너무 큰 죄인이어서 하나님께 버림받았구나.’ ‘주변 사람들은 다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데, 왜 나만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이런 절망적인 생각에 빠졌습니다.
주용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셨네요.
서정인 절망감에 뛰쳐나가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고, 다시 돌아와 성경을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운동장을 뛰는 것으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친구를 만나거나 딴 짓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 때 친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 생일 전날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내일 생일을 맞이하는 것이 싫다.’ ‘내년에도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다.’ ‘솔직히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옥에 갈까 봐 두렵다.’ ‘자살은 못 하겠지만, 이렇게 사는 것은 너무나 싫다.’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성경을 펼쳤습니다. 로마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수없이 읽었던 로마서였지만, 그날따라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는 말씀을 읽을 때, 여전히 절망적인 생각에 빠졌습니다. ‘맞아, 나는 죄인이야. 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 나는 구원받을 수 없어.’ 그러다 로마서 4장 3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전율이 흘렀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믿음이 뭐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어디로 갈지 모르는 그 여정을 함께하는 것?’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고, 너의 죄를 해결했으며, 이제 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그 말씀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구나!’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나를 의롭다고 보시는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 짓눌렀던 죄의 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누가 뒤에서 죄의 짐을 확 가져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죄인으로서 포기한 심정으로 흘렸던 눈물이었지만, 그 순간부터는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집에서 뛰쳐나와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날이 바로 제 생일이었습니다. 다시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삶을 드리겠다는 헌신이 저절로 우러나왔습니다.
주용 정말 드라마틱한 변화네요.
서정인 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삶에 기쁨이 넘치고, 천국을 경험하는 듯한 자유를 느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율법 아래 갇혀 있던 삶에서 벗어나,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주용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신 후에, 어떻게 컴패션을 만나게 되셨나요?
서정인 컴패션과의 만남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학교에서는 이미 합격 통보를 받았고, 다른 학교에서는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수많은 경험을 하게 하셨다고 생각하나요?’ ‘일찍 미국에 이민 가게 하시고, 베이비시터부터 시작해서 식당, 청소, 회사, 자영업 등 다양한 일을 경험하게 하시고, 신학교까지 가게 하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중산층 백인들이 사는 지역에 가서 대학생, 신학생들을 배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내의 질문에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기도해보겠다고 답했습니다. 교수직 제안을 백지화하고,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 컴패션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저는 컴패션을 알지도 못했고, 지원한 적도 없었습니다. 텍사스에 있는 한 목사님이 저를 추천했다고 했습니다. ‘컴패션이 뭐하는 곳인가요?’ 라고 물었더니, 전 세계 가난한 아이들을 현지 교회와 연계하여 양육하는 기관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가난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 교육까지 제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내는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특히 컴패션의 역사를 듣고 울컥했습니다. 컴패션은 한국 전쟁 직후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시작된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1993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했고,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정부 차원의 복지 시스템이 갖춰지자 한국에서 철수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한국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도왔다고 하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에 울컥했습니다. 컴패션의 사역 방식, 즉 아이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을 함께 전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컴패션 면접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지원서를 낸 적도 없이 면접부터 시작했습니다. 면접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마케팅, 인사, 경영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면접을 거쳤고, 마지막 면접에서는 영적인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싶은가?’ ‘왜 컴패션인가?’ ‘아내가 남편이 컴패션에서 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면접 과정에서 아내가 결혼 전부터 품었던 꿈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주용 아내분께서 어떤 꿈을 갖고 계셨나요?
서정인 아내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고 입양을 통해 봉사하며 살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원하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입양을 고민하던 중, 첫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딸을 원했지만 아들이 태어났고, 이후 두 아들을 더 낳으면서 입양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 아들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요. 남편은 사역에만 몰두하고, 집안일은 전혀 돕지 않았으니,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이 컴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아내는 다시 입양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아동 학대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컴패션이 아이들을 현지에서 양육한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이거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하나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컴패션은 1993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1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을 양육했다고 합니다. 41년 동안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2,700개의 보육원과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컴패션은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교회 이름으로만 사역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컴패션이라는 이름을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컴패션 출신 어린이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컴패션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주용 컴패션이 한국에서 철수한 이유가 있었나요?
서정인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더 이상 후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컴패션이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컴패션에 후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3년 동안 자발적으로 모여 컴패션 한국 지부 설립을 요청했습니다. 국제 컴패션은 재정적으로 넉넉한 독일을 후원국으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한국 교회의 간절한 요청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국을 후원국으로 결정했습니다. 한국 교회 대표들은 미국 컴패션 본부를 방문하여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한국은 도움을 받아 경제와 신앙을 이룩한 나라입니다. 이제는 한국도 축복의 통로가 되어 다른 나라를 도울 차례입니다.’ ‘한국 교회가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민족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런 간절한 요청에 국제 컴패션은 한국을 후원국으로 준비하고, 저를 한국 대표로 세운 것입니다. 정말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컴패션은 한국 전쟁 직후 한국을 돕기 위해 시작되었고, 한국 경제가 성장하자 철수했고, 이제는 한국이 후원국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컴패션 사무실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의 놀라운 변화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나라가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것입니다. 컴패션은 한국을 롤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저의 꿈은 한국이 다른 나라에도 희망을 줄 수 있는 롤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주용 대표님은 컴패션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나라를 방문하셨는데요, 특히 사진으로 가난한 현실을 담아내려고 노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서정인 처음 컴패션을 방문했던 나라는 에콰도르와 필리핀이었습니다. 필리핀 쓰레기장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쓰레기장에 갔더니 컴패션 아이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예처럼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TV 영상으로만 보던 가난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쓰레기 더미를 넘어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가난을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이 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피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다 멀리서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했습니다. 그 순간, 렌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이는 마치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사람이에요.’ ‘제발 불쌍하게만 보지 마세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안아주었습니다. ‘미안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컴패션 현지 교회와 연계하여 아이를 등록시키고 양육했습니다. 그 후, 컴패션의 핵심 가치 중 하나가 ‘존귀함’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컴패션은 아이들의 존귀함을 지켜주기 위해 가난한 모습이 아닌 밝고 건강한 모습만을 사진과 영상에 담습니다.
주용 컴패션 사진 속 아이들은 늘 밝고 깨끗한 모습인데요, 그 이유가 있었군요.
서정인 네, 컴패션은 아이들의 존귀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전 총재님께 질문했습니다. ‘왜 컴패션 사진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가난한 모습이 아니라, 밝고 깨끗한 모습인가요?’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너무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는데요?’ 전 총재님은 저에게 이렇게 설명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이들이 가난과 고통 속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만약 당신의 아이가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세요.’ ‘외국 기자가 와서 아이 사진을 찍고, 매달 후원금을 보내준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당신 아이의 앙상하게 마른 사진을 배포한다면, 당신은 부모로서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이들이 컴패션을 통해 건강하게 성장하고, 부모로서 자녀를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존귀함입니다.’ 컴패션을 통해 존귀함의 의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주용 실제로 현지에서 만난 아이들은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나요?
서정인 네, 놀라울 정도로 밝고 건강했습니다. 보호받고 사랑받는 아이들의 표정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히려 제 표정이 더 어둡고 슬퍼 보였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만날 때, 제 마음속에는 ‘나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컴패션 비전트립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가난한 현실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피어나는 기쁨을 함께 느끼고, 그것이 자신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컴패션이 오래 전부터 존귀함을 드러내는 사진과 영상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기관들도 점차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용 바쁘신 사역 중에도 아픈 학생에게 골수 이식을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서정인 그건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컴패션 초창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컴패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변화되어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컴패션 한국 지부를 설립하기 전에 한국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백혈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놓인 학생 소식을 듣고, 학교에서 골수 등록 운동을 벌였습니다. 헌혈도 하고, 학생들과 함께 골수 등록을 했습니다. 몇 년 후, 컴패션을 시작하고 나서, 골수 등록했던 것이 백혈병에 걸린 한국 여자아이와 일치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잊고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당연히 골수 이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세계 아이들을 살리자고 외치는 사람이, 눈앞의 아픈 아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골수 이식이 헌혈처럼 간단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척추 밑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골수를 채취해야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계속 주사를 맞아야 했습니다. 의료사고 위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골수 이식을 감행했습니다. 다행히 의료사고는 없었고, 아이는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아이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주용 골수 이식을 한 번 더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서정인 네, 첫 번째 골수 이식 후 1년 뒤에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의료사고 때문에 다시 골수 이식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골수 이식은 더욱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 골수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아내는 두 번째 골수 이식을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첫 번째 골수 이식 후 건강이 너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직원들도 모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혹시 의료사고가 또 발생할까 봐, 건강이 더 악화될까 봐 걱정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여동생과 남편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동생 남편은 의사였습니다. 여동생 부부는 두 번째 골수 이식은 매우 위험하며, 성공 확률도 희박하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첫 번째 골수 이식 후 재발했기 때문에, 두 번째 골수 이식도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고했습니다. 여동생 부부의 말은 저에게 면죄부와 같았습니다. ‘두 번째 골수 이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충분하다.’ 두려움과 망설임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을, 여동생 부부가 대신 해준 것입니다.
주용 두 번째 골수 이식을 망설이셨군요.
서정인 네, 두려웠습니다. 두 번째 골수 이식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7월에 두 번째 골수 이식 제안을 받았고, 8월에 에콰도르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에콰도르 컴패션 사역지를 방문하여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컴패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왜 두 번째 골수 이식을 망설이는 거지?’ 계속해서 그 아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에콰도르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에게 유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 마음을 합리화하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골수 이식은 위험하다던데, 하지 않는 것이 좋겠죠?’ ‘성공 확률도 희박하다던데, 굳이 해야 할까요?’ 모두들 두 번째 골수 이식을 만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분은 장로님이셨습니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바퀴가 펑크가 나서 오랫동안 길가에 멈춰 서 있게 되었습니다. 장로님께 다시 유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장로님은 한숨을 크게 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하십시오.’ 장로님은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잠시 침묵하시더니, 슬픈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들이 백혈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아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골수 이식은 전도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이의 가족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장로님의 말씀은 묵직하게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깜깜한 버스 안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지 않습니까?’ ‘이 아이 하나 때문에 제가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까?’ ‘하나님, 저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저를 코너로 몰아가셨습니다. 꼼짝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한국 사무실에 연락하여 두 번째 골수 이식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이 엄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부끄러운 목사’ 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두려움 때문에 두 번째 골수 이식을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저를 코너로 몰아세우셔서, 결국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목사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려주시면 감사하고, 만약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가시더라도, 아이는 천국에 갈 것입니다.’ ‘당신도 천국에서 아이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편지를 보내고, 이름 없이 두 번째 골수 이식을 했습니다.
주용 두 번째 골수 이식은 성공적이었나요?
서정인 두 번째 골수 이식 후, 아이 엄마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름 없는 후원자에게 보내는 다섯 장의 편지였습니다. 편지 곳곳에 엄마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은 감사하다는 말뿐이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골수 이식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는 무균실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편지 쓸 겨를도 없었지만, 너무나 감사해서 편지를 씁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을 잘 모르지만, 붙잡고 기도하겠습니다.’ 골수 이식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간호사에게 골수를 두 배로 뽑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혹시 세 번째 골수 이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간호사는 규정상 안 된다고 했지만, 결국 두 배의 골수를 채취했습니다. 몇 달 후,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재발 확률이 매우 높다고 했던 아이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건강하게 퇴원했고,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 아버지는 다른 백혈병 환자를 위해 골수 기증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못 합니다’ 라고 수없이 외쳤습니다. 수많은 이유와 핑계를 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를 코너로 몰아세우셨습니다. ‘나는 너를 너무 잘 안다. 네가 얼마나 두렵고 싫어하는지 안다. 하지만 묻겠다.’ ‘만약 그 아이가 네 친딸과 같았다면, 포기했겠느냐?’ ‘그 아이는 내 생명이다.’ 하나님의 음성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컴패션을 통해 배운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지, 한 생명이 피어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지,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나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주용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신 대표님께 존경을 표합니다. 많은 아이들을 후원하시다 보면, 때로는 시험에 들 때도 있으신가요?
서정인 네, 큰 시험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이야기라서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에게만 털어놓았던 이야기입니다.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와 함께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차인표 씨는 컴패션을 통해 대학생이 된 아이를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최고 대학에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컴패션은 빈민가 아이들을 양육하여 대학까지 보내는 놀라운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컴패션 사역을 보고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입니다. 에티오피아 대학생을 만나러 갔는데, 휠체어를 탄 아이가 나타났습니다. 초청한 적도 없고, 현지 직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휠체어를 뒤에서 밀고 오는 엄마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아이는 성장 장애를 겪고 있었고, 몸도 불편해 보였습니다. 눈은 초점을 잃은 듯했고,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지쳐 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는 1년 전 컴패션에서 전 세계 후원자들에게 기도 요청을 했던 아이였습니다. 이름은 ‘엔다카추’ 였습니다. 엔다카추는 컴패션을 통해 성장하여 약학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희귀 폐결핵에 걸렸는데, 아프리카 전역을 뒤져도 치료제가 없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수소문한 끝에 캐나다 제약회사에서 임상 실험 중인 약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약값이 한 달에 300만 원이나 되었습니다. 컴패션 후원금은 한 아이당 4만 5천 원인데, 한 달 약값으로 300만 원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도 임상 실험 중인 약이라 효과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캐나다 제약회사에 간곡하게 요청하여 약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매달 캐나다 직원이 주사기에 약을 담아 비행기를 타고 에티오피아로 날아갔습니다. 매달 300만 원의 약값과 비행기 티켓, 행정 비용까지 감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한 아이에게 3,600만 원이 넘는 돈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3,600만 원이면 4만 5천 원씩 80명의 아이들을 후원할 수 있는 돈입니다.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는 상황을 잘 몰랐습니다. 저에게 엔다카추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엔다카추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영어 기도가 서툴다며 저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날 저녁,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이었다’ 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화가 났다’ 고 말했습니다. ‘부끄러운 목사다’ ‘컴패션 대표라고 하면서 아이들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외치면서,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니’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무릎 꿇었습니다.
주용 큰 시험에 드셨었네요.
서정인 네, 1년 후 차인표 씨가 컴패션 영상팀과 함께 에티오피아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차인표 씨가 후원하는 대학생을 만나러 간 것입니다. 차인표 씨는 학용품 세트를 가득 준비해갔습니다. 그런데 엔다카추가 또 나타난 것입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엔다카추는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한국 후원자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나타난 것입니다. 차인표 씨는 놀라서 저에게 전화했습니다. ‘엔다카추가 나타났다’ 며 흥분했습니다. 엔다카추는 종이 한 장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완치되었다는 진단서였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엔다카추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엔다카추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수많은 봉사자들과 함께 NGO 단체를 설립하여 폐결핵 퇴치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UN, 한국 제약회사, 전 세계 제약회사들과 협력하여 수많은 의료진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았습니다. 저는 가룟 유다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한 생명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엔다카추는 10년 동안 폐결핵 퇴치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용 정말 기적과 같은 이야기네요.
서정인 네, 소자를 통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컴패션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용 지금도 많은 후원자들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후원을 이어가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서정인 네, 컴패션은 유명인들이 앞장서서 홍보하고 있지만, 실제 후원자들의 대부분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후원을 이어가는 분들입니다. 저희는 이런 분들이 컴패션을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깡통 통장을 가진 사장님, 암 투병 중인 어머니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컴패션 사역을 후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살을 생각했던 분이 컴패션 소식을 듣고 아이를 후원하며 다시 일어서겠다는 결심을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가 컴패션 아이를 후원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컴패션은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두닦이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주용 구두닦이 목사님 이야기는 감동적이네요.
서정인 어느 날, 후원금이 계속 밀리는 후원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알고 보니, 개척교회 목사님이셨습니다. 교회 성도 대부분이 과부였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30명의 아이를 후원하고 계셨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구두통을 들고 남한산성 등산객들에게 구두를 닦아주며 후원금을 마련하셨습니다. 교회 앞에서,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으며 아이들을 후원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 루게릭병에 걸리셨습니다. 더 이상 구두를 닦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른 교회에 맡기고, 성도들에게 흩어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목사님이 자발적으로 와서 사역을 이어갔고, 성도들은 여전히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 컴패션 후원 교회에 소개되었습니다. 김정화 목사님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한국 컴패션은 전 세계 컴패션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수혜국 아이들은 김정화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한국 후원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컴패션은 하나님께서 하나로 묶으시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컴패션을 대표하는 진짜 후원자들입니다.
주용 김정화 목사님 건강은 어떠신가요?
서정인 김정화 목사님은 루게릭병과 싸우면서 여전히 버티고 계십니다. 사모님께서 헌신적으로 목사님을 돌보고 계십니다.
주용 대표님은 정도 많으시고 눈물도 많으신 것 같습니다. 원래 눈물이 많으신 편이신가요?
서정인 아내에게 물어보면, 저는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결벽증도 심했습니다. 융통성 없고, 원칙만 고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컴패션을 통해 하나님의 눈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납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함께했던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한국의 변화를 보면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완전히 변했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늘 눈물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용 아내분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으시겠네요.
서정인 아내와 아이들에게 늘 미안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미안해, 용서해줘, 후회스러워’ 세 마디를 입에 달고 삽니다. 큰 아들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 고 말할 정도입니다. 아내에게 특히 미안합니다. 1년에 해외 출장을 20-30번 다닙니다. 한국에 있어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역에 몰두합니다. 가정은 뒷전이었습니다. 가정적인 아빠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어쩌면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진 목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부족하고 허점투성이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모습과 실제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주용 목사님께서는 해외 출장이 잦으시고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서정인 건강은 늘 좋지 않습니다. 확정 질병도 많고, 늘 병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제 회의, 자매 도시 문제, 선교 문제 등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들을 감당하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주용 코로나19로 인해 후원이 어려워지는 분들도 많을 텐데요, 컴패션 상황은 어떻습니까?
서정인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12개 후원국 중에서 이탈리아와 함께 후원 취소율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독일, 네덜란드,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은 후원을 시작하면 오랫동안 지속하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과 이탈리아는 후원 지속율이 낮은 편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켜주시고 새로운 후원자를 보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입니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수혜국들의 어려움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수혜국들은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방 접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목사님들이 돌아가시고, 아이들까지 죽어가는 상황입니다. 일용직 부모들은 일자리를 잃고, 과부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컴패션은 등록된 아이들뿐만 아니라, 가족, 목사님, 교사, 스텝들까지 모두 먹여 살리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후원자님들은 상황을 잘 모르십니다. 코로나19가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을 들을 환경도 되지 않습니다. 교육에서 소외되고 방치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아이들이 교육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릴까 봐 가장 걱정됩니다. 한국 부모들은 교육열이 높고 자녀를 위해 헌신하지만, 수혜국 부모들은 대물림된 가난 속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아이들을 노동 시장에 내보내거나, 팔아넘기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컴패션 교회가 문을 닫고, 아이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면, 많은 아이들이 컴패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후원자님들이 후원을 취소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후원을 이어가겠다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용 사실 모든 수혜국 아이들을 다 도울 수는 없기 때문에, 한 아이를 후원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그런 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신가요?
서정인 맞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질문을 하십니다. 영상으로만 가난을 접하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와 악이 존재하는 한, 가난은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을 외면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상과 숫자에 갇히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아이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제가 한 교회를 방문하여 간증을 하고 떠날 때,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힘없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컴패션 아이들 틈에 섞여 있었지만, 어딘가 소외된 듯 보였습니다. 컴패션은 늘 밝고 건강한 아이들 사진만 보여주기 때문에, 저는 그 아이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컴패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교회 밖에서 까치발을 들고 교회 안을 기웃거리는 아이, 엄마 뒤에 숨어 있는 아이, 울고 있는 아이, 도움이 더 필요한 아이, 하나님의 마음이 더 필요한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버스를 세우고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선생님과 컴패션 대표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왜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죠?’ 알아보니, 그 아이는 컴패션에 등록되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였습니다. 아이 엄마는 눈물을 닦으며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아이는 선천적으로 항문이 막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수술조차 받지 못하고,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의료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컴패션 필리핀 대표에게 지시했습니다. ‘당장 이 아이를 후원 아동으로 등록시키고 의료 지원을 제공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저는 수십만 명의 아이들을 후원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제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며칠 후, 영상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 아이가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영상이었습니다. 몸 밖으로 배변 주머니를 차고 있다가, 몸 안으로 항문을 만드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합니다. 아이는 건강을 되찾고 활발하게 뛰어놀았습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5살짜리 아이답지 않게 씩씩하고 쾌활했습니다. 후원자님들은 자신이 한 아이만 후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아이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후원자님들이 한 아이를 살리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후원자님들은 한 아이의 1%를 돕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의 전부를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도 매체를 통해 접하지 못하는 고통과 절망 속에 놓인 아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우리를 안타까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주용 오늘 말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서정인 오늘 이야기를 통해 마음이 무거워지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아이들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흘린 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이들의 존귀함과 밝은 웃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우리 생각만 앞세우고 있었습니다. 컴패션은 수혜국에서 도움을 받던 나라였지만, 이제는 성장하여 다른 나라를 돕는 후원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어려움을 잊고, 가난에 무감각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과거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다른 아이들을 돕는 것입니다. 저의 작은 후원이 미래의 선교사를 키우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그 나라를 변화시킬 길을 안내하는 것은, 미래의 선교사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컴패션을 통해 세 가지 큰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둘째, 후원 아동을 통해 가족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셋째, 미래의 선교사를 키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컴패션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는 것은, 사랑의 기준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바리새인과 같은 사랑의 기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준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컴패션 사역을 통해 얻는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용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대표님의 컴패션 사역을 응원하며, 건강도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서정인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용 오늘 ‘새롭게 하소서’에서는 서정인 한국컴패션 대표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도 더욱 귀한 말씀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