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영웅 이운재 간증: 축구 인생과 신앙 성장 이야기
2002 영웅 이운재: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다
"믿음의 수문장" 前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운재 간증 상세 정리: 삶과 신앙의 여정
전 국민을 열광케 했던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거미손' 이운재 선수의 간증을 상세히 정리하여, 그의 축구 인생과 신앙 여정을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단순히 내용만 정리하며, 어떠한 추가 내용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영문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국어로 재작성되었으며,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반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기법, 방법론 등은 최대한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정량적으로 서술하여, 독자분들이 이운재 선수의 경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요약은 지양하고, 서술형 문장과 문단을 중심으로 풍부하게 내용을 구성했습니다.
본문은 한글로 작성되었으며, 3~4 문장마다 줄바꿈을 적용하여 가독성을 높였습니다. 불필요한 쉼표나 따옴표는 제거하여 문장을 간결하게 만들었고, 불릿 기호 대신 서술형 문장과 문단을 사용했습니다. 문장과 문단 연결은 다양하고 풍부한 연결 어구를 활용하여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마치 이운재 선수가 직접 이야기하는 듯한 친근하고 자세한 설명 방식을 취했습니다. 핵심 내용과 중요 노하우는 극도로 자세하게 서술하되,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내용은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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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손" 이운재, 그의 시작과 축구 인생
이운재 선수는 전국민을 열광시켰던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숨은 주역입니다. '거미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국가대표 골키퍼로서 16년간 굳건히 골문을 지켰습니다. 그의 축구 인생은 영광과 환희의 순간만큼이나 아픔과 시련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골대 앞에서 날아오는 공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수문장'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선수였던 이운재는 이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귀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고자 신앙 교육에 힘쓰는 자상한 아버지로 변모했습니다. 전 국민을 위해 뛰었던 국가대표에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믿음의 수문장'으로서 새로운 비전을 그려나가고 있는 이운재 집사.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시죠.
김학중 목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롭게하소서 김학중 목사입니다. 오늘 정말 굉장한 분을 모셨습니다. 영상을 통해 이미 만나보셨겠지만, '거미손'이라는 별명만으로 모두가 아실 만한 분. 오늘 귀한 말씀을 해주실 분입니다. 바로 전 축구 국가대표 이운재 집사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운재: 안녕하세요.
김학중 목사: 아니, 실물이 훨씬 더 거미손 같으세요. (웃음)
이운재: (웃음) 맞습니다. 그런 이야기 많이 듣습니다. 별명이 '은평구 손난로'라고도... 아, 죄송합니다, 농담입니다.
김학중 목사: (웃음) 많은 팬분들이 궁금해하실 텐데요, 최근 근황은 어떠신가요?
이운재: 작년까지는 수원 삼성 팀에서 코치 역할을 맡았고요, 올해부터는 중국 대표팀에서 골키퍼 코치로 활동했습니다. 물론 선수 육성에도 힘쓰고 있고요. 지금은 잠시 한국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김학중 목사: 아, 막내아들 퇴원 때문에 한국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운재: 네, 맞습니다. 저희 아들이 아주 씩씩해졌어요. (웃음) 요즘은 막내 아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초등학교에 입학을 못 해서 아빠 손길이 필요할 때인데,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김학중 목사: 요즘 유소년 축구 붐이 다시 일고 있는데, 평생 축구를 하셨고 지금도 운동장에서 코치 일을 하시잖아요. 경기를 보다 보면 아직도 현역에서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거나, '저기 가서 내가 막아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신가요? 워낙 오랫동안 운동을 하셨으니까요.
이운재: 그냥 저는 솔직히 골키퍼로 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웃음) 골키퍼는 이제 후배들에게 맡겨야죠. 하지만 많은 분들과 축구를 할 때, 특히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칠 때에는 골키퍼에 대한 코칭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운동장에서 공을 찰 때는 필드 플레이어로 뛰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제가 처음부터 골키퍼는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필드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필드 플레이를 즐기고, 가끔 골문을 비우기도 합니다. (웃음) 생활 축구를 하다 보면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많으셔서, 제가 미드필더나 공격수로 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비 역할도 하고요. 얼마 전 안양에서 '거미손' 노래도 해주셨다고 하던데요.
김학중 목사: (웃음) 은퇴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현역 선수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십니다. 처음 축구는 언제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운재: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때 축구가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반대하셨습니다. 저희 집안이 운동 집안입니다. 큰 형님도 야구를 하시다가 그만두셨고, 큰 누나는 배구 선수 출신입니다. 2남 3녀 중 누나와 제가 대표 선수 출신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이 운동하는 것을 힘들어하셔서 반대하셨지만, 저는 축구가 너무 좋아서 축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공도 주워다 주고, 운동장 정리도 하고 그랬습니다. 결국 축구를 시작하게 해주시더라고요.
김학중 목사: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으니 즐겁게 운동을 하셨겠네요.
이운재: 아니요, 처음 6개월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매일 울면서 운동했어요. 너무 힘들 때는 축구를 안 나가고 방학 때 누나에게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누나가 대표 선수 합숙소에 있었는데, 거기 가서 며칠 묵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코치님께 붙잡혀서 다시 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그런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더 열심히 했으면 지금보다 더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김학중 목사: (웃음) 결국에는 축구에 대한 마음으로 돌아오신 거네요. 축구를 하겠다고 마음먹으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이운재: 초등학교 때는 왔다 갔다 했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번 승부를 걸어보자'라는 마음을 먹었죠. 그때부터 평생 축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축구가 나의 천직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때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운동만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실력 차이를 느껴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김학중 목사: 원래 골키퍼가 아니고 필드 선수였다고 하셨는데, 언제 골키퍼로 전향하게 되셨나요?
이운재: 중학교 때까지 필드 선수였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골키퍼로 전향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필드 플레이어로도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경기 시간도 늘어나고 더 많이 뛰어야 했습니다. 저는 지구력이 부족한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때 감독님께서 '운재는 밥을 더 많이 먹고 몸집을 키워서 골키퍼를 하는 것이 더 낫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골키퍼로 전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처음 골키퍼를 했는데, 놀랍게도 재능이 있더라고요. 손으로 공을 막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습니다.
김학중 목사: 대학교 1학년 때 국가대표 발탁되셨죠? 1992년에 바로 국가대표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때 소감이 어떠셨나요?
이운재: 소감이라기보다는 '내가 대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축구 시스템상 대표 선수가 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거든요. 당시에는 7월 31일 이전에 태어난 선수만 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저는 7월 20일 생이라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청소년 대표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올림픽 대표도 23세 이하 출전 제한 규정이 있었는데, 1973년생인 저는 혜택을 받지 못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 기회가 왔고, 대학교 1학년 때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었습니다. 대표팀 유니폼을 처음 입었을 때는 '내가 진짜 대표 선수가 되었구나'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TV에서 보던 선배들과 함께 공을 찰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선배들이 공 차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고, 내 유니폼에 태극마크가 달려 있다는 사실이 정말 영광스러웠습니다.
신앙과의 만남, 그리고 믿음의 성장
김학중 목사: 축구 선수로 활동할 당시에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새롭게하소서'에 함께하고 계신데요, 언제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되셨고, 교회는 언제 처음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운재: 1992년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습니다. 최종 예선부터 월드컵 본선까지 경험하면서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1994년 월드컵에도 참가했습니다. 당시 유럽과의 경기에서 45분 정도 뛰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을 마치고 대학교에 복학했는데,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는 장로님 딸로 모태 신앙을 가진 친구였습니다. 첫눈에 반해서 아내에게 호감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소개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김학중 목사: 친구의 친구 소개로 만나셨군요. 연애를 시작하시면서 바로 결혼까지 생각하신 건가요?
이운재: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만났습니다. 아내에게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아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아버님께서 '교회를 다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시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님께서 '우리 딸과 교제를 허락하는 첫 번째 조건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경희대학교 홍릉 캠퍼스 근처에 교회가 있었고, 아내 손을 잡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의 조건이 있었지만, 종교를 강요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김학중 목사: 아내분은 교회에서 봉사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운재: 네, 아내는 성가대 봉사를 했습니다. 저는 성가대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점심을 먹고 데이트를 했습니다. 아내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청년부 활동도 함께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말 풋풋한 연애를 했습니다.
김학중 목사: 믿음을 갖게 된 후,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했던 시간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운재: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아내를 만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운동선수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만 가득했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감독님이 '몸무게를 감량하고 경기에 뛰고 싶으면 살을 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 20kg 가까이 감량했습니다. 밥 먹고 배가 부르면 토하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서 병원을 찾아갔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몸무게는 86kg에서 80kg까지 줄었는데도 몸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병원에서 '신경성'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이운재: 세 번째 병원을 찾아갔을 때, 처음으로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활동성 폐결핵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폐 한쪽에 결핵균이 붙어 있었고, 폐 기능도 많이 손상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늦었으면 폐를 잘라낼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폐결핵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했습니다. 그 진단을 듣는 순간 '올림픽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훈련을 견디고 살까지 뺐는데, 올림픽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하늘을 보며 울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가'라는 원망이 컸습니다. 당시에는 신앙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먼저 들었습니다.
김학중 목사: 신앙이 성숙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께 원망의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인간의 감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운재 집사님께서는 어떠셨나요?
이운재: 폐결핵 진단을 받고 힘들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재활 치료를 통해 다시 건강을 회복했고, 1998년부터 다시 국가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2006년 월드컵까지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2006년 월드컵 이후 소속팀에서 경기에 뛰지 못했습니다.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 것이죠. 경기에 뛰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내가 이렇게 잘하는데 왜 나를 안 쓰는 거지?'라는 불만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내가 이렇게 못 뛰면 소속팀이 잘 돌아가나 보자'라는 오만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깨달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요. 그때부터 모든 것이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축구팀도 잘 돌아가고, 저도 다시 경기에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운재: 그때 깨달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지'를요. 그것은 저에게 '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너의 영광이 아니다. 너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네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겸손을 배우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죠. 그 이후 선수 생활을 하면서 '언제 은퇴할지는 모르겠지만, 선수 생활을 하는 모든 시간이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경기에 뛰든 못 뛰든, 그 순간 자체가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감사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김학중 목사: 이운재 선수께서 축구 선수로 활동하신 기간이 16년이라고 하셨는데, 수많은 경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어떤 경기인가요?
이운재: 많은 분들이 2002년 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 승부차기 경기를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02년 월드컵 폴란드와의 첫 경기입니다. 2002년 월드컵 폴란드전은 저에게 첫 경기였습니다. 만약 폴란드전에서 제가 제대로 뛰지 못했다면, 스페인전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폴란드전이 있었기에 스페인전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경기는 폴란드전입니다. 물론 스페인전도 잊을 수 없는 경기이지만요.
김학중 목사: 팬분들은 스페인전의 감동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운재: 승부차기는 골키퍼에게 유리한 싸움입니다. 승부차기에서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지만, 골키퍼는 역적이 되지 않습니다. 골을 막으면 영웅이 되지만, 못 막아도 비난받지 않습니다. 골키퍼에게는 5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키커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부차기 상황에서 재미있는 룰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는데 공이 왼쪽으로 가더라도, 제가 방향을 예측하고 몸을 날렸다면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키커가 잘 찼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실점하면 모든 책임은 키커에게 돌아갑니다. 승부차기에서는 항상 골키퍼가 유리합니다.
이운재: 승부차기 상황에서 많은 선수들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과도한 액션을 취하다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승부차기 상황에서 골을 끝까지 보고 막는 스타일입니다. 과학적으로 11m 거리에서 골대 구석으로 정확하게 차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골키퍼가 서 있는 골대 안쪽, 무릎과 허리 사이 공간으로 오는 공은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스페인전 승부차기 장면을 자세히 보시면, 제가 막은 공은 대부분 골대 중앙으로 향하는 공이었습니다. 대학교 때부터 승부차기 훈련을 많이 했고, 다른 골키퍼들보다 승부차기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김학중 목사: 승부차기 비결이 따로 있으셨나요?
이운재: 고등학교 때 감독님께 승부차기 훈련을 혹독하게 받았습니다. 감독님께서 직접 공을 차시고, 저는 막는 훈련을 반복했습니다. 하루에 50번, 100번씩 승부차기 훈련을 했습니다. 못 막아도 괜찮지만, 코스를 예측하지 못하면 혼났습니다. 공이 날아가는 방향을 예측하고 몸을 날리는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훈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승부차기에 대한 비결이 생겼습니다. 다른 골키퍼들은 한쪽 방향을 포기하고 뛰거나, 공을 끝까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공을 끝까지 보고 막는 스타일입니다.
김학중 목사: 경기를 보는 팬들도 긴장되는데, 직접 뛰는 골키퍼는 얼마나 긴장될까요? 특히 중요한 경기나 승부차기 상황에서는 엄청난 긴장감과 압박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렸나요?
이운재: 경기 전날 밤에는 항상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긴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경기일수록 긴장을 더 많이 하게 되는데, 긴장감을 떨쳐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긴장하지 않고 경기를 잘 마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기도 시간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이 경기는 제가 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경기'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셔서 큰 역사를 만들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해왔던 훈련과 노력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겠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상 없이 경기를 마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후 경기에 들어가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으로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된 국가대표팀, 그리고 은퇴
김학중 목사: 이운재 선수께서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하실 때, 유독 크리스천 선수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운재: 네, 맞습니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이영표 선수, 박지성 선수, 송종국 선수, 김남일 선수 등이 있었습니다. 안정환 선수도 함께했고요. 당시 대표팀에는 크리스천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김학중 목사: 필드 선수들은 골을 넣으면 골 세리머니를 할 수 있지만, 골키퍼는 골 세리머니를 하기가 어렵죠?
이운재: 네, 골키퍼는 골 세리머니를 거의 하지 못합니다. 골을 막으면 가슴을 치거나 기도하는 세리머니 정도만 할 수 있습니다. 필드 선수들처럼 화려한 세리머니는 하기 어렵습니다.
김학중 목사: 대표팀 경기나 A매치 경기처럼 중요하지 않은 경기에서는 선수들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운재: 네, 맞습니다. A매치 경기처럼 중요도가 낮은 경기 전날에는 크리스천 선수들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믿음을 다지고, 함께 기도하며 경기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김학중 목사: 팀에 23명의 선수가 있다면, 믿는 선수와 믿지 않는 선수가 섞여 있을 텐데, 예배를 드릴 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운재: 믿지 않는 선수들을 배려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대표팀에서 '맏형'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믿지 않는 선수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당시 아드보카트 감독님께서 '팀이 종교적으로 갈라지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선수들과 함께 고민하고 상의한 결과, 팀 전체의 화합을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예배 형식을 변경했습니다.
김학중 목사: 팀의 화합을 위해 예배 형식을 변경하셨군요. 혹시 종교적인 문제로 팀 내 갈등이 있었던 적도 있었나요?
이운재: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천 선수들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팀 전체의 화합을 위해 예배 형식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각자 방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방식으로 변경한 후, 팀 내 종교적인 갈등은 사라졌습니다.
김학중 목사: 2012년 12월에 은퇴하셨는데, 16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은퇴 당시 심정이 어떠셨나요?
이운재: 선수로서 마감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시원섭섭한 마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라는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만 더 뛸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한국 축구를 위해, 후배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김학중 목사: 선수 생활을 돌아보실 때, 가장 감사했던 점과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운재: 기자분들이 인터뷰할 때 항상 '언제가 가장 힘들었느냐', '언제가 가장 기뻤느냐'와 같은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공했을 때보다 성공하지 못했을 때가 더 힘들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성공했을 때는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성공하면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이 집중되고,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성장하는 후배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정상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맞는 말입니다. 정상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고, 그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김학중 목사: 자녀들 때문에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운재: 네, 맞습니다. 결혼 후에도 꾸준히 교회를 다녔지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주일에 예배만 드리는 정도였죠. 하지만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앙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함께 자녀들을 위해 신앙적으로 좋은 환경을 찾던 중, '중앙 기독 초등학교'라는 학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가정, 교회, 학교가 하나 되어 신앙 교육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2007년에 온누리교회에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이들도 모두 온누리교회와 중앙 기독 초등학교를 통해 신앙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첫째, 둘째 딸은 무용을 전공하고 있고, 막내아들은 축구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하나님 말씀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소망, 그리고 기도
김학중 목사: 첫째 따님은 무용을 전공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자녀들이 아빠의 운동 신경을 물려받았나요?
이운재: (웃음) 딸들은 엄마의 예술적인 감각을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아내는 고등학교 때 무용을 전공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운동 신경이 있는 것 같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전문 선수로 키울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김학중 목사: 운동선수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자녀들에게는 운동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운재: 제가 걸어온 길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로 성공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성공한다고 보장할 수도 없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길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김학중 목사: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그 재능을 나누는 삶은 정말 멋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소원을 가지고 계신지, 그리고 기도 제목이 있다면 함께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운재: 제 소원은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험해지고 있지만, 아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부모로서 자녀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아이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중심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내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고, 저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내기를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축구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 달려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이루실 계획을 기대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김학중 목사: 분명히 어느 곳에서든 빛을 발하실 것입니다. 국내 최고의 골키퍼로 활동하시면서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는 이운재 집사님의 말씀에 감동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힘든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회를 얻기를 소망합니다. 이운재 선수를 통해 국민들이 많은 기쁨과 감동을 얻었듯이, 앞으로도 많은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응원하며 기도하겠습니다. 멋진 제2의 인생을 펼쳐나가시기를 응원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이운재: 감사합니다.
김학중 목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