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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역주행 이건용 화백 간증: 인생·예술·신앙 이야기

요약

70대 역주행 신화, 이건용 화백의 인생 간증

"하늘의 때를 기다려라" 이건용 화백 간증 상세 정리 및 노하우 소개

오늘, 우리는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이건용 화백님의 감동적인 간증을 통해 인생의 깊은 의미와 예술, 그리고 신앙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얻어보려 합니다. 이 글은 단순한 요약이 아닌, 2만 자 내외의 상세 정리글로서, 이건용 화백님의 삶과 예술 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그 안에 숨겨진 노하우와 교훈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듯, 편안하고 친근한 문체로,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풀어나갈 예정인데요, 특히 중요한 부분은 볼드체로 강조하여 가독성을 높이고, 3~4문장마다 줄바꿈을 통해 시각적인 편안함까지 고려했습니다. 불필요한 쉼표나 따옴표는 최대한 제거하여 문장의 흐름을 매끄럽게 만들고, 다양한 문장 연결 어구를 적극 활용하여 자연스러운 연결을 돕겠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이건용 화백님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1. 시대의 역주행 아이콘, 이건용 화백을 만나다

최근 미술계에서는 '역주행'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오는데요, 이는 과거에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재조명받는 작품이나 작가를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새롭게 하소서"에서는 바로 이 역주행의 주인공, 70대 원로 화가이신 이건용 화백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70대가 되어서야 국내 미술계에서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받으며 큰 사랑을 받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를 묵묵히 기다려 온 이건용 화백님. 과연 그의 인생 이야기는 어떠할까요? 영상을 통해 먼저 만나보시겠습니다.

영상에서는 이건용 화백님을 "기존의 관습을 깨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위예술"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왔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강조하며, 묵묵히 외길 인생을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이건용 화백님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굳건히 지켜왔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믿음은 세상의 비판과 고정관념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2014년 한국 현대미술 작가 시리즈에 초대되어 6개월간 전시를 진행하며 해외 미술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대중들에게 작품 세계가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하는 이건용 화백님은 작품 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동남아시아 등 여러 국가에 교회를 건축하며 선교 활동에도 힘쓰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 감사하며 인생 2막을 써 내려가시는 이건용 화백님. 그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지지 않으신가요?

2. 서울 생활과 작품 세계: 신체 드로잉에서 마-디스크-f로

드디어 스튜디오에 이건용 화백님이 등장하셨습니다. 김학중 목사님과 김정현 사회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시며, 촌에서 서울로 이사 오신 근황을 전하셨는데요. 서울로 이사 온 이유는 가족들도 서울에 있지만, 해외 미술 관계자들과의 만남이 잦아 서울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프닝에서 언급되었듯이, 최근 국내 미술계와 대중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화백님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방송을 위해 특별히 작품 하나를 직접 가져오셨는데요,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리자, 이건용 화백님은 "신체 드로잉"에서 최근에는 "마-디스크-f (마-디스크-풍경)"라고 명명한 작품 세계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마-디스크-f"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예술에서 벗어나 현실, 즉 "우리의 현실의 장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는 사람의 신체와 그리는 매체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탄생한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작품 제작에 있어서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색깔과 터치, 자연을 보는 듯한 느낌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작품은 다채로운 색감과 역동적인 선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정면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눕혀 놓고 화면 뒤에서 손을 넘겨 그리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신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화면을 뒤집어 놓고 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얼마나 실험적인 예술 세계를 추구하시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을 "이벤트-로직 미술" 혹은 "퍼포먼스 미술"이라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제작 과정을 더 자세히 설명해주셨는데요, 캔버스에 최초의 선을 긋는 행위, 그 선들이 나타나는 과정, 검은색과 흰색의 자연스러운 조화, 물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하는 기법, 그리고 밝은 붉은색 배경 등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특히 붉은색 배경은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깔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몸으로 그리는 "이벤트-로직 미술"의 1세대 작가로서, 현재 사회가 다양한 예술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작품 세계에 호응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미술계의 엄격한 틀 때문에 일반적인 평가가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 이건용 화백님은 솔직하게 답변하셨습니다.

3. 비판과 비난 속에서 굳건히 지켜온 예술 철학

어려서부터 "왜 꼭 그렇게만 그려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는 이건용 화백님은, 성장하면서 자신만의 예술 철학을 확립해나갔다고 합니다. 7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획일적인 미술을 강요받는 현실에 저항하며, 제도와 체제에서 벗어나 "그린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탐구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민과 실험 정신은 "이벤트-회화"라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탄생시켰고, 현재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무슨 그림이야"라는 비판과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건용 화백님은 "무관심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에 집중했다는 것인데요. 당시 사회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고, 해외 문화를 배척하는 분위기였지만, 이건용 화백님은 오히려 이러한 시대 상황에 저항하며 더욱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결국,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개방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재평가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대중적인 인정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 "신앙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강조하시는 이건용 화백님. 그의 신앙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4.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난 믿음, 삶의 원동력이 되다

이건용 화백님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목회 활동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설교하시는 모습, 교회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던 기억,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묵상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그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긍정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제시대에 간호사로 활동하셨고, 위생 관념이 철저하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요, 원래 소설가를 꿈꾸셨던 인문학적인 아버지께서 어떻게 목사가 되셨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공개되었습니다. 책을 너무 좋아하셔서 이사를 한 번 밖에 못 갈 정도였다는 아버지, 양의사였던 할아버지의 영향, 그리고 할아버지의 유품 정리 중 발견한 성경책이 아버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열병이 유행하던 시절,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성경책을 발견하고 감명을 받아 신학대학에 진학,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셨다고 합니다. 당시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목회자로서 더욱 어려움을 겪으셨을 텐데, 아버지께서는 강직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묵묵히 목회의 길을 걸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 또한 간호사로서 넉넉지 않은 살림에 보탬이 되셨고, 엄격하지만 사랑으로 가득한 가정 환경 속에서 이건용 화백님은 성장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 습관을 몸에 익혔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형제자매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는데요, 목사를 포함하여 의상 디자이너, 건축가 등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형제들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가족 배경은 이건용 화백님의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자신에게 미술적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이건용 화백님은 "재능보다는 관심이 많았다"고 겸손하게 답변하셨습니다. 미국 구호 물품 속에 들어있던 컬러 인쇄 책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 동양화 중심의 흑백 그림만 존재하던 시대에 컬러 그림이 주는 충격은 어린 이건용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연탄재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나무 잎이 너무 많아서 못 그리겠다"고 답할 정도로 엉뚱하고 괴짜스러운 면모도 보였다고 합니다.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 이것이 바로 이건용 화백님 예술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요?

5. 홍익대학교 진학과 실험 미술의 시작,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열정

소년 시절부터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보였던 이건용 화백님은 홍익대학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시절부터 실험적인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나갔는데요. 실험적인 작품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힘들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실험 미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비판적인 시각도 많았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질문에, 이건용 화백님은 "미술 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실망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간호사였기 때문에 아들이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를 바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용 화백님은 사람을 고치는 일보다는 예술을 통해 세상에 의미를 전달하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느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라벌예대 야간부에 편입학하며 미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지만,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야 했고, 집안의 반대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홍익대학교 시험을 다시 보라고 권유했고, 이건용 화백님은 홍익대학교에 합격하게 됩니다.

결혼 후에는 더욱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지만, 실험 미술만 고집하다 보니 수입이 불안정했던 것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림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회상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아내 또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었기에 남편의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제 예술을 첫째로 이해하고 가치 있게 생각했던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심지어 하루에 두 끼만 먹을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에도, 굶어 죽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고 하니,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빈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덕분에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6. 교수 임용과 신원조회,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사랑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예술 활동을 이어가던 이건용 화백님은 교수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수 임용 과정 또한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신원조회라는 절차가 있었는데, 실험 미술, 특히 권력 비판적인 퍼포먼스 미술을 했던 이건용 화백님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신원조회 과정에서 과거 퍼포먼스 작품들이 문제가 되었고, 작품 활동에 대한 질문과 감시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작품 할 때마다 기관에서 자꾸 질문하고, 전시회에 반입하는 작품을 두 번이나 교체해야 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신원조회 때문에 교수 임용이 좌절될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무사히 교수 임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건용 화백님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분은 대학의 원로 교수였다고 합니다. 그 원로 교수는 이건용 화백님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목사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적극적으로 변호해주었고, 학장 또한 이건용 화백님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여 교수 임용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수 임용된 이건용 화백님은 이후 30년 동안 제자 양성에 힘썼습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아버지처럼 제자들의 영적인 성장까지 돕는 스승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합니다. 지도교수로 10년 동안 한 서클을 맡아 이끌면서, 제자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어려움을 겪는 제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상담을 통해 제자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신앙적인 멘토 역할까지 자처했다고 합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외로운 대학 생활을 하는 제자들에게는 교회가 쉼터가 되어주었고, 자연스럽게 전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미술과 교수들이 학생들을 교회로 많이 데려오는 역할을 했다고 회상하며 웃으셨습니다.

7. 영적인 체험과 교회 건축 서원, 그리고 늦깎이 전성시대

지금까지는 비교적 평탄하게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말씀하셨지만, 이건용 화백님에게도 삶을 송두리째 바꾼 "영적인 체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체험 신앙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은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용 화백님은 과거에 갈등과 어려움이 많았지만,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난 덕분에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6.25 전쟁 때 제주도까지 피난 갔던 경험, 소록도에서 목회 활동을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의 권유로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뻔했던 위기 등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굳건한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어느 날, 이건용 화백님은 제자들과 함께 "치유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집회 도중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 쓰러지는 사람들, 쇼와 같은 분위기에 실망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운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그는 "두려움"과 "경외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교만했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한 존재였는지 깨닫게 되면서, 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집회 후 아내에게 "울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우는 건 좋은데, 휴지는 챙겨갔냐'고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영적인 체험을 통해 이건용 화백님은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임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아버지께서 해외에 20개 교회를 건축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자신도 교회를 건축하겠다는 서원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20개 교회를 건축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서 '50개'라는 숫자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50개 교회를 건축하겠다고 서원하는 순간, 마음속에 평안함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서원이었지만, 그는 의심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교회 건축 서원을 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국립대학교 교수 월급은 넉넉하지 않았고, 연구비 지원도 부족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어느 날,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는 것을 발견하고,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머리카락을 이용한 독특한 작품들은 201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개인전에서 6개월간 전시되며 큰 호응을 얻었고, 늦깎이 전성시대의 서막을 알립니다. 머리카락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면서, 대중들에게도 그의 예술 세계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8. 70대 역주행 신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삶

2014년 개인전 이후, 이건용 화백님의 작품 세계는 국내외 미술계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외 미술관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고, 국내외 갤러리들의 러브콜이 쇄도했습니다. 해외 전시를 통해 작품이 국립 미술관에 판매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으며, 국내에서는 "미친 사람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입소문이 퍼져나가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70대에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가 된 것입니다.

"젊었을 때 성공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없었는지 묻는 질문에, 이건용 화백님은 "과거에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고 답변했습니다. 만약 젊었을 때 성공했다면 단명했을 수도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농담 섞인 위로도 전했습니다. 오히려 늦게 성공했기에 더욱 오래도록 예술 활동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50개 교회 건축 서원에 대한 질문에, 현재까지 30개 교회를 건축했고, 앞으로 20개를 더 건축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교회 건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예술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작품 활동과 교회 건축을 이어갈 것이며, 아프리카 우물 파기, 러시아 선교 등 다양한 선교 활동에도 참여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인이 헌금을 해야겠다고 말했다는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9. 맺음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

김학중 목사님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영적으로 더욱 젊어지고 강해진다는 증거"라며 이건용 화백님을 격려했습니다. "모두가 함께 출발했지만, 누군가 앞서가는 것처럼 보일 때 좌절감을 느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춰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엎드려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믿음은 결국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교훈을 전달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건용 화백님의 간증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삶"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이건용 화백님의 삶을 통해 얻은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기고, 우리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이건용 화백님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2. 너무나도 중요한 소식 (불편한 진실)

3. 당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

4. 신(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5. 신의 증거(연역적 추론)

6. 신의 증거(귀납적 증거)

7. 신의 증거(현실적인 증거)

8.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9. 성경의 사실성

10. 압도적으로 높은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11.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12.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

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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