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남매 역경 딛고 희망의 음악 펼친 아슬란뮤직 라영신 대표 스토리
## 5남매 딛고 음악으로 희망을 쏘다: 라영신 대표의 역경 극복 스토리
세상에 던져진 어린 5남매, 역경을 딛고 일어서기까지: 아슬란뮤직 라영신 대표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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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한 아슬란뮤직의 라영신 대표의 인생 이야기를 상세히 정리하고, 그가 고난을 극복하고 음악으로 희망을 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라영신 대표는 어린 시절 겪었던 극심한 가정 폭력과 경제적 어려움,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연이은 유산의 아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켜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전하고 있는데요.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역경 극복기를 넘어, 우리 삶 속에서 마주하는 고난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고, 더욱 나아가서는 어떻게 역경을 딛고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를 찾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지금부터 라영신 대표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시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용기와 희망을 얻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1. 고난의 시작: 폭력과 가출, 벼랑 끝에 내몰린 어린 시절
라영신 대표는 5남매 중 한 명으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폭력에 시달리며 극한의 공포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흔히 가정 폭력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폭력을 떠올리기 쉽지만, 라영신 대표의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폭력의 가해자였는데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5남매에게도 감정 쓰레기통처럼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어린 영신 대표는 신발장에 튄 피를 보며 공포에 질렸고, 울음조차 제대로 터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이러한 폭력적인 환경은 어머니가 젊은 시절 겪었던 시집살이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어머니는 깡시골 시댁에서 극심한 시집살이를 겪으며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서울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시댁 식구들에게 온갖 구박과 폭력을 당했고, 심지어는 세탁기 사용조차 금지당하는 등 상상하기 힘든 억압 속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세탁기 대신 겨울 강가에서 얼음을 깨가며 빨래를 해야 했고, 1년에 13번이나 되는 제사를 억지로 지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놓였던 것이죠. 아버지 또한 어머니의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어머니의 고통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절벽에서 투신하려 하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했지만, 아버지의 무관심과 냉담함은 어머니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부모님의 불화는 결국 아버지의 가출로 이어졌고, 남겨진 5남매에게는 더욱 가혹한 현실이 닥쳐왔습니다. 아버지의 가출 후 어머니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고, 가정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사업 실패와 빚에 시달리면서 사채까지 끌어쓰게 되었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사채업자들의 잦은 방문과 협박은 어린 5남매에게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마저 사채 빚 때문에 야반도주하면서 어린 5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영신 대표는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시골 할머니 댁으로 향했지만, 아버지마저 여자 문제로 가정을 완전히 버리면서 5남매는 방치된 채 힘겨운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2. 소년 가장의 눈물: 방황과 위태로운 10대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10대 시절, 라영신 대표는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영신 대표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고, 어린 동생들을 돌볼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겨울에는 옥탑방 화장실이 얼어붙어 PC방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고,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지하 방에서 넷이 옹기종기 모여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일주일에 10만 원씩 생활비를 받았지만, 5남매가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동생들을 보며 영신 대표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휩싸였고,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납골당 뼈 가루를 붙이는 험악한 일부터 조폭들이 시키는 불법 전단지 아르바이트까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 영신 대표는 점점 학교를 멀리하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냉혹한 현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수업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고, 시험을 보지 않는 날도 많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학교 친구들과 멀어지고, 어둠의 세계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담배와 술을 배우고 오토바이를 타는 등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타는 위험한 질주를 반복하며 죽음을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로등 아래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듯한 경험을 하면서, 완전히 엇나가지 않고 위태로운 10대 시절을 간신히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과의 만남은 영신 대표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학교에 체육복을 잃어버렸다는 핑계로 체육 수업에 빠지던 영신 대표를 교무실로 불러 혼을 내시려던 담임 선생님은, 오히려 영신 대표의 가정사를 듣고 깊이 공감하며 위로해주셨습니다. "부모가 너를 버려도 하나님은 절대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따뜻한 말은 영신 대표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였고, 잃어버린 체육복을 사라고 20만 원이라는 거금을 쥐어주시기도 했습니다. 김선영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도움은 영신 대표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3. 음악과의 만남, 방황을 멈추고 꿈을 향해 나아가다
힘겨운 방황 속에서 영신 대표는 음악, 특히 힙합 음악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를 떠나 방황하던 시절, 밴드 음악을 듣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다이나믹 듀오의 '불면증'이라는 곡은 영신 대표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고통과 힘겨운 현실을 노래하는 가사는 영신 대표 자신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었고, 힙합 음악 특유의 진솔한 가사와 강렬한 리듬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부터 힙합 음악을 듣고 랩을 따라 하면서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힙합 음악은 영신 대표에게 단순한 음악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음악은 그의 아픔과 분노, 슬픔과 절망을 배설하는 창구였고, 동시에 새로운 꿈과 희망을 불어넣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음악에 몰두하면서 자연스럽게 비행 청소년 시절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연습과 작곡에 몰두하는 시간은 그에게 위로와 안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음악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고, 래퍼로서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대학교 진학 후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서 활동하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래퍼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4. 다시 만난 하나님, 슬픔을 넘어 사명으로
음악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원하던 대학에 진학하고 힙합 뮤지션으로서 인정받았지만, 행복감은 잠시뿐이었고 깊은 공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팀원이었던 슬로우지 JQ의 권유로 우리들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겉모습만 보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팀원의 신앙심에 놀랐고,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참석한 예배에서 라영신 대표는 예상치 못한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 설교를 통해 라영신 대표는 어린 시절 겪었던 가정의 아픔과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이혼 가정 자녀들이 흔히 느끼는 죄책감이 본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방주 설교를 통해 고난은 똥물 웅덩이와 같지만, 그 똥물 웅덩이를 40일 동안 견뎌야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땅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설교를 듣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3년 만에 다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면서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을 회복한 후, 라영신 대표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혈기 넘치고 폭력적인 오빠였지만, 이제는 설거지와 빨래를 하며 동생들을 살뜰히 챙기는 다정한 오빠로 변모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자, 둘째 동생 수지를 시작으로 다른 형제자매들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5남매 모두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랜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찾은 것입니다.
5. 예기치 못한 시련, 동생의 죽음과 유산의 아픔
행복도 잠시, 라영신 대표에게 또 다시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둘째 동생 수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라영신 대표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고, 죄책감과 자책감에 휩싸여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동생의 죽음 이후, 라영신 대표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심지어 환청에 시달리며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음악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와의 사이에서 가진 세 아이를 연이어 유산하는 아픔까지 겪으면서 라영신 대표는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동생의 죽음에 이어 연이은 유산까지 겪으면서,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신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목사님의 "붙어만 있으라"는 조언을 따라 억지로 예배에 참석하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던 중, 2018년 열왕기상 '하나님의 사람' 설교를 통해 동생의 죽음과 유산의 아픔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하게 되면서 다시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6.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아슬란뮤직의 탄생
'하나님의 사람' 설교를 통해 라영신 대표는 삶과 죽음, 고난과 축복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동생의 죽음과 유산은 슬픔이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후, 라영신 대표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건강한 딸 '온'을 출산하면서 다시 삶의 희망을 발견했고, 딸의 이름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신앙을 회복하고 가정의 안정을 되찾은 라영신 대표는 힙합 크루 '언다이트'를 '아슬란뮤직'으로 재정비하고 본격적인 찬양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아슬란뮤직은 C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사자 아슬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티브로 한 이름입니다. 아슬란뮤직은 세상에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음악, 생명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음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세기 말씀을 바탕으로 창조 질서를 노래하는 앨범을 발매하고, 영화 '언플랜드' OST 커버 작업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박치순 목사님과의 협업을 통해 마약 퇴치 캠페인 음악 제작에도 참여하며 음악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뮤지션으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라영신 대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그는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고난과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켜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과 사랑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라영신 대표와 아슬란뮤직의 음악은 세상에 지치고 힘든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