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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과 고난을 딛고 복음을 전하는 만화가 김종두 이야기

요약

## 간첩 누명 벗고 만화로 복음 전하는 삶: 김종두 작가의 희망과 용기

간첩 누명으로 고통받은 아버지, 그리고 극적인 삶의 반전: 기독 만화가 김종두 작가의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께서는 평범한 삶 속에서 예기치 못한 고난을 겪고,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 놀라운 인생의 반전을 이룬 한 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접하게 되실 겁니다. 과거 우리 사회에는 무고한 시민들이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피해를 보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빈번했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김종두 작가님 역시 아버지께서 간첩 혐의를 받으시면서 어린 시절부터 깊은 상처를 안고 성장하셨다고 합니다. 간첩이라는 낙인은 한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무서운 것이었고, 작가님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작가님의 삶에 놀랍게 역사하셨고, 그 고난을 오히려 선한 도구로 사용하셨는데요, 지금부터 기독 만화가 김종두 작가님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를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격동의 시대, 아버지의 간첩 누명과 가족의 고통

김종두 작가님은 만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사역을 하고 계신데요, 작가님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한 만화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님께서 태어나시기 전, 아버지께서는 간첩으로 오인받는 억울한 일을 겪으셨다고 하는데요,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떠했는지 작가님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작가님이 태어나신 1968년은 남북 관계가 극도로 긴장되었던 시기였는데요, 마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과 같은 불안한 분위기가 사회 전체를 감돌았습니다. 1968년에는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무장공비의 울진-삼척 침투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회적으로 극도의 불안감이 팽배했었죠.

이러한 살벌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작가님의 아버지께서는 서해 바다에서 조기잡이를 하시다가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는 불행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당시 서해는 황금어장으로 불릴 만큼 조기가 풍부했는데요, 연평도 근처에서 조업하시던 아버님은 북한 경비정에 의해 억류되셨고, 무려 1년 동안 북한에서 억류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1년 후 아버님은 기적적으로 귀환하셨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 큰 고난의 시작이었다고 작가님은 회상합니다. 귀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인데요, 북한에서 배를 돌려보내줄 때 어부들에게 쌀 두 가마씩을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나았던 시절이라 쌀을 나눠줄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쌀을 바다에 버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님과 선장님 두 분이 아까운 마음에 쌀을 버리지 않고 숨겨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아버님은 간첩 혐의를 받게 되신 것인데요, 당시 한국 사회는 간첩 조작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간첩을 잡아들이면 엄청난 포상금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1960년대 간첩 포상금이 약 3천만 원이었는데, 당시 서울 기와집 한 채 가격이 300만 원 정도였다고 하니, 포상금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사들은 간첩 사건을 통해 인생 역전을 꿈꿀 수 있었고, 어리숙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간첩 조작의 희생양이 되기 쉬웠던 시대였습니다.

작가님의 아버님 역시 어리숙하고 순박한 어부였기에 간첩 조작 사건의 표적이 되었는데요, 아버님은 북한에서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 국가 기밀을 누설했는지에 대한 강압적인 수사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결백하셨고, 형사들의 강압적인 추궁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형사들은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는데요, 물구나무를 세워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들이붓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 인간 이하의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님은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허위 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고, 글을 읽지 못하는 아버님께 형사들이 글을 가르쳐주며 자술서를 대필하게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모나미 볼펜이 터져 잉크가 번질 정도로 자술서를 강요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님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혐의로 전주교도소에 2개월 동안 수감되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간첩 누명을 쓰고 1년 억류에 2개월 옥살이까지 하셨으니, 아버님의 정신적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입니다. 출소 후 아버님은 완전히 폐인이 되셨다고 작가님은 안타까워합니다. 술에 의존하며 괴물처럼 변해버린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어머니를 폭행하는 등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작가님은 술 취한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이면 가족들과 함께 산으로 피신하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한번은 피신하는 과정에서 동생이 사라져 온 가족이 발을 동동 굴렀는데, 나중에 마루 밑에 숨어있던 동생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가정은 늘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님은 병원과 집을 오가며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시다 작가님이 9살 되던 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아버지의 폭력과 죽음을 겪으면서 작가님은 큰 혼란과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님은 아버님이 왜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시대의 아픔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의 간첩 누명 사건은 한 가정을 풍비박산 낸 비극이었고,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남았습니다. 어머니는 1년 동안 북한에 억류되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고 깊은 슬픔에 잠겨 계셨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에는 우울증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지만, 어머니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셨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쥐약을 드시거나, 누님을 업고 바닷가에 나가 바위에 아이를 내려놓고 바다에 뛰어드는 등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다행히 누님의 울음소리를 듣고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이 어머니와 누님을 구출해 주셨다고 합니다. 작가님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의 극단적인 선택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 어머니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갯벌에서 조개를 캐다 팔았는데, 밤에 몰래 조개를 캐다 경비원에게 발각되어 큰 충격을 받고 정신줄을 놓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후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하셨고, 자녀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어린 나이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는데요, 특히 작가님의 형님은 중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 가구 공장에 취업하여 생계를 책임지셨다고 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리던 형님은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후 형님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의 불행이 닥쳤습니다. 누님들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도시로 나가 가정부 일을 하며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네 명의 누님들 중 두 명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연락이 끊겼다고 하니, 당시 누님들이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님 중 한 분은 가정부 생활을 견디다 못해 무작정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군산까지 걸어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차비도 없이 2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고향으로 향했던 누님의 이야기는 작가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간첩 누명을 쓴 가족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멸시 또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는데요, 동네 사람들은 작가님 집 장독대에 돌을 던지고, 어린 작가님에게 돌을 던지며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간첩 교육이라며 학생들을 모아놓고 표적에 총을 쏘는 훈련을 시키기도 했는데, 어린 작가님은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 사건 때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작가님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고통과 아픔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냈다고 합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어린 시절 작가님은 왜 자신만 이런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절망했습니다. 작가님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고, 하루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학교에 가도 학용품 살 돈이 없어 어머니께 돈을 달라고 떼쓰는 것조차 죄송스러웠고, 어머니는 늘 밖으로만 도셨기에 어린 작가님은 늘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를 무시하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며 어린 작가님은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감에 속으로 울어야 했습니다.

가족들은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제대로 된 집에서 살지 못하고 빈집이나 폐가 같은 곳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대문도 없는 집에 쥐가 들끓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족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새벽마다 술 취한 아저씨들이 대문 없는 집 마루에 드러누워 행패를 부리고 문고리를 흔들어대는 통에 어린 동생은 밤마다 무서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폐허와 같은 집에서 쥐들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작가님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폐렴으로 고생했던 형님은 건강이 조금 나아지자 가족 생계를 위해 다시 배를 타셨지만, 불의의 사고로 바다에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형님의 죽음은 작가님에게 또 다른 큰 슬픔과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아버지마저 안 계신 상황에서 형님은 작가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는데요, 엄격했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동생들을 챙겼던 형님은 병마와 싸우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형님은 하늘산기도원에 가서 눈물로 기도하며 예수님을 영접했고,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투병했지만, 결국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임종 직전 형님은 동생들을 작은아버지에게 부탁하며 교회에 다니라는 유언을 남겼고, 누님에게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누님이 불러주는 찬송가를 들으며 형님은 평안하게 눈을 감으셨고, 13살 어린 나이에 작가님은 또 다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잇따른 가족의 죽음과 불행 속에서 작가님은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섬에서 도시로 이사 온 후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셨고, 작가님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습니다. 아침에 늦잠을 자 학교에 늦게 가는 일이 잦았고,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샌들을 신고 다니는 등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도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작가님은 외로움과 슬픔을 그림으로 달랬습니다. 집 앞 백사장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슬픔을 삭였던 작가님에게 백사장은 스케치북이자 캔버스였고, 그림은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섬을 떠나 도시로 이사했지만, 불행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기를 당해 전세금을 날리고 외할머니 댁에 얹혀살다가 빈집을 전전하는 힘겨운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군산에서 서천으로 이사하면서 작가님은 금강 하굿둑을 건너 먼 거리를 통학해야 했는데요, 5km는 자전거를 타고, 장항선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다시 걸어서 학교에 가는 고된 통학길은 작가님을 지치게 했습니다. 매일 왕복 4시간이 넘는 통학길에서 작가님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폭풍이 불면 배가 뜨지 않아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고, 작가님은 폭풍이 불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힘겨운 통학길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금강 하굿둑을 건너 학교를 오가며 마주했던 아름다운 풍경들은 훗날 작가님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작가님은 군산시 지도를 그릴 정도로 군산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고, 당시 경험은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꿈꿀 수 없었던 작가님은 군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요, 상고에 진학했지만 주산과 부기에는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학교 수업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수업시간 내내 공책에 낙서만 하던 작가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낙서를 워낙 많이 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고, 세계문학전집 삽화나 화보 등을 보며 그림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공책 귀퉁이가 낙서로 가득 차자 교과서 여백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노트를 마련해 본격적으로 낙서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미술 선생님이 작가님의 노트를 보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는데요, 열심히 필기하는 줄 알고 칭찬하려던 선생님은 작가님의 노트가 온통 낙서로 가득 찬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며 작가님을 혼내셨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술 교생 선생님이 오시면서 작가님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교생 선생님은 작가님의 낙서 노트를 보시고 그림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미술 공부를 권유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작가님을 미술실로 데려가 석고 데생을 가르쳐주시고, 사과를 그리게 하시는 등 열정적으로 지도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에 힘입어 작가님은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교생 선생님은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작가님의 재능을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고, 작가님은 선생님의 격려와 지지 덕분에 화가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교생 선생님은 방학 때 서울에서 그림을 배우라며 작가님을 이끌었고, 작가님은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울 화실에서 작가님은 유명 미술 평론가 원장 선생님을 만나 3년 동안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작가님의 재능을 인정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작가님은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결심했지만, 등록금 20만 원이 없어 좌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작가님을 다시 서울로 불러 1년 동안 재수를 시켜주셨고, 작가님은 재수 끝에 군산대학교 미술학과에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작가님은 여전히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지만, 대학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원장 선생님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되면서 작가님의 인생은 또 한 번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학원 원장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요, 추위에 떨던 작가님에게 따뜻한 교회에서 하룻밤 묵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일 생각에 교회에 따라갔지만, 작가님은 교회에서 난생 처음 십자가를 보게 되었고, 십자가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슬픔과 고통이 터져 나오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작가님은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뒤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지만, 작가님은 그때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날 이후 작가님은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새벽기도, 부흥회 등 각종 예배와 기도 모임에 참석하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작가님은 삶의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발견했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간첩 누명을 쓴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가족들은 여전히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작가님은 선교사가 되어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꿈을 꾸었는데요, 한국을 떠나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유학생 선교사 과정을 밟고 중국 선교를 준비하던 작가님에게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안기부 직원은 작가님을 만나 중국 선교 계획을 묻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과거를 들춰내며 간첩 혐의를 씌우려 했습니다. 결국 작가님은 출국 금지 조치를 당하고 선교사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선교사의 꿈이 좌절되자 작가님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했지만, 신문 배달, 교회 벽돌 쌓기, 미장, 벽화 그리기 등 노동을 통해 고통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육체적인 노동은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작가님은 노동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작가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 선교사보다 더 귀한 곳에 사용하시기 위해 선교의 길을 막으셨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또한, '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외국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내면의 질문에 답하며 선교사로서의 자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선교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작가님은 조국과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작가님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조국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고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서해 갯벌,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 판소리 등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 작가님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의 시를 읽으며 작가님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스타일도 바뀌었는데요, 차가운 파란색 위주로 그리던 그림에서 따뜻한 색깔을 많이 사용하면서 그림 자체도 따뜻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마음의 변화와 함께 작가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기대하며 기도했습니다.

만화, 복음 전파의 도구로 거듭나다

작가님의 기대와 기도에 응답하시듯, 하나님께서는 만화라는 특별한 재능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학 졸업 후 언론 자유화 시대에 발맞춰 신문사마다 시사 만화가 붐처럼 번지던 시기에 작가님은 선배의 추천으로 시사 만화가로 데뷔하게 됩니다. 4컷 만화를 통해 정치 풍자, 사회 비판 등 날카로운 시사 만화를 그리며 이름을 알렸고, 시사 만화가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시사 만화가로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기독교 만화, 즉 복음 전파를 위한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이현세 화백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면서 작가님은 기독교 지식과 교리를 만화로 쉽게 풀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기독교 만화 제작에 뛰어들었습니다.

세계 선교 역사에 감동을 받은 작가님은 세계 선교 역사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고, 한국 최초의 기독교 지식 만화 '만화로 보는 세계 선교 발달사'를 출간하며 기독 만화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출판사를 찾지 못해 직접 복사하여 주변에 나눠주던 만화 원고는 생명의 말씀사를 통해 정식 출판되었고, 1만 부 이상 판매되며 선교 단체 필독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후 '만화로 보는 세계 기도 정보', '윌리엄 캐리' 등 기독교 지식과 교리를 쉽게 풀어낸 만화들을 잇달아 출간하며 기독 만화가로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캠퍼스 전도 활동을 하면서도 잉크를 가방에 넣어 다니며 캠퍼스 열람실에서 만화를 그리는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만화가로서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냈고, 선교 단체나 목회자의 길을 권유하며 만화가의 길을 만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은 만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을 만화로 그리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 책은 바로 종교개혁의 교과서라 불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였습니다. 기독교 강요를 읽으면서 작가님은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고, 기독교 강요를 만화로 만들어 한국 교회에 소개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게 됩니다. 기독교 강요 만화 제작은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작가님은 포기하지 않고 기독교 강요 원전을 탐독하고 관련 자료를 연구하며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완성했습니다.

만화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요, 과로와 스트레스로 대상포진에 걸리는 등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그림을 그렸고, 마침내 5년 만에 '만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기독교 강요 만화는 신학계와 교계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프랑스 개혁교회 초청을 받아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개혁교회 관계자는 한국 신학교 총장 방에 꽂혀 있는 만화 기독교강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작가님을 초청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강요 만화는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 교회에도 소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림은 '진리'를 담는 그릇, 그리고 희년의 은총

기독 만화가로서 작가님의 철학은 '그림은 진리를 담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작가님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그림을 그린다고 강조합니다. 만화는 재미있어야 하지만, 진리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작가님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을 시각화할 때도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표현은 지양하고, 비유나 상징, 대화 등을 통해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철저히 진리를 보조하는 수단이며, 그림 자체가 주목받기보다는 말씀과 복음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작가님의 기독 만화 철학입니다.

만화가로서 성공적인 길을 걷던 작가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도 만화 제작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출판사를 나와 전도 만화 사역에 매진했습니다. 작은 전도 만화를 제작하여 군부대, 교도소, 소년원, 다문화 거리 등 복음의 손길이 필요한 곳곳에 전도 만화를 보급하며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전도 만화 사역에 헌신하던 작가님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는데요, 49년 동안 잊혀졌던 아버지의 간첩 누명 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억류되었던 어부 한 분이 재심을 청구했고, 증인으로 나선 덕분에 재심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은 재심 재판에 참석하지도 않았지만, 2017년 겨울, 아버지의 무죄 판결 소식을 듣게 되었고, 재판부는 아버지께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49년 만에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는 감격적인 순간, 작가님의 마음속 응어리와 상처는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재심 무죄 판결과 함께 형사보상, 민사보상까지 이루어졌고, 가족들은 보상금을 나누며 오랜 고통을 위로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누명 벗겨짐과 함께 작가님에게는 '희년'의 은총이 임했습니다. 희년은 모든 빚이 탕감되고 자유와 해방이 선포되는 해인데요, 작가님은 아버지의 무죄 판결이 자신의 인생에 희년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희년을 맞이하여 작가님은 원망의 인생에서 감사와 사랑의 인생으로, 받는 인생에서 주는 인생으로, 홀로 가는 인생에서 함께하는 인생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놀랍게도 희년 선포 이후 작가님의 마음에는 미움과 원망 대신 사랑과 감사, 평안이 가득 차게 되었고, 과거의 아픔을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장이 된 작가님은 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보며 아버지의 고통과 희생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형님과 작가님, 그리고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버지의 고난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작가님은 고백합니다. 무죄 판결 후 고향 섬을 방문했을 때 작가님은 어린 시절 고통 속에서 헤매던 섬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섬으로 변화되었음을 느끼고 감격했습니다. 섬에는 동티모르에서 온 외국인 어부들이 많았는데요, 작가님은 섬 교회에 전도 만화를 기증하고 인도네시아어로 번역된 전도 만화를 보내 어부 선교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뜻밖에도 인도에서 작가님의 전도 만화가 큰 인기를 얻어 60만 명 이상이 복음을 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오히려 전도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작가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작가님은 드론으로 밤하늘에 복음 메시지를 담은 만화를 그리는 새로운 비전을 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모래밭에 그림을 그리며 외로움을 달랬던 작가님은 이제 드넓은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복음을 전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청소년들이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드론 만화를 통해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고, 청소년들이 별처럼 빛나는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작가님의 새로운 비전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그날까지, 작가님은 만화라는 특별한 재능을 통해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늘 김종두 작가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귀한 간증과 작품 활동을 응원하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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