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에서 사회적 기업가로,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감동 스토리
고아, 희망을 일구는 삶: 브라더스키퍼 김성민
“고아라는 이름표를 자랑으로”: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의 감동적인 인생 역전 스토리, 희망을 심는 사회적 기업가로 거듭나기까지
오늘, 삭막한 벽을 희망의 정원으로 바꾸는 특별한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키퍼의 김성민 대표님의 감동적인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김성민 대표님은 스스로를 “고아”라고 당당하게 소개하며, 오히려 그 경험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하는데요, 과연 그에게는 어떤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가 숨겨져 있을까요? 단순히 슬픈 과거를 극복한 이야기가 아닌, 고통 속에서 피어난 숭고한 가치와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는 김성민 대표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함께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해 줄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의 진솔한 고백과 뜨거운 열정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김성민 대표님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그리고 장모님까지, 세 명의 어머니를 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유쾌하게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어머니”라는 단어가 그에게 남다른 아픔과 애틋함을 동시에 지닌 단어임을 고백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부모님의 얼굴조차 모르는 고아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과 역경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잦은 구타와 굶주림 속에서 보육원 생활을 견뎌내야 했고, 청소년 시절에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칼을 품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었다고 하니, 그의 마음속 깊은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적인 과거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고아라는 사실조차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히려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는 사회적 기업가로 변신한 김성민 대표님. 그의 놀라운 변화 뒤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요?
브라더스키퍼는 삭막한 벽을 정원으로 만드는, 조금은 특별한 사업을 하는 사회적 기업이라고 합니다. 김성민 대표님은 현재 대한민국이 미세먼지로 심각한 상황 속에서, 실내외 공간 어디든 식물로 채우는 사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단순히 식물을 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살아있는 식물과 자동 관수 시설, 경비 시스템까지 갖춘 스마트 정원 시스템을 구축하여, 사람 손이 닿지 않아도 식물이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점이 놀라운데요, 이는 단순한 조경 사업을 넘어 기술과 환경,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융합한 혁신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브라더스키퍼의 직원 채용 조건 또한 매우 특별하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회사가 학력, 경력, 자격증과 같은 스펙을 중요시하는 반면, 브라더스키퍼는 보육원 퇴소 청소년들을 우대 채용한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 아닌,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김성민 대표님의 깊은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직원들은 입사 시 자신의 과거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브라더스키퍼가 보육원, 고아라는 단어를 더 이상 상처가 아닌, 오히려 동질감과 연대감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매개체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육원에서의 경험을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점 또한,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퇴소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브라더스키퍼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김성민 대표님 역시 3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정확한 생일조차 모른다고 하는데요, 보육원에서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3살 무렵 안동 초등학교 앞에서 발견되었다고 추정될 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또한 보육원에서 임의로 만들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이름과 나이조차 없는, 어쩌면 존재 자체가 지워진 듯한 암울한 과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육원에서는 3살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약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보육원에는 80명의 아이들과 단 3명의 선생님만이 함께 생활했다고 하니,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남자아이들은 형들에게, 여자아이들은 누나들에게 의지하며 성장하는 환경 속에서, 보육원 내에는 일종의 “무질서”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재단 보육원이었기에, 종교 활동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고 합니다. 매주 교회에 참석해야 했지만, 김성민 대표님은 그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버리셨을까” 하는 원망과 분노가 더 컸다고 하는데요, 이는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초등학교 입학 전,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모든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평범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어린 김성민에게, 이 말은 마치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도 내 편이 생겼다”는 생각에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주일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여전히 구타와 폭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을 믿고 “이번 한 번만 안 맞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평소와 똑같은 강도로 매를 맞았고, 오히려 배신감 때문에 더 심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절망감을 느낀 그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함께 깊은 좌절감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뿐만 아니라, 사춘기를 겪으면서 고아라는 사실은 더욱 큰 상처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보육원 출신”임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친구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등교하는 반면, 자신은 선생님과 함께, 혹은 혼자 등교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친구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신이 다른 환경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대상이 되었고,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부모님으로부터 “고아와는 놀지 말라”는 차가운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고아”, “보육원”이라는 단어는 김성민 대표님에게 끊임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는 주홍글씨와 같았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원망 또한 커져갔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칼을 들고 복수를 다짐할 정도로 분노에 휩싸였던 과거를 고백하며,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상황 속에서 김성민 대표님은 어떻게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까요? 어느 날, 보육원에 수련회를 온 교회 청년들을 통해 그는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억지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고, 그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인내하며 기다려주었다고 합니다. 잘해도 맞고 못해도 맞는, 칭찬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던 보육원 아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은 너무나 낯설고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청년들이 보여준 따뜻함에 감동받은 김성민 대표님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자신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련회 셋째 날, 그는 청년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어두컴컴한 예배당 안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던 중, 목사님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던 김성민 대표님에게, 이 말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때리는 형들과 폭력을 방조하는 선생님, 그리고 자신을 버린 부모가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도 시간이 깊어지면서, 그는 문득 자신이 동생들을 괴롭히고 친구들을 때렸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폭력만이 난무했던 보육원 환경 속에서, 폭력은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이자, 오히려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그에게, 자신의 폭력성이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죄책감, 수치심, 후회, 슬픔 등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왔고,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어둠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통해, 그는 놀랍게도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면, 왜 이전의 기도에는 응답해주시지 않았냐”고 질문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힘들 때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했지만, 번번이 외면당했던 경험에 대한 원망이 섞인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깊은 깨달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눈을 떠보니, 여전히 동생들을 괴롭히는 형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성민아, 네가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너의 가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억울했지만, 곧이어 감사함이 밀려왔습니다. 고아라는 단어가 그토록 아프고 싫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아로 “보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보육원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분노와 원망 대신 감사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세상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고아였고, 환경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잘 살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방법을 몰랐던 그에게, 가장 큰 변화는 그를 가장 심하게 괴롭혔던 형이 건넨 한 권의 책, 큐티 책이었습니다. 책 읽는 환경이 아니었던 보육원에서, 그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큐티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큐티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실천하면서, 그의 삶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가장 큰 시련은 보육원 퇴소를 앞두고 찾아왔습니다. 찬양 사역자를 꿈꾸며 신앙생활에 매진했지만, 가정에 큰 어려움이 닥치면서 그는 큰 혼란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믿어왔던 신앙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방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감을 얻었지만, 다시 “고아”로 돌아간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퇴소를 앞두고 겪은 시련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홀로서기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보육원을 퇴소한 김성민 대표님은 서울로 향했지만, 낯선 도시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퇴소한 선배들의 암울한 소식을 익히 들어왔기에, 퇴소 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은 컸습니다. 선배들은 범죄자가 되거나 교도소에 가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 선배들은 성매매에 내몰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고아”라는 현실 앞에서, 그는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노숙 생활을 하면서 어둠의 손길이 그에게 다가왔지만, 그는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부정한 길은 택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지켰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나님께 “이성교제를 하지 않겠다”고 서원했던 그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노숙 생활 끝에 우연히 식당 일자리를 구하게 되면서, 그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깨끗하게 씻고 식당을 찾아가 무작정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했고, 다행히 식당 사장님은 그를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기술이 없었기에 웨이터 일을 시작했지만, 그는 서빙 일조차 즐겁고 감사하게 했다고 합니다. 아침 7시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행복감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보육원에서는 잘해도 맞고 못해도 맞는, 칭찬이라고는 없던 환경과는 달리, 식당에서는 일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고 칭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을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껴보았다고 합니다. 힘든 식당 생활 중, 김성민 대표님은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지하철역에서 지인을 기다리던 중, 전도하던 권사님들의 끈질긴 권유로 얼떨결에 교회에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강남에 위치한 사랑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그는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다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 근처 고시원에 거처를 마련하고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등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신앙생활을 회복해나갔습니다.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김성민 대표님에게, 디모데전서 5장 8절 말씀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그는 자신이 돌봐야 할 “가족”이 바로 보육원 동생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아로 자랐지만, 이제는 자신이 다른 “고아”들을 돌보는 “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회복지 선교를 향한 꿈을 품고 스물여섯 늦은 나이에 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그는, MT에서 자신이 보육원 출신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동생들을 돕기 위해 이 학과에 왔다고 소개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그의 당당함은, 하나님 안에서 얻은 새로운 정체성과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MT 이후, 많은 친구들이 그에게 고민 상담을 요청해왔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에는 저마다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더욱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2학년 때 결혼, 결혼식조차 자신만의 기쁨이 아닌, 보육원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특별한 의미를 담아 진행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체육관을 빌려 보육원 친구들을 초대하고, 신혼여행 비용을 아껴 결혼식을 준비하는 등, 그의 결혼은 단순한 개인의 행복을 넘어,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헌신이었습니다. 명절이면 더욱 외로움을 느꼈던 과거를 떠올리며, 결혼 후에는 아내와 함께 보육원 친구들을 초대해 명절을 함께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명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늘어나 펜션을 빌려 명절을 함께 보내는 특별한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결혼 6년 차,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김성민 대표님은 문득 “번아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은 행복하지만, 아내에게 제대로 된 선물 한번 해주지 못했고, 여행 한번 함께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육원 사역을 그만두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3개월 후, 교회 설교 시간 중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듣던 중,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가인에게 묻는 장면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 동생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인처럼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는 무릎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그는 다시 한번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키퍼 대표로서의 소명을 확인하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형제들을 지키는 “Brother’s Keeper”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브라더스키퍼라는 회사 이름은, 바로 이 순간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18세가 되면 보육원을 나와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청소년들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사회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범죄, 성매매 등 어두운 길로 빠지거나, 빚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브라더스키퍼는 단순히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식물을 통해 정서적 안정과 치유를 제공하는 특별한 사업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식물을 가꾸고 사랑을 주는 과정에서, 오히려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정서적 회복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에 착안하여, 조경 사업을 통해 보육원 출신 청소년들의 자립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김성민 대표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딛고 일어선 한 인간의 위대한 승리이자, 사회에 희망을 심는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그는 고아라는 이름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며,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고아”들이 존재합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가 있어도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어른들까지, 우리 모두는 어쩌면 마음속에 “고아”를 품고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김성민 대표님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Brother’s Keeper”가 되어, 험난한 세상을 함께 건너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브라더스키퍼의 사업이 더욱 확장되고, 김성민 대표님의 따뜻한 마음과 숭고한 헌신이 더욱 빛나기를 응원하며,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