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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탈북 방송인 김아라 감동 간증 이야기

요약

새롭게하소서: 어둠 속 희망, 이창훈 & 김아라

# 시각장애인 앵커 이창훈 & 탈북 방송인 김아라 간증: 어둠 속에서 찾은 빛, 새롭게하소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학중 목사입니다. 샬롬, 박소현입니다. 소연 씨를 보면서 어릴 적 모습이 궁금해지는데요, 발레를 하고 무용을 했을 테니 굉장히 성실하고 착했을 것 같아요. 저는 어린 시절 발레밖에 몰랐고, 지금도 그렇지만, 매우 성실한 학생이었어요.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사는, 꾸준한 학생이었죠. 정말 잘 맞추시네요. 오래 옆에서 봐서 성실한 건 알았지만, 지금 모습 보면 과거가 보이는 것 같아요.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두 분은 현재는 성공했지만 과거에 고생과 방황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떤 과거를 가진 분들인지 화면으로 만나보시죠.

(화면 전환)

지난달 은행권 정기예금이 1년 만에 최대 폭으로 증가했습니다. 52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시각장애라는 큰 장벽을 넘어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앵커가 된 이창훈 씨, 그리고 북한이라는 험난한 장벽을 넘어 방송 현장을 누비는 탈북 방송인 김아라 씨. 상처 많았던 어린 시절, 이들의 삶은 끝없는 어둠이었습니다. 밤에 악몽을 꾸지 않기를 소원했던 이창훈 씨, 내일은 먹을 것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김아라 씨. 십자가 보혈의 완전하신 사랑, 이창훈 씨의 걸음걸음을 동행하시며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할 때마다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박히고, 모든 고난의 짐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눈물 펑펑 쏟으며 “하나님, 저 왔어요. 받아주세요.” 어둠이 빛으로, 고난이 축복으로 변하는 하나님의 통로, 이창훈, 김아라 씨의 믿음 고백이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스튜디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이야, 안녕하세요! 스튜디오가 환해졌네요. 20대 선남선녀가 앉아 있으니 분위기가 밝아졌어요. 각자 인사 부탁드립니다. 저부터 할까요? 반갑습니다. 국내 최초,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앵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이창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아라입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북한 실상을 전하고, KTV ‘사랑합니다 대한민국’ 리포터로 활동합니다. 창훈 씨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텐데요. 보통 아나운서는 기사를 보며 뉴스를 진행하는데, 시각장애를 가지고 어떻게 진행하는지 궁금할 거예요. 실제 모습 보여주실 수 있나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창훈 앵커 뉴스 진행 시연)

손에 든 것이 핵 뉴스 담당, 정보 보조 기기라는 건데요.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정보 보조 기기, 점자 정보 단말기입니다. 아, 그렇군요. 메모리를 통해 뉴스를 넣어 점자로 읽으면서 진행합니다. 우리는 프롬프터를 보는데, 손으로 읽으면서 이야기하는 거군요. 셀프 프롬프터죠. 스스로 프롬프터 역할을 합니다. 오늘 뉴스 오프닝 멘트 잠깐 보여주시겠어요? 제작진이 뉴스 원고를 줬습니다. 뉴스 보여드릴까요? 네, 박수!

(뉴스 시연 시작)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롭게하소서 뉴스입니다. 첫 번째 소식입니다. 새롭게하소서 MC 김학중 목사님에 대한 여집사님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화면보다 훨씬 잘생긴 외모 때문에 여집사님들이 목사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방송 집중이 어렵다는 겁니다. 이에 김학중 목사님은 원활한 방송 진행을 위해 잘생긴 외모를 감추는 메이크업을 제작진에게 부탁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새롭게하소서 안방마님 박소현 씨가 최근 일일 드라마에서 연기력을 뽐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드라마 출연, 나이를 잊은 동안 미모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는데요. 박소현 씨는 이 모든 것이 새롭게하소서 MC를 맡은 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훈훈함을 더했습니다. 이상으로 새롭게하소서 뉴스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뉴스 시연 종료, 박수)

와, 박수가 절로 나오네요. 뭐가 다르긴 다르죠? 처음 봤어요. 저도 SBS 뉴스 진행, 드라마 앵커 촬영, 다른 앵커들 모습도 봤지만, 시각장애인 앵커 뉴스 진행은 처음 봅니다. 굉장히 새롭네요. 방송인으로서 몇 점 주시겠습니까? 95점 드리겠습니다. 5점은 채워드릴게요. 진짜 잘하셨어요. 최고예요. 목소리, 전달력, 순발력 최고입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은 북한이라는 큰 장벽, 시각장애라는 장벽을 넘으셨는데요. 공통점을 가진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자기소개와 함께 많은 분들에게 공감될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오늘 시청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어둠은 어둠이다”입니다. 제게 물리적인 어둠이 왔지만, 어둠 속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얻었습니다. 어둠은 어둠이다, 첫 번째는 의존에서 자립으로 변화입니다. 시각장애라는 큰 어둠이 온 후,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계속 서울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만약 물리적인 어둠이 없었다면 자립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겁니다. 어둠은 어둠이다, 두 번째는 무의미한 삶에서 유의미한 인생으로 변화입니다. 시각장애라는 어둠이 왔기에, 공부, 직업 선택 등 모든 과정에 의미를 담고 마음을 쏟았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결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앵커라는 유의미한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어둠은 어둠이다, 마지막은 주 하나님을 만난 가장 중요한 어둠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삶에 새로운 변화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통로로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큰 어둠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창훈 앵커 찬양)

(박수)

안녕하세요. 저는 2003년 탈북, 2009년 한국에 입국한 김아라입니다. 어린 시절은 힘들었던 것 같아요. 12살까지 앞으로 나은 삶을 살 거라는 상상도 못 했고, 늘 어둠에 갇혀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90년대 초, 다섯, 여섯 살 때 북한에 미공급 시기가 닥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습니다. 탄광에서 일하시던 아빠 덕분에 잘 살았지만, 배급이 끊기고 30평 집을 옥수수 10kg과 바꿔 벌레가 들끓고 비가 새는 작은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매일 “내일은 뭘 먹을까?” 고민했고, 부모님은 불화가 잦았습니다. 아빠는 술을 마시고, 엄마는 할머니 댁에 자주 가셨죠. 그러다 엄마가 “일주일만 기다려라.” 하고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셨지만, 소식이 끊겼습니다. 엄마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아빠는 두 딸을 키우기 어려워 동생은 외할머니 댁에 맡기고 저만 데리고 살았습니다. 산에서 고사리, 고비, 산나물을 캐면 저는 다듬고 말리고 데쳐 시장에 팔았습니다. 소토지에서 땅을 받아 아빠와 농사지으며 살았지만, 새엄마가 들어오면서 힘든 생활은 더 심해졌습니다.

새엄마는 딸 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자기 자식 챙기기에도 힘든 상황이라 저를 구박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맛있는 것을 먹고 저를 따돌리는 일이 많았는데, 아빠가 그걸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새엄마 쪽 친척들이 “왜 동생한테 잔소리하냐?”며 아빠를 때렸습니다. 가족이 없는 아빠는 매번 맞고 피 흘리고 우는 모습을 보여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 아빠가 7일 뒤 행방불명되셨습니다. 며칠 있으면 오겠지, 설마 버리고 가실까 생각했지만, 아빠는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아빠와 함께 가꾸던 소토지 밭에 가서 기다리고, 울다 잠들다 했지만, 결국 아빠는 오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다 아빠와 친했던 분을 만나 그 집에서 살게 되었고, 입양까지 되었습니다. TV가 있는 잘 사는 집 같아서 머물고 싶었고, 걸레질, 먼지 줍기, 설거지 등 눈치껏 움직였습니다. “눈치 빠르고 일도 잘한다” 칭찬받아 입양되었지만, 친딸처럼 대우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엄마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가게 되었고, 엄마를 만나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박수)

두 분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창훈 씨는 가수해도 되겠어요. 목소리가 정말 좋으신데요. 과찬이십니다. 거짓말은 못 합니다. 두 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궁금해지는데요.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창훈 씨. 저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뇌수막염을 앓아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뇌수막염은 척수와 뇌에 물이 차서 열이 끓는 질환인데, 후유증으로 시력, 청력 장애가 올 수 있습니다. 저는 시력에 문제가 생겨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끔찍이 아끼는 아들을 낫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셨습니다. 미용실을 하시던 어머니는 생업을 포기하고 저를 데리고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병원뿐 아니라 종교 단체, 심지어 굿도 하고, 여호와의 증인, 지리산 도사까지 찾아갔습니다. 신기하게도 지리산 도사 할아버지가 저희 어머니와 저를 보더니 “이 아이는 교회를 가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타종교에서 전도하다니 놀랍네요. 도사님 덕분에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셨고, 목사님은 “다른 곳 다 다녀와 보고 마지막에 교회 와라”고 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교회 다니면서도 제 시력 회복을 위해 계속 노력하셨습니다.

네 살쯤 포천 기도원에 갔었는데, 물리적인 시술로 낫게 한다고 유명한 곳입니다. 제 왼쪽 이마에 흉터가 있는데, 어떤 기구로 이마를 긁어 내리는 시술을 받다가 생긴 상처입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저를 낫게 하려고 애쓰셨죠. 그러다 어머니는 깨달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요한복음 9장 1-3절,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통해 어머니를 만져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변하겠다” 결심하고 하나님을 영접했고, 저를 경상남도에서 천 리 떨어진 서울 맹학교로 유학 보냈습니다. 여덟 살 때 맹학교 기숙사에서 12년 동안 살게 된 거죠. 어릴 적 기억이 나는군요. 엄마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다니며 힘든 시술을 받으면서 어떤 마음이었나요? 제 의지가 아닌 엄마 때문에 끌려 다니는 어린 시절,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있었나요? 제 심정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 끌려가 맞고, 억압받고, 뭔가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듯한 공포감이 컸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당하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느낌에 휩싸였습니다. 시력 장애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아라 씨,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동생을 거의 키우다시피 했고, 여덟 살 때부터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동생을 돌보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다녔습니다. 영양 부족으로 키도 제대로 크지 못해, 아홉 살 때 키가 한국 아이 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됐어요. 아버지와 헤어진 후 중국에서 친엄마를 만났는데,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중국에서 어떻게 엄마를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엄마와 헤어진 지 오래돼서 처음 엄마를 만났을 때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어요. 중국에서 우연히 만난 것은 아니고, 브로커를 통해 만났습니다. 엄마가 브로커를 통해 저를 찾은 거죠. 엄마를 처음 봤는데, 어릴 적 기억 속 엄마와 너무 달랐어요. 키가 엄청 커 보였던 엄마가 작아 보였어요. 엄마가 맞나 싶어 의심했는데, 엄마는 저를 안고 울고불고… 저는 눈물이 안 났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나서야 엄마가 맞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만나 한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분 다 어린 시절 상처도 많고,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겪으면서도,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을 텐데요. 창훈 씨는 시각장애와 힘든 시술을 겪으면서 어떤 꿈을 꾸셨나요? 꿈을 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밤에 악몽만 안 꾸면 다행이었죠. 가위눌림만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꿈이었죠. 악몽을 안 꾸는 게 꿈이라니… 내일 일도 모르는 상황에서 두려움만 가득했겠네요. 마음속에 두려움이 8, 90% 이상을 차지했던 것 같아요. 아라 씨는 어떤 꿈이 있었나요? 가족 누군가가 나를 보듬어줬으면 좋겠고, 제발 내일은 굶지 않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꿈이었어요. 굶지 않는 것이 간절한 꿈이었다니… 두 분 다 힘든 10대를 보내고 20대가 되었는데, 삶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맹학교 졸업 후 창훈 씨의 삶은 어떠했나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서울신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는데, 맹학교와는 너무 다른 환경이었습니다. 첫째, 교과서 배부가 안 돼 직접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책 읽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둘째,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인사해도 누가 누군지 몰랐고, 드라마나 스포츠 이야기에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셋째, 남자 친구들과 축구, 농구 등 활동을 함께 할 수 없어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받았고, 맹학교 시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에 20대 초반은 사회와의 괴리감, 외로움, 고독함 속에 보냈습니다. 20대 초반은 힘든 시기였군요. 아라 씨는 한국에 19살에 왔는데, 한국에서의 삶은 어떠셨나요? 한국에 왔을 때 막막했습니다. 한국에 오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우울했고, 20살 코앞인데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고, 한글도 서툴렀습니다. 언제 공부해서 따라갈 수 있을까, 좌절했습니다. 남들은 대학 갈 준비를 하는데, 저는 초등 과정을 생각해야 하니 막막했습니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창피해서 밖에 나가기도 두려웠습니다. 옷을 잘 입지 못하면 주눅 들고, 사람들이 북한에서 온 것을 알아볼까 봐 걱정했습니다.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학원부터 등록했습니다. ABC도 모르는 상태에서 바나나, 애플부터 배우기 시작했죠. 대한학교에 들어가 초중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공부만 했습니다. 엄마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19살에 초등학교 4학년 과정부터 다시 시작한 셈이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네요. 두 분 다 10대, 20대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생이 변화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 아닐까 싶은데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인해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창훈 씨부터.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네요. 어머니가 시각장애인이 된 저 때문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저도 따라다니며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는 음악도 있고, 노래도 부르고, 놀 거리도 많아 재밌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음악을 통해 자존감이 높아졌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에 집착하면서 비교 의식과 인정 욕구가 강해졌습니다. 부끄럽지만 목회자가 꿈이었는데, 설교하는 목사님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하는 모습, 제가 뭔가 하면 “아멘” 화답하는 모습이 랩처럼 멋있어 보였습니다. 강단에서 멋있게 설교하는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점점 철이 들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교 의식과 인정 욕구로 가득 찬 제 모습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대학교 3학년 때 아는 형의 소개로 시각장애인 목사님이 담임하는 교회에 가게 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잘한다” 칭찬했는데, 그 교회에서는 평범하게 대했습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기대했던 환호가 없자 힘들어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말씀을 통해 제가 했던 “주여”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적인 외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잠언 4장 23절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말씀을 통해 예배 대상이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전에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지만 제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3학년 이후 하나님께서 저를 조금씩 변화시키셨습니다. 아라 씨는 북한, 중국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을 텐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나요? 하나님은 제게 한국이라는 선물을 주시면서 당신을 알게 하셨습니다. 중국에서 엄마가 먼저 한국으로 가고, 저는 1년 동안 엄마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정말 막막했습니다. 북한보다 더 막막했어요. 중국말도 서툴고, 호적도 없어 불안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편의점에 갔다가 선교사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께 엄마 소식을 기다린다고, 불안하다고 이야기했더니, “하나님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들어보는 존재였습니다. “기도하면 엄마에게 연락이 올까요?” 여쭤봤더니,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밤에 창문을 향해 두 손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엄마에게 연락 오게 해주세요.” 난생처음 하는 기도였습니다. 교회도 안 가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냥 기도했군요. 하나님, 부처님, 옥황상제, 다 불렀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십자가도 따라 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까지 했습니다. 매일 쉬지 않고 기도했더니, 정말 신기하게 일주일 만에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엄마 전화 왔다는 소리에 “하나님이 들어주셨구나!” 기뻤습니다. 엄마는 전화로 “이제 한국으로 와라. 오는 길에 위험하니 기도해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멘 해라”고 했습니다. 엄마도 한국 와서 하나님을 만났군요. 엄마와 통화하면서 하나님과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제3국 거쳐 한국으로 오는 과정이 위험했는데, 버스에서 검문할 때 신분증 없는 저만 그냥 지나치시더라고요. 하나님께 “도와주세요”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보호해주신 것 같아요. 다른 탈북민들은 악어 강을 건너고, 사막을 걷는 고생을 했다는데, 저는 차 타고, 버스 타고 무사히 교회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대사관 근처 교회에서 4개월 동안 머물며 성경 공부, 새벽 기도, 찬양하며 지냈습니다. 4개월 후 한국에 왔는데, 편안해지니 교만해지더라고요. 급한 것이 없어지니, 교회도 안 나가고, 큰 교회만 찾아다니고, 은혜도 못 받고… 하나님 믿으려고 애는 썼지만, 교회 가면 겉도는 느낌, 사람만 구경하다 오는 기분이 들어 싫었습니다. 대한학교에 들어갔는데, 매주 수요일 예배가 있어 ‘예배는 여기서 드리면 되겠지’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아는 언니를 통해 지금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교회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부모님께도 듣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에 감동받았습니다. 예배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고, 찬양 가사가 제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힘든 짐을 지고 온 저에게 “내게로 오라” 하시는 하나님께 털썩 주저앉아 “하나님, 저 왔어요” 고백하며 감사했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저를 받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도 많이 사라지고,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실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큰 변화를 경험하셨네요. 아라 씨의 고백이 많은 분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것입니다. 두 분 다 하나님을 만나 큰 변화를 겪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가장 크게 변화된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창훈 씨부터.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뇌수막염 후유증, 힘든 치료 과정 때문에 늘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걸을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된 후 훈련받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시편 23편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말씀이 와닿았습니다. 혼자 살면서 밥하고, 불 다루고, 차도 건너는 위험한 상황도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제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두렵지 않습니다. 방송하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고 여유가 넘칩니다.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 가장 큰 변화군요. 아라 씨는요? 저에게 아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아빠 사랑을 제대로 못 받았는데, 하나님 안에서 아빠, 엄마 사랑을 넘치는 사랑을 받고, 친구의 사랑까지 더해진 풍성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빠가 되어주신 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정말 놀라운 변화네요. 두 분의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두 분은 이제 인생의 절반 정도 왔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님 만나 본격적인 후반 레이스를 시작할 텐데, 앞으로의 기도 제목과 비전이 있다면 시청자분들에게 말씀해주세요. 응원하겠습니다. 창훈 씨부터. 세 가지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통로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방송인으로서 사람들을 조명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벽을 허무는 통로, 하나님을 알리는 통로로 쓰임 받고 싶습니다. 통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첫 번째 기도 제목입니다. 둘째,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아버지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청년으로서 좋은 만남과 가정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해달라고 하시는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히 세 번째 기도 제목 중요합니다. 아라 씨의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요? 북한에 있는 동생들이 무사하고, 한국에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 의지하며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묵묵히 나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길을 개척하기보다, 하나님 인도하심에 맡기고, 하나님만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두 분 이야기를 들으니, 저희도 한 가족이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시청자가 아닌 두 분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겠습니다. 귀한 일 있으면 함께 나누고 응원하는 가족이 되겠습니다. 오늘 새롭게하소서 출연해주셔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꿈과 미래가 활짝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시각장애와 탈북이라는 큰 장벽을 믿음으로 극복한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담대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두 분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기대됩니다. 두 분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 안에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오늘 두 분 이야기 통해 많은 분들이 힘과 용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용기 내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여러분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새롭게하소서 감사합니다.

(프로그램 참여자 선물 안내)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분들께는 (주)뉴랜드알로에 셀터치 알칼리 이온수기, 백화점 상품권, 행복의 샘 활 헛개수 세트, 제이손 진공젓가락 제이손 수저 세트, 면과 김 김 선물 세트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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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성경의 예언 성취

14. 성경에 기록된 현재와 미래의 예언

15. 성경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

16. 우주의 기원이 증명하는 창조의 증거

17. 창조론 vs 진화론, 무엇이 진실인가?

18. 체험적인 증거들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20. 결정하셨습니까?

21. 구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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