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한 의료선교사 감동 스토리: 아프리카·중국 헌신과 신앙
고통받는 곳이 선교지: 최병한 의료선교사
"고통받는 곳이 바로 나의 선교지" 최병한 의료선교사의 감동적인 이야기
여러분, 혹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존경을 받는 직업,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인데요. 저 또한 처음에는 그저 평범하게, 남들처럼 좋은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제가 평범한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아내에게 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내 곁을 지키며, 저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만약 아내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신다면, 남은 삶을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굳게 서원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은혜로 아내는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원했던 대로 주님을 향한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세상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 중 하나인 미얀마 로힝야족 난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의료팀을 꾸려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제 삶의 목표는 단지 몸의 질병만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닌, 마음까지 깊이 헤아릴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김학중 목사: 안녕하십니까, 새롭게 하소서 김학중 목사입니다. 오늘 정말 귀한 분을 모셨는데요, 마치 슈바이처 박사님처럼 아프리카 오지에서 헌신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전 세계를 누비며 의료 선교를 펼치는 분입니다.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인생 후반전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최병한 선교사님을 모셨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안녕하세요. 저는 T국제 NGO 가족 공동체 선교 단체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된 소아과 의사 최병한입니다.
김학중 목사: 선교사님, 얼굴이 많이 그을리셨네요. 최근 아프리카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네, 3주 전에 부룬디에서 돌아왔습니다.
김학중 목사: 아프리카는 햇볕이 강해서 얼굴이 잘 탄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유독 더 많이 타신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으셨나요?
최병한 선교사: 아프리카 부룬디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데요. 처음에는 7일, 두 번째는 10일, 그리고 이번에는 한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제가 소아과 의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요. 그곳 아이들이 놀이터 시설 하나 없이, 낡은 쓰레기봉투를 묶어 축구공처럼 차며 노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한국에 돌아와서 어린이 놀이터 제작 업체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시소나 미끄럼틀 같은 놀이기구들이 너무 크고 튼튼하게 제작되는 거예요. 현지 아이들에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라스틱 재질로 가볍게 만들자니, 안전 문제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부룬디 현지에 계신 이승현 선교사님과 상의했습니다. "놀이터 자재를 직접 구매해서 현지에서 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이번 부룬디 방문 기간 동안, 진료 틈틈이 시간을 내어 놀이터 제작에 매달렸습니다. 용접 작업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페인트칠도 하면서 놀이터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저는 건축 설계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건축 감독 역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방문 때는 얼굴이 더 많이 탔습니다. 이전 방문 때는 진료만 봤었는데, 이번에는 놀이터 제작 때문에 야외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놀이터가 완성되고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뿌듯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부룬디 아이들은 놀이터를 처음 본다고 했습니다. 현지 주민들도 놀이터 제작은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아이들을 위해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정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제가 놀이터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안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썼습니다. 놀이터 바닥도 완벽하게 안전하게 만들고, 페인트칠까지 꼼꼼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을까요? 네, 정말 행복해했습니다.
김학중 목사: 선교사님께서는 언제부터 의료 봉사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최병한 선교사: 의과대학 2학년 때, 의대생 선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아내와도 의대생 선교회에서 만나 함께 의료 봉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결혼 후에도 꾸준히 의료 봉사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김학중 목사: 단순히 의료 봉사를 하는 것과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텐데요. 선교사님께서는 어떻게 의료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최병한 선교사: 저는 원래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모태신앙인이었습니다. 아내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일에 교회만 겨우 출석하는, 부족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던 1999년, 아내가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아내는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6개월 동안 병원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저는 거의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아내를 살려주세요. 만약 아내를 살려주신다면, 평생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겠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서원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엘리아 교회 장로로 섬기던 중 중앙아시아 단기 의료 봉사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타지키스탄으로 의료 봉사를 떠났는데, 봉사 활동이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한국에서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제일 친했던 형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형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너무나 당황스럽고 슬펐습니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비행기 표를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봉사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형님은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형님의 유골함을 마주하는 순간, 저는 큰 충격과 함께 깊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고 지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형님을 데려가신 건 아닐까?' 라는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의료 선교사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형님의 죽음은, 잊고 있었던 옛 서원을 다시 떠올리게 하시고,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였는지도 모릅니다.
김학중 목사: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셨을 때,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16년간 운영해 온 소아과 병원도 정리해야 했는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물론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님의 죽음을 통해 의료 선교사의 길을 가야겠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가족들을 설득했습니다. 3개월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3개월 안에 병원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만약 3개월 안에 병원이 정리된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의료 선교를 떠나겠습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2개월 만에 병원이 매각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정말 기적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김학중 목사: 정말 놀랍네요. 그렇게 급하게 2개월 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나신 첫 선교지는 어디였나요?
최병한 선교사: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무석이라는 도시였습니다.
김학중 목사: 선교사님께서 중국으로 떠나셨을 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최병한 선교사: 만 57세였습니다. 2005년에 중국으로 떠났으니, 벌써 17년 전이네요.
김학중 목사: 처음 중국에 가실 때, 가족들과 함께 가셨나요?
최병한 선교사: 아닙니다. 아내와는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단 하루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는데, 중국에서 혼자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오히려 서로를 더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치아 가정, 즉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여 의료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한 달에 두 번씩, 장쑤성 지역의 치아 가정을 방문하여 진료했습니다. 무석뿐만 아니라 쑤저우, 창저우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의료 봉사를 펼쳤습니다. 장애인 시설뿐만 아니라, 일반 농촌 지역의 가난한 환자들도 돌봤습니다.
김학중 목사: 중국은 의료 체계가 우리나라와 다르고, 기독교에 대한 제약도 많은 나라인데, 의료 선교 활동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특히 공안 문제라든지...
최병한 선교사: 물론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 외국인 의사 자격증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중국 의사 면허를 취득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의료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의료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사업적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면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순수한 봉사 목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중국 정부도 묵인해 준 것 같습니다.
김학중 목사: 사모님께서는 한국에서 약을 보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네, 아내가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보내주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세관에 걸리지 않고 모든 약품이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약품 통관에 문제가 생겼다면, 의료 선교 활동에 큰 차질이 생겼을 텐데,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 문제 없이 약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 공항에서 약품이 적발되어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큰 은혜였습니다.
김학중 목사: 중국에서 10년 동안 의료 선교 활동을 하시면서,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셨나요? 혼자 타지에서 지내시다 보면, 건강 관리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최병한 선교사: 다행히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외국인 의사 자격증을 받으면, 1년에 한 번씩 중국 정부에서 건강 검진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도 매년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중국인 의사 선생님도 저를 잘 알고 계셨는데, 2011년까지는 건강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 건강 검진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 표정이 심각해지면서, CT 촬영을 권유하셨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CT 촬영 결과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간암 진단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20일 만에 간암 수술을 받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딸이 "아빠, 몸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서 왜 또 가시려고 하세요?" 라고 걱정했지만, 중국 환자들을 생각하니 그냥 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딸도 제가 중국에서 행복하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김학중 목사: 그렇게 중국을 사랑하고 의료 선교에 헌신하셨는데,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최병한 선교사: 중국에서 10년 정도 사역하다 보니, 중국 공안에서도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놓고 제재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중국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묵인해 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료 선교 활동이 확대되면서, 중국 현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저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앞으로는 저희를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를 다른 곳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중국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도 흘렀고, 나이도 점점 많아지면서 귀국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의료 선교사 은퇴 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김학중 목사: 중국에서의 의료 선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셨지만, 선교사님의 해외 의료 봉사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은퇴하신 후, 아프리카 최빈국 부룬디로 다시 떠나셨습니다. 아프리카 선교는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셨나요?
최병한 선교사: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는 신흥남 선교사님의 초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흥남 선교사님은 부룬디 한센인 마을에 선교 센터를 건립하고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신 선교사님 부부는 한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시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미국으로 가시기 전, 저희 부부의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인연으로 신 선교사님 부부가 저희 병원에 방문하셔서 선교 후원 요청을 하셨습니다. 아내가 신 선교사님 부부에게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 요양원에 가서 기도도 받으시고, 봉사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권유했습니다. 신 선교사님 부부는 3박 4일 동안 소록도에서 봉사 활동을 하셨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소록도 봉사 활동을 통해 큰 감동을 받으신 신 선교사님 부부는, 아프리카 선교를 결심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두 분은 아프리카 33개국을 여행하면서, 한센병 환자들의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프리카 여행을 즐기겠지만, 신 선교사님 부부는 오직 한센병 환자들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33개국을 순회하는 동안,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서 흑인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흑인 목사님은 신 선교사님 부부에게 부룬디 선교를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신 선교사님 부부는 부룬디로 향하게 되었고, 현재 부룬디 선교 센터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펼치고 계십니다. 신 선교사님 부부는 부룬디 선교 센터를 설립하면서, 의료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마침 중국 선교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였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 부룬디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사실 한국에서 편안하게 쉬고 싶었지만, 아프리카 선교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부룬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아프리카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된 지 40년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왜 저를 의사로 부르셨는지, 왜 소아과 의사로 인도하셨는지, 부룬디 선교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의사로 만드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40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부룬디 한센인 마을과 중국 치아 가정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섬겼을 때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진정한 의사의 보람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김학중 목사: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께서는 의사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인연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특히 한센병 환자들과의 인연이 깊으신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최병한 선교사: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참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제 둘째 딸이 피아노 전공으로 예원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예원학교 2학년 때, 딸아이가 갑자기 저에게 "피아노에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재능 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예고로 진학해야 할지, 인문계로 진학해야 할지 모르겠다." 며 힘들어했습니다. 마침 저희 집에 소록도에서 봉사하시는 선교사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선교사님은 딸아이에게 소록도 봉사 활동을 권유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딸아이에게 "소록도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니?" 라고 제안했습니다. 딸아이는 소록도로 봉사 활동을 떠났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딸아이를 소록도로 보내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혹시 딸아이가 한센병에 감염되면 어쩌나?' 라는 걱정을 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당시에는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록도에 다녀온 딸아이는 변화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딸아이가 소록도 봉사 활동 중에 겪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빠, 엄마, 제가 소록도 한센인 환자분들을 대할 때 무심코 장갑을 끼고 악수를 했어요. 그런데 환자분들이 너무 민망해하시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무례했는지 깨달았습니다." 딸아이는 그 일 이후로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회복지사가 되었습니다. 딸아이는 훗날 한센인들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김학중 목사: 따님의 변화를 보면서, 선교사님도 소록도에 방문하게 되셨군요.
최병한 선교사: 네, 딸아이의 변화를 보면서 소록도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습니다. '소록도가 어떤 곳인지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저희 부부와 장로님 부부, 세 팀이 함께 소록도 봉사 여행을 떠났습니다. 장마철이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밤에 출발했습니다. 함께 간 장로님은 "너무 무섭다. 그만 돌아가자" 라고 했지만, 저는 "여기까지 왔으니 소록도에는 꼭 가봐야 한다" 며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새벽녘에 소록도에 도착했을 때,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소록도 선착장에 도착해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할머니는 긴 의자에 앉아 계셨는데, 비를 피할 곳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할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옆에 앉았습니다. 잠시 후, 용기를 내어 할머니의 왼손을 잡았습니다. 할머니의 손은 따뜻했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할머니는 제 손을 잡으시더니, 갑자기 오른손으로 제 손을 덮으며 두 손으로 제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아, 따뜻해. 나는 정상인 손을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 순간, 저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내가 그동안 한센인들을 얼마나 멀리하고 편견을 가졌던가?' 라는 죄책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눈물 어린 고백은, 마치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만져보고 싶다. 네 병을 고쳐주고 싶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일 년에 두 번씩, 소록도 봉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매년 1월 첫째 주, 새해를 소록도에서 맞이했습니다. 무박 2일로 소록도에 가서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광복절에는 1박 2일로 여수 해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사실 지금은 한센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많이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했습니다. 저 또한 과거에는 한센병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록도 봉사 활동을 통해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소록도에 가면, 제가 한센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들로부터 사랑과 위로를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록도 봉사 활동을 통해 오히려 제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소록도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소록도 봉사 활동을 추천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소록도에 가서 한센인들의 삶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최병한 선교사: 영등포 쪽방촌 목사님께서 노숙인,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섬기고 계십니다. 목사님께서 "쪽방촌 주민 25명과 함께 소록도 봉사 활동을 가고 싶다" 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흔쾌히 소록도 봉사 활동을 초청했습니다. 소록도 봉사 활동에 참여한 쪽방촌 주민들은 큰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사회 최하층민으로 살아가는데, 소록도 한센인들은 몸은 불편하지만 감사와 찬송, 기도를 잃지 않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한센인들의 흉한 모습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지만, 봉사 활동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소록도 봉사 활동 후, 쪽방촌 주민들은 오히려 봉사자로 변신했습니다. 소록도 봉사 활동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1995년부터 소록도 봉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소록도 봉사 모임인 '서로사랑회'를 조직했습니다. 1993년부터 소록도 봉사 활동을 시작하신 분들과 함께, 더 체계적이고 큰 규모의 봉사 활동을 펼치기 위해 '서로사랑회'를 만들었습니다. '서로사랑회'는 현재 국내 한센인뿐만 아니라, 해외 한센인, 베트남, 스리랑카, 케냐, 부룬디, 인도 등 전 세계 한센인들을 돕고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민들도 돕고 있습니다.
김학중 목사: 선교사님의 사랑이 정말 크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눈물을 글썽이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랑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모님, 최경석 권사님 또한 '의료 봉사 대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이 함께 의료 봉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인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을 주님께 인도하신 전도자이자, 평생 동역자인 사모님께 한 말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아내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아내는 저를 믿음의 길로 인도했고, 저희 가정을 믿음의 가정으로 세웠습니다. 힘든 시간을 함께 이겨내며,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주었습니다. 큰딸은 현재 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지금까지 함께 의료 선교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아내의 헌신 덕분입니다.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김학중 목사: 두 분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두 분은 캠퍼스 커플로 만나, 지금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이어오고 계신데요. 두 분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최병한 선교사: 저희는 의과대학 예과 1학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는 단 한 번도 선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선을 여러 번 봤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운명처럼 끌렸습니다. 아내의 아픔을 통해 저희 부부는 더욱 가까워졌고, 굳건한 믿음 안에서 의료 선교의 길을 함께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격려하며,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입니다. 아내에게 다시 한번 사랑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학중 목사: 정말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두 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박수를 보냅니다. 선교사님께서는 연세도 있으신데, 이제 좀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최병한 선교사: 저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쉬지 못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룬디 의료 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미얀마 로힝야족 난민촌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김학중 목사: 미얀마 로힝야족 난민촌 의료 봉사,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연세도 있으시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봉사하는 것이 두렵지는 않으신가요?
최병한 선교사: 물론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간암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에 가서 더 봉사하라" 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로힝야족 난민들을 돕기 위해 미얀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시청자분들께서도 로힝야족 난민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학중 목사: 선교사님께서 기도 제목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최병한 선교사: 제가 한 달 동안 로힝야족 난민촌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병원 운영의 지속 가능성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기독 병원들이 협력하여, 로힝야족 난민촌 병원을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약사 등 의료진을 2주씩 파송해주시면, 3개 병원이 순환 방식으로 로힝야족 난민촌 병원을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로힝야족 난민촌은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하고, 영양 부족으로 인해 전염병 발병 위험이 높습니다. 특히 혈액 매개 질환 감염 위험이 높기 때문에, 이동식 헌혈 차량을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헌혈 차량에서 혈액 검사와 수혈, 간단한 치료를 제공하면, 난민들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힝야족 난민촌에는 전쟁 고아 2만 7천 명이 있습니다. 미얀마 군경의 학살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입니다. 로힝야족 난민촌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김학중 목사: 기도 제목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와 함께, 물질적인 후원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봉사 활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로힝야족 난민들을 위해 저희도 함께 기도하고 후원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귀한 사역 잘 감당하시기를 새롭게 하소서에서 응원하고 축복하겠습니다.
최병한 선교사: 감사합니다.
김학중 목사: 마지막으로, 로힝야족 난민촌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시네요. 아이들이 정말 예쁘고 순수해 보입니다.
최병한 선교사: 네, 로힝야족 난민촌 아이들은 정말 순수하고 착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큰 감동과 도전을 받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어주었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로힝야족 난민들을 위해 헌신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로힝야족 난민촌이 또 다른 선교지입니다.
김학중 목사: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선교사님의 헌신적인 삶에 다시 한번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저희 새롭게 하소서 시청자 여러분께서도 최병한 선교사님과 로힝야족 난민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