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벨 재단 5대 린튼가문의 한국 사랑과 북한 결핵 퇴치 헌신
5대 린튼 가문의 숭고한 한국 사랑
5대에 걸친 숭고한 헌신, 오직 복음을 향한 유진벨 재단의 발자취: 인세반 회장님의 깊이 있는 이야기
오늘 우리는 특별한 가문의 숭고한 헌신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바로 5대에 걸쳐 한결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유진벨 재단의 이야기인데요, 그 중심에는 인세반 회장님이 계십니다. 연예인 주영훈 님과 이정수 님의 진행으로 시작된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서 인세반 회장님은 가문의 역사와 헌신, 그리고 북한 결핵 퇴치 사업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으셨습니다. 오늘 이 글에서는 방송 내용을 바탕으로 유진벨 재단의 발자취와 인세반 회장님의 깊은 신앙심, 그리고 숭고한 헌신을 상세히 정리하여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합니다.
5대에 걸친 한국 사랑, 그 시작점에는 유진벨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이야기는 1895년, 유진벨 선교사님이 조선 땅을 밟으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조선은 서구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였는데요, 유진벨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나먼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이것이 5대에 걸친 유진벨 가문의 한국 사랑의 첫걸음이었던 것이죠. 이정수 님은 인터뷰 초반에 유진벨 가문의 놀라운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했는데요, 1895년 유진벨 선교사님을 시작으로, 그의 딸 샬롯 벨 선교사님은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과 결혼하여 함께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의 아들, 즉 휴 린튼 선교사님 역시 대를 이어 한국 선교에 헌신하셨고, 4대째인 인세반 회장님, 그리고 5대째 조카까지 현재까지 한국과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주영훈 님은 5대에 걸친 헌신에 대해 감탄하며 감사를 표했는데요, 정말이지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으면 5대에 걸쳐 이 땅에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인세반 회장님은 유진벨 선교사님의 자손들이 현재도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방송인 임요한 씨가 바로 유진벨 선교사님의 손자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님의 손자이자, 인세반 회장님의 조카라고 합니다. 또한 변호사로 활동하는 조카 데이비드 린튼 씨, 대만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또 다른 조카까지, 유진벨 가문의 헌신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95년 조선, 선교는 생명을 건 숭고한 헌신이었습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3살 때 한국에 오셨다고 합니다. 회장님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언급하며 당시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는데요, 1895년은 조선 시대 말기로,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은 낯설고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더욱이 19세기 말 선교 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18세기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평균 수명이 3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당시 선교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강조했는데요,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헌신했습니다.
유진벨 선교사님 부부가 한국으로 향하던 1895년 배 안에는 총 4명의 선교사가 타고 있었지만, 5년 안에 절반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당시 선교 환경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당시 선교사들이 특별히 훌륭해서 위험을 무릅쓴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세상이며, 영원한 다음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파에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질병으로 인한 죽음을 "조금 빨리 천국에 가는 것"으로 여겼으며, 한국인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갈 기회를 주는 것을 숭고한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주영훈 님은 "위험 부담 정도가 아니라, 금방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져 선교에 목숨을 걸고 오신 것"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요, 18세기 선교사들은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19세기는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예방주사나 위생 시설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풍토병과 설사병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진벨 선교사님 역시 5년 만에 질병으로 사망하며 한국 땅에 묻히셨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20-30대의 젊은 나이에 선교를 시작했으며, 5년 안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유진벨 선교사님은 한국에 와서 어떤 사역을 펼쳤을까요? 인세반 회장님은 당시 장로교 선교의 핵심 목표는 "자립적인 한국 교회" 를 세우는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초기에는 개인 전도가 중요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인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선교사들은 한국어로 설교하고,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했으며, 교회를 세우는 데 힘썼습니다. 물론 이후에는 교육 선교, 의료 선교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지만, 초기 선교의 중심은 교회 개척이었습니다.
인세반 회장님의 아버지, 휴 린튼 선교사님 역시 평생을 교회 개척에 헌신했습니다. 한국 노회와 협력하여 인구가 100호 이상 되는 시골 마을, 그리고 다른 교회와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는 계획적인 사역을 펼쳤습니다. 5km 거리 기준은 당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고려했을 때, 5km 떨어진 마을에도 교회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유진벨 가문은 한국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선교사 파송에 대한 질문에 인세반 회장님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점을 설명했는데요, 가톨릭 신부들은 한국에 오면 거의 사망했기 때문에 장례식을 치르고 파송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반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죽음을 각오했지만, 복음 전파의 숭고한 가치를 믿었기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오히려 오늘날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살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밝혔는데요, 당시 선교사들은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헌신했기에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선교 초기 문맹률이 높았던 조선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했을까요? 인세반 회장님은 다시 한번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의무" 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핍박과 순교를 각오하라고 경고하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주는 것은 가장 숭고한 사명이었던 것이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세워 한국인 목회자를 양성하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힘썼습니다. 특히 한글은 배우기 쉬운 문자였기에 복음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선교 역사에도 큰 혜택을 준 셈입니다.
유교 문화와 일제 강점기, 시련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낸 신앙
유교 문화가 뿌리 깊었던 조선 사회에서 선교 활동은 순탄치 않았을 텐데요, 실제로 유교적인 반발과 일제의 탄압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세반 회장님은 오히려 "당시 한국 교회가 순수성을 지키기 훨씬 쉬웠다" 고 말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인들은 사회 진출에 제약을 받았고, 이는 오히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 한다" 는 의식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휴 린튼 선교사님은 교육 선교를 통해 인재 양성에 힘썼지만,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정부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1935년 일제는 모든 학생과 교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학교 폐쇄를 결정했습니다. 이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이었으며, 당시 한국 교회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역사는 뱅글뱅글 돌기 때문에, 신자들이 빛을 보는 시절도 있지만, 핍박받는 시절도 있다" 며, 언제나 핍박을 받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통해 순수한 기독교 문화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교인들이 핍박 속에서도 자립할 수 있도록 기술 교육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강요는 로마 시대 황제 숭배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공무원, 군인 등 사회 진출에 제약을 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선교사들은 "어차피 목숨 걸고 왔는데, 신사참배에 무릎 꿇을 수 없다" 는 강한 신념을 보였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신앙생활과 사회 진출을 분리하기 어렵지만, 퇴폐 문화가 심화될수록 사회 진출의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유진벨 재단, 북한 결핵 퇴치에 헌신하는 숭고한 사랑
유진벨 가문의 한국 사랑은 유진벨 재단을 통해 북한 결핵 퇴치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1979년 대학원 재학 중 북한을 방문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북한 동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1995년 유진벨 재단은 북한에 식량 지원을 시작했고, 당시 재미 교포들의 뜨거운 호응이 있었습니다. 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북한 지원의 필요성이 잘 와닿지 않았지만, 교포들은 북한의 어려운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후원에 참여했습니다. 초기에는 컨테이너 박스 100개 분량의 식량을 지원했고, 이후 중국에서 옥수수를 수입하여 지원 규모를 확대했습니다.
식량 지원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북한 측의 요청에 따라 1997년부터 결핵 퇴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북한 지원 활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유진벨 재단은 굴하지 않고 묵묵히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신자는 어느 나라에 속하든 하나님의 백성이며, 정치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는 신념을 밝혔습니다. 남북 관계, 북미 관계가 어렵다고 좌절할 필요 없이, 북한 주민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북한은 코로나19로 인해 국경을 봉쇄하면서 외부 지원이 완전히 막힌 상황입니다. 유진벨 재단 역시 3년 동안 북한에서 결핵 퇴치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다시 사역을 재개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으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북한 결핵 퇴치, 특히 다제내성 결핵 치료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됩니다. 일반 결핵 치료에도 1년에 500억 원, 다제내성 결핵 환자 1인당 치료비는 한국에서 1억 원, 미국에서 10억 원에 달합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의 협조를 받아 다제내성 결핵 환자 1인당 500만 원이라는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다제내성 결핵은 기존 결핵 치료제에 내성을 가진 결핵균에 의해 발생하는 질병으로, 치료가 매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결핵균의 특성을 설명하며, 항생제 내성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는데요, 초기에는 항생제 개발로 결핵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도 있었지만, 결핵균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약물에 대한 내성을 획득합니다. 따라서 다제내성 결핵 치료에는 새로운 약제와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하며, 유진벨 재단의 헌신적인 노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북한을 향한 기도와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는 인세반 회장님. 정부 차원의 지원은 남북 관계에 따라 변동성이 크지만, 결핵 치료는 지속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 바람을 타지 않는 민간 차원의 지원" 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유진벨 재단은 한국 NGO들이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궁극적으로 북한 결핵 퇴치 책임을 민간이 져야 한다" 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를 위해 유진벨 재단은 후원금을 적립하며 사역 재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유진벨 재단이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깊은 감사와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
마지막으로 인세반 회장님은 다음 세대, 특히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진심 어린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풍요롭고 여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세상의 발전으로 고생이 줄어들었지만, 인생은 결국 끝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세반 회장님은 젊은 세대들이 세상에 너무 빠지지 않고, 영원한 영혼을 위해 더 많이 신경 쓰기를 당부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교인들의 두려움이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없다는 점에 실망감을 느꼈다고 고백하며, 천국을 믿는다면 세상의 두려움을 초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상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북 관계가 어려운 시기에 한국 교회가 정치적 중재 역할을 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초기 교회처럼 정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주영훈 님은 인세반 회장님의 이야기에 부끄러움과 반성을 느꼈다고 고백했는데요, 인세반 회장님은 오히려 초기 한국 교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격려했습니다. 주영훈 님은 선교사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한국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헌신한 유진벨 가문의 숭고한 사랑에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또한 유진벨 재단이 꿈꾸는 북한 땅의 미래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다음 세대가 북한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세반 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인터뷰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인세반 회장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5대에 걸친 숭고한 헌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용기, 그리고 북한 동포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유진벨 재단의 헌신적인 발자취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우리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기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합니다. 이 글을 통해 유진벨 재단의 숭고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의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