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방주연 은혜의 삶과 극복 스토리: 고난 속 믿음과 용서
지옥 결혼, 은혜로 핀 인생: 가수 방주연 권사의 고백
지옥 같았던 결혼 생활 속에서 발견한 은혜: 가수 방주연 권사님의 삶과 지혜
결혼은 인생의 아름다운 시작이자, 많은 이들에게 축복받는 순간입니다. 특히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는 목사님들은 수많은 부부의 행복한 출발을 지켜보며 보람을 느끼시죠. 새롭게 가정을 이루는 이들의 밝은 미소는 보는 이들마저 기쁘게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때때로 이상과 다릅니다. 행복하게 시작했던 결혼 생활이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며 지혜롭게 어려움을 헤쳐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만남을 굳건히 이어가기 위해서 말이죠.
인생에는 때로는 힘든 시간도 존재하지만,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면 그 어려움 속에서 귀한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오늘 함께 만나볼 방주연 권사님은 고부 갈등과 부부 불화로 인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권사님은 과거의 고난마저도 은혜였다고 고백하십니다. 오랜만에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방주연 권사님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이야기를 영상으로 먼저 만나보시겠습니다.
[동영상 링크 삽입]
1970년대, "당신의 마음", "기다리게 해놓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방주연. 그녀는 결혼과 함께 은퇴를 결심하며 평범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녀의 꿈과 이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명문가 자제였던 남편, 그리고 유명 가수였던 며느리를 부담스러워했던 시어머니. 결혼 초부터 시어머니의 심한 반대는 고부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부 관계는 악화되었고, 방주연 권사님은 육체적 질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암 투병 중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 심정으로 주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방주연 권사님은 무사히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남편의 외도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방주연 권사님은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굴곡진 인생이 원망스럽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삶에 평안과 용서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 숨겨진 믿음과 인내, 희망의 비밀을 깨닫게 된 방주연 권사님. 이제 그녀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고백이 시작됩니다.
70년대 가요계를 휩쓸었던 전설적인 디바, 방주연 권사님께서 귀한 발걸음 해주셨습니다. (환호와 박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는지 근황이 궁금한데요.
"네, 저는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바쁜 것 같아요. (웃음) 노래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가수에게 무대는 삶의 활력소와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자연치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강의도 다니면서 정신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사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방주연 권사님은 젊은 시절 수많은 히트곡으로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했었죠. "당신의 마음", "기다리게 해놓고", "별과 나", "자주색 가방" 등 열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히트곡들이 있습니다. 오늘 권사님의 명곡들을 다시 한번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웃으며) 네, 좋습니다. "당신의 마음" 이라는 곡을 짧게 들려드릴게요. 이 노래는 인간의 마음을 갈대와 같이 알 수 없다는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노래 시작)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 글씨를 씁니다. 허허 흣 헛, 헛 헛 헛, 헛 헛 헛. 그리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린 당신의 마음... 아- 아- 당신의 마음...' (노래 끝) 오랜만에 부르니 감회가 새롭네요."
목소리가 예전과 똑같으시네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목소리를 유지하시는 비결이 있으신가요?
"목소리에도 지문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고유한 성문, 즉 목소리 지문이 있다는 것이죠. 이 지문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제가 공부하는 자연치유학에 그 비법이 숨겨져 있습니다. 목소리 관리뿐만 아니라 마음 관리, 신앙 관리까지, 건강하게 오래도록 노래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습관처럼 꾸준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음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궁금한데요.
"저는 영원히 20대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웃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긍정적인 마음으로 활기차게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방주연 권사님의 젊은 시절, 음악적인 재능은 언제부터 나타났나요?
"제가 6.25 전쟁 직후 어려운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힘든 시기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흥얼거리는 노래가 남달랐다고 해요. 부모님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는데, 저희 아버님이 유교적인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교회에 호의적이셨습니다. 교회에 가면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교회에 가보는 것을 권유하셨죠.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선물을 준다는 소식에 사탕과 과자를 얻어먹으려고 교회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그곳에서 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교회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군요. 교회에서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주일학교에 처음 갔는데, 낯선 아이에게 환영회를 해주고 머리에 꽃핀도 꽂아주고 맛있는 것도 주는 따뜻한 분위기에 감동받았습니다. 환영 파티에서 노래를 시키길래 불렀더니, 칭찬을 받으면서 성가대 활동을 제안받았습니다. 성가대에는 특이하게 테너 파트가 없었는데, 여자아이인 제가 테너 파트를 맡게 되면서 독특한 발성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자연스럽게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죠."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노래를 잘 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지만,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주관하는 전국 노래자랑에 참가했는데, 예선, 본선을 거쳐 결승에서 가창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가에서 주는 큰 상을 받게 된 것이죠.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특히 아버님은 제가 공부를 하거나 교수가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연예인이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가수의 길을 걸으셨나요?
"부모님의 반대가 완강했지만,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전략적으로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에서 주최하는 여고생 작가 공모전에 시를 응모했는데, 운 좋게 등단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여고생 작가로 등단하면서 저작권 협회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죠. 아버님은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제가 작가로서 재능을 인정받는 모습을 보시면서 조금씩 마음을 여셨습니다. 게다가 노래자랑에서 상까지 받아오니, 반대만 할 수는 없으셨겠죠. (웃음)"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어렵게 가수의 꿈을 이루셨는데, 데뷔 과정은 순탄했나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지만, 1학기만 마치고 등록금을 챙겨 작곡가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등록금을 털어 슬픈 연가, 꽃과 나비 두 곡을 만들어 선생님께 곡을 붙여달라고 부탁드렸죠. 학교에서는 제적 통지서가 날아오고, 부모님께서는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가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기에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작곡가 선생님께서 신세계 레코드사에 저를 소개해주셨고, 운 좋게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취업해서 방송 활동을 몇 번 했는데, 우연히 화려한 시절 레코드사 대표님 귀에 제 노래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표님은 제 목소리를 듣고 단번에 스카우트를 제의하셨고, 아파트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화려한 시절 레코드사와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했더니, 오히려 잘 됐다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예명도 지어주시고, 1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포기하는 조건으로 가수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정말 드라마틱한 데뷔 스토리입니다.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도 데뷔 1년 만에 톱스타 반열에 오르셨죠.
"데뷔곡 "슬픈 연가"를 발표하자마자 KBS 10대 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등 각종 가요 시상식을 휩쓸었습니다. 그야말로 신데렐라처럼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죠. 무명 시절 없이 단숨에 톱스타가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무명 시절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당시 남진, 나훈아 씨와 함께 여성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승승장구하던 70년대, 갑자기 활동을 중단하고 은퇴를 선언하셨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70년대 후반, 가요계에 대마초 사건이 터지면서 수많은 연예인들이 구속되거나 활동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은 가수들이 몇 명 되지 않았는데, 그 소수의 가수들이 모든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밤낮없이 방송과 공연 무대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몸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극심해져서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고, 차 안에서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결국 극장 무대 생방송 도중 쓰러지는 응급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몸이 너무 망가져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 병원에서 목사님을 만나게 되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기도를 통해 제가 너무 교만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명 시절 없이 갑자기 톱스타가 되다 보니, 마치 세상이 제 발아래 있는 듯 오만해졌던 것이죠. 인기를 좇아 쉴 새 없이 달려오면서 제 몸을 혹사시키고, 건강을 소홀히 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교만함과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결혼 후 평범한 주부의 삶을 꿈꾸셨지만, 결혼 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결혼은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는데, 시댁이 의사 집안에 명문가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완벽한 조건이었지만, 시어머니의 반대가 엄청났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극심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결혼 후 1년 정도는 꿈같은 신혼 생활이었지만,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시어머니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나요?
"시어머니는 제가 숨 쉬는 것조차 싫어하실 정도로 저를 미워하셨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온갖 모욕적인 말씀을 서슴없이 하셨습니다. 시댁 식구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너 때문에 집안에 불행이 닥쳤다'는 말까지 하셨습니다. 명문가 출신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이었지만, 며느리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듯한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고부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분가를 생각해 보지는 않으셨나요?
"분가를 하고 싶었지만, 남편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서 쉽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가정 문제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술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고부 갈등이 심화되는 동안 남편은 방관자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저는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 속에서 임파선암 진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암 진단은 절망적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암 투병 중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요.
"네, 암 투병 중 임신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힘을 내기로 했습니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한 모성애가 절 일으켜 세웠습니다. 분가를 간절히 원했지만, 시어머니는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결국 남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분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분가 후 안정을 찾으면서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분가 후 건강을 회복하시고 아이도 출산하셨지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분가 후 건강을 회복했지만, 남편은 오히려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술과 친구에 의존하며 가정에 소홀해졌고, 결국 예상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큰 충격이었지만,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남편이 사업을 한다며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현지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배신감과 분노, 슬픔이 뒤섞여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습니다."
남편의 외도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었겠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에게만 이렇게 힘든 시련을 주시는 걸까'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을 주셨다는 것을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서 용서와 사랑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남편을 용서하고, 저를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까지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용서는 쉽지 않았지만, 용서를 통해 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권사님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지난 10년, 어떻게 마음을 정리하고 평안을 찾으셨나요?
"처음에는 원망과 분노로 가득했지만,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라, 사랑하라'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고통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남편을 용서하고 시어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제 마음의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권사님께서 자주 부르시는 찬송이 있으신가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는 찬송을 즐겨 부릅니다. 제 인생을 노래 가사처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찬송 같습니다. (찬송 한 소절)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일지, 행복일지, 나는 몰라요.' 정말 제 삶이 이 찬송 가사 그대로였습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믿음과 소망,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행복은 습관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네, 행복도 습관처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증오, 저주, 미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 대신,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선택하고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억지로라도 행복한 생각을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 보면, 행복이 바이러스처럼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복한 습관은 저뿐만 아니라 제 자녀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더 나아가 이웃에게까지 행복을 전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건강 관리를 잘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 가수로서 무대에서 노래하고, 자연치유학 강사로서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의 지혜를 나누고, 간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인 상주 홍보대사로서 고향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루하루를 천년처럼 귀하게 살아가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권사님의 이야기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저희 역시 권사님의 제2의 전성기를 응원하며, 앞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음악 종료]
